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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화고위교(僞敎,indoctrination, 거짓 가르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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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7.02.07 조회2,58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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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감사원 교감 김재현
 

 
 
1. 들어가며
 
  거짓된 지식을 가르치거나 가르쳐야 할 것을 잘못 가르치는 것을 위교라 한다. 가르쳐야 할 것을 올바르게 가르치는 교수(敎授)와 상대적인 단어이다. 분석적 교육철학자인 윌슨(J. Wilson)은 위교를 허위의 지식을 가르치는 것, 앳킨슨(R.F. Atkinson)은 방법적 과정에 대한 이해 없이 지식을 가르치는 것, 헤어(R.M. Hare)는 자율적 사고능력을 억제하려는 의도 하에서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라 했다.01 결국 위교란 도덕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가르침으로 교사가 학생들의 생각을 자기 의도(意圖)대로 바꾸어 놓는 데 급급한 나머지, 자발적 사고(自發的思考)나 질문의 기회를 제공하지 않음으로써, 학생으로 하여금 비합리적인 신념을 가지게 하거나(고의로 속이는 것), 비록 합리적 신념일지라도 그 근거를 모르는 채 신봉하도록 가르치는 것을 말한다. 이때 교사의 의도가 성공하거나 실패하거나 그 결과에 관계없이, 그 의도를 실현하려는 노력 자체가 바로 위교이다. 위교는 「인독트리네이션」(indoctrination)으로 원래 「독트린」(doctrine), 즉 교조(敎條)나 주의(主義)를 믿게 만든다는 뜻이었으나, 점차 지금과 같은 의미로 바뀌어 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당한 교육과 위교를 구별하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문제가 제기되었고 최근에 와서는 스누크(I.A. Snook)·화이트(J.P. White) 등이 제시한 「교사(敎師)의 의도」라는 기준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학생들이 교사의 권위를 의심하지 못하게 만들려는 의도를 가지고 가르침에 임하는 것을 위교로 보고 있다.02
  일본인 10명 가운데 7명이 독도를 일본 땅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위교의 사례로 가장 대표적인 것이다. 일본 히로시마시립대 평화연구소 김미경 부교수에 따르면 2012년 4월과 8∼11월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시마네·오이타·히로시마현 주민과 리쓰메이칸[立命館] 아시아-태평양 대학의 일본인 학생 등 440명을 상대로 조사를 벌인 결과, 91%(399명)가 “독도 분쟁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그리고 “다케시마(독도의 일본식 명칭)는 일본땅”이라고 생각한다는 응답자는 67%(293명)에 달했다. “아니다”라는 응답은 2%(7명)에 불과했으며, 27%(118명)는 “모른다”고 답했다.03 이러한 조사 결과는 일본 언론 보도와 우익 지도자들의 독도에 대한 발언과 학교 교육에서 독도에 대한 그들의 가르침의 영향으로 보인다. 어떤 사실을 언론과 정치인, 교사가 어떻게 말하고 기사화하고 가르치느냐에 따라 사실이 아니어도 얼마든지 사실로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잘못된 가르침은 사실을 왜곡하여 받아들이게 할 수 있다. 대순진리회 각 방면의 교화는 그 방면의 수도인이 어떤 관점에서 대순진리를 인식할지 그 근거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각각의 수도인의 수도생활 방향을 설정하므로 그 영향은 참으로 크다고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위교와 관련하여 대순진리회 교화의 문제를 논하고자 한다. 구체적으로 대순진리회에서의 교화(敎化)의 개념과 목적, 그리고 참된 신념의 개념과 비판적 사고의 필요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2. 참된 교화와 신념
 
