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자춘추(晏子春秋)』암주(暗主)의 일상적 폭정과 최후 시간의 유예 > 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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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읽기『안자춘추(晏子春秋)』암주(暗主)의 일상적 폭정과 최후 시간의 유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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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정근 작성일2018.12.19 조회3,66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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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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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齊)나라는 오늘날 산둥반도에 자리하고 있다. 위치로 보면 제나라는 동쪽에 치우쳐있지만 서쪽의 진(秦)나라와 함께 춘추전국시대의 혼란을 끝내고 통일을 이룰 후보로 거론되던 강대국이었다. 제나라는 국력이 도약할 시기에 지도자들 사이의 내부 암투와 부적절한 처신으로 인해 격심한 위기를 겪었다. 이처럼 제나라의 자유로우면서도 느슨한 분위기는 신상필벌과 부국강병을 내세우면서 병영국가를 세운 진나라의 엄격하면서도 강력한 분위기와 구별되었다. 이러한 제나라와 진나라의 차이를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차이에 비유하기도 한다.01
  『안자춘추』의 분위기를 살펴보기 위해서 먼저 제나라 정치 지도자들의 형태를 살펴보자. 양공(襄公)은 여동생 문강(文姜)과 근친상간을 했다. 문강이 노(魯)나라 환공(桓公)에게 시집을 간 뒤에도 두 사람의 관계가 끝나지 않았다. 이 일로 발각되자 양공이 사람을 보내 환공을 죽일 정도로 안하무인이었다. 양공 사후 국정이 혼란한 상황에서 공자 소백(小白)이 포숙아(鮑叔牙)와 손잡고서 공자 규(糾)와 관중(管仲) 세력과 내전을 벌인 끝에 제후가 되었다. 소백이 바로 춘추오패의 한 사람인 환공(桓公)이다.
  환공은 내전에 승리한 뒤 반대 진영의 관중을 재상으로 받아들여서 국정 개혁을 한 결과 춘추시대의 패자(覇者)가 되었다. 그는 주(周)나라 천자가 유명무실한 상황에서 주변 이민족의 침입을 막아내서 중원 문화의 수호자 역할을 해냈다. 이 점은 공자도 『논어』에서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실이다.02 환공의 사후 다시 제나라는 내전 상태에 빠져서 그의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했다.
  춘추전국시대에 제나라는 바다에 위치한 덕분에 소금과 해산물 그리고 넓은 평야지대에서 나오는 풍부한 농산물 덕택에 비교적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아울러 제나라는 지리적으로 중원의 동쪽 끝에 자리한 까닭에 진(秦)나라와 직접 충돌할 기회가 적어서 비교적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장공(莊公, 기원전 553~548)은 국정에 소홀하면서 대부 최저(崔杼) 아내와 사통을 했다. 최저가 장공을 살해하자 제나라는 국정 혼란을 겪었다. 이런 가운데 경공(景公)은 장공의 이복동생으로 최저의 지지를 받아서 제후에 즉위했다. 경공은 국정 운영보다는 건물 짓기, 연회 벌이기, 사냥하기에 열을 올리면서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여 국민들로부터 원성이 자자했다.
  안영(晏嬰)은 제나라의 제후가 강(姜)씨에서 전(田)씨로, 즉 강제(姜齊)에서 전제(田齊)로 바뀌는 상황을 제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안영은 자신이 영공(靈公), 장공, 경공의 세 제후를 보좌하면서 예정된 듯 다가오는 최후의 시간을 늦추는 역할을 피하지 않았다. 이렇게 보면 『안자춘추』는 안영이 최후를 늦추기 위해서 분투하는 언어의 기록이다. 이 때문에 안영은 최후를 없던 일로 하지 못했지만 실패자로 낙인  찍히지 않고 관중과 함께 제나라의 뛰어난 재상으로 살아남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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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상의 방법, 특수부대의 육성


