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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 와룡리(古阜 臥龍里)

교무부    2017.07.20    읽음 : 1870


본문

종단역사연구팀 

 

▲ 정읍시 정우면 회룡리 괴동 

 

  고부 와룡리 주변 일대에는 상제님을 따랐던 종도 문공신, 황응종, 신경수, 손병욱이 살고 있었다. 여러 종도들이 살았던 만큼 상제님의 행적 또한 적지 않을 것이다. 특히 그곳은 1907년 12월에 있었던 고부화액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고부 와룡리와 이곳에서의 상제님 행적을 살펴보고자 관련 자료들을 정리한 후 길을 나섰다. 

 

 

지명의 변천과 산세




  고부 와룡리는 현재 정읍시 정우면 회룡리 괴동의 남쪽에 있었던 마을이다. 『전경』에는 ‘와룡리’ 주변에 있는 ‘교동[교촌]’, ‘운산리’를 통칭해서 ‘와룡리’로 쓰고 있다.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행하실 때 이 지역은 ‘고부군(古阜郡) 벌미면(伐未面)’에 속했다가 1914년 ‘정읍군(井邑郡) 정토면(淨土面)’에 편입된 후, 1923년 우순면(雨順面)과 정토면(淨土面)이 합쳐지면서 현재 ‘정읍시(井邑市) 정우면(淨雨面) 회룡리(回龍里)’에 속해 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와룡리를 포함한 괴동(槐洞), 신기리(新基里), 정토리(淨土里), 교촌(校村), 수금면(水金面)의 규촌(閨村) 일부가 ‘회룡리(回龍里)’에 병합되었다. 회룡리는 고부 와룡리 주변을 감싸고 있는 정토산(淨土山: 고도 132m)이 조산(祖山)인 덕재산(德栽山)에서 빙 돌아 내려와 몸을 틀어 다시 조산을 바라보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을 이루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정읍시 정우면 회룡리와 옛 마을 위치 (출처: 다음지도)

 

  정우면 회룡리는 정읍시의 중부(中部)에 위치해 있으며, 동쪽으로는 운암호[옥정호]의 물이 칠보면 행단마을의 섬진강수력발전소를 거쳐 동진강을 따라 흐르고, 서쪽으로는 정읍천과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다.  

회룡리를 감싸고 있는 정토산은 정우면의 회룡리와 산북리, 수금리, 대사리에 걸쳐 있는 산으로, 봉우리 수에 맞춰 정토칠봉(淨土七峰)으로도 불렸다. 그리고 호남정맥에 속한 순창군 쌍치면의 고당산(高堂山)을 시작으로 정읍시의 칠보산(七寶山), 마태봉(馬太峰), 바둑이산, 덕재산과 지맥을 이룬다. 한편 정토산 중턱에는 고려 때 담운(曇雲) 선사가 창건하고 선조 때 진묵대사(震默大師, 1562~1633)가 중건하여 약사전(藥師殿)을 세웠다는 정토사(淨土寺)가 자리 잡고 있다.

  왠지 ‘정토(淨土)’라는 단어가 잠시 마음에 머문다. ‘정토’는 청정한 국토라는 의미로, 미래불로서 수행 중인 미륵보살이 대기하고 있는 천상의 도솔천을 ‘미륵(彌勒)의 정토’라고 하여 그 도솔천(兜率天)에 미륵보살이 태어났다고 하는 미륵신앙에서 사용되었다. 그리고 미륵신앙 이후 ‘정토’ 그 자체를 믿는 정토신앙이 중국에서 발전하면서 정토는 대승불교의 종교적 이상향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사용되었다. 