1) 대순진리회의 교화
 
  대순진리회에서 교화는 도인들의 신앙의 3대 원칙 중 하나04이며, 종단 3대 기본사업의 하나이다.05 따라서 교화는 개인의 신앙 목적과 종단의 광구천하(匡救天下)·광제창생(廣濟蒼生)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교육적 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교화는 알게 하여 개조되도록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입도한 도인에게 하늘에 운(運)이 사람을 구하여 쓰는 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을 자인 자각케 하고 대순사상과 그 실천덕목을 가르쳐서 참도인으로 이끌어 나가는 것, 사람이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도리를 가르치는 것, 대순진리를 전하여 사람이 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을 말한다. 더불어 상제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분명히 알리고 상제께서 광구천하·광제창생으로 지상선경을 건설하시고자 천지대도를 선포하신 의미를 일깨워주는 것이어야 하며 그 목적은 도인들에게 해원상생·보은상생의 양대진리가 마음과 몸에 배도록 하는 것이다. 즉 교화는 상대로 하여금 어떠한 사실을 ‘알게’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종교적 법리로 인간(人間)을 개조(改造)하여 행동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대순진리회에서 인간의 개조는 신명(神明)이 인간의 마음에 출입하여 성격과 체질을 바꿔 줌으로써 이루어진다.06 따라서 신명이 출입하여 응(應)할 수 있도록 그 마음을 열게 하고 향상(向上)을 이루도록 해 주어야 한다. 일신(一身)을 생각하고 염려하고 움직이고 가만히 있게 하는 것은 오직 마음에 있으므로, 인간개조는 마음의 감화(感化)를 통하여야 가능한 일이다. 교화가 언설(言說)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이 감동(感動)할 행동(行動)과 처신(處身)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07 똑같은 내용의 교화도 행동과 처신이 바른 사람이 한 교화와 바르지 않은 사람이 한 교화는 감동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교화에는 말이나 글로써 하는 것이 있고 솔선수범을 통한 무언(無言)으로 하는 것이 있지만 그 효과는 말이나 글보다 솔선수범의 효과가 더 크게 나타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교화란 가르침(教)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게[化] 하는 것이기에  상대방을 감화시켜서 행동의 변화를 유도해야 하는 것이다. 상대를 감화시키는 힘은 화려한 말주변이 아니라 솔선수범하고 상대방을 위하는 진정한 마음이다. 이에 대해 도전님께서도 “말재주 보다 행동과 처신으로써 상대를 감화시키는 자세를 가져라.”08라고 하셨다. 가장 좋은 교화는 솔선수범에 있다.
  그러나 대순진리의 사상을 바르게 깨우쳐주기 위해서는 말과 글을 통한 교화도 필요하다. 『전경』을 근본으로 하여 강세하신 강증산(姜甑山)께서 구천상제(九天上帝)이심을 분명히 일깨워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화의 내용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틀은 어떻게 구성하여야 하는가? 물론 여기에는 다양한 견해가 있을 수 있으나 교화의 지침을 이루는 요소들을 『전경』과 『대순지침』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첫째 증산께서 구천상제이심을 일깨우고 연원(淵源)의 중요성과 종통(宗統)을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둘째 종지(宗旨)·신조(信條)·목적(目的)을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 셋째 상제님의 9년간의 천지공사를 널리 알려 지상낙원의 복을 받는 포덕에 동참 하도록 하는 것, 넷째 세상에 충(忠)·효(孝)·열(烈)이 없어서 천하가 병들었으므로 인륜도덕을 바로 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다섯째 자모지정(慈母之情)과 은사지의(恩師之義)의 심정으로 통심정(通心情)을 이루어 연운체계의 질서를 확립하도록 하는 것, 여섯째 기도와 공부의 중요성을 알려서 실천하도록 하는 것 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지침을 무시하고 말을 꾸며서 진리가 와전되게 교화하고 있는 무리들도 있다. 즉 근거도 없는 자신만의 생각을 진리라 주장하고 왜곡된 교화로 종단 분규의 단초(端初)를 제공하고 방면 전체를 사지(死地)로 몰아간 사례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부분은 대순진리에 대한 올바른 신념은 꼭 필요하지만 근거도 없고 객관적으로 잘못된 신념을 가진 사람이 교화를 하면 위교(僞敎)가 된다는 점이다. 그래서 다음으로 신념은 무엇이며 정당한 참 신념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참된 신념
 
