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통계승
종통계승
대순진리회는 강증산(姜甑山, 1871~1909) 상제님께서 강세하여 천지대도를 펴신 데에 그 시원을 두고 있다. 상제님께서 화천(化天)하신 후, 계시를 받아 종통을 세우신 조정산(趙鼎山, 1895~1958) 도주님께 연원(淵源)의 맥이 이어지고, 도주님 화천 당시 유명(遺命)으로 종통을 계승하신 박우당(朴牛堂, 1917~1995) 도전님께 연원의 맥이 이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종통(宗統)은 한 종파의 계통이나 법통을 의미한다. 대순진리회의 종통은 상제님, 도주(道主)님, 도전(都典)님으로 연원의 맥이 이어지는 천부적인 신성성과 연속성으로서 도(道)의 생명이며 진리이다. 이 종통이 바르지 못하면 법이 있을 수 없고 경위가 바로 설 수 없으며, 그 속에서는 생명이 움트거나 만물 만상을 이루어낼 수 없다. 대순진리회는 조정산 도주님께서 만주 봉천(奉天)에서 강증산 상제님으로부터 종통계승(宗統繼承)의 계시를 받으신 데서 비롯하였다. 상제님의 계시와 봉서를 받아서 종통을 세우신 도주님께 연원의 맥(脈)이 이어졌고, 이는 다시 유명으로 종통을 계승하신 박우당 도전님께 이어졌다. 이 연원의 맥은 바꿀 수도 고칠 수도 없는 것이다. 이처럼 대순진리회의 종통은 상제님-도주님-도전님으로 이어지는 계보를 뜻한다.
도전님께서 “본도의 연원(淵源)은 상제님의 계시(봉서)를 받으셔서 종통을 세우신 도주님으로부터 이어 내려왔다”(대순지침, 14쪽) 라고 하셨다. 연원의 한자는 못 연(淵), 근원 원(源)으로 사물의 근원을 뜻한다. 천지의 이치가 일육수(一六水)에 근원하니, 복희(伏羲) 때는 용마(龍馬)가 황하(黃河)에서 하도(河圖)를 지고 나와 거기에서 천지의 이치를 깨달았고, 우(禹)임금 때는 신구(神龜)가 낙수(洛水)에서 낙서(洛書)를 지고 나와 거기에서 천리(天理)를 깨달았다. 진표율사가 금산사(金山寺)의 용추(龍湫) 못을 숯으로 메우고 솥[鼎] 위에 미륵불[甑]을 모셔놓은 것은 증산ㆍ정산 양산의 진리를 암시하여 도의 근원을 밝혀 놓은 것이다. 양위 상제님의 진리도 물에서 나왔기 때문에 연원이라고 하며, 상제님과 도주님, 도전님으로 이어지는 종통이 도의 근원이 된다. 대순진리가 연원에서 시작하고 수도의 목적인 도통 또한 연원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에 연원도통(淵源道通)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순진리회는 신앙의 대상인 구천상제님께서 인간의 모습을 빌어 강세(降世)하여 천지대도를 펴신 데에 그 시원을 두고 있다. 천도(天道)와 인사(人事)의 상도(常道)가 무너져 삼계(三界)가 진멸할 지경에 이르자 원시의 모든 신성ㆍ불ㆍ보살들이 구천에 계시던 상제님께 하소연하였다. 이에 따라 천하를 대순(大巡)하신 상제님께서는 전주 모악산 금산사 삼층전 미륵금불에 임하여 30년을 계시다가 최수운에게 세상을 구할 큰 도[濟世大道]를 계시하셨다. 그러나 최수운이 유교의 폐습으로 인해 대도(大道)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자, 1871년 9월 19일에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현재의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신송마을)에 강세하시게 된다. 인류와 신명계의 겁액을 풀어주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강세하신 상제님의 성은 진주(晉州) 강(姜)씨이고, 존휘는 일순(一淳)이며, 존호는 증산(甑山)이시다.
상제님께서는 조선 말기에 극도로 악화된 종교적ㆍ정치적ㆍ사회적 도탄기를 당하여 음양합덕ㆍ신인조화ㆍ해원상생ㆍ도통진경의 대순진리에 의한 종교적 법리(法理)로 인간을 개조하면 정치적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사회적 지상천국이 자연히 실현되어 창생을 구제할 수 있다는 전무후무한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셨다. 그리고 천지도수(天地度數)를 바로잡으시고 삼계를 개벽하여 후천의 무궁한 선경(仙境)을 열기 위한 대역사인 천지공사(1901~1909)를 단행하신 후 화천(化天)하셨다.