 


▲ 정읍시 정우면 회룡리의 괴동과 교촌 전경

 

 

회룡리에 들어서며

  차로 몇 시간을 달려 고부 와룡리와 가까운 태인 IC를 통과하였다. 다시 이동하여 정읍시 정우면 화천리를 거쳐 회룡리로 향했다. 회룡리로 들어가는 초입에 낮은 구릉지가 보였다. 낮은 구릉지 언덕길을 따라 오르니 왼편에 폐교된 회룡초등학교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여기서 잠시 회룡리 마을 주변 경관을 살펴보기로 했다. 뒤쪽으로는 지나온 정우면 화천리의 덕재산이, 앞쪽으로는 좌에서 우로 길게 뻗은 정토칠봉이 회룡리를 감싸고 있었다. 그런데 회룡리를 품고 있는 정토칠봉의 길게 뻗은 산의 형세가 마치 용이 땅에 누워 있는 와룡(臥龍)을 연상케 했다. 흔히 와룡은 앞으로 큰일을 할 사람이 아직 때를 만나지 못한 것에 비유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고부 와룡리 주변 일대의 상제님 행적과 이곳에 살았던 종도들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회룡초등학교에서 왼편으로 마을에 괴목(槐木)이 많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괴동이 있다. 그리고 초등학교에서 오른편으로 교촌[교동]이 있으며, 초등학교에서 큰길을 따라 계속 직진하면 정토칠봉의 고개 너머로 대사리(大寺里)가 있다. 우선 옛 와룡리 지역을 포함하고 있는 괴동으로 향했다. 교촌 사거리를 지나 괴동에 도착한 후, 종도들의 집 위치를 알아보기 위해 마을 분들을 만나 보았다. 종도 문공신과 황응종 그리고 손병욱은 후손들이 아직 마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집 위치를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종도 신경수의 경우 이곳에 후손이 없었는데, 다행히 괴동에 신씨(申氏)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집 위치를 대략 알아낼 수 있었다. 그래서 정토칠봉의 끝 봉우리 부근에 살림집도 없는 곳 주변의 토지대장을 확인하여 신경수의 집터를 찾을 수 있었다.  

 

 

문공신과 황응종의 집

  우선 문공신과 황응종의 집은 교촌 사거리에서 괴동 쪽으로 조금 가다 보면 도로와 인접한 곳에 있었다. 후손들의 증언을 통해 알게 된 두 종도의 집은 현재 밭으로 되어 있고 가까이 인접해 있었다. 건물의 흔적조차 없는 집터를 보고 많은 아쉬움이 남았다. 『전경』에는 두 종도의 집을 와룡리와 교동으로 표기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 두 종도의 집터가 괴동에 인접해 있으니, 과연 황응종의 집이 있는 이곳을 예전에 교동이라 했는지가 의심스러웠다. 다만 ‘이곳 두 종도의 집터가 옛 와룡리와 옛 교동의 경계 지역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 괴동의 문공신과 황응종 집터

 

  1907년 6월 일진회 회원이던 문공신, 황응종, 신경수 등이 상제님을 추종하였다.01 이들 중 문공신이 먼저 상제님과 인연을 맺었으며, 동료로서 같은 지역에 살고 있던 나머지 종도들이 자연스럽게 상제님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문공신은 일찍이 동학에 가입했는데 당시에는 일진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전경』에도 1907년 12월 문공신이 상제님의 명을 따라 자기 집에서 일진회의 간부 송대화를 치송(治送: 짐을 챙겨서 길을 떠나보냄)하고 오는 내용이 나온다.02 송대화(宋大和, 1858~1919)는 1893년 사발통문 거사계획에 참여하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고부의 전접주(前接主) 겸 대접주(大接主)로 활동한 인물이다. 그래서 문공신이 동학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한편 문공신과 손병욱은 상제님과 같은 연배였으나, 황응종과 신경수는 상제님의 부친과 같은 연배였으므로 상제님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다.  

