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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읽기『춘추』의 역사 기술과 사후 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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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신정근 작성일2018.12.18 조회3,72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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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신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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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이란 말은 애틋하고 설레게 하는 반면 마지막이란 말은 무섭고 두렵다. 사람에게 마지막은 죽음이다. 그럼 마지막의 마지막은? 그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 뒤에 심판이다. 이런 점에서 심판은 마지막을 마지막이게끔 종결짓는 사태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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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아시아 전통에서 신의 사후 심판이란 사유 방식이 없다. 마지막이 두려운만큼 사람은 나쁜 마지막을 피하고 좋은 마지막을 바란다. 좋은 마지막을 위해 마지막이기 전에 좋은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신이 없었던 동아시아인들은 어떤 기제로 마지막의 마지막을 의식하면서 평소 선하게 살려고 했을까?

  동아시아 사람은 신을 의식하는 대신에 이름[名]과 역사[史]를 강하게 의식한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며 이름에 집착하고, 사법적 심판보다 역사적 심판을 더 진실한 것으로 간주한다. 이러한 역사의식은 “내가 어떻게 역사에 기록되느냐?”로 집약된다고 할 수 있다. 죽어서 악인으로 평가되면 그 사람은 영원한 악인이고 선인으로 평가되면 영원한 선인이 된다. 이로써 동아시아의 역사는 단순히 사실의 기록이거나 과거와 대화가 아니라 사후 심판이라는 엄중한 의무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앞으로 『춘추』가 어떻게 사후 심판의 역할을 맡게 되었는지 그 여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춘추』는 역사인가?


  역사를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다. 사람마다 입장이 다른 만큼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입장이 다르더라도 사람들은 역사가 과거에 있었던 사실의 기록이라는 점에 쉽게 동의할 것이다. 물론 그 뒤 사실의 성격과 효용 그리고 가치를 두고 각자 다른 생각을 가질 것이다.

  오늘날 학문 분류에 따르면 『춘추』는 다양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내용을 읽다보면 풍속학, 인류학, 사회학, 법학, 군사학, 역사학, 철학, 문학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예컨대 결혼, 성생활은 풍속학의 주제에, 전쟁과 무기는 군사학의 주제에, 범죄는 사회학의 주제에, 명분, 시비 등은 철학에 어울린다.

  이 중에 법학이 다소 엉뚱해 보인다. 사실 전모를 알고 나면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전근대는 성문법이 일반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떤 행위가 범죄가 되는지 그 구성 요소를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춘추』를 보면 다양한 인물의 행위를 기록하고서 그것이 옳은지 그른지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것은 오늘날 법정에서 특정 행위의 유무죄를 가리는 재판 절차와 상당히 닮아 보인다. 한나라에는 실제로 ‘춘추결옥(春秋決獄)’이라 하여 『춘추』에 의거해서 소송 사건을 심리하기도 했다.

  이처럼 『춘추』가 다양한 성격을 가졌지만 역사로 보는 게 좋을 듯하다.
첫째, 서술 방식의 특수성이다. 『춘추』의 서술 방식은 편년체로 알려져 있다. 이는 연월, 즉 시간 순서에 따라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간혹 ‘초(初)’라는 표현을 통해서 현재 시점 이전에 일어났던 일의 개요를 알려주지만 전체적으로 먼 과거에서 가까운 과거라는 직선적인 시간을 따르고 있다.

둘째, 서술 내용의 포괄성이다. 오늘날 분과 학문 중에서 역사학만이 『춘추』에 등장하는 다양한 내용을 포괄할 수 있다. 『춘추』에서 전쟁을 다룬다고 하더라도 군사학이 『춘추』의 내용을 포괄할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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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추』를 역사로 본다면 그것은 역사 서술에서 어떤 나름의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경(經)의 무게 때문에 주저할 수 있지만 실제로 책을 펼쳐보면 보통 인간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것이 바로 『춘추』와 『서경』의 차이이다. 같이 역사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서경』은 성왕들이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서 분투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다. 성왕의 언행은 바로 보통 사람들이 믿고 따라야 할 말씀이었다. 반면 『춘추』는 『서경』의 세계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바로 그런 인간이 기상천외한 짓을 주저하지 않는다.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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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컨대 『춘추』 첫 기사를 살펴보자.02 정나라 무공에게 오생(寤生)과 공숙단(共叔段) 형제가 있었다. 아버지가 동생 공숙단을 편애하다가 죽자 형 오생이 장공이 된 뒤에도 두 사람은 사사건건 부딪치며 갈등을 키워갔다. 결국 두 사람의 대립은 내전 상태로 진행되었고 그 사이에 동생을 편든 어머니는 지하에 구금을 당하기도 했다.  
  왜 하필 『춘추』는 화목한 형제애가 아니라 치고 박는 골육상쟁을 다루었을까? 그것은 『춘추』가 보통 인간을 외면하지 않고 서술의 대상으로 끌어안고서 그 행위를 하나하나 심판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서경』의 역사는 성왕들의 모범적인 언행을 기록하며 찬양하고 그 지배에 반기를 든 자들을 응징하고 있을 뿐이다. 『춘추』는 신분은 고귀하더라도 언행이 그다지 특별할 게 없는 사람을 통해 선악의 가치를 평가해서 해당 인물을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객관적이며 엄정하게 평가했던 것이다. 그래서 장자는 『춘추』가 명분을 내세운다고 보았고, 사마천은 『춘추』가 시비를 가린다고 보았던 것이다.03 

