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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古名將 전봉준 解冤한 피노리(避老里)「全北 순창군」

교무부    2017.01.26    읽음 :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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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古名將 전봉준 解冤한 피노리(避老里)「全北 순창군」


              

              
  순창군의 북서쪽 국사봉(655m) 아래 산 능선을 따라 한 마을이 모여 있는데 그 동리명은 피노리(避老里)이다. 피노리라는 지명의 유래는 노론(老論)을 피해서 온 소론(小論)들이 이곳에 정착했기 때문에 생겼다 한다. 그러나 필자가 피노리에 대해 관심을 두는 것은 당쟁으로 인해 소론들이 이곳에 정착한 사실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근대사에 있어서 이 동리에 있었던 역사적 사실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의 크나큰 전환기인 구한말에 큰 사건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1895년에 있었던 「갑오동학농민혁명(甲午東學農民革命)」이었다. 당시에 고부지역에서 탐관오리의 탐학과 횡포가 날로 극심해지자 백성의 울분과 분노는 극치에 달했고 이에 전봉준은 격분을 누를 길이 없어 세상을 개혁하고자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을 기치로 분연히 일어났다.  
  전봉준은 「포고문」에서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기 때문에 백성이 쇠잔하면 나라도 멸망하게 된다. 도리가 바로 잡혀져야 천하가 태평성세케 된다』고 했다. 이러한 내용은 당시 정세를 정확히 통찰한 올바른 주장이었다. 또한 「격문」에서도 『우리가 의(義)를 들어 이에 이름은 그 본의가 결단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고 창생을 도탄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위에 두고자 함이라』고 밝힌 것처럼 오직 동학농민혁명의 뜻은 보국안민에 있었다. 동학의 물결은 당시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또한 그 기운이 전 세계에 미쳤으니 비록 그 개혁하고자 하는 바가 눈에 보이는 측면에서는 실패로 끝났지만 보이지 않는 측면에서는 오늘날까지 그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또한 동학난은 갑오년에 있었던 동학군의 폐정개혁과 신앙의 자유를 위한 민권운동으로 시작되어 불법 무도한 왜군의 노골적인 침략행위를 막고 그들을 몰아내기 위한 항왜전쟁을 감행함으로써 우리나라 근세사상적으로 볼 때 일반 서민층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민권, 민족구국운동의 효시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상제님께서는 『전명숙은 천하에 난을 동케 하였느니라.』(교법 3장 30절)고 밝히셨다. 그러나 난을 동케한 전봉준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고 말았으니 체포 당시의 일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전봉준은 갑오년 11월 27일의 태인 전투를 끝으로 수행원 몇 명과 함께 29일 입암산성에 들어가 그날 밤을 지내고 왜군이 추격한다는 소식을 듣자 30일에는 동쪽으로 20리 떨어진 백양사로 옮겼다. 다음날 곧 12월 1일 이곳을 떠난 김개남의 은신처로 찾아가던 도중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에 이르러 날이 어두워지므로 옛 친구 김경천의 집으로 찾아들었다. 그러나 전봉준을 맞아들인 김경천은 이웃에 사는 전주감영 출신의 한신현에게 밀고했다. 한신현은 동네사람 김영철, 정창욱 등 몇 사람을 동원하여 포위하고 체포하니 바로 12월 2일(陽12월 28일)이었다. 그 뒤 순창을 거쳐 담양의 일본군에 인계되어 나주, 전주를 경유 12월 18일 서울에 도착하여 일본 영사관 감방에 수감되었다.』 위에 기록된 사실을 간단히 생각한다면 전봉준은 친구의 배신에 의하여 실패했다고 볼 수 있으나 상제님의 말씀을 근거로 해서 본다면 그가 농암에 묻혀 있는 큰 기운을 쓰지 못하여 된 것이니 이와 관련된 말씀을 보기로 하자. 『상제께서 순창 농암 박장근의 집에 가셔서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곳에 큰 기운이 묻혀 있으니 이제 그 기운을 내가 풀어 쓰리라. 전명숙과 최익현이 있었으되 그 기운을 쓸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여 동학이 성공하지 못하였느니라」고 하셨도다.』(공사 1장 27절) 

  상제께서는 전명숙의 못 다한 뜻을 들어주시기 위하여 농암에 응기 되어 있는 기운을 풀어쓰시고 그에게 사명을 주어 원을 풀게 하셨으며 또한 조선명부(공사 1장 7절)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 전명숙에 대한 해원공사는 다음과 같다. 『상제께서 사명기(司命旗)를 세워 전명숙과 최수운의 원을 풀어 주셨도다. 상제께서 피노리 이화춘의 집에 이르셔서 그에게 누런 개 한 마리를 잡고 술 한 동이를 마련하게 하고 뒷산의 소나무 숲에서 가장 큰 소나무 한 그루와 남쪽 양달에 있는 황토를 파오게 하고 백지 넉 장을 청, 홍, 황의 세 색깔로 물들여서 모두 잇고 베어 온 소나무의 한 윗가지에 달게 하고 백지 석장에 각각 시천주를 쓰고 그 종이 석장에 황토를 조금씩 싸서 함께 잇고 또 소나무 가지에 달고 그 나무를 집 앞에 세우시니 마치 깃대와 같은지라.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곳에서 전명숙이 잡혔도다. 그는 사명기가 없어서 포한(抱恨)하였나니 이제 그 기를 세워주고 해원케 하노라.」다시 상제께서 사명기 한 폭을 지어 높은 소나무 가지에 달았다가 떼어 불사르시고 최 수운을 해원케 하셨도다.』(공사 3장 2절) 크나큰 포부를 지니고 천하에 난을 동케 했던 전명숙은 비록 그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다행히 상제님께서 「백의한사로 일어나 천하를 움직인 만고명장」이라 하시고 해원시켜주셨으며 그가 살아서 이루려했던 「보국안민」의 소원을 이룰 수 있도록 조선명부를 주장하게 하셨다. 이러한 공사는 한 개인의 막힌 기운을 풀어준다는 의미도 있지만 크게는 새로이 조선명부의 주장자로 전명숙을 정함으로써 천하에 「제폭구민」「보국안민」「五萬年受運」의 깃발을 휘날리게 하는 점도 간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41세로 최후를 마치면서 전봉준은 나라를 위하는 마음에서 다음과 같은 유시(遺時)를 남겼다. 『時來天地皆同力 運去英雄不自謨 愛民正義我無失 爲國丹心誰有知』(때 만나서는 천지도 내편이러니. 운 다하니 영웅도 할 수 없는 것. 백성 사랑하는 마음 무슨 허무이더냐. 나라향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리.)

《대순회보》 3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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