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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룡산 동학사

교무부    2017.09.17    읽음 :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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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역사연구팀 

 


▲ 동학사전경

 

  병신년 三월에 박 한경은 도주의 분부를 좇아 류 철규·박 종순과 함께 정하신 바에 따라 공주 동학사(東鶴寺)에 이르렀도다. 이 절의 경내에 동계사(東雞祠) 삼은각(三隱閣)과 단종왕의 숙모전(肅慕殿)이 있고 생육신과 사육신을 추배한 동묘 서묘가 있으니 신라 고려 조선의 삼대 충의지사를 초혼한 곳이로다. 이곳의 관리자는 사육신의 한 사람인 박 팽년(朴彭年)의 후손이고 정기적으로 청주에서 내왕하면서 관리하고 있었도다. 그러므로 평상시에는 문이 닫혀 사람들이 출입할 수 없는데 이날따라 그 후손이 도주께서 불러나온 듯이 미리 와서 문을 여니 도주께서는 배종자들을 데리시고 이곳을 두루 살피셨도다. 그리고 동학사 염화실(拈花室)에서 이레 동안의 공부를 마치시고 말씀하시길 “이번 공부는 신명 해원(神明解冤)을 위주한 것이라”고 이르셨도다. (교운 2장 57절)

  

 1956년 3월 어느 날 도주님께서는 도전님과 배종자(陪從者)들을 데리고 공주 계룡산에 있는 동학사에 가셨다. 그곳에 도착하신 도주님께서는 충의지사(忠義之士)의 혼이 모셔져 있는 동학사 경내의 동계사, 삼은각, 숙모전, 동묘, 서묘를 두루 살피시고 동학사 염화실에서 7일간 공부를 하셨다. 공부를 마치시고 이 공부가 신명 해원을 위주한 것이라고 밝혀주셨다. 우리는 이번에 도주님과 도전님의 행적이 남아있는 계룡산 동학사 염화실과 동계사, 삼은각, 숙모전, 동묘, 서묘를 답사하였다.  

 


 

  여주에서 출발한 지 두 시간여 지난 후에 계룡산 동학사 매표소에 도착하였다. 우리는 포장된 길을 따라 동학사가 있는 곳까지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5분 정도 올라갔을 때, 길 좌우에 보이는 산자락의 바위가 흰색을 띠고 있는데, 예전에 계룡산의 바위들은 검은색이었는데 근래에 들어 흰색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정감록』에 계룡산에 바위가 흰색을 띠면 … 세상일을 가히 알리라는 ‘계룡백석 …세사가지(鷄龍白石 世事可知)’라는 내용과 연관이 있는 듯했다. 

  계룡산의 유래는 조선 시대 초기 무학대사의 말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초기 이성계가 신도안(현 계룡시 신도안면 일대)에 도읍을 정하려고 이 지역을 답사하였다. 당시 동행한 무학대사가 산의 형국이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금 닭이 알을 품는 형국)이요, 비룡승천형(飛龍昇天形: 용이 날아 하늘로 올라가는 형국)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두 주체인 계(鷄) 자와 용(龍) 자를 따서 계룡산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계룡산은 경관이 좋아 삼국시대에는 계람산(鷄藍山: 백제의 동쪽경계를 수호하는 산)·옹산 등의 이름으로 불렸다. 그 이름은 당나라까지 알려졌으며, 신라 시대 이후에는 오악(五嶽)01 중 서악(西嶽)으로 알려졌다. 또한, 조선 시대에는 국가를 수호하는 삼악(三嶽)02 신앙 중 한 곳인 중악(中嶽)으로 봉해질 정도로 이미 역사에 자주 언급되는 산이다. 이 산은 지역을 수호하는 명산이라기보다 국토를 수호하는 국행제의(國行祭儀)의 성소(聖所)로 간주하였다. 특히 『정감록(鄭鑑錄)』에는 이곳을 십승지지(十勝之地), 즉 큰 변란을 피할 수 있는 장소라 했으며, 6·25전쟁 당시 많은 피난민이 정착했던 곳이기도 하였다.

  10여 분 더 올라가니 동학사에 약간 못 미친 길 우측에 동학사에 속한 암자들이 보였다. 이곳의 암자들은 문수암, 관음암, 미타암, 길상암으로 1600년대부터 존속되어 온 산내 암자로서 예부터 비구니 스님이 주석하며 참선, 정진하던 도량이다. 암자들을 뒤로하고 길을 따라가니 드디어 동학사 건물들이 보였다.  