  1907년 12월에 이르러 상제님께서는 고부 와룡리 주변 일대에서 여러 행적을 보이셨다. 우선 문공신의 집에서 만국 창생들의 새 생활법으로써 물품(物品)과 재화(財貨: 화폐)가 국가 또는 지역 간에 서로 오고 가게 하는 물화상통 공사를 보셨다.03 같은 시기 이곳에서 대전쟁 관련 공사, 문공신을 통해 후천에서의 음양 도수를 조정하는 공사, 동학신명들을 해원하기 위해 역도(逆度)를 조정하는 공사를 보셨다.04 동학신명들의 해원은 후일 차경석이 보천교 교주가 되어 스스로 차천자가 됨으로써 이루어진다. 또 고부화액을 당하시고 문공신에게 독조사 도수도 붙이셨다.05 한편 문공신은 1922년 섣달, 도수에 따라 도주님께서 통사동 재실에 모셔 놓은 상제님의 성골과 금품을 훔쳐가는 일을 벌이기도 하였다.06 

  1907년 12월 상제님께서는 황응종의 집에 방문하셔서 “북은 채가 있어야 하나니 수저가 북채라. 행군할 때 이 수저로 북채를 하여야 녹이 진진하여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며 북도수를 보셨다.07 1908년 여름에는 상제님께서 이곳에서 산하의 대운을 거둬들이는 공사도 보셨다.08 한편 황응종은 상제님을 따르기 전에 객망리 강씨가(姜氏家)에 딸을 시집보낸 적이 있었다. 그래서 객망리 강씨 문중 사람들과 친분이 있었다. 이처럼 상제님께서는 두 종도의 집에서 여러 공사와 도수를 보셨다.

 


▲ 괴동에 있는 손병욱의 집

 

 

손병욱의 집 

  손병욱의 집은 후손이 괴동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 위치를 알 수 있었다. 문공신의 집터에서 도로를 따라 괴동 쪽으로 가다 보면 도로와 인접한 곳에 있었다. 현재 그 집에는 종손이 살고 있었으며 초가를 현대식으로 개량한 듯한 집이었다. 그리고 앞마당에는 넓은 텃밭도 있었다. 그나마 다른 종도들에 비해 옛 자취를 느낄 수 있어서 다행스러웠다. 

  1908년 여름 상제님께서 손병욱의 집에 계실 때 그의 부인이 상제님에 대한 믿음을 방해하려고 했다. 그러자 신명들이 손병욱의 부인을 없애려고 하는 것을 상제님께서 아시고 구해주시면서 “이 뒤로는 잉태를 못하리라”고 하셨다.09 손씨 집안의 족보에 의하면 상제님을 믿고 따랐던 손병욱(1870년생)은 두 아들(1899년생, 1903년생)을 두었는데, 1908년 이후로 자식이 없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집 부근에서는 부모님께 효성이 지극했던 손병욱 종도의 효자비(孝子碑)도 볼 수 있었다. 

 

 

와룡리 네거리

 


▲ 1924년 조선총독부에서 제작한 <정읍> 근대지도의 정토면 회룡리 지역

 

  종도들의 집 위치를 알기 전까지 『전경』 행록 4장 20절에서 말하는 ‘와룡리 네거리’를 현재 손병욱의 집에서 남쪽에 있는 네거리 지점으로 생각했었다. 1924년에 제작된 『정읍』 근대지도를 살펴보면 옛 와룡리 지역에 물을 가두어 놓은 제(堤)가 있는데, 현재는 없어졌지만 그 제(堤) 부근의 네거리가 옛 ‘와룡리 네거리’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실제로 종도들의 집 위치를 알고 보니 『전경』에서 말하는 ‘와룡리 네거리’의 위치는 화천리에서 회룡리로 가다보면 회룡초등학교가 있는 낮은 구릉지 언덕길의 진입로 부근으로 추정되었다. 지금은 농지 정리로 네거리라는 흔적이 미미하지만, 『정읍』 근대지도를 살펴보면 점선으로 표시된 소로(小路)에 네거리인 곳이 있으며, 이 네거리를 중심으로 『전경』에서 서술한 내용처럼 북쪽에 신경수의 집과 서북쪽에 황응종의 집이 있다. 그런데 이 네거리는 실제 ‘옛 와룡리’ 지역보다 ‘옛 교동[교촌]’ 지역에 더 인접해 있으므로 옛 ‘와룡리 네거리’로 보기에는 어렵고, ‘와룡리 부근에 있는 한 네거리’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해 보였다.

 

 

신경수의 집

  괴동과 정반대 편인 운산리 신경수의 집을 둘러보기 위해 괴동에서 교촌 사거리 쪽으로 다시 이동했다.

