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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면도 기행
9월 29일 어둠이 가시지 않는 이른 새벽 5시30분 종무원장을 비롯한 이사장 선감, 교감 등 4백37명의 임원은 승용차 7대와 대형버스11대에 분승하여 도전님을 모시고 도주님께서 만주 봉천에서 득도하시고 고국으로 돌아오실 때 처음으로 정착하신 충남태안 안면도로 향하였다.
언제나 도전님을 모시고 나갈 때는 자식이 부모님을 모시고 나가는 것과 같이 기쁘고 즐거운 마음이다. 꼭 소풍 가는 어린아이의 마음과 같다고 할까. 차량을 스치는 새벽 안개 속을 헤치고 천안회관(천안시 다가동)에 도착하니 7시경이었다. 천안방면 도인들이 밤을 지세우며 정성 들여 준비한 아침식사를 마치고 다시 출발하여 가을의 황금들판을 바라보며 길가에 코스모스가 만발한 아산만과 삽교천을 거쳐 태안을 뒤로 하고 차는 달려 안면도로 향하였다.
安眠島는 글자 그대로 편안하게 잠시 쉬는 곳이다. 즉 도주님께서 만주봉천에서 계시에 의한 종통을 계승하시고 고국 땅을 처음 밟으신 곳이 크게 편안케 한 곳이라는 태안(泰安)이고 준비를 하기 위해 잠깐 쉬시었던 곳이 안면도인 것이다. 이 안면도와 육지를 연결하는 유일한 다리가 안면교였다. 안면교를 지나니 도로 포장공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비포장도로를 약 30분 가니 창기리가 나왔다. 창기리에서 “정풍기”란 83세 된 노인을 만났다. 이 노인으로부터 도주님께서 창기리에 계실 때의 사정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고, 또한 도주님의 간척사업과 염전사업 등에 대해서도 들었다. 즉 도주께서 토지를 해원하고 제민하고자 안면도와 원산도 두 섬에 간사지를 개척하셨으며 이 개척하신 안면도의 이십만평 농지와 원산도의 염전은 여러 마을 사람들을 어려움에서 구제하셨다고 한다. 도주님 가족들이 기거하던 집을 돌아보고는 도주님의 구국제민을 위하는 마음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도주님께서 만드신 농토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도주님의 덕을 기리고 있다고 한다.
창기리를 뒤로 하고 정당리 느락골로 향하였다. 이곳은 도주님께서 우일재를 마련하시고 공부를 하시던 곳이다. 우일재에 가니 건물은 없고 빈공터만이 남아 있었다. 다시 영복리에서 멀리 원산도를 바라보며 도주님께서 제민을 위하여 애쓰셨던 염전사업을 회상해 본다. 영복리에서 나와 개발중인 청포대 해변가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속에서 도주님께서 구국제민하신 뜻을 기리면서, 저 파도와 같이 끊임없는 우리의 성경신이 모든 일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다짐한다.
도전님을 모시고 기념촬영을 하였다. 3년전만 하여도 모두 함께 촬영하였는데 지금은 임원들이 많아서 외수선, 교감과 내수선, 교감들이 따로 촬영하였다. 온양에 들려 민속박물관에서 우리 선조들이 살아왔던 발자취를 더듬어 보고 도고에서 저녁을 먹고 때묻은 몸과 마음을 온천수로 씻어버리고 귀가길에 올랐다.
오늘 간 태안, 안면도가 도주님께서 구국제민하시기 위하여 귀국하신 첫 자리이다. 우리도 처음 입도하여 상제님을 모시는 정성스러운 마음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한다.
《대순회보》 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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