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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읽기『소학(小學)』의 부계(민족) 이데올로기의 구축과 사디스트의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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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정근 작성일2018.12.18 조회3,67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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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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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에 『친일인명사전』을 펴낸 적이 있다. 사전은 발간 이전과 이후 모두 뜨거운 관심사였고 간혹 사전에 등재된 인사의 후손들은 수록 자체가 부당하다는 소송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는 모두 일제 강점기를 지난 뒤에 우리가 일제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도 민족정기를 바로잡지도 못한 탓에 뒤늦게 일어나는 일이다. 이 탓에 외세의 침략과 국가(왕조) 실패의 상황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광복(해방) 이후의 주체는 어떤 바탕 위에 서야 하는지 이론화 작업이 마무리되지 않고 있다. 근대와 전근대 모두 침략과 식민의 체험을 겪은 뒤에는 영토의 회복만이 아니라 정기의 타락과 오염을 회복하기 위한 몸부림을 벌였다. 『소학』의 편찬도 민족 문화의 복원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소학』은 보통 아동 교육을 위해 편집된 책으로 성인을 위한 『대학』과 짝으로 이야기된다. 하지만 책을 되풀이해서 읽으면 『소학』을 단순히 ‘아동용 교재’라는 순백한 시각으로 볼 수 없다. 그것은 한 제국에서 송 제국에 이르기까지 한족이 중원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났다가 다시 돌아오는 탈환의 과정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소학』은 중화 문명이 주변의 이민족에 의해서 철저하게 유린된 뒤에 한족이 자신의 문화 정체성을 지켜내기 위해서 만든 텍스트이다. 송나라의 지식인들은 국가(왕조) 실패가 멸종(滅種)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자각을 통해서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보종(保種, 종족 보존)을 위한 희망의 근원과 이론화의 작업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화 정체성의 위기와 『소학』의 편집
 


 『소학』은 공식적으로 주희의 편집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의 제자 유자징(劉子澄)이 주희의 지휘를 받아서 고전과 당시의 서적에서 좋은 구절을 뽑아낸 것이다. 주희는 『소학』 편찬의 프로젝트를 주관했다는 생각을 가진 듯하고 그의 후학들도 『소학』을 그의 편저로 여기는 듯하다.

  주희와 다른 사람의 말을 보면 ‘소학’은 어린이가 다니는 학교의 이름이나 교재의 이름으로 실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01 허형(許衡)은 분서갱유로 인해 고전의 체계적인 학습법이 실종되었고 그 결과 학자들은 성인보다는 자신의 주관적인 의사를 학문으로 간주하면서 그 중 뛰어난 자는 공허한 도가와 선불교에 빠지고 뒤떨어지는 자는 말끝마다 공리와 효용을 내세우는 학술사의 전개를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가 생각하기에 주희는 쇠락한 학술사에서 가뭄의 단비마냥 「곡례曲禮」, 「소의(少儀)」, 「제자직(弟子職)」 등의 글을 참조해서 성현들이 남긴 학문의 유풍을 복원한 위인이었다.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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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소학』이 오늘날 잃어버렸지만 과거의 찬란한 ‘성학(聖學)의 복원 프로젝트’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은 『소학』의 본문에서 여실히 알 수 있다. 사마광(司馬光, 1019~1086)은 자신의 시대를 기준으로 근세(近世) 이래로 관례, 즉 성인식의 의례가 그 본래 모습과 의미를 잃어버리고 희화화된 현실을 개탄하고 있다. 원래 머리에 관을 쓰는 것은 자식으로서 동생으로서 신하로서 후배로서 도리에 책임을 다하는 상징적 의식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자식(아들)을 낳으면 젖을 먹는 시절부터 두건과 모자를 씌운다. 심지어 공직자들은 아이에게 관복을 해 입히기조차 했다.(「가언」 22)03 이처럼 관례가 사람의 욕망을 덧칠하고 허영을 나타내는 유희로 여겨지고 있다. 이로써 관례는 본래의 의미를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사람은 아이와 어른 사이의 경계를 허물면서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늪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은 아이가 어른으로 바뀌어가는 삶의 과정이 아니라 아이와 아이 같은 어른만 넘치는 곳으로 변하게 된다. 이는 사마광이 염려하는 것이고 주희도 그 점을 공유하고 있다.

