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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읽기『여씨춘추(呂氏春秋)』, 제국의 공정성과 황제의 불개입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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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정근 작성일2018.12.19 조회3,75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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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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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는 군부의 장기 집권이 끝난 뒤 5년마다 대선을 치른다. 선거 결과에 따라 다수자가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대통령 당선자는 취임 전에 선거 과정에서 제시했던 공약을 손보게 된다. 이 일은 인수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진행한다.
  전국시대가 끝나갈 즈음이었다. 전국칠웅이 경쟁하던 중에 진(秦), 제(齊), 초(楚)가 통일 왕국의 후보자로 압축되었다. 다시 경쟁이 첨예화되면서 일반인과 사상가들은 어느 나라가 전국시대의 상황을 종식시킬 것인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사상가들은 단순히 어느 나라가 통일의 주역이 될지 알아맞히는 일에 자신들의 역할을 한정시키지 않았다. 그들은 멀지 않은 미래에 등장할 통일 제국을 운영하는 시스템을 입안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자백가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시대의 혼란을 해결하는 데에 공통 지향을 가지고 있었다. 전국 말기에 이르면 사상가들은 분열을 종식시키는 승리의 방법이 아니라 승리자가 혼란을 질서로 전환시키는 큰 그림을 그리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순자, 한자(한비자), 여불위(呂不韋, 기원전 ?∼235) 등은 각자 자신의 방식으로 공통 과제를 수행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선진시대의 제자백가 사상을 일정한 틀로 종합화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 중에서도 여불위는 제자백가의 사상을 하나로 꿰려고 했던 사상 릴레이의 최종 주자였다. 그는 결국 제자백가의 초기 사상가만이 아니라 후기 종합자의 성취를 골고루 섭렵하는 후발 주자의 특권을 최대한으로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여불위, 최고의 투자 대상은 사람이다


  여불위는 무역업, 헤드 헌터, 정치의 막후 실력자, 학계의 지원자, 『여씨춘추』의 편집자01, 제국의 설계사, 십만 호의 식읍을 가진 승상 등의 화려한 경력을 거치다가 마지막으로 자살로 생애를 마쳤다. 경력만 놓고 보더라도 여불위의 인생은 한 편 드라마를 보는 것처럼 파란만장하다고 할 수 있다.
  여불위는 인생의 전환기마다 치밀한 조사와 면밀한 계산 끝에 최선의 미래를 선택하곤 했다. 여불위는 전국시대처럼 정치적 불안의 정도가 높은 시대가 아니라면 그는 상인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그는 농산물의 산지와 소비자의 가격 차등을 이용해서 천금의 재산을 모을 정도로 성공한 무역 상인이었다. 당시는 근대처럼 사유재산권의 불가침이 법으로 보장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사업의 규모가 커질수록 정치 논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02
  여불위는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고 나서 더 이상 상품에 투자를 하지 않고 사람에게 투자하기도 했다. 그가 아버지에게 농사를 짓고 사치품을 팔면 투자한 비용에 비해 얼마의 이윤을 거둘 수 있는지 물었다. 아버지는 차례로 10배, 100배의 이윤이 생길 것이라고 대답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한 나라의 군주를 받들어서 세우면 얼마의 이윤을 거둘 수 있는지 물었다. 아버지는 헤아릴 수 없는 이윤을 얻을 것이라고 예상했다.03
  여불위가 아버지에게 이런 물음을 던진 이유가 있다. 그가 무역업에 투자할 물건을 구하러 다니다가 조(趙)나라 수도 한단(邯鄲)에서 인질로 와있던 진(秦)나라의 공자 자초(子楚)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여불위는 당시 자초를 만나고서 “이 진귀한 돈 덩어리는 사 둘 만하다”라는 ‘기화가거(奇貨可居)’라는 말을 외친 것으로 유명하다.04
  여불위는 진나라 정국의 향배를 미리 계산해보고서 자초를 군주로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당시 진 소왕(昭王) 40년에 태자가 죽자 둘째 아들 안국군[安國君, 나중에 효문왕(孝文王)]을 태자로 삼았다. 안국군은 자초를 포함해서 아들이 20명이 있었다. 화양부인(華陽夫人)이 안국군의 사랑을 독차지 한 반면에 자초의 생모 하희(夏姬)는 자식을 낳은 것 외에 존재감이 없었다. 그 때문에 자초가 위험한 인질이 되었던 것이다.(「여불위열전」 참조)
이때 여불위는 다음처럼 작전을 짰다. 첫째, 자초를 화양부인의 양아들로 만든다. 둘째, 안국군이 왕이 된 뒤에 자초가 태자가 된다. 셋째, 마지막으로 자초가 왕이 된다. 이 모든 계획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딱 맞아떨어져서 자초가 실제로 장양왕(莊襄王)이 되었다. 왕이 된 뒤에 여불위는 승상에 제수되고 문신후(文信侯)에 분봉되어 식읍 10만호를 거느리게 되었다.(「여불위열전」 참조)05 여불위의 아버지가 예상했던 셀 수 없는 수익이 생겨났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여불위는 사람 투자가 가장 확실하고 엄청난 이윤을 가져온다는 것을 예리하게 알아차린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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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 가까운 미래에 출현할 통일 제국의 존재 이유