  춘추전국시대의 상황은 간단하게 정리할 수 있다. 강대국이 무력을 바탕으로 약소국을 멸망시켜서 자신의 하부 행정 단위로 만들었다. 이를 멸국치현(滅國置縣)이라 했다. 개별 국가는 부국강병을 경쟁적으로 추진하여 망하지 않고 살아남아야 하는 자기보존의 욕구를 실현하고자 했다.
  진나라는 사회 제도의 개혁을 외치는 법가(法家)를 대거 중용해서 귀족의 세습 특권을 부정하고 서민의 역량을 부국강병의 실현에 적극 끌어들였다.03 진나라는 농업 생산과 전쟁 승패에 따라 신상필벌을 엄격하게 적용하여 누구나 출세할 수 있는 업적 사회를 추진했다. 이를 바탕으로 서쪽 변방의 진나라는 차츰 국력을 키울 수 있었다.
  춘추시대 초기에 환공이 패자의 역할을 한 뒤로 국제무대에서 뚜렷한 위력을 떨치지 못했다. 안영이 활약하던 시절 영공(靈公), 장공(莊公), 경공(景公) 등 부족한 정치 지도자가 연이어 등장하면서 국력이 더욱 위축되었다. 하지만 그들도 춘추전국시대의 시대 상황을 인지하고 있었던 터라 쇠락한 국위를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장공과 경공은 반발이 일어나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제도 개혁을 통해 제나라의 국력을 만회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렵지만 성공하면 탄탄한 기반을 가질 수 있는 진나라 식의 개혁, 즉 변법(變法)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길을 채택했다. 그들은 용력지사(勇力之士), 즉 오늘날 육군의 특전사나 해군의 UDT를 키우고자 했다.
  『안씨춘추』 제일 첫 편을 보면 장공은 용력(勇力)으로 수세의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했기 때문에 도의를 지키는 문제를 신경 쓰지 않았다. 용력지사들도 나라에서 어떤 제지를 받지도 않아 거리낌 없이 행동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귀족과 인척들도 장공에게 유능한 사람을 추천하지 않았고 근신과 총신들도 잘못을 범하고서도 책임을 지려고 하지 않았다.04
  장공의 길이 실패로 끝난 뒤에도 경공도 실패한 길을 되풀이해서 걸었다. 공손접(公孫接), 전개강(田開疆), 고야자(古冶子) 세 사람이 경공에게 중용되었는데, 그들은 하나같이 호랑이를 때려잡을 정도로 용력(勇力)이 뛰어났다.
  경공은 세 사람으로 국내외에서 위세를 과시하게 되었지만 그들은 제나라에게 안하무인으로 굴었다. 안영이 경공에게 이 문제를 제기하자 경공도 그제서야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도 세 사람을 때려잡으려고 해도 제대로 되지 않고 찔러 죽이려고 해도 제대로 맞추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05
이에 안영은 세 사람이 힘만 믿고 날뛸 뿐 장유(長幼)의 예를 차리지 못한다는 점을 통해 그들을 제거할 계책을 세웠다. 그는 세 사람에게 복숭아 두 개를 주면서 공을 세운 사람이 먹으라고 제안했다. 세 사람은 각자 서로 먹으려고 하다가 복숭아를 두고 싸운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살아남은 것에 분개해서 세 사람 모두 자결했다. 이로써 경공의 우환거리를 해결하게 되었다. 이렇게 보면 용력지사의 양성은 일시적인 해결책이 될지 모르나 언젠가 국정의 부담으로 작용하게 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 뒤에 경공은 몸도 아프고 의기도 꺾이게 되자 하늘의 상제와 종묘의 조상신에게 제사를 지내서 복을 얻고자 했다. 그는 자신이 정치적 행위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 존재의 위력을 빌어서 연이은 실패를 만회하고자 했던 것이다.06
  이렇게 볼 때 용력지사, 상제 등은 장공과 경공처럼 비상수단으로 사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의지하는 길이었던 것이다.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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멈출 수 없는 욕망