  당 제국 고종(재위 649~683)은 태산에 올라 봉선 의식을 치르고 장공예(張公藝)의 집을 방문했다. 왜냐하면 당시 장공예는 한 집에 9대가 화목하게 살아가는 생활 공동체를 이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종의 아버지 태종은 골육상쟁 끝에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정도로 형제끼리도 처참하게 다투는데 북제(北齊)에서 당 제국까지 화목한 가문을 이끌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고종이 장공예에게 종족을 화목하게 만드는 길[睦族之道]을 묻자 그는 참을 인(忍) 자 100여 자를 써서 대답을 대신했다.(「선행」 49, 성백효 역주, 431쪽) 이는 훗날 ‘구세동거(九世同居)’의 이야기로 널리 알려졌다. 
 『소학』의 편집자는 구세동거의 고사를 왕가에 보인 혈육상잔의 비극, 민가에 일어나는 각종 사건 사고와 미묘하게 대비시킬 뿐만 아니라 통상적인 동선과 반대로 황제가 신하의 집을 찾은 사실을 뚜렷하게 부각시키고 있다. 이로써 아동은 황제를 저 멀리 구중궁궐에 있는 아득한 존재가 아니라 언젠가 나에게 친림할 수 있는 존재로 표상하게 되고, 효도 등의 도덕은 추상적이며 고원한 가치가 아니라 황제를 나에게 강림하게 하는 활력을 가진 실재가 된다.

  관례의 희화화와 구세동거의 이야기는 누가 들어야 하는 걸까⋅ 당연히 어른이다. 어른 옷을 입은 것은 아동이지만 아동에게 어른 옷을 입힌 것은 어른이다. 구세는 차치하고 일세의 친족이 동거하지 못하고 서로 죽이는 것도 어른이다. 따라서 관례를 희화화시키지 않고 구세동거하게 하려면 아동이 아니라 성인이 성학을 배워야 한다. 
  하지만 주희는 「소학서제(小學書題)」에서 다른 소리를 한다. “반드시 어린 아이일 때부터 차근차근 풀이해서 몸에 배이도록 한 것은 몸에 배임과 지식이 함께 자라고 교화가 마음과 함께 이루어져 삐딱하게 대들거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걱정거리를 없애고자 하는 데에 있다.”04 주희는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도덕적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능력을 계발하도록 계몽하고자 하지 않는다. 그는 사람이 어릴 때부터 각종 예절을 몸에 배이게 하여 어른이 되었을 때 예절과 완전하게 일체가 되도록 기도하고 있다. 일종의 ‘도덕 신체화’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보면 도덕이 정당하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몸에 익숙해서 기계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된다.

 또 주의해야 할 것은 주희는 현재의 타락과 관련해서 어른의 문제를 따지지 않고 현재의 아이가 미래의 어른이 되었을 때의 상황을 문제로 삼고 있다. 이처럼 『소학』은 어른의 문제 해결을 아이에서 찾는 기형적 구조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제 아이는 아이대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어른으로 성장해야 할 닫힌 폐쇄 회로를 걷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도덕은 자유보다 억압으로 변신할 수 있는 전제적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도덕이 이성적 판단 능력이 부족한 아동에게 제시될 때 “왜 해야 하는지⋅”의 근거를 모른 채 몸으로 실행하게 된다. 물론 어린이가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하니까 하지 않지 왜 나쁜지 알고서 스스로 억제하기는 어렵다. 이 거짓말의 부당성은 성인이 되고서 정당화가 가능하다. 자식이 부모에게 효도를 해야 한다고 하니까 어린이가 앵벌이를 한다면 그것은 성인이 되고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소학』 중 특히 뒷부분의 예시에서는 “과연 정당화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도덕적 모범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소학』 속에 숨겨진 가학 성향을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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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가 왜 갑자기 오서오경(五書五經)을 말했을까?