  여불위는 진나라의 관료 조직에서 승상이었지만 실제로 승상 이상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니 진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자리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소왕이 죽은 뒤 안국군(효문왕)이 즉위해서 1년 만에 죽었고, 여불위 프로젝트의 주역 자초(장양왕)는 즉위해서 3년 만에 죽었다. 장양왕의 아들 정(政, 훗날 진시황)이 13세에 즉위했다.06 이때 진시황은 여불위를 ‘중부(仲父)’로 부르며 그의 이야기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때부터 진시황이 친정을 하기 전까지 여불위의 전성기라고 할 만하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정치적 유력자에 기탁해서 유사시에 개인의 역량을 발휘하던 독특한 식객(食客) 문화가 생겨났다. 위(魏)나라의 신릉군(信陵君), 초나라의 춘신군(春申君), 조나라의 평원군(平原君), 제나라의 맹상군(孟嘗君)도 식객을 양성하고 있었다. 오늘날 말로 하면 가신 그룹이라고 할 수 있고 싱크 탱크나 인재 풀이라고 할 수도 있고 장학 조직이나 참모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여불위는 승상이지만 실제로 왕 노릇을 해야 했다. 그는 3,000여 명의 가신 그룹 또는 참모 조직을 동원해서 자신과 미래의 왕(진시황)을 위한 국정의 장기 비전과 액션 플랜을 그리고자 했다. 오늘날 인수위원회나 청와대 참모 그룹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인재 풀을 만들었던 것이다.
  여불위가 ‘통일 제국의 국정 철학과 액션 플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그 성과를 세상에 공포했다. 그것이 바로 『여씨춘추』였던 것이다. 그는 프로젝트의 결과물에 무한한 신뢰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여씨춘추』를 셴양(咸陽)의 시문(市門)에 걸어놓고, 이 책의 내용을 한 자라도 고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천금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이로 인해 ‘일자천금(一字千金)’의 고사가 생겨나게 되었다.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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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씨춘추』는 크게 「십이기(十二紀)」, 「팔람(八覽)」, 「육론(六論)」의 세 부분으로 총 200,000자에 이르는 대작이다. 앞의 ‘십이기’는 사람이 자연의 주기에 맞추어 살아야 한다는 내용을 다루고 있다. 월령(月令), 시령(時令)의 사고와 일치하는 부분으로 봄에는 봄의 일을 하고, 여름에는 여름의 일을 해야지 봄에 겨울의 일을 하거나 여름에 가을의 일을 해서 안 된다는 것이다.08
  자연의 주기에 맞추면 사람과 자연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가 화해를 이루게 되지만 자연의 주기에 맞추지 못하면 사람과 자연 그리고 사람과 사람이 불화하게 된다. 이 부분은 전국시대에서 자연과 사람을 통합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던 음양가 또는 자연철학자들의 영향을 받고 있다. 「팔람」과 「육론」은 인간 사회를 지배하는 원칙과 기술을 다루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여씨춘추』는 여러 가지 문제 중에서도 두 가지를 핵심적으로 다루고 있다. 전국시대가 종식되면 제국이 출현하고 제국의 정점에 선 최고 통치자(황제)가 나타나게 된다. 이때 문제는 다음과 같다. “제국은 전국칠웅(戰國七雄)의 경쟁하던 개별 국가와 어떻게 다르고 최고 통치자는 천자나 패자(영웅 호걸)와 다른 어떤 리더십을 보여줄 것인가?” 제국이 개별 국가와 다른 정당성을 가져야만 존재의 이유를 가지게 되고, 황제가 천자나 패자(영웅호걸)와 다른 리더십을 창출해야만 사회 통합의 시대정신을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여불위는 제국의 정당성을 공(公, 공정)에서 찾았다.