상제님께서 대순하신 진리는 종통을 계승하신 도주님에 의해 밝혀지고 체계화되었다. 도주님께서는 1895년 12월 4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현재의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산리 회문마을)에서 탄강하셨으며, 성은 함안(咸安) 조씨(趙氏)이고, 존휘는 철제(哲濟)이며, 존호는 정산(鼎山)이시다.
도주님께서는 15세가 되시던 해인 1909년 4월 28일 만주 봉천(奉天) 지방으로 망명하여 동지들과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도력(道力)으로 구세제민(救世濟民)할 뜻을 정하고 입산수도에 진력하셨다. 그러다가 9년의 공부 끝인 1917년에 상제님의 삼계대순(三界大巡)의 진리를 감오득도(感悟得道)하시고 종통계승의 계시를 받으셨다. 도주님께서 만주 봉천에서 23세 시에 득도하심은 태을주(太乙呪)로 본령합리(本領合理)를 이룬 것이며, 전경의 “12월 26일 재생신(再生身)”은 12월 4일로 1년 운회의 만도(滿度)를 채우실 도주님의 탄강을 뜻한다. 이것을 여합부절(如合符節)한 천부적 종통계승이라고 한다.
1917년 4월, 도주님께서는 가족들과 함께 만주를 떠나 뱃길로 귀국길에 오르셨다. 도중에 풍랑을 만나 서산 태안을 거쳐 안면도에 이르신 도주님께서는 이 섬에 우일재(宇一齋)를 마련하여 공부하셨다. 다음 해인 1918년 가을, 도주님께서는 “김제 원평으로 가라”는 상제님의 계시를 받고 원평으로 가서 동곡약방(銅谷藥房)을 방문하셨다. 이 길은 상제님께서 9년 동안 이룩하신 공사를 따라 밟으신 것이다. 도주님께서 1919년 정월 보름, 정읍 마동(馬洞) 김기부의 집에서 대사모님(상제님의 모친)과 상제님의 누이동생인 선돌부인 그리고 따님 강순임을 만나셨다. 선돌부인은 도주님을 반겨 맞으며 “오라버니께서 을미생(乙未生)이 정월 보름에 찾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아뢰면서 봉서(封書)를 도주님께 올렸다. 봉서 안에는 상제님께서 친필로 쓰신 현무경과 주문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1919년 9월, 상제님께서 동곡약방에 비치하셨던 둔궤(遁櫃)를 차경석의 보천교 본부(정읍 대흥리)에서 찾아 정읍 통사동 이준세의 재실(齋室)로 옮기셨고, 1921년 9월에는 상제님의 성골(聖骨)을 김제 동곡마을 초빈지(草殯地)에서 이곳 재실로 모셔왔다.
도주님께서는 1925년에 전북 구태인 도창현(道昌峴)에 도장을 마련하고 무극도(无極道)를 창도(創道)하셨다. 이때 상제님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上帝)’로 봉안하고 종지와 신조 및 목적을 정하셨다. 무극도 건립 후에는 상제님께서 짜놓으신 도수(度數)에 의한 공부와 포교에 힘을 기울이셨다. 이로부터 도인의 수가 많이 늘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무극도는 일제의 종교단체해산령에 의해 탄압을 받아오다가 1941년에 강제 해산을 당하게 된다. 도주님께서 전국 명산대천을 다니며 도수에 의한 공부를 하시다가 1945년 해방이 되자 종교 활동을 재개하셨다. 1948년에 도본부(道本部)를 부산으로 옮기신 후, 1950년에 도명(道名)을 태극도(太極道)로 바꾸고 포덕과 교육 및 구호자선사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다. 1957년 11월에는 도인의 각종 수도방법과 의식행사 및 준칙 등을 마련하시고, 시학ㆍ시법 공부를 처음으로 시행하신 뒤 이듬해에 화천하셨다. 이처럼 도주님께서는 15세에 봉천명하신 이후 64세에 화천하실 때까지 50년 동안 상제님께서 짜놓으신 도수를 풀어나가셨다. 또한, 상제님께서 대순하신 진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하셨고, 도인들의 수도와 도통을 위한 법방(法方)을 마련하셨다.
