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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6.08.02 조회3,55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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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백리(淸白吏)는 재물에 대한 욕심이 없이 곧고 깨끗한 관리라는 뜻이며 관직 수행 능력과 청렴(淸廉)ㆍ근검(勤儉)ㆍ도덕(道德)ㆍ경효(敬孝)ㆍ인의(仁義) 등의 덕목을 겸비한 조선시대의 이상적(理想的)인 관료상이다. 고려시대부터 청백리 제도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장자』「어부편(漁父篇)」에 “행실이 맑고 결백하지 않으면 아래 관리들이 거칠고 게을러지니 이것이 대부의 근심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중국에서는 청백리란 말보다는 청백재상이란 말이 더 많이 쓰였다. 청렴하고 결백한 재상을 말하는데, 이는 일반 명사가 아니라 송나라 때의 관리인 두연(杜衍)01을 일컫는 말이다. 『연감유함(淵鑑類含)』02「설관부(設官部)ㆍ재상편(宰相篇)」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송나라 경력연간(慶曆年間:1041~48)에 두연이란 사람이 재상이 되었는데, 예물로 주는 물품이 있어도 절대로 집으로 가져오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이 그를 일러 청백재상이라고 하였다.

 

  우리 역사에 나오는 수많은 청렴했던 선비들 가운데 두 사람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는 비가 새는 집에서 우산을 받치며 살았던 유관(柳寬, 1346~1433)의 이야기이고, 두 번째는 검약한 생활을 스스로 지킨 한계희(韓繼禧, 1423~1482)의 이야기다. 이 모두가 『용재총화(慵齋叢話)』03에 실려 있으며『청파극담(靑坡劇談)』04과 『기재잡기(寄齋雜記)』05에 각각 유관과 한계희 이야기가 실려 있다.

 

유관은 문화 유씨로 자는 경부(敬夫), 호는 하정(夏亭)이며, 공민왕 신해년(1371) 문과에 급제했다. 그는 기국이 큰데다 청렴결백하였고 총명하여 가르치고 훈계하는 일에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조선조에 들어와 흥인문 밖에 집을 지었는데 단지 몇 칸에 불과했고 바깥에는 담장도 없었다. 태종이 선공감에 명하여 한밤중에 그의 집에 울타리를 만들게 하고는 그 사실을 비밀로 하였다. 유관은 스스로 청빈한 생활을 지켜나갔다. 어느 날 장맛비가 보름정도 내리자 집안에 비가 뚝뚝 샜다. 유관이 방안에서 우산을 받쳐 들고 빗물을 막으며 부인에게 걱정스럽게 말했다. “우산이 없는 집은 어떻게 장마를 견디겠소.” 부인이 이 말을 받아 말했다. “우산이 없는 사람들이야 단단히 대비했겠지요.” 이 말에 유관도 웃어 버렸다. 가끔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아무리 겨울이라도 맨발에 짚신을 신고 나가 맞았으며, 틈이 나면 호미를 들고 채소밭을 가꾸면서도 힘들어 하지 않았다. 세종 갑진년(1421)에 우의정이 되었다가 나이가 들어 벼슬을 그만두었다. 손님을 맞아 술상을 차릴 때면, 반드시 막걸리 한 동이를 계단 위에다 놓고, 늙은 여종이 사기 주발로 술을 떠올리면 각자 몇 사발 마시고 끝낼 뿐이었다.

 

  한계희는 청주 한씨로 자는 자순(子順)이다. 세종 신유년(1441) 진사과에 급제하고 정묘년(1447) 문과에 올라 관직은 좌찬성에 이르고 공훈으로 서평군에 봉해졌다. 그는 일상생활이 검약하여 살림살이가 대단히 어려웠다. 풍악에 잡히지도 않았고 기생에게 눈을 돌리는 법도 없었으며, 집에는 검소한 서재 하나가 달랑 있을 뿐이었다. 형 서원군 한계미(韓繼美)와 재종 동생 상당부원군 한명회(韓明澮)가 크게 부귀를 누렸지만, 그만이 홀로 검소한 생활을 스스로 지켰다. 조석을 채소와 현미로 이어갔으며 늙을수록 더욱 검약에 힘쓰니 서원군이 민망히 여겨 급할 때마다 도와주었지만 모두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하루는 상당부원군 집에서 문중 모임이 열렸는데 모인 사람들이 모두 입을 모아 말했다.