   

  “옛날 성왕이 천하를 다스릴 때 반드시 공정을 우선시했다. 공정해야만 천하가 평화롭게 된다. 천하를 얻은 사람이 많은데, 반드시 공정에 의거하기에 천하를 얻고 편파성에 굴복하면 천하를 잃는다. …… 천하는 한 사람의 천하가 아니라 천하 사람의 천하이다. 음양의 두 기운이 조화로우면 한 부류를 키우지 않고 때 맞춰 이슬이 내리고 비가 오면 한 사물을 편애하지 않는다.”09

 

  여불위는 개별 국가를 넘어선 제국이 공정을 원칙으로 할 때 존립의 정당성을 갖추게 된다고 본다. 전국칠웅이 대립할 때 일국의 생존이 가장 우선적인 목표이다. 이와 달리 칠국이 하나의 제국으로 통일된 뒤에는 귀공(貴公), 즉 공정을 최우선의 원칙으로 설정해야 한다. 공정이 무너지게 되면 제국도 붕괴될 수밖에 없다. 귀공은 거사(去私), 즉 편파성의 제거(부정)를 함축하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실천하도록 요구한다.

  

  “하늘이 만물을 골라서 덮어주지 않고 땅이 만물을 골라서 실어주지 않고 해와 달리 만물을 골라서 비춰주지 않고 네 계절이 때를 골라서 운행하지 않는다. 제각각 자신의 덕(힘)을 발휘하니 만물이 그것을 받아서 자라게 된다.”10

  

  여불위는 사(私)를 대표하던 전국시대의 개별국가와 공(公)을 대표하는 제국을 대비시키면서 제국의 정당성을 공에서 찾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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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불개입 리더십 


  진시황은 자신의 표현대로 이전의 어떠한 군주도 이루지 못한 엄청난 과업을 성취했다. 이전의 최고 통치자와는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면서 ‘황제(皇帝)’라는 호칭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진시황은 통일 전에 승리를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가혹한 통치자와 통일 후에 불사(不死)를 위해 재정을 거덜낸 비이성적 폭군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진시황을 비롯해서 역사상의 황제들은 절대 권력자, 무자비하고 변덕스런 압제자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다. 실상 전근대 동아시아 황제나 군주는 결코 절대 권위를 마음대로 휘두를 수는 없었다.
  건국의 황제는 후계자에 비해 강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지만 그도 공신 집단의 통제라는 중대한 과제를 해결해야 했다. 건국 과정에서 황제와 공신 집단은 동지적 연대 의식을 갖지만 건국 이래에는 군주와 신하의 관계로 재편성된다. 이 재편성은 늘 피비린내 나는 투쟁을 거치기 마련이다. 건국 이후의 후계자, 왕실 세력, 외척 세력만이 아니라 관료 집단, 비서 집단 등이 전체적으로 권력의 장을 이루지만 그들 사이에 묘한 균형과 견제, 대립과 협력의 관계가 형성된다.
  진시황을 비롯해서 황제가 역사에서 권력의 중독에 의한 타락 현상을 보인다. 이것은 황제 권력의 이상 현상에 불과하지 정상 현상이라고 할 수 없다. 이상 현상에 주목해서 황제의 절대성을 말한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부분의 진실이지 결코 온전한 진실이 되지 못한다. 현대사회에도 권력의 타락을 예방하는 법제가 있지만 간혹 부정, 부패, 비리, 독직의 종합 세트와 같은 권력의 중독 현상이 일어난다. 우리는 현대사회가 권력의 절대성을 허용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진시황은 오히려 하루에 자신이 처리해야 할 업무량을 저울에 달아서 집무를 할 정도로 일 중독증을 보였다. 후기 제국의 옹정제는 주접제(奏摺制)를 통해 개인의 의지를 지역 행정의 일선에게 신속하고 정확하게 전달하여 중앙 집권의 사각지대를 없애려고 했다.11 이것은 진시황이 황제로서 권력을 행사하던 정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정상 현상에 한정시킬 때 여불위는 황제가 권력의 중독에 빠지지 않고 사회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고 보았다.
 