  우리는 사서삼경이니 사서오경이란 말에 익숙하다. 훗날 사서도 경에 포함되어 13경이니 21경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사서에 일서를 덧보태서 오서라는 말은 잘 쓰이지 않는다. 있다면 오서가 서체의 일종으로 전서(篆書) ⋅ 예서(隸書) ⋅ 행서(行書) ⋅ 초서(草書) ⋅ 해서(楷書) 등을 가리킨다. 특이하게도 이이(李珥)는 오서오경(五書五經)이란 말을 사용했다.

  이이(1536~1584)는 『소학』과 비슷한 용도이며 그것보다 훨씬 압축적이며 실용적인 목적으로 『격몽요결』을 지었다. 이는 왕을 위해 지은 『성학집요(聖學輯要)』와 함께 그의 대표적인 업적으로 알려졌다. 제4장 독서를 보면 그는 오서오경(五書五經)이라는 신조어를 쓰고 있다. 그는 오서를, 기존의 『대학』 ⋅ 『논어』 ⋅ 『맹자』 ⋅ 『중용』의 사서에다가 『소학』을 덧보태서 사용하고 있다.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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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이 이전에 김굉필(1454~1504)은 김종직의 영향으로 평생 『소학』을 가까이 했다.06 나아가 그는 시사(時事)를 물으면 “자신은 ‘소학동자’이니 어찌 대의를 알겠느냐⋅”며 『소학』을 자신의 학문적 근원으로 삼았다.(한국고전종합DB의 『고봉집』 등)

  또 이이 이후에 『승정원일기』 고종 1년(1864)을 보면 흥미로운 대화가 나온다.    


  조득림이 말했다. “『소학』은 어린이가 배워야 할 것일 뿐만 아니라 실로 성인이 배워야 할 규범입니다. 영묘조(英廟朝)의 50년 질서와 안정이 오로지 『소학』 한 권을 읽어 득력한 데에 있었습니다. 옛날의 노숙한 학자 중에 평생 동안 읽고 스스로 ‘소학 동자’라고 한 이가 있었습니다.”

  고종이 물었다. “『소학』 속에는 없는 것이 없는가⋅” 조득림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이재원이 말했다. “몸을 닦고 집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가지런하게 하는 도리가 다 이 책에 있습니다.” (위와 같은 사이트, 4월15일)

  

  조선에 왜 이토록 강한 ‘소학 열풍’이 불었을까⋅ 이 물음의 답은 『소학』의 다이제스트 또는 대중본이라 할 수 있는 『삼강행실도』 등의 편찬과 관련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세종실록』 10년의 9월 27일과 10월 3일에 같은 사안이 다루어지고 있다. 진주 김화(金禾)가 아버지를 살해하자, 9월 27일에 허조(許稠)는 기존의 율문(律文)보다 가중해서 처벌할 것을 주장했지만 세종은 율문의 가중에 동의하지 않았다. 대신 10월 3일에 세종은 김화의 존속 살해 사건을 듣고서 깜짝 놀라 낯빛을 바꾸며 자책을 하고서 “효제를 돈독하게 하고 풍속을 두텁게 이끌도록 할 방책”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 결과로 설순(⋅循)이 충신 ⋅ 효자 ⋅ 열녀 각 35명씩 105명을 선정해서 그들의 행적에다 그림을 덧붙여 『삼강행실도』를 펴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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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 다른 사례로 병자호란(1636~1637) 당시에 전리품으로 압송되었다가 탈출, 구조, 보상 등의 방식으로 조선으로 돌아온 여성을 고려해볼 만하다. 오늘날 비속어로 쓰이는 화냥년의 어원이 청의 영토로 끌어갔다가 고국으로 돌아온 ‘환향녀(還鄕女)’에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 환향년이 1638년 3월 11일의 어전에서 문제가 되었다.(『인조실록』 16년) 장유(張維)는 외아들 장선징(張善⋅)의 처가 청으로부터 잡혀갔다가 돌아와 처가댁에 머무르고 있지만 전력으로 인해 조상 제사를 모실 수 없으니 아들의 이혼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다. 한이겸(韓履謙)은 딸이 청으로 잡혀갔다가 속환되었지만 사위가 새장가를 갈려고 한다며 원통함을 하소연했다. 같은 사안에 대해 시댁과 친정의 다른 입장을 다루고 있다. 당시 최명길은 이혼을 허락하게 되면 사회문제가 되고, 압송되었지만 반드시 실절(失節)한 것은 아니라는 정보를 바탕으로 이혼 불가를 주장했다. 결론은 최명길의 주장대로 났지만 사신(史臣)의 논평에 따르면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다.”는 대전제에서 절개를 잃었다면 남편집과 의리가 끊어진 것이고, 난리 끝에 압송되어 죽지 않았으니 실절한 것과 마찬가지라며 최명길을 ‘백 년 동안 내려온 나라의 풍속을 무너뜨리고 삼한을 오랑캐로 만든 자’로 비판하고 있다.07