  일반적인 신념과 종교적인 신념에는 분명 차이점이 존재한다. 일반적인 신념은 논리적, 합리적, 이성적인 근거를 제시해야 한다. 하지만 종교적 신념은 이러한 일반적인 신념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곤란하므로 자신이 속한 종교 사상 안에서 논리적, 이성적, 합리적인 근거를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그럼 여기서 먼저 교육철학에서 말하는 신념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한다.
  신념 (信念, Belief)은 자신이 가진 견해·사상에 대하여 흔들림 없는 태도를 취하며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퍼스(C. S. Peirce)09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적절한 행동규칙을 가져야 하는데, 이와 같은 규칙이 곧 ‘신념’이다. 이러한 신념이 결여되면 인간은 지적으로 불안하고 불쾌한 상태를 경험하게 되며, 이러한 상태를 벗어나 적절한 행동 규칙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신념을 획득하고자 한다. 퍼스는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대상이나 경험세계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신념을 형성하고, 그러한 신념에 따라 자신의 행동을 선택하고 결정해 나간다.”10고 말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개개인이 자신의 신념에 대해 참된 것이라고 확고하게 믿는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도 참되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개개인이 참된 것이라고 믿는 것이 객관적으로도 참되다고 인정되지 않는 한, 그것은 주관적인 믿음에 불과하며 나중에 그릇된 것으로 밝혀질 수도 있다. ‘믿는다’라는 동사와 짝지을 수 있는 명사로서의 ‘신념’은 개인의 지적 작용의 결과로 형성되며, 그런 점에서 신념은 기본적으로 개인적이며 주관적인 것이다.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믿음으로서의 신념은 객관적으로 옳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객관적으로 틀리고 잘못된 신념이라 할지라도 ‘신념’으로 성립할 수 있으며, ‘잘못된 신념’ 또는 ‘틀린 신념’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교육학에서는 모든 신념이 지식으로 성립하는 것은 아니며, 신념 중에서 ‘참’인 것으로 인정되는 신념만이, 즉 ‘참 또는 진(眞)인 신념(true belief)’만이 지식을 구성하게 된다.
  그러면 ‘참’인 신념은 모두 지식으로 성립하는가? 그렇지는 않다. 신념이 지식으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그 신념이 참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참인 것을 보여 주는 정당한 근거 또는 증거가 제시되어야 한다. 예를 들면, 어떤 학생이 수학 문제의 정답을 말했지만, 어떻게 해서 그 답이 나왔는지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풀었는지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면 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라고 말할 것이다. 이처럼 지식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비록 참인 신념이라 할지라도 타당한 ‘근거’나 ‘증거’의 제시를 통해 그 신념의 정당성을 확보하여야 한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하면, 지식은 증거를 통해 참으로 받아들여지는 신념, 즉 ‘정당성을 지닌 참 신념(justified true belief)’으로 규정되며, 지식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길동이가 P를 안다고 말하기 위해서, 즉 길동이가 P에 대한 지식을 갖고 있음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⑴ 길동이가 P를 믿고 있고