박우당 도전님께서는 1917년 11월 30일 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에서 탄강하셨으며, 성은 죽산(竹山) 박씨(朴氏)이고, 존휘는 한경(漢慶)이며, 존호는 우당(牛堂)이시다. 30세가 되던 1946년 1월 15일 도문(道門)에 들어오셨고, 1957년에 도주님으로부터 ‘우당(牛堂)’이라는 호를 받으셨다. 도전님께서는 1958년 2월에 도주님으로부터 도를 이끌어 나가는 최고 직책인 도전(都典)에 임명되셨다. 이 ‘도전’은 도주님을 시봉하는 직책이 아니라 종통을 계승하는 도의 최고 책임자의 자리이다. 도주님께서는 화천하시던 날(1958년 3월 6일) 미시(未時)에 방 밖에 간부들을 시립시키고, 도전님 한 분만 방안으로 불러 도의 운영 전반에 대한 당부 사항을 세세히 전하셨다. 그리고 “오십년공부종필(五十年工夫終畢)이며 지기금지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가 금년이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행하여 오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고 말씀하고 화천하셨다. 도전님께서 유명(遺命)으로 종통을 계승하신 사실은 ‘공포사항’으로 전 도인들에게 알려졌다.
도전님께서는 1958년에 종통을 계승하신 후, 태극도에서 10년간 도주님의 유업(遺業)을 받들다가 도수에 따라 감천도장에서 서울로 이궁(離宮)하셨다. 그리고 1969년 4월에 종단의 전반적인 기구를 개편하고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셨다. 이후 30년이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여주본부도장, 중곡도장, 포천수도장, 금강산 토성수련도장, 제주수련도장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회관 및 회실 등을 건립하셨다. 또한, 구호자선사업, 사회복지사업, 교육사업의 3대 중요사업을 연차적 계획에 따라 시행하여 사회발전에 이바지하셨다. 이처럼 도전님께서는 양위 상제님의 유지(遺志)와 유법(遺法)을 받들어 종단을 도의 법방과 체계에 따라 영도(領導)하신 후, 1995년 12월 4일(양력 1996년 1월 23일)에 화천하셨다. 강증산 상제님께서는 삼계대순 개벽공사를 통하여 후천 5만 년의 지상선경을 건설할 설계도를 짜놓으셨다. 계시로써 종통을 계승한 조정산 도주님께서는 50년 공부종필로써 종단의 체계와 법방을 마련하셨다. 도주님의 유명으로 종통을 이어받은 박우당 도전님께서는 대순진리회를 창설하고 모든 도인이 대순진리(大巡眞理)에 의한 수도를 완성할 수 있도록 도장을 건립하시고 연차적 계획에 따라 종단의 사업을 시행하여 지상천국 건설의 토대를 마련하셨다. 이와 같은 종통계승에 의해 도인들은 진법(眞法)에 의한 수도와 천하창생을 살리기 위한 천지공정(天地公庭)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도전님께서 “본도의 연원(淵源)은 상제님의 계시(봉서)를 받으셔서 종통을 세우신 도주님으로부터 이어 내려왔다”(대순지침, 14쪽) 라고 하셨다. 연원의 한자는 못 연(淵), 근원 원(源)으로 사물의 근원을 뜻한다. 천지의 이치가 일육수(一六水)에 근원하니, 복희(伏羲) 때는 용마(龍馬)가 황하(黃河)에서 하도(河圖)를 지고 나와 거기에서 천지의 이치를 깨달았고, 우(禹)임금 때는 신구(神龜)가 낙수(洛水)에서 낙서(洛書)를 지고 나와 거기에서 천리(天理)를 깨달았다. 진표율사가 금산사(金山寺)의 용추(龍湫) 못을 숯으로 메우고 솥[鼎] 위에 미륵불[甑]을 모셔놓은 것은 증산ㆍ정산 양산의 진리를 암시하여 도의 근원을 밝혀 놓은 것이다. 양위 상제님의 진리도 물에서 나왔기 때문에 연원이라고 하며, 상제님과 도주님, 도전님으로 이어지는 종통이 도의 근원이 된다. 대순진리가 연원에서 시작하고 수도의 목적인 도통 또한 연원에 의해 이뤄지기 때문에 연원도통(淵源道通)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순진리회는 신앙의 대상인 구천상제님께서 인간의 모습을 빌어 강세(降世)하여 천지대도를 펴신 데에 그 시원을 두고 있다. 천도(天道)와 인사(人事)의 상도(常道)가 무너져 삼계(三界)가 진멸할 지경에 이르자 원시의 모든 신성ㆍ불ㆍ보살들이 구천에 계시던 상제님께 하소연하였다. 이에 따라 천하를 대순(大巡)하신 상제님께서는 전주 모악산 금산사 삼층전 미륵금불에 임하여 30년을 계시다가 최수운에게 세상을 구할 큰 도[濟世大道]를 계시하셨다. 그러나 최수운이 유교의 폐습으로 인해 대도(大道)의 참뜻을 밝히지 못하자, 1871년 9월 19일에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현재의 전라북도 정읍시 덕천면 신월리 신송마을)에 강세하시게 된다. 인류와 신명계의 겁액을 풀어주기 위해 인간의 몸으로 강세하신 상제님의 성은 진주(晉州) 강(姜)씨이고, 존휘는 일순(一淳)이며, 존호는 증산(甑山)이시다.