  동학사의 유래는 신라 724년(성덕왕 23) 상원(上願) 조사가 동학사의 북쪽으로 2km 떨어져 있는 남매탑 부근에 조그만 상원암을 지었고, 그곳에 회의(懷義) 화상이 절을 창건하여 이름을 상원사(上願寺)라 한 데서 비롯하였다. 921년에 도선이 지금의 동학사 자리에 사찰을 중창한 뒤 고려 태조 왕건의 원당 사찰이 되었다.

  936년 신라가 망하자 대승관(大丞官) 류차달(柳車達)은 지금의 동학사 자리인 이곳에 와서 충신 관설당(觀雪堂) 박제상(朴堤上, 363년~418년 추정)의 초혼제를 지내기 위해 왕건의 도움으로 사당인 동학사(東鶴祠)를 지었다. 이후 절이 번창하여 이름도 동학사(東鶴寺)로 바뀌었다. 동학사는 이 절의 동쪽에 학 모양의 바위가 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부처님이 학서(鶴捿)03에서 열반한 것에 비유하여, 동방의 동학사도 그에 부합하는 땅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04 

 


 

  동학사는 공주시 계룡산 동쪽 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으며 갑사와 함께 계룡산을 대표하고 있는 사찰이다. 1860년에는 이곳에서 최대 규모의 비구니 강원(講院)이 열렸으며, 일제강점기 때에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이 병행되기도 하였다. 1956년 2월 23일 동학사는 동학사 강원을 바탕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비구니 전문 강원인 동학승가대학을 설립하였다. 이 무렵에 도주님께서 동학사에 오시게 된 것이다.

  동학사는 우리나라에서 불교 건물과 유교 건물이 공존하고 있는 유일한 사찰로 스님과 유림이 같이 제의를 지냈다. 조선 시대에는 역대 관찰사가 관장했고, 1963년에 사단법인 숙모회를 설립하여 봄, 겨울에 대제(大祭)를 드려오고 있다.  

  우리 일행은 동학사에 도착하여 인재문(仁在門) 우측의 숙모전 일원이란 안내판이 세워진 출입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에는 동계사, 삼은각, 관리사(숙모재)가 있었다. 먼저 동계사 건물로 올라가 닫힌 문을 열고 예를 갖추어 내부를 살펴보았다. 건물 내부는 신라 충신 박제상과 류차달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 숙모전(초혼각지) 배치도

 

  418년 동계사에 박제상을 초혼하게 된 일화는 다음과 같다. 신라는 백제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402년 내물왕의 셋째 아들인 미사흔(未斯欣)을 왜에 화친을 위한 볼모로 보냈으며, 412년에는 둘째 아들인 복호를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 군사 원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왜와 고구려는 이들 왕자를 인질로 감금한 채 정치적으로 이용하였다. 

  내물왕의 큰아들인 눌지왕은 즉위한 후 두 동생을 고구려와 왜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박제상을 먼저 고구려에 보냈다. 박제상은 고구려 장수왕을 언변으로 회유하여 복호를 구출한 후 무사히 귀국하였다. 귀국 즉시 그는 왜에 인질로 가 있는 미사흔을 구출하기 위해 부인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떠났다. 그는 왜에 이르러 마치 신라를 배반하고 도망해 온 것처럼 속였다. 마침 백제 사신이 와서 고구려와 신라가 모의해 왜를 침입하려 한다고 거짓으로 말하였다. 그래서 왜는 병사를 파견하여 미사흔과 박제상을 향도(嚮導: 길을 인도하는 사람)로 삼아 신라를 침략하고자 하였다. 

  왜의 침략 세력이 신라를 치러 가는 도중에 박제상은 강구려(康仇麗)와 협력해 왜병을 속여 미사흔을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으나, 그 자신은 붙잡혀 왜왕 앞에 끌려갔다. 왜왕은 그를 신하로 삼기 위해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으로 회유했으나, 그는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결코 왜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해 끝까지 충절을 지키다가 마침내 유형(流刑)에 처해 불에 태워지는 참형을 받아 죽었다. 신라가 망한 뒤 류차달(柳車達)의 건의로 이곳에 박제상의 초혼제를 지내면서 동계사를 건립하였다. 그 후 1956년(丙申) 9월에 중건하여 류차달도 함께 추향(追享)하였다. 