  “외적 사물은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할 수 없다. 예컨대 충신 관룡방이 살해되었고 비간이 도륙을 당하고 기자가 미친 행세를 했다. 간신 악래가 피살되었고 폭군 걸과 주가 멸망당했다. 군주는 모두 예외 없이 자신의 신하가 충성스럽기를 바라지만 하려는 충성이 반드시 신뢰를 받지 못한다. 그래서 오자서 부자에게 살해당해서 시신이 강물에 떠다니게 되었다. …… 부모는 모두 예외 없이 자식이 효성스럽기를 바라지만 자식의 효성이 반드시 사랑을 받지 못한다. 그래서 효기가 아버지에게 의심을 받았고 증자가 아버지의 미움을 받아 슬퍼했다.”12

  

  권력중독의 증상은 나의 의지가 타자에게 무제약적으로 관철될 수 있다고 믿는 데에서 시작된다. 권력자가 신이 되는 것이다. 권력자가 불가능이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불위는 군주와 신하, 부모와 자식 사이의 역설을 예로 든다. 사람 사이에 ‘미움 받는 충신’, ‘사랑 받지 못하는 효자’의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것은 황제가 사람과 사물을 자기 의지대로 변화시킬 수 있는 만능성의 착각에서 깨어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는 곧 개별자의 의지를 인정해야 하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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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군주도 모든 것을 알 수 없었지만 중심(기준)을 잡으니 만사가 잘 풀려나갔다. 사람으로 하여금 중심을 잡을 수 없게 하는 경우는 사물이 자극을 주어 흔든다. 그래서 어그러진 뜻을 통하게 하고 뒤엉킨 마음을 풀어주고 부담스런 짐(덕업)을 덜어주고 꽉 막힌 도(길)를 뚫어준다. 신분과 부유, 현달과 위세, 명성과 이익 여섯 가지는 뜻을 어그러지게 한다. 파문과 자극, 여색과 무늬, 분기와 의기(意氣) 여섯 가지는 마음을 뒤엉키게 한다. 미움과 바람, 기쁨과 성냄, 슬픔과 즐거움 여섯 가지는 덕업을 부담스럽게 한다. 지혜와 능력, 떠남과 나아감, 취함과 버림 여섯 가지는 도를 막는 것이다. 이렇게 네 종류의 여섯 가지가 가슴(마음) 속에서 퉁탕거리지 않으면 뜻과 마음, 덕업과 도가 올바르게 된다. 네 가지의 상태가 올바르면 고요해지고, 고요해지면 맑고 밝아지면, 맑고 밝아지면 텅 비게 되고, 텅 비게 되면 의도적으로 하지 않아도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없게 된다.”13

  

  여불위는 황제가 왜 권력의 중독이 발생하는지 진단하고 있다. 의(意), 심(心), 덕(德), 도(道)가 어그러지고 뒤엉키는 등 교란이 일어나게 되면 사람(황제)은 자기 세계에 갇히게 된다. 사람이 자기 세계에 갇히게 되면 타자를 자기 세계의 부속물로 취급하게 된다. 이러한 상태의 악화는 결국 타자를 자기 세계로 끌어들여서 만화경을 구경하게 만든다. 가학과 피학이 구분되지 않는 사이코패스가 된다. 이렇게 권력중독의 이상 현상이 시작되는 것이다.
  여불위는 의(意), 심(心), 덕(德), 도(道)가 교란되지 않으면 사람(황제)은 타자를 자기 세계로 끌어들이지 않게 된다. 마음에는 교란으로 인해 생겨나는 갈등의 소리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는다. 마지막 구절에서 보이듯이 사람이 타자의 세계에 개입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저절로 풀려나기 시작한다.
  여불위는 제국의 운영에 공정의 원칙을 세우고 황제가 불개입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사회 통합을 이루도록 이끌고자 했다. 그의 주도면밀한 설계에도 불구하고 진시황의 말기에 보이는 권력의 중독을 막지 못했다. 이로써 그는 진시황의 친정과 더불어 자살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여불위열전」)