상제님께서는 조선 말기에 극도로 악화된 종교적ㆍ정치적ㆍ사회적 도탄기를 당하여 음양합덕ㆍ신인조화ㆍ해원상생ㆍ도통진경의 대순진리에 의한 종교적 법리(法理)로 인간을 개조하면 정치적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사회적 지상천국이 자연히 실현되어 창생을 구제할 수 있다는 전무후무한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셨다. 그리고 천지도수(天地度數)를 바로잡으시고 삼계를 개벽하여 후천의 무궁한 선경(仙境)을 열기 위한 대역사인 천지공사(1901~1909)를 단행하신 후 화천(化天)하셨다.
상제님께서 대순하신 진리는 종통을 계승하신 도주님에 의해 밝혀지고 체계화되었다. 도주님께서는 1895년 12월 4일,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현재의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산리 회문마을)에서 탄강하셨으며, 성은 함안(咸安) 조씨(趙氏)이고, 존휘는 철제(哲濟)이며, 존호는 정산(鼎山)이시다.
도주님께서는 15세가 되시던 해인 1909년 4월 28일 만주 봉천(奉天) 지방으로 망명하여 동지들과 독립운동에 힘쓰다가 도력(道力)으로 구세제민(救世濟民)할 뜻을 정하고 입산수도에 진력하셨다. 그러다가 9년의 공부 끝인 1917년에 상제님의 삼계대순(三界大巡)의 진리를 감오득도(感悟得道)하시고 종통계승의 계시를 받으셨다. 도주님께서 만주 봉천에서 23세 시에 득도하심은 태을주(太乙呪)로 본령합리(本領合理)를 이룬 것이며, 전경의 “12월 26일 재생신(再生身)”은 12월 4일로 1년 운회의 만도(滿度)를 채우실 도주님의 탄강을 뜻한다. 이것을 여합부절(如合符節)한 천부적 종통계승이라고 한다.
1917년 4월, 도주님께서는 가족들과 함께 만주를 떠나 뱃길로 귀국길에 오르셨다. 도중에 풍랑을 만나 서산 태안을 거쳐 안면도에 이르신 도주님께서는 이 섬에 우일재(宇一齋)를 마련하여 공부하셨다. 다음 해인 1918년 가을, 도주님께서는 “김제 원평으로 가라”는 상제님의 계시를 받고 원평으로 가서 동곡약방(銅谷藥房)을 방문하셨다. 이 길은 상제님께서 9년 동안 이룩하신 공사를 따라 밟으신 것이다. 도주님께서 1919년 정월 보름, 정읍 마동(馬洞) 김기부의 집에서 대사모님(상제님의 모친)과 상제님의 누이동생인 선돌부인 그리고 따님 강순임을 만나셨다. 선돌부인은 도주님을 반겨 맞으며 “오라버니께서 을미생(乙未生)이 정월 보름에 찾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아뢰면서 봉서(封書)를 도주님께 올렸다. 봉서 안에는 상제님께서 친필로 쓰신 현무경과 주문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1919년 9월, 상제님께서 동곡약방에 비치하셨던 둔궤(遁櫃)를 차경석의 보천교 본부(정읍 대흥리)에서 찾아 정읍 통사동 이준세의 재실(齋室)로 옮기셨고, 1921년 9월에는 상제님의 성골(聖骨)을 김제 동곡마을 초빈지(草殯地)에서 이곳 재실로 모셔왔다.