⑵ P가 참이고,
⑶ P에 대한 길동이의 믿음이 증거나 근거를 통해서 정당성을 확보해야 한다.
결국 어떤 신념이 지식으로 성립할 수 있는가의 여부는, 먼저 그 신념이 참인가 아닌가 여부에 달여 있으며, 이차적으로는 신념이 참임을 보여주는 증거나 근거의 제시 여부에 있다.
  세상을 살면서 누구나 자신만의 신념을 가질 수 있듯이 대순진리회 도인들 누구나 자신만의 신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 신념은 자신만의 신념일 수도 있고 대순진리에 부합하는 신념일 수도 있다. 자신만의 신념과 대순진리에 부합하는 신념의 구별은 어떻게 할 수 있는가? 도전님께서는 “대순진리는 『전경』을 근본으로 하여 참다운 도인이 되도록 교화하여야 한다.”11 고 하셨고 자신의 신념을 진리인양 교화하는 것을 경계하셔서 “말을 꾸며서 진리가 와전 되어서는 안 된다.”12고 하셨다. 결국 『전경』과 『대순지침』, 그리고 도전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는 신념은 대순진리에 부합하지만 그렇지 않은 신념은 자신만의 신념인 것이다.
  지금 우리 종단은 분규로 인한 덕화손상에 의해 포덕사업에 막대한 지장을 겪고 있다. 분규의 원인은 여주본부도장을 이탈한 방면의 임원들이 지녔던 도전님을 원위에 모셔야 한다는 잘못된 신념 때문이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참 신념의 조건은 먼저 그 신념이 참이어야 하고, 그 신념이 참인 증거나 근거를 제시하여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도전님을 원위에 모시는 것이 참이라는 근거를 『전경』에 대한 잘못된 해석을 증거로 내세우고 있다. 여기서 『전경』의 말씀에 대한 해석을 올바르게 하실 수 있는 분은 그 말씀을 하신 양위 상제님과 종통을 이으신 도전님 외에는 그 누구도 『전경』 말씀에 대한 온전한 해석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겸손을 기본으로 갖추어야 하는 수도인의 인품을 저버린 것을 넘어 자만으로 가득 찬 모습이라 하겠다. 결국 그들은 자만을 넘어 천지공사의 법을 바꾸어 버렸다. 여기서 살펴 볼 부분은 상제님께서 짜 놓으신 도수는 후천 기획이고 이 뜻을 받들어 도주님께서 후천의 설계를 진법(眞法)으로 짜 놓으셨다. 그런데 누군가 이 법을 바꾼다는 말은 자신이 도수를 바꾸고 진법을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으로 천자를 도모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그들은 서가여래의 퇴위에 대한 이유나 근거에 대한 설명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종단의 핵심요직에 있고 다수의 의견이라는 것을 명분 삼아 도전님을 원위에 모시는 일을 강행하고자 했다. 권위나 다수의 의견, 계시(啓示), 직감 등은 신념의 정당성을 보장해 줄 수 없고 믿을 수 있는 준거(準據)가 될 수 없다. 영대(靈臺)의 15신위는 구천상제님의 뜻에 따라 도주님께서 짜놓으신 법방이다. 그래서 도전님께서 15신위는 누구도 손댈 수 없다고 하셨다. 구천상제님의 유지(遺志)와 도주님의 유법(遺法)과 도전님의 유훈(遺訓)을 무시하고 잘못된 신념으로 신위를 변경하려 하였고 결과적으로  종단의 분규를 낳고 말았다. 지금까지 잘못된 신념이 어떤 결과를 낳는지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본부를 이탈한 세력과 일부의 방면에서 행해지는 잘못된 교화의 사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3) 잘못된 신념과 교화의 사례
 