  『안씨춘추』는 경공이 끊임없이 폭정을 일삼고 안영이 가까스로 만류하는 장면으로 가득 차 있다.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차를 멈추려고 고군분투하는 것으로 보인다. 경공은 일단 정치 지도자로서 제후의 자리를 공적 의무로 보지 않고 사적 특권으로 이해했던 것이다.
  경공이 벌이는 폭정의 퍼레이드를 일일이 열거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는 음주와 관련해서 여러 차례 사고를 쳤다. 궁정에서 대부들과 술을 마시면서 귀찮은 예를 따지지 말자며 스스로 군주의 위엄을 허물기도 하고 술을 연일 마셔서 술병으로 며칠 동안 조회를 열지도 못했다. 사냥과 음악 공연도 빼놓을 수 없는 일과였다. 한 번 사냥을 나가면 돌아올 줄 몰라서 국정을 마비시키기도 하고 값비싼 악기 주조는 예사고 심심하면 공연을 벌이고 노느라 정사를 돌보지도 않았다. 그때마다 안영은 경공을 찾아서 겨우 설득하여 경공이 이성을 되찾아 국정을 돌보게 만들었다.
  경공은 사냥개가 죽자 사람의 장례와 마찬가지로 관을 만들고 제사를 준비하도록 했다. 이에 대해 안영은 “세금을 마구 거두어서 인민의 복지로 되돌려주지 않고 재물을 펑펑 써서 주위의 놀림감이 된다”며 강하게 반발해서 만류했다. 안영의 논지는 도움을 받아야 할 사회적 약자는 얼어 죽고 굶어 죽는 상황인데도 제후가 그것을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개인적 정리를 앞세워 개의 장례를 융숭히 치르는 것을 비판하는 데에 있었다.08
  정치 지도자로서 경공의 기행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경공은 자신이 여우의 겨드랑이 흰 털로 만든 값비싼 호백구(狐白裘)를 입고 날씨가 춥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또 그는 사냥을 나가서 새를 겨냥하고 있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소리를 내는 바람에 새가 날아가자 그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 또 아끼던 말이 죽자 책임을 물어 말 관리인을 죽이려고 했다. 또 자신이 아끼던 홰나무를 어떤 사람이 훼손하자 그를 죽이려고 했다. 또 자신의 신발을 금과 은 그리고 옥으로 온갖 장식을 하려고 했다.
  『안씨춘추』를 보면 경공은 실제로 엽기적인 행동을 별다른 생각없이 되풀이 하고 있다. 안영은 그때마다 온갖 논리와 생각을 짜내서 경공을 만류하기에 급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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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욕(勝欲)의 길, 예치(禮治)의 회복


  안영은 장공과 경공의 거듭되는 기행을 만류하면서 다양한 논리를 제시했다. 그 중에서도 그는 욕망과 예치를 중심으로 논리를 펼치고 있다.
장공이 제나라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진(晉)나라를 공격하려고 했다. 사람은 한 가지 일을 성공하면 그에 자신감을 얻어서 다른 일을 벌이려고 하게 된다. 안영은 이런 자신감이 교만으로 이어져서 커다란 사고를 일으킬 것이라고 보았다.

  

“지도자가 원하는 것을 얻으면 욕망이 많아지고 욕망을 자꾸 부추기게 되면 뜻이 교만해집니다. 원하는 것을 얻어서 욕망이 많아지면 위태로워지고 욕망을 부추겨서 뜻이 교만해지면 곤란해집니다. 지금 용력의 특전사를 써서 이웃의 현명한 군주를 공격하려고 하니 차라리 실패하는 게 나라의 복입니다. 덕이 없으면서 공을 세우면 오히려 우환이 군주에게 닥쳐올 것입니다.”09

  

  군주가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통제를 받지 않으면 전제(專制)와 독선(獨善)의 성향을 드러내게 된다. 장공도 통제받지 않는 지위에서 점차 과대망상의 꿈을 꾸었다. 한 가지에서 자신감을 얻다보면 어느새 자신이 하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착각을 가지면서 자신을 신적 존재로 여기게 된다.
경공은 누대를 완성하고서 다시 그것에 걸 종을 만들려고 했다. 안영은 누대를 세우느라 민력을 동원했는데 다시 종을 주조한다면 이중삼중의 부담을 주게 된다는 사실을 일깨웠다. 