   


•『춘추』와 공자 그리고 춘추 삼전(三傳)


  오늘날 전해지는 『춘추』는 여러 차례 편집 과정을 거친 결과이다. 가장 원초적인 형태는 노나라에서 있던 역사 기록물이었다. 이를 편집되지 않은 춘추, 즉 ‘불수춘추(不修春秋)’라고 한다. 공자는 이 불수춘추를 대상으로 해서 중복되는 부분을 정리하고 기술의 일관성을 이루면서 특정 인물의 행위에 칼날 같은 평가를 내리는 작업을 했다.

 『춘추』가 다루는 시대는 노나라 은공 원년(BC 722)에서 애공 14년(BC 481)까지 모두 242년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춘추 좌전』은 은공 원년에서 애공 27년(기원전 468)까지 모두 255년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나중에 이 책의 이름은 공자가 살았던 시대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따라서 ‘춘추’하면 특정한 역사 시대를 가리키는 말이면서 동시에 그 사이에 일어났던 역사를 기록한 책을 가리킨다.

  공자는 『춘추』를 편집하면서 단순히 역사적인 사실을 기계적으로 나열한 것이 아니라 사관의 평가를 곳곳에 남기고 있다. 그는 특정한 기사가 끝난 뒤에 ‘군자왈(君子曰)’이라는 형식을 빌어서 행위자의 득실과 가치를 냉엄하게 평가하고 있다.

  한국 근대사에는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 할 수 없다”는 특이한 판례가 있다. 일반적으로 역사 기술의 대상 인물이 죽었더라도 얼마 지나지 않았거나 현재 살아있다면 물론 객관적인 언어로 기술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춘추』에서는 현실의 성공한 악일지라도 그 악이 명백하게 분명하다면 역사에서 악으로 평가를 내렸다. 아울러 현실에서 불행한 선은 『춘추』에서 반드시 복권을 시켰다.

  이러한 서술 원칙으로 인해서 맹자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공자가 『춘추』를 완성하자 현실에서 성공했던 군주를 죽이고 왕이 된 자나 아비를 죽이고 모든 것을 독차지한 아들이 두려움에 떨었다.”04 왜냐하면 지금 당장 현실에서 난신적자가 어깨에 힘을 주고 모든 권세를 부릴지 모르지만 그도 사람인 한 죽기 마련이다. 죽고 난 뒤 역사에는 그가 분명히 악인으로 평가되어 영원히 그렇게 알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춘추』는 현실에서 구현되지 않은 선과 만연한 악의 위치를 완전히 전도시켜서 선악의 가치를 회복시키는 역사 법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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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도 『주역』과 마찬가지로 경(經)과 전(傳)의 이원 체제로 되어 있었다. 경은 사실 일자와 사건 개요를 적어놓은 연대기에 불과하다. 경의 기사만으로는 사건의 발생 자체를 알 수는 있지만 원인, 전개, 결과, 영향 등을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전 부분은 바로 경에서 다루지 못한 부분을 보충해서 사건을 전체의 시야에서 명백하게 재구성할 수 있도록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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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은 하나가 아니라 한제국 이래로 세 가지 전이 유명했다. 세 가지는 바로 공양전(公羊傳), 곡량전(穀梁傳), 좌씨전(左氏傳) 등을 가리킨다. 이를 합쳐서 ‘춘추삼전(春秋三傳)’이라고 한다. 한나라 초기에는 공양전과 곡량전이 『춘추』를 해설하는 믿을 만한 자료로 널리 받아졌다. 고문의 발견과 함께 『좌씨전』의 존재가 알려지자 기존의 판도가 깨졌다. 오늘날 『춘추』하면 『좌씨전』을 연상할 정도로 그 영향이 큰 편이다.  