 

“서평군이 나이가 많으나 생활이 갈수록 검약하여 누추한 의복과 음식을 바라보기가 여간 민망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대처할 바를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당부원군이 말했다. “이는 모두 제 허물입니다.” 하고는 아이에게 종이와 붓을 가져오게 한 뒤 그 자리에 있던 친지의 이름을 죽 적었다. 그리고 먼저 서평군의 맑고 청빈한 덕을 서술한 다음, 문중에서 받들어 모시지 못한 잘못을 적고 마지막으로 하찮은 물건이라 족히 부족하다 쓰고는 동대문 밖 북바위 아래 있는 열 섬지기 논을 바쳤다. 서평군이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는데 상당부원군이 그곳에서 나는 추수를 매년 보내니 그것마저 그만두게 할 수는 없어 받기는 했지만, 삼가고 불안해하는 기색을 끝내 거두지 않았다.

 

이처럼 유관과 한계희는 높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청렴하게 살았다. 유관이 보여준 태도는 무능하다 할 만큼 어리석은 행동이다. 그러나 사욕을 채우기보다는 가난을 일상으로 여겼던 옛 선비의 청빈한 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모은 재물은 한몸이야 치장해 주겠지만 결국 마음에는 독이 된다는 사실을 깨우쳤던 것이다.

 

한계희의 문중 사람들은 당대의 권세를 누렸고 부귀영화를 만끽했다. 한명회라면 세조 때부터 대대로 정승 반열에 오르내리면서 권세를 누렸고, 천하의 대세를 좌지우지했던 권세가였다. 그런 집안 출신인 한계희가 자처한 가난은 그래서 더욱 값져 보인다. 원하지 않던 재물이 왔을 때 그가 보여 준 두려워하는 마음은, 바로 자신을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지 않게 만든 힘이 되었던 것이다. 한계희야말로 누구도 꿈꿀 수 없는 큰 권력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어떤 비참한 지경에 빠져도 당당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할 것이다.

 

도전님께서 “수도를 잘하고 잘못함은 자의에 있으나, 운수를 받는 것은 사(私)가 없고 공(公)에 지극한(無私至公) 인도(人道)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06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대순진리회요람』에는 “사심은 물욕에 의하여 발동하는 욕심이다.”07라는 말씀이 나온다. 운수를 바라는 수도인은 수도과정에서 과거 청렴했던 선비들이 보여주듯이 물(物)을 탐하는 욕심인 사심(私心)이 허망한 것임을 깨닫고 과감히 버려야 하며, 지극한 도심(道心)을 갖추 어 나가야 할 것이다. 

 

 

01 옥송(獄訟) 심리를 잘했고 특히 관리의 부정을 용납지 않는 청렴한 북송(北宋)의 정치가이자 재상이었다. 조서(詔書)를 10여 회나 도로 봉하여 황제 앞에 바친 일로 임금의 과실을 바로잡은 신하의 표본으로 후세에 알려졌다.

02 청(淸)나라 강희제(康熙帝)의 칙명에 따라 편찬된 유서(類書). 내용을 사항에 따라 분류해서 편집한 장르 백과사전과 같은 것으로, 장영(張英) 등 4명이 총재가 되어 132명이 분담 편수(編修)하여 1710년에 완성하였다.

03 조선 전기의 문신ㆍ학자인 성현(成俔)의 수필집으로 중종 20년(1525)에 경주에서 간행되었다.

04 조선 초기에 이륙(李陸)이 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견문기(見聞記)를 엮은 책.

05 조선 인조 때의 문신 박동량(朴東亮)이 야사류와 일기를 함께 편저한 책.

06 『대순지침』, p.93.

07 『대순진리회요람』, p.19.

 

<대순회보 13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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