도주님께서는 1925년에 전북 구태인 도창현(道昌峴)에 도장을 마련하고 무극도(无極道)를 창도(創道)하셨다. 이때 상제님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上帝)’로 봉안하고 종지와 신조 및 목적을 정하셨다. 무극도 건립 후에는 상제님께서 짜놓으신 도수(度數)에 의한 공부와 포교에 힘을 기울이셨다. 이로부터 도인의 수가 많이 늘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무극도는 일제의 종교단체해산령에 의해 탄압을 받아오다가 1941년에 강제 해산을 당하게 된다. 도주님께서 전국 명산대천을 다니며 도수에 의한 공부를 하시다가 1945년 해방이 되자 종교 활동을 재개하셨다. 1948년에 도본부(道本部)를 부산으로 옮기신 후, 1950년에 도명(道名)을 태극도(太極道)로 바꾸고 포덕과 교육 및 구호자선사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다. 1957년 11월에는 도인의 각종 수도방법과 의식행사 및 준칙 등을 마련하시고, 시학ㆍ시법 공부를 처음으로 시행하신 뒤 이듬해에 화천하셨다. 이처럼 도주님께서는 15세에 봉천명하신 이후 64세에 화천하실 때까지 50년 동안 상제님께서 짜놓으신 도수를 풀어나가셨다. 또한, 상제님께서 대순하신 진리를 체계적으로 정립하셨고, 도인들의 수도와 도통을 위한 법방(法方)을 마련하셨다.
박우당 도전님께서는 1917년 11월 30일 충청북도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에서 탄강하셨으며, 성은 죽산(竹山) 박씨(朴氏)이고, 존휘는 한경(漢慶)이며, 존호는 우당(牛堂)이시다. 30세가 되던 1946년 1월 15일 도문(道門)에 들어오셨고, 1957년에 도주님으로부터 ‘우당(牛堂)’이라는 호를 받으셨다. 도전님께서는 1958년 2월에 도주님으로부터 도를 이끌어 나가는 최고 직책인 도전(都典)에 임명되셨다. 이 ‘도전’은 도주님을 시봉하는 직책이 아니라 종통을 계승하는 도의 최고 책임자의 자리이다. 도주님께서는 화천하시던 날(1958년 3월 6일) 미시(未時)에 방 밖에 간부들을 시립시키고, 도전님 한 분만 방안으로 불러 도의 운영 전반에 대한 당부 사항을 세세히 전하셨다. 그리고 “오십년공부종필(五十年工夫終畢)이며 지기금지사월래(至氣今至四月來)가 금년이다. 나는 간다. 내가 없다고 조금도 낙심하지 말고 행하여 오던 대로 잘 행해 나가라”고 말씀하고 화천하셨다. 도전님께서 유명(遺命)으로 종통을 계승하신 사실은 ‘공포사항’으로 전 도인들에게 알려졌다.
도전님께서는 1958년에 종통을 계승하신 후, 태극도에서 10년간 도주님의 유업(遺業)을 받들다가 도수에 따라 감천도장에서 서울로 이궁(離宮)하셨다. 그리고 1969년 4월에 종단의 전반적인 기구를 개편하고 대순진리회를 창설하셨다. 이후 30년이 안 되는 짧은 기간에 여주본부도장, 중곡도장, 포천수도장, 금강산 토성수련도장, 제주수련도장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회관 및 회실 등을 건립하셨다. 또한, 구호자선사업, 사회복지사업, 교육사업의 3대 중요사업을 연차적 계획에 따라 시행하여 사회발전에 이바지하셨다. 이처럼 도전님께서는 양위 상제님의 유지(遺志)와 유법(遺法)을 받들어 종단을 도의 법방과 체계에 따라 영도(領導)하신 후, 1995년 12월 4일(양력 1996년 1월 23일)에 화천하셨다. 강증산 상제님께서는 삼계대순 개벽공사를 통하여 후천 5만 년의 지상선경을 건설할 설계도를 짜놓으셨다. 계시로써 종통을 계승한 조정산 도주님께서는 50년 공부종필로써 종단의 체계와 법방을 마련하셨다. 도주님의 유명으로 종통을 이어받은 박우당 도전님께서는 대순진리회를 창설하고 모든 도인이 대순진리(大巡眞理)에 의한 수도를 완성할 수 있도록 도장을 건립하시고 연차적 계획에 따라 종단의 사업을 시행하여 지상천국 건설의 토대를 마련하셨다. 이와 같은 종통계승에 의해 도인들은 진법(眞法)에 의한 수도와 천하창생을 살리기 위한 천지공정(天地公庭)에 동참할 수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