(1) 강신 및 해원
 
  신(神)을 내려 신을 보게 하고, 또 신에게 의례나 교화를 하여 신을 해원(解冤)시켜준다는 허황된 법을 만들어 시행하다가 적발되어 제명 등의 중징계를 받은 사례가 있었다. 이러한 잘못된 신념은 난법난도(亂法亂道)요, 허령(虛靈)으로 도전님 재세 시에도 이러한 일을 벌였던 몇몇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도전님으로부터 ‘제명 처분’이라는 중벌을 면치 못했었다. 우리 종단에서는 신을 내려 본다거나 신을 해원시켜주는 행위는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는 난법난도요, 허령에 해당하고 도통을 목적으로 하는 수도가 아니라 사도(邪道)이기 때문이다.13
  이러한 행위의 대표적인 예는 해원식(解冤式), 대운치성(大運致誠), 제사상 등으로, 조상을 해원한다는 명분 하에 없던 의례를 만들었던 사례다. 스스로가 대순진리회에 있지도 않는 의례를 만들 수 있고 이를 통해 조상을 해원할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의 소산물이다. 누군가의 행위로 조상을 해원할 수 있다는 생각 자체가 무당의 생각과 다르지 않다. 자손이 상(床)을 차리고 절 몇 번 한다고 해서 조상이 원을 풀 수 있다는 생각 자체에 맹점(盲點)이 있고 누가 무슨 생각으로 왜 그런 의식(儀式)을 만들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다. 이런 허황된 생각은 금전을 목적으로 하는 사심이 개입된 것으로 위교를 넘어 난법(亂法)의 사례이다.
  이러한 의식은 상제님의 말씀과도 맞지 않는다. 상제님께서는 ‘해원시대’를 여시어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들이 이 세상에서 각자의 원을 풀도록 천지도수를 만들어 놓으셨는데 원을 풀기 위해서는 괴로움을 받아서 직접 겪어나가도록 도수를 짜놓으셨다. 자신의 가슴뼈를 상하게 한 원수를 오히려 은인과 같이 사랑함으로써 과거 자신의 잘못을 풀 수 있었던 박공우의 예14에서 볼 수 있듯이, 신의 원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괴로움을 받아서 견뎌서만 되는 것이 아니라 ‘남 잘 되는 공부’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15
 
(2) 시한부와 계시
  도전님께서 “도는 영원한 진리이니, 도에서 시한부를 운운함은 있을 수가 없다. 운수나 도통에 시한부가 있다고들 말하나 그것은 자멸행위이니라.”16하셨다. 그리고  “포덕하는 과정에서 시한부(時限附)의 이야기를 하여도 안 되며, 시대(時代)를 악용(惡用)하여도 안 됩니다.”17 라고 하셨다. 이처럼 도전님께서 분명히 밝혀 놓으신 말씀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신념인지 아니면 자신도 믿지 않으면서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인지 시한부를 논하는 사람이 있다.
  또한 자신이 옥황상제라 자칭하는 사람, 도전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사람, 도전님께서 자신의 몸에 응(應)하셨다고 하는 사람, 계시나 꿈에 도전님께서 자신에게 이러이러한 말씀을 하셨다고 하고, 그것이 진리인양 가르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수도인이 이러한 황당한 말을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참으로 안타깝고 한심한 일들이 현재도 발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3) 포덕과 성금
  도전님께서 포덕의 본질은 상제님의 사상을 널리 알리는 것으로 포덕을 통해 나 자신이 연성(煉性) 되고 연질(煉質)이 되는 과정을 거쳐 도통을 하기 위한 그릇을 만드는 것이고, 포덕은 수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 하셨다.18 하지만 포덕의 목적이 상제님의 사상을 널리 알리고, 수도하기 위한 방법임을 망각하고 단순히 호수를 늘리는 것이 포덕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우(愚)를 범하는 것이다. 그 결과 포덕을 하는 데 있어서 편법을 쓰거나 구차한 방법을 동원하여 덕화를 손상하고 대순진리회에 대한 이미지를 실추시켜 다른 방면의 포덕사업을 방해함으로써 종단 전체가 포덕에 어려움을 겪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다음으로 성금에 대한 부분은 『도헌』 제8조를 보면, “본부에 헌납하는 성금은 자진 성의에 의하여야 하고 일체의 권유와 강요를 받지 않는다.”고 되어 있다. 『대순지침』에도 “성은 어디까지나 자진 성이 되어야 하고 강요된 성금은 내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모두에게 화를 일으킨다.”고 하셨다. 그리고 『전경』을 살펴보면 어느 해 여름 천원(川原)에 계실 때 참외를 올리는 자가 있었으나 상제께서 잡수시지 않고 그대로 두셨는데 공우가 사사로이 한 개를 먹었더니 갑자기 설사가 나고 낫지 않으므로 할 수 없이 상제께 사유를 고하니 가라사대 그 아내가 주기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가져 왔으므로 살기가 붙어있었는데 그 살기를 맞았다고 하셨다.19
  결과적으로 무엇을 하든지 안 좋은 돈을 써서 원성을 사는 일이 있다면 안한 것만도 못하고 어떠한 방식으로든 간에 천지공사니까 다 끌어다 쓰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신념이지 양위 상제님과 도전님의 뜻과는 전혀 맞지 않는다.
 