 <대순회보> 1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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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현재 『여씨춘추』 번역본으로는 김근 옮김, 민음사, 1993~1995; 글항아리, 2012; 정영호 옮김, 자유문고, 2006; 정하현 옮김, 소명출판, 2011 등이 있다.
02 司馬遷, 정범진 외 옮김, 『사기 열전』상, 까치, 1995; 4판 1997, 373쪽. 오늘날까지 『사기』 「여불위열전」은 여불위의 생애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자료이다.
03 『전국책』7 「秦策」5 歸而謂父曰: 耕田之利幾倍? 曰: 十倍. 珠玉之贏幾倍? 曰: 百倍. 立國家之主贏幾倍? 曰: 無數. 曰: 今力田疾作不得煖衣餘食, 今建國立君, 澤可以遺世. 願往事之.
04 『사기』 「여불위열전」 子楚, 秦諸庶孼孫, 質於諸侯, 車乘進用不饒, 居處困, 不得意. 呂不韋賈邯鄲, 見而憐之, 曰: 此奇貨可居.
05 여불위의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와 같아서 드라마나 문학 등 예술의 소재가 되었다. 중국에서 일찍이 TV 드라마가 제작되기도 했고 우리나라에서도 사실과 허구를 곁들인 소설이 나왔다.
06 사마천은 정이 장양왕의 아들이 아니라 여불위의 아들일 것이라는 설에 따르고 있다. 자초가 한단에 인질로 있을 때 여불위는 모든 재산을 쏟아 부어서 자초를 즐겁게 해주었다. 어느 날 자초가 여불위의 집에 왔다가 춤추는 무희 중 한 명을 마음에 두게 되었다. 그 무희는 이미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는데, 그 사실을 밝히지 않고 자초의 아내가 되었다. 훗날 자초와 무희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 정(政)이다. 유사한 이야기가 고려에도 있다. 이성계는 위화도 회군 이후에 조선의 개국을 진행해가면서 창왕과 우왕을 공민왕의 후손이 아니라 신돈의 자식으로 만들어갔다. 두 사람은 『고려사』에서 ‘공민왕세가’에 실리지 못하고 ‘신창열전’, ‘신우열전’으로 기록되었다. 오늘날의 유전자검사 기법이 있었더라면 사실이 확인이 되겠지만 진시황, 창왕과 우왕 모두 사실과 소문 사이에서 문학의 소재가 되었다.
07  『사기』 「여불위열전」 是時諸侯多辯士, 如荀卿之徒, 著書布天下. 呂不韋乃使其客人人著所聞, 集論以爲八覽,六論,十二紀, 二十餘萬言. 以爲備天地萬物古今之事, 號曰『呂氏春秋』. 布咸陽市門, 懸千金其上, 延諸侯游士賓客有能增損一字者予千金.
08 이와 관련해서 신정근, 『신정근교수의 동양철학이 뭐길래?』의 추연 항목, 동아시아, 2011 참조.
09  『여씨춘추』 「貴公」 昔先聖王之治天下也, 必先公, 公則天下平矣. 平得於公. 嘗試觀於上志, 有得天下者衆矣, 其得之以公, 其失之必以偏. 凡主之立也, 生於公. …… 天下非一人之天下也, 天下之天下也. 陰陽之和, 不長一類, 甘露時雨, 不私一物, 萬民之主, 不阿一人.
10 『여씨춘추』 「去私」 天無私覆也, 地無私載也, 日月無私燭也, 四時無私行也, 行其德而萬物得遂長焉.
11 진시황을 좀 더 객관적으로 접근하려면 장펀톈, 이재훈 옮김, 『진시황 평전: 철저하게 역사적으로 본 제국과 영웅의 흥망』, 글항아리, 2011 참조. 또 청 제국에 나타난 진시황의 닮은꼴인 옹정제와 관련해서 조너선 D. 스펜스, 이준갑 옮김, 『반역의 책』, 이산, 2004 참조.
12 「必己」 外物不可必, 故龍逄誅, 比干戮, 箕子狂, 惡來死, 桀‧紂亡. 人主莫不欲其臣之忠, 而忠未必信, 故伍員流乎江 ……. 親莫不欲其子之孝, 而孝未必愛, 故孝己疑, 曾子悲.
13 「有度」 先王不能盡知, 執一而萬物治. 使人不能執一者, 物感之也. 故曰通意之悖, 解心之繆, 去德之累, 通道之塞. 貴富顯嚴名利六者, 悖意者也. 容動色理氣意六者, 繆心者也. 惡欲喜怒哀樂六者, 累德者也. 智能去就取舍六者, 塞道者也. 此四六者不蕩乎胸中則正. 正則靜, 靜則淸明, 淸明則虛, 虛則無爲而無不爲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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