 『삼강행실도』가 간행된 뒤 김안국(金安國)이 중종에게 나머지 2륜의 보완을 건의해서 1518년에 『이륜행실도』를 간행하게 되었다. 그 뒤 정조 21년(1797)에 1434년의 3륜과 1518년의 2륜을 합쳐서 『오륜행실도』를 간행했다. 이때 정조는 『오륜행실도』와 『소학』을 함께 편찬하게 했다.08

  송과 조선의 『소학』 열풍은 공통점을 갖는다. 그것의 편찬 사업은 표면적으로 성학의 진흥이란 명분을 내걸고 있지만 실제로 국망(國亡), 식민의 상황을 수습한 뒤에 일종의 ‘도덕 재무장’ 운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그 중에서 『소학』은 멸망을 초래했던 남성 성인의 책임을 통렬하게 요구하는 자성문이 아니라 멸망으로 가장 심각한 고통을 겪었던 아동과 여성을 상대로 해이한 기강을 바로잡는 ‘빗나간 과녁’ 타령처럼 보인다.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죽지 않은 죄를 묻는 데에서 보이듯 책임 없는 사람에게 책임을 전가시킬 뿐만 아니라 미래의 구원의 새로운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 이런 점에서 『소학』에는 충분히 억압과 가학 성향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여성과 아동의 희생과 가부장 이데올로기의 회생


  ‘지금까지 『소학』 논의가 다소 극단적이지 않나’ 라고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소학』의 도덕 사례 부분, 즉 5장의 『가언(嘉言)』과 6장의 『선행(善行)』에 다소 비인간적인 경우가 있다고 하더라도 ‘1장의 『입교(立敎)』와 2장의 『명륜(明倫)』 등은 보편적 가치를 가지지 않느냐.’ 라고 항변할 수 있다. 물론 보편성이 구체적인 상황에는 다양한 방식으로 적용될 수 있다. 보편 사랑을 말하더라도 구체적인 자식 사랑에서 자유주의와 간섭주의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이때 간섭주의만 잘못이고 보편 사랑 자체는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랑을 말한다고 하면서 아동과 여성, 즉 약자의 인권 침해에 가까운 언행을 효행이라고 권장한다면 그 사랑은 아동과 여성을 제외한 성인 남성을 위한 사랑이지 결코 보편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여기서 『소학』에서 말하는 사랑이 과연 보편적인지 충분한 의문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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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상(王祥)은 전근대에 효자의 대명사로 알려진 인물이다. 흔한 이야기처럼 어머니가 죽고 계모가 들어와 그를 미워해서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다. 계모가 아플 때 겨울인데 물고기를 먹고 싶어 했다. 왕상은 옷을 벗고 얼음을 깨서 물고기를 잡으려고 했는데 얼음이 저절로 풀리며 잉어 두 마리가 물속에 솟구쳐 나와서 그놈을 잡아 어머니에게 요리해주었다. 어머니가 참새구이를 먹고 싶어 하자 참새가 장막에 집단 투신해서 요리를 할 수 있었다.(「선행」 11) 전근대에는 이를 지성감천이니 천인감응으로 풀이했다. 효성이 지극하면 하늘을 감동시켜서 초자연적인 일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부모가 아프면 자식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서 부모를 먹인다는 할고(割股) 이야기가 생겨나게 되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과부가 재가하는 것과 관련해서 주희가 스승으로 섬겼던 정이는 “굶어죽는 일은 사소한 일이고 절개를 잃는 일은 중대한 일이다.”라며 재혼에 반대했다.09 나아가 문숙(文叔)의 아내가 남편이 죽자 자신이 젊고 아이가 없으므로 친정에서 재가를 권하리라 예상했다. 이에 그이는 머리를 잘라서 자신의 뜻을 나타냈지만 친정에서 재혼을 시도하자 칼로 두 귀를 잘랐다.(「선행」 29) 『안씨가훈』을 인용해서 재능이 있어도 여성도 가정에 머무른 채 남편을 돕는 선을 벗어나지 않고 여성이 사회에 참여해서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서경』 이래로 암탉이 새벽에 울면 화를 불러들인다는 사고를 굳게 지키고 있다.(「가언」 45)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고 시민을 섬기지 않는 정치인은 없다고 한다. 부분적으로 맞을 수는 있다. 간혹 부모는 자식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종교적 신념으로 아픈 자식의 치료를 거부한다거나 정치인은 선거 때에 불가능을 가능하다고 해놓고 당선 뒤에 불가능을 변호한다. 『소학』도 전반부에 성학의 고결함을 말하고서 후반부에 도덕적 억압을 당연이자 의무로 역설하고 있다. 이를 두고 과연 선의 폭력이 아니라고 할 수 있고, 부계 질서를 위한 가학 윤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대순회보> 13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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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소개
신정근: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배웠고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의 교수로 있다. 한국철학회 등 여러 학회의 편집과 연구 분야의 위원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제자백가의 다양한 철학흐름』 『동중서 중화주의 개막』 『동양철학의 유혹』 『사람다움의 발견』 『논어의 숲, 공자의 그늘』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 『한비자』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백호통의』 『유학, 우리 삶의 철학』 『세상을 삼킨 천자문』 『공자신화』 『춘추』 『동아시아 미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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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이와 관련해서 주희의 「소학서제(小學書題)」, 「소학집주 총론 (小學集註總論)」, 후자에 인용된 허형의 「소학대의(小學大義)」 등 참조.