 


•『춘추』와 사후 심판


  기독교와 불교 그리고 도교에는 모두 내세와 사후 심판의 사유 방식을 가지고 있다. 특히 불교에서는 삶을 전생, 현생, 내세(후생)로 나누고서 이전의 업이 다음의 생을 결정한다. 해탈을 통해 업의 사슬을 끊지 못한다면 과거에 의해서 다음이 규정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불교와 도교 등이 종합된 민간신앙에서는 염라대왕이 업경(業鏡)과 업칭(業稱)을 통해 사람이 살아온 이력을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확인하고서 천당과 지옥을 결정한다.05

 『춘추』의 세계는 철저하게 현세 중심의 특성을 드러내므로 귀신이 간혹 등장하지만 그들은 보호신과 수호신의 역할을 할 뿐이지 사후 심판관이 아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칫 하면 현실 세계는 강자의 힘의 논리가 차갑게 적용되는 정글이 될 수 있다. 물론 현실에서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평화는 전쟁의 기도를 사전에 내리누를 정도로 힘이 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하지만 신 또는 심판자 없는 인간 사회는 두 가지 문제를 드러낼 수 있다. 하나는 정의보다는 부정의가 판치고 공정보다는 타락과 부패가 만연하고 평화보다는 전쟁이 일상화되더라도 누가 그것을 바로잡을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다른 하나는 앞의 문제를 바로잡지 못했을 경우 우연히 평화가 아니라 전쟁의 시대에 태어난 사람의 고통은 누가 보상을 해주는가라는 문제이다. 
  현실에서 선이 악을 지배한다면 두 가지 문제가 생기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현세 중심의 세계는 곧 고통의 만연을 함축할 수가 있다. 바로 이 문제를 『춘추』가 해결하고자 했던 것이다. 물론 현실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않는 때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곧 악의 만능과 선의 무능을 증명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춘추』의 저자들은 아무리 현실의 악이 거대하다고 하더라도 결코 넘볼 수 없는 선의 절대 세계를 세움으로써 신 없는 정의가 가능하고 패배한 선의 고통이 보상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이다.

  사관은 왕의 죽음을 계기로 해서 주기적으로 현실을 심판하는 역사의 법정을 열었던 것이다. 이 법정은 기독교와 불교 등의 사후 심판과 같은 점도 있고 다른 점도 있다. 행위자가 죽은 다음에 심판을 받는 점은 동일하다. 하지만 『춘추』에서 심판자는 절대자로서 신이 아니라 집단지성의 사관(인간)이고, 장소가 내세가 아니라 현세이고 판결문의 보관이 신계가 아니라 역사서이고 판정이 일회적이지 않고 재연될 수 있고 영향이 당사자만이 아니라 후손 전체일 수 있다. 이처럼 『춘추』는 현세 중심의 세계관을 고수하면서도 사람을 사후에 역사로 초대해서 심판의 법정을 열었던 것이다.

  좁게는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넓게는 동아시아의 근대사에서 더 넓게는 세계의 근대사에서 반인륜적 범죄를 저지르고서 권력을 가졌던 탓에 현실의 법정에서 면죄부를 받은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권좌에 있으면서 비판자들에게 “역사가 자신을 알아주리라!”는 말로 대응했다. 이 대응은 『춘추』의 관점에서 보면 사관의 역할마저 빼앗는 몰역사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역사’ 타령을 하건 말건 『춘추』의 역사는 그들의 행위를 엄중하게 평가할 것이다.

    