 
3. 비판적 사고의 필요성
 
  이상에서 대순진리에 대한 잘못된 신념과 잘못된 교화의 몇몇 사례를 살펴보았다. 대순진리회에서 도통을 하기 위해서는 수도를 해야 하고, 수도를 하기 위해서는 수도를 하기 위한 법방(法方)이 필요하다. 그 법방은 어느 누가 지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직 도주님에 의해 만들어지고 도전님에 의해 계승된 것이다. 신을 보거나, 신을 보게 한다든가, 척(慼) ·마(魔)를 풀어준다는 행위, 공사를 보고 다닌다는 행위, 조상 해원식 등 신명의 원을 풀어주는 행위 등은 난법(亂法)이다. 그리고 도주님이나 도전님을 빙자하여 비밀리에 자기 혼자 어떤 특별한 법을 받은 것인양 주장하며 행세하고 다닌다면, 그것은 천자를 도모하는 행위이다. 『대순지침』에도 삿된 방법을 감행하는 것은 욕심을 앞세우기 때문에 정기(正氣)는 물러가고 사기가 선동하여 허령(虛靈)이 되는 것20이라고 하셨다. 대순진리를 정각하고 올바르게 수도하여 도통을 받기 위해서는 교화자의 교화에 대하여 신중히 생각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할 것이다.
  대순진리에 대한 위교의 일차적 책임은 당연히 진리를 왜곡하여 교화한 교화자(敎化者)에게 있다. 일종의 신념에 지나지 않는, 그것도 잘못된 신념을 주입하는 것은 난법난도자를 만드는 결과를 낳음을 앞서 살펴보았다. ‘한 학생의 생애를 파멸시키는 데에는 한 사람의 교사면 족하다’라는 말이 있다. 그러므로 교화를 하는 사람은 교화 내용에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대순진리에 입각한 교화를 하고 사가 개입된 자신의 신념을 대순진리인양 교화해서는 안 된다.
  위교의 이차적인 책임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따르는 사람에게 있다. 도전님께서도 잘못된 행위를 하는 사람보다 그것을 옆에서 호응해 주는 사람의 잘못이 더 크다고 하셨다.21 위교나 잘못된 행위를 따르는 이유가 자신의 무지(無知)에 있든 계산에 의한 행동이든 이는 운수와 멀어지는 행위임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비판적 사고를 길러서 대순진리를 올바르게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요즘 학교 교육에서 논술에 대한 관심이 부쩍 커지고 있다. 이유는 비판적 사고를 길러주기 위함인데, 여기서 비판적 사고란 어떤 주장을 받아들일지 또는 거부할지 또는 유보할지를 주의 깊고 신중하게 결정하는 것과, 어떤 주장이 어디까지가 옳고 어디부터 그른지 하나하나 능동적이고 반성적으로 따져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비판적 사고의 결과 타인의 잘못을 비판할 수 있다. 그러나 비판적 사고는 타인의 잘못을 비판하는 데에만 급급한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장점을 칭찬할 수도 있으며, 나아가 대안을 제시하고, 더불어 자기 자신의 장단점을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게 하는 사고이다. 이러한 비판적 사고를 ‘비판하는 사고’라고 비판하는 것은 무비판적이다.22 누군가가 비판받을 일을 하는데 이를 무비판적 사고를 통해 받아들이고 따르는 사람은 비판받을 일을 한 사람보다 더 큰 책임이 있다고 할 것이다.
 