 

  “군주는 인민의 괴로움을 즐거워해서는 안 됩니다. 군주께서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이미 누대를 지었습니다. 지금 다시 종을 주조한다면 인민은 반드시 슬퍼할 것입니다. 인민의 괴로움을 고려하지 않고 부담을 지우면서 즐거워한다면 좋은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군주로서 할 일이 아닙니다.”10

 

  안영은 장공과 경공의 일상적 폭정을 욕망의 문제로 파악했다. 그는 양욕(養欲), 불승욕(不勝欲)에 주목하고 있다.11 사람이 욕망을 키우다보면 결국 스스로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여 극복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 단계에서 사람은 ‘원하면 할 수 있고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원하더라도 할 수 있는지 해야 하는지’라는 반성적 사고를 결여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상태의 암주는 술 취한 사람에게 칼과 총을 쥐어주고,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형국과 마찬가지이다.
  경공은 욕망에 휘둘리는 불승욕(不勝欲)을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 승욕(勝欲)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예에 주목했다. 특전사와 UDT의 용력지사를 키운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예의를 겸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용력 만능의 상태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12

  

  “죽음을 가볍게 여기더라도 예의를 지켜야 ‘용기’라고 하고, 포악한 자를 처벌하거나 강한 자를 피하지 않아도 ‘무력’이라고 한다. 용기와 무력이 제 노릇을 하는 것은 반드시 예의를 지키는 데에 달려있다. 역사적으로 탕(湯)과 무(武)가 병사를 움직여서 신하에서 왕이 되었지만 ‘역도’라고 하지 않고 나라를 합치더라도 ‘탐욕’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는 인의의 도리를 지켰기 때문이다.”


  안영은 용력이 예의 또는 인의와 결합되지 않을 때 나타나는 위험성을 간파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용력만이 숭상되는 용력 만능의 시대가 아니라 용력이 예의 또는 인의에 의해 통제되는 예의 중심의 사회를 실현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안영은 예의의 원칙이 살인기술을 가진 용력지사만이 아니라 일반적인 인간관계, 예컨대 군주(리더)와 신하(전문가) 그리고 군주와 인민의 사이에서도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경공이 술에 취해 예의를 떠나서 대부들과 자유롭게 어울리자고 제안했을 때 안영은 다음처럼 단호히 반대했다.

 

  “대부분의 신하는 본래부터 군주가 예를 따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무력이 세면 우두머리를 이길 수 있고 용기가 많으면 지도자를 제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의가 그렇게 하지 못하게 합니다. 짐승은 무력을 기준으로 하기에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덤비므로 나날이 주인(승자)을 바꿉니다. 지금 군주가 예의를 없애버리면 짐승처럼 됩니다. 대부분의 신하가 무력을 기준으로 삼아서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덤비므로 나날이 승자를 바꿀 것입니다. 군주께서는 어떻게 자리를 지키겠습니까?”13

  

  예는 여러 가지 맥락에서 다양한 특성을 갖는다. 안영은 예를 사회 질서를 짜고 재생산하는 맥락으로 이해하고 있다. 사람이 예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사회적 차이를 수용한다는 논리이다. 만약 예를 부정하는 거례(去禮)와 무례(無禮)의 상황이 된다면 사회 질서가 붕괴되는 것이다. 붕괴는 오로지 힘의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는 정글의 상황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예의 이러한 특성을 안영은 더 간명하게 표현했다. “예는 인민의 벼리이다. 벼리가 어지러워지면 인민이 할 바를 잃게 된다.”14
  안영은 예가 승욕(勝欲)의 작용을 하여 사회 질서를 유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예의 이러한 작용에도 불구하고 군주가 다양한 명분으로 세금을 거두어들여서 사리사욕을 채우고 긴요한 문제를 해결하거나 사회적 재분배를 실시하지 않는다면 인민이 불복종 운동을 일으켜서 직접 재분배에 나설 수 있다는 무서운 경고를 하고 있다. 이것은 안영이 그렇게 피하고 싶었던 최후의 시간이지만 그의 개인적 노력으로만 해낼 수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논리가 역사적으로 빈발했던 의적(義賊) 또는 왕조 교체를 용인하는 것으로도 확대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에서 우리는 안영의 고뇌를 읽을 수 있다. 