•『춘추』의 두 이야기 : 미언대의와 동호직필


 『춘추』의 사관은 단순히 사실을 기록하는 필사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세계의 질서를 짜고 가치를 지키는 최후의 존재였다. 그들은 내세에서 현실의 힘을 상실한 무기력한 존재를 대상으로 철퇴를 내리는 신이 아니었다. 그들은 죽은 자들의 영향력이 남아있는 현실에서 심판자 노릇을 해야 했다. 그들은 축구장을 선수들과 함께 누비면서 반칙을 찾아내는 심판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사관이 자신들의 역사적 임무를 수행하기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 않았다. 이를 두 가지 이야기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첫째, 미언대의(微言大義)이다. 현실의 힘 센 자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이의 모든 영향력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특히 왕과 같은 인물은 그의 사후에도 수많은 이해 관련자가 살아있다. 사관의 한 글자 한 글자가 바로 그들의 신변을 위협하고 붓끝을 떨게 할 수가 있었다. 원래 역사는 무미건조하고 분명한 사실 언어로 쓰여야 한다. 하지만 분명한 만큼 감내해야 할 위험의 몫이 너무나도 컸다. 미언대의는 역사를 분명한 말이 아니라 미묘한 말로 기록하자는 일종의 장치라고 할 수 있겠다. 
  둘째, 동호직필(董狐直筆)이다. 진나라 영공은 왕이 되지 말아야 할 사람이 왕이 된 자이다. 조돈(趙盾)이 몇 차례 간언을 해서 비행을 바로잡고자 했다. 하지만 영공은 조돈을 미워해서 그를 죽이려고 했다. 조돈은 망명을 떠나 국경을 넘기 전에 영공이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조정으로 되돌아왔다. 사관이었던 동호가 “조돈이 제 군주를 시해했다(趙盾弑其君)”고 기록했다. 조돈은 기록의 부당함을 말하며 수정을 요구했다. 사관은 조돈이 국경을 넘지 않은 상황에서 시해사건이 발생했고 조정에 복귀한 뒤에도 재상이면서 살해자를 체포하는 적절한 조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시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고 주장했다. 나중에 공자는 원칙을 고수하는 사관과 그 원칙을 수용하는 조돈을 모두 높이 칭찬했다.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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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슷한 일이 제나라에서 일어났다. 최저(崔杼)가 군주를 시해하자 사관이 “최저가 제 군주를 시해했다(崔杼弑其君)”고 적었다. 최저가 수정을 요구해도 사관이 들어주지 않았다. 최저가 사관을 살해하자 그 동생이 이어서 같은 내용을 적었다. 최저가 또 수정을 요구했다가 들어주지 않자 또 사관을 죽였다. 이어서 세 번째 동생이 똑같이 기록을 하자 그제서야 최저도 더 이상 수정을 요구하지 않았다.07 역사는 그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숱한 피의 강물로 인해 정의가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동호직필을 사관직필로 일반화시키는 것이 좋겠다. 현실을 핑계로 미언대의에만 꽁꽁 숨을 것이 아니다.


  이제 정리해보자. “누가 『춘추』를 욕되게 하는가?”

<대순회보> 126호

 

필자소개
서울대학교에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배웠고 대학원에서 동양철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성균관대학교 유학·동양학부의 교수로 있다. 한국철학회 등 여러 학회의 편집과 연구 분야의 위원과 위원장을 맡고 있다.
저서로는 『사람다움이란 무엇인가』 『공자씨의 유쾌한 논어』 『제자백가의 다양한 철학흐름』 『동중서 중화주의 개막』 『동양철학의 유혹』 『사람다움의 발견』 『논어의 숲, 공자의 그늘』 『중용: 극단의 시대를 넘어 균형의 시대로』 『어느 철학자의 행복한 고생학』 『한비자』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백호통의』 『유학, 우리 삶의 철학』 『세상을 삼킨 천자문』 『공자신화』 『춘추』 『동아시아 미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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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맹자는 『춘추』가 다루는 시대에 얼마나 실망을 했는지 전쟁 기사는 많은데 ‘정의로운 전쟁’은 한 건도 없다며 분노를 나타냈다. 「진심」하2 “孟子曰: 春秋無義戰, 彼善於此則有之矣.”

02 『춘추 좌전』은 그간 한국어 번역본이 없어서 일반인이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번역본이 있어도 너무 고어투라 읽기가 버거웠다. 최근 읽을 만한 번역본이 나와서 『춘추좌전』의 세계를 빨리 훑어볼 수가 있다. 신동준, 『춘추좌전』1-3, 한길사, 2006 참조.

03 『사기』 「태사공자서」 “春秋辨是非, 故長于治人.” 『장자』 「천하」 “春秋以道名分”
04 「등문공」하9 “孔子成春秋, 而亂臣賊子懼.”

05 네이버에 연재된 호민의 『신과 함께』 저승편과 이승편의 웹툰을 보면 우리의 민간신앙에 나타난 사후 심판을 현실감 있게 알 수 있다.
06 『좌씨전』 선공 2년 “孔子曰: 董狐, 古之良史也, 書法不隱. 趙宣子, 古之良大夫也, 爲法受惡. 惜也, 越竟乃免.”

07 『좌씨전』 양공 2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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