 


▲ 와룡리에서 바라본 교촌과 운산리 전경

 

  신경수가 살았던 곳으로 가려면 교촌을 지나야 했다. 교촌(校村)은 예전 마을에 향교가 있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교촌 사거리에서 교촌 마을 뒤편으로 난 산길을 따라 정토산의 마지막 봉우리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구불구불한 길과 밭두렁 길을 지나 마지막 능선에 다다르니 신경수의 집터를 볼 수 있었다. 집터는 능선에서 조금 아래쪽에 위치하여 건물은 없고 빈터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곳 주변이 전체적으로 약간 경사져서 과연 이런 곳에 살림집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곳을 ‘운산리(雲山里)’라 불렀다는데, 운산(雲山)이란 지명은 정토칠봉의 형세와 관련 있는 ‘와룡(臥龍)’이란 지명과 어울리는 것 같다. 민간신앙에서 용(龍)은 물을 지배하는 수신(水神)으로, 농경민족에게 중요한 신앙의 대상이었다. 즉 용이 비를 내릴 때는 구름을 몰고 다니듯이 용과 구름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래서 이곳 지명도 유래는 알 수 없었지만 그런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싶었다. 

 


▲ 정토산 끝 봉우리 부근의 신경수 집터

 

  1907년 12월 상제님께서는 신경수의 집에서 요(堯)의 역상 일월성신 경수인시(曆像日月星辰敬授人時: 일월성신을 역상으로 하여 사람들에게 때를 알려주도록 하다)에 대해 “천지가 일월이 아니면 빈 껍데기요, 일월은 지인(知人)이 아니면 허영(虛影)이요, 당요(唐堯)가 일월의 법을 알아내어 백성에게 가르쳤으므로 하늘의 은혜와 땅의 이치가 비로소 인류에게 주어졌다”라고 하시면서 오주(五呪)를 지어 천지의 진액(津液)이라 이름하셨다.10 같은 시기 이곳에서 전북(全北) 칠읍(七邑)의 흉년을 없애기 위해 운암강 물을 김제 만경 들판으로 돌리는 공사도 보셨다.11 또 백의군왕 백의장군 도수를 보시고 이에 따른 화난을 당하시는데12 신경수의 집은 고부화액의 시작점이 되었다. 1908년 여름에는 상제님께서 궤 두 개를 만들어 큰 것을 조화궤라 이름하여 동곡 약방에 두고 작은 것을 둔(遁)궤라 이름하고 공부하실 때에 72현(賢)의 72둔궤로 쓰시다가 신경수의 집에 두셨으며,13 신경수의 집에 수명소(壽命所)를 정하기로 하셨다.14 1908년 10월경에는 신경수의 집에서 묵은 하늘의 요청에 만일 허락하지 아니하면 배은이 되므로 상제님과 박공우의 살을 떼어 주는 공사도 보셨다.15 

  그런데 지명과 관련해서 전북 칠읍의 흉년을 없애는 공사는 용이 비를 내릴 때 구름을 몰고 다니듯이 ‘와룡리’와 ‘운산리’의 기운을 공사에 붙여 쓰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공사의 결과로 현재 운암호[옥정호]에 있는 물이 동진강 물줄기의 근원이 되어 전북 칠읍[옥구·전주·진안·장수·금구·태인·임실]에 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고 있다.

  1907년 12월 상제님께서는 고부 와룡리 주변 종도들의 집에서 선기옥형(璿璣玉衡) 도수를 정하시면서 신경수의 집에 저울 갈고리 도수, 황응종의 집에 추 도수, 문공신의 집에 끈 도수 그리고 신경수 집에 일월 대어명(日月大御命) 도수, 다시 문공신 집에 천지 대팔문(天地大八門) 도수를 정하시고 이 세 종도의 집에 밤낮으로 번갈아 다니며 공사를 행하셨다.16 같은 시기 고부 와룡리에서 박공우의 처결로 후천 5만 년 첫 공사인 과부와 홀아비를 정식으로 예를 갖추어 개가케 하는 공사도 보셨다.17 1908년 10월에는 상제님께서 고부 와룡리 주변 일대에서 혼란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 청국 광서제(淸國光緖帝)에게 응기해 있는 황극신을 만동묘로 옮겨오는 공사를 보셨고, 같은 시기 종도들에게 “만국 제왕의 기운을 걷어 버리노라” 하신 후 하늘에 그 기운을 잠시 보여주기도 하셨다.18