 

  “백성들에게 세금을 마구 거두어들이면서도 굶주린 인민에게 나누어주지 않습니다. 재물을 쌓아두기만 하고 쓰지 않으면 재앙입니다. 재물을 아득바득 모으면서 잃을까봐 걱정하면 모자란 짓입니다. 보답은 되돌아옵니다. 다음으로 재물을 지키는 데에 눈이 멀고 잃을까봐 걱정하면서도 정작 곳간에 처박아 두고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지 않으면 백성들이 반드시 스스로 나서서 나누어 가질 것입니다. 정치 지도자는 남의 요청에 움직이기보다 자신의 요청에 따르는 것이 좋습니다.”15


  <대순회보> 1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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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두 나라의 차이와 관련해서 장웨이, 이유진 옮김, 『제나라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춘추오패의 우두머리 제나라의 번영과 몰락』, 글항아리, 2011 참조.
02 「헌문」 16 子路曰: 桓公殺公子糾, 召忽死之, 管仲不死. 曰: 未仁乎? 子曰: 桓公九合諸侯, 不以兵車, 管仲之力也. 如其仁, 如其仁.
03 법치와 반(反)귀족의 상관성과 관련해서 신정근, 『신정근교수의 동양고전이 뭐길래?』, 동아시아, 2012 참조.
04 「諫」上 莊公奮乎勇力, 不顧于行義. 勇力之士, 無忌于國. 貴戚不薦善, 逼邇不引過. 『안씨춘추』의 번역본으로는 임동석 역주, 『안자춘추』상하, 동서문화사, 2009; 2012 2쇄가 있다. 주석이 충분하지 않아서 원문과 번역문의 연관성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05  「諫」下 三子者, 搏之恐不得, 刺之恐不中也.
06 「問」上 寡人意氣衰, 身病甚. 今吾欲具奎璧犧牲, 令祝宗薦之乎上帝宗廟, 意者祀可以干福乎?
07  초나라 무당이 경공을 찾아서 오제(五帝)에게 제사를 지내면 그들과 같은 군덕(君德)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을 믿기도 했다.(「諫」上)
08  「諫」下 夫厚籍斂不以反民, 棄貨財而笑左右. 傲細民之憂, 而崇左右之笑, 則國亦無望已. 且夫孤老凍餒, 而死狗有祭, 鰥過不恤, 而死狗有棺, 行辟若此, 百姓聞之, 必怨吾君. 諸侯聞之, 必輕吾國.
09  「問」上 君得合而欲多, 養欲而意驕. 得合而欲多者危, 養欲而意驕者困. 今君任勇力之士, 以伐明主, 若不濟, 國之福也. 不德而有功, 憂必及君.
10  「諫」下 君國者, 不樂民之哀. 君不勝欲, 旣築臺矣. 今復爲鐘, 是重斂于民, 民必哀矣. 夫斂民之愛而以爲樂, 不祥, 非所以君國者.
11 승욕(勝欲)은 춘추전국시대의 욕망 해법과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개념이다. 특히 『논어』의 극기복례(克己復禮) 해석과 관련해서 새로운 관점을 던져줄 수도 있다. 신정근, 『사람다움의 발견』, 이학사, 2005 참조.
12 「諫」上 輕死以行禮, 謂之勇. 誅暴不避彊, 謂之力. 故勇力之立也, 以行其禮義也. 湯武用兵而不爲逆, 竝國而不爲貪, 仁義之理也.
13 「諫」上 群臣固欲君之無禮也, 力多足以勝其長, 勇多足以弑其君, 以禮不使也. 禽獸以力爲政, 彊者犯弱, 故日易主. 今君去禮, 則是禽獸也. 群臣以力爲政, 彊者犯弱, 而日易主, 君將安立矣? 凡人之所以貴于禽獸者, 以有禮也.
14 「諫」下 夫禮者, 民之紀. 紀亂則民失, 亂紀失民, 危道也.
15 「諫」下 厚籍斂于百姓, 而不以分餒民. 夫藏財而不用, 凶也. 財苟失守, 下, 其報還至. 其次, 昧財之失守, 委而不以分人者, 百姓必進自分也. 故君人者, 與其請于人, 不如請于己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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