 
4. 나가면서
 
  교육(敎育)의 사전적 의미는 ‘지식과 기술 따위를 가르치며 인격을 길러 주는’ 것이다.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뒷받침하는 증거(證據)가 확실해야 한다. 그런데 증거가 없는 것을 증거가 있는 것처럼 가르치거나, 증거의 정도가 보잘 것 없는데 대단한 증거가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 일종의 신념에 지나지 않는 것을 주입하는 것을 위교라 할 수 있다. 위교의 전형적인 예를 들면, 허위의 지식을 참인 것처럼 가르칠 때, 증거나 이유에 대한 이해 없이 맹목적으로 지식을 주입시킬 때, 주체적이며 비판적인 사고능력을 위축시키려는 의도에 의해 가르칠 때를 들 수 있다. 위교를 행하는 대부분의 교수나 교사의 경우 이러한 세 가지 경우가 동시에 진행된다. 위교를 저지르는 사람이나 이를 따르는 사람들의 특징 중에 하나는 확증편향(確證偏向)의 오류에 빠진다는 것이다. 자신의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을 나타낸다.
  마찬가지로 대순진리에 대해 올바른 교화가 진행되지 않는 방면의 경우 학교교육에서 벌어지는 위교의 사례와 비슷하다. 대순진리가 아니거나 비슷한 것을 대순진리인 것처럼 가르칠 때, 증거나 이유에 대한 이해 없이 맹목적으로 자신의 교화를 주입시키고자 할 때, 주체적이며 비판적인 사고능력을 위축시키려는 의도에 의해 교화할 때를 들 수 있다. 특히 방면의 최고의 위치에 있는 선감이 자신의 지위를 앞세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대순진리 일부를 교묘히 해석하여 위교를 저지르는 경우 심각한 결과를 초래함을 앞서 살펴보았다.
  교화란 대순진리를 전하여 사람이 가야 할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을 말한다. 즉 사람이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도리를 가르치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떠한 명분을 내세워 교화를 할 때 그 명분 뒤에 감춰진 의도, 즉 그 마음에 욕심이나 잘못된 신념으로 교화할 수 있으므로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보아야 한다. 무비판적 사고는 많은 문제점을 낳고 자신의 운수와도 직결되므로 비판적 사고를 가지고 교화를 받아 들여야 한다. 그리고 교화는 사(私)를 떠난 공(公)의 자리에서 이루어지므로 교화자(敎化者)는 지성(知性)과 인격(人格), 심성(心性)과 언행(言行), 처사(處事) 등에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겸(兼)하여 ‘한 학생의 생애를 파멸시키는 데에는 한 사람의 교사면 족하다’라는 말을 교화자는 가슴깊이 새기고 대순진리를 올바르게 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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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조화태, 『교육철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출판부, 2012, p.239.
02 [네이버 지식백과] 위교[indoctrination, 僞敎] (교육학 용어사전, 1995. 6. 29, 하우동설)
03 연합뉴스 2013년 1월 3일.
04 『대순지침』, p. 44.
05 『대순지침』, p. 97.
06 교법 3장 4절.
07 백경언, 「대순진리회 교화에 관한연구」, 대진대학교 대순종학과 석사논문, 2012.
08 『대순지침』, p.77.
09 진보주의 교육철학을 철학적 바탕 위에서 체계화시킨 실용주의 철학자.
10 조화태, 『교육철학』,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출판부, 2012, p.214.
11 『대순지침』, p. 17.
12 『대순지침』, p. 19.
13 『대순회보』 86호, 「지남거」
14 교법 3장 12절.
15 『대순회보』 86호, 「지남거」
16 『대순지침』 p.38.
17 『대순회보』 9호. p.2.
18 1995년 2월 5일 훈시 참조.
19 제생 39절. 참조.
20 『대순지침』, p.40.
21 1991년 2월 20일 훈시.
22 김광수, 『비판적 사고』, 철학과현실사, 2007.
 

대순회보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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