 

 

답사를 마무리하며 

  고부 와룡리 주변 일대에는 상제님의 여러 행적이 있었다. 특히 상제님께서 선기옥형(璿璣玉衡) 도수를 정하시고 종도들의 집에 번갈아 다니며 공사를 행하신 내용은 중요하게 느껴졌다. 선기옥형은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관측하는 천문 기구로 원래 『서경』 「순전」에 “선기옥형으로 칠정(七政)19을 가지런히 한다.(在璿璣玉衡 以齊七政)”는 대목에서 나오는 말이다. 그리고 사마천의 『사기』 「오제본기」에서 “요(堯)임금이 연로하자, 순(舜)에게 자신을 대신해서 섭정(攝政)하여 천명(天命)을 살필 것을 명하였다. 이에 순은 선기옥형으로 칠정을 가지런히 다스려, 마침내 상제에게 제사를 지냈다(帝堯老 命舜攝行天子之政 以觀天命 舜乃在璿璣玉衡 以齊七政 遂類于上帝…)”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선기옥형 도수와 관련하여 상제님께서 요(堯)의 역상 일월성신 경수인시(曆像日月星辰敬授人時)에 대해 여러 말씀을 하신 부분이 새롭게 와 닿았다.

 


 

  상제님께서는 고부 와룡리 주변에서 선기옥형 도수 공사, 과부와 홀아비를 개가케 하는 공사, 전북 칠읍의 흉년을 없애는 공사, 물화상통 공사, 대전쟁 관련 공사, 음양도수 공사, 역도를 조정하는 공사, 황극신을 만동묘로 옮겨오는 공사 등 여러 공사(公事)와 도수(度數)를 보셨다. 그리고 이곳은 백의군왕 백의장군 도수에 따라 상제님께서 고부화액을 당하는 시작점이 되었던 곳이다. 고부 와룡리 일대가 상제님의 행보에 있어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곳의 지형 형세가 ‘와룡(臥龍)’을 연상케 하듯이 와룡에 내포된 여러 의미처럼 앞으로의 큰일을 위해 때를 기다렸던 이곳이 상제님의 천지공사에 큰 쓰임이 되기 위해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대순회보》 19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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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전경』.

정읍사편찬위원회, 『정읍시사 (상권)』 정읍: 정읍시사편찬위원회, 2001.

편집부, 『종교학대사전』 서울: 한국사전연구사, 1998.

 

01 교운 1장 21절 참고.

02 행록 4장 46절 참고.

03 공사 2장 23절 참고.

04 공사 2장 25절, 공사 2장 16절, 공사 2장 19절 참고.

05 행록 3장 65절 참고.

06 교운 2장 24절 참고.

07 공사 3장 11절 참고.

08 공사 3장 7절 참고.

09 행록 4장 20절 참고.

10 교운 1장 30절 참고.

11 공사 1장 28절 참고.

12 행록 3장 54절, 55절 참고.

13 공사 3장 10절 참고.

14 예시 46절 참고.

15 공사 3장 13절 참고.

16 예시 31절 참고.

17 공사 2장 17절 참고.

18 공사 3장 22절, 예시 27절 참고.

19 칠정은 칠요(七曜)라고도 하며, 별과 해와 달의 운행이 일정한 규칙에 따라 운행되는 것이 정치가 일정한 법규와 제도에 따라 집행되는 것과 같고, 또 옛날사람들은 우주의 변화와 원리에 따라 순천(順天: 하늘의 뜻을 좇는 것)하는 정치를 행하였으므로 하늘의 주된 현상인 일월(日月)과 5성[수성, 금성, 목성, 화성, 토성]을 정치의 근원으로 삼았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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