02 「소학집주총론」: “許氏(曰)小學大義, 其略曰: 自始皇焚書以後, 聖人經籍不全, 無由考較古人爲學之次第. …… 千有餘年, 學者各以己意爲學, 高者入於空虛, 卑者流於功利. 雖苦心極力, 博識多聞, 要之不背於古人者, 鮮矣. 近世, 新安朱文公, 以孔門聖賢爲敎爲學之遺意, 參以曲禮, 少儀, 弟子職諸篇, 輯爲小學之書.”
03 성백효 역주, 『소학집주』, 전통문화연구회, 1993; 2004 12쇄, 295쪽

04 必使其講而習之於幼穉之時, 欲其習與智長, 化與心成, 而無⋅格不勝之患也.(성백효, 13)

05 이이는 ‘오서오경’ 이외에 『근사록』 ⋅ 『가례』 ⋅ 『심경』 ⋅ 『이정전서』 ⋅ 『주자대전』 ⋅ 『어류』 등을 정밀하게 읽을 것을 권하고 있다.

06 김굉필은 『소학』의 가치를 재발견하고서 시를 지었다. “業文猶未⋅天機, 小學書中悟昨非. 從此盡心供子職, 區區何用羨輕肥⋅”(국역 『경현록(景賢錄)』 참조)
07 『인조실록』 16년 3월 11일 “忠臣不事二君, 烈女不更二夫. …… 雖曰非其本心, 臨變而不能死, 則其可謂之不失其節哉⋅ 旣失其節, 則與夫家, 義已絶. …… 壞百年之國俗, 擧三韓而夷之者鳴吉也, 可勝痛哉⋅” 장유가 죽은 뒤 그의 아내가 다시 돌아온 며느리의 버릇을 이유로 다시 이혼을 요청해서, 勳臣의 독자라는 예외적인 경우로 이혼을 허락했다.(『인조실록』 18년 9월 22일)
08 이 책은 1976년에 을유문화사에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조선 후기에 『소학』을 이어서 박재형朴在馨이 『해동속소학』(또는 『해동소학』)을 편집해서 출판했다.

09 「가언」 44 “餓死事, 極小. 失節事, 極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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