 


▲ 동계사와 삼은각 

 

  신라의 충신 박제상이 모셔져 있는 동계사 옆에는 고려의 충신이 모셔진 삼은각이 있다. 삼은각은 고려 때 절의를 지킨 삼은(三隱)인 포은(圃隱) 정몽주, 목은(牧隱) 이색, 야은(冶隱) 길재의 위패가 모셔진 곳이다. 삼은각은 길재가 1394년(조선 태조 3)에 동학사에 와서 고려의 왕을 제사하고 절 옆에 단을 쌓아 포은 정몽주의 충혼을 불러 제사하고 위로한 데서 비롯되었다. 그 후 1399년에 유방택이 고려말 충신 목은 이색의 넋을 이곳에서 제사지냈다. 이듬해인 1400년에 공주 목사 이정간이 제단의 터에 각을 세웠으며, 길재 사후(死後) 후학들이 그마저 추가로 배향함으로써 삼은각이란 명칭이 붙게 되었다. 이후 고려 말과 조선 초의 천문학자이자 고려의 유신으로 절의를 지켰던 유방택, 정몽주의 제자로 조선 건국 전에 정도전의 심복에게 피살된 이숭인, 조선 건국 이후 권근의 벼슬 권유를 거절하며 고려왕조에 대한 의리를 지켰던 나계종의 위패를 추가하여 모두 6기가 삼은각에 모셔져 있다.  

 


▲ 숙모전

 

  삼은각 서쪽으로는 단종이 모셔진 숙모전(肅慕殿)과 조선의 충신들이 모셔진 동묘, 서묘가 있다. 숙모전에는 세조에게 폐위당하여 죽은 단종과 정순 황후를 합독(合櫝)한 위패가 모셔져 있다. 남향인 숙모전 앞마당에 동묘와 서묘가 마치 왕 앞에 문무백관이 서열 한 것처럼 마주하고 있다. 숙모전은 1904년 고종 때 편액이 내려졌으며 그 이전에는 초혼각(招魂閣)이라 불렀다. 숙모(肅慕)란 ‘엄숙하고 정중하게 그리워하는 것’이란 뜻으로 단종 내외분을 숙모한다는 말이다. 건물의 이름을 ‘각(閣)’에서 임금이 거처하는 집이란 뜻의 ‘전(殿)’을 붙인 것은 건물을 승격시킨 의미가 있다. 동묘와 서묘에는 세조에게 항거한 충신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곳 숙모전의 유래는 매월당 김시습이 사육신(死六臣)을 초혼한 데서부터 비롯되었다. 김시습은 세조 2년(1456)에 사육신의 비극이 일어나자 그들의 시신을 거두어 노량진에 묻었다. 그리고 동학사로 돌아와 정절공(貞節公) 조려(趙旅)05·조상치(曹尙治)·이축(李蓄) 등과 더불어 삼은각 옆에 단을 쌓고 초혼제를 지냈으며 이듬해에 단종을 초혼하였다. 

 


▲ 동묘,내부모습(김시습 자화상과 위패들)

 

  세조는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한 후 형수 현덕왕후(顯德王后: 문종비, 단종의 모)가 나타나 그에게 침을 뱉는 꿈을 꾸었다. 그 후 침이 튀긴 자리에 피부병이 생겨서 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래서인지 세조는 온양 온천에 자주 행차하였다. 『연려실기술(然藜室記述)』06에 따르면, 1457년(세조 3) 9월에 피부병으로 고생하던 세조가 속리산 복천암(福泉庵)에서 약수로 목욕을 하고 귀경길에 온양 온천으로 가던 차에 동학사에 들렀을 때 삼은각과 사육신 초혼단을 보고 김시습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8폭 비단으로 사육신과 그 부자 형제 및 연좌하여 죽은 자 등 총 100여 위를 열명(列名)하여 ‘병자원적(丙子寃籍)’07을 내렸다.  

  또 고려의 삼은 고사에 감격하여 고려 역대 왕의 성과 이름 및 고려 말에 죄 없이 죽은 자의 성명 100여 위를 열명(列名)하여 내리고 그들의 넋을 기렸다. 1458년에 세조는 친히 동학사에 와서 제단을 살핀 뒤 단종을 비롯해 사육신과 세조 찬위 때 억울하게 죽은 280여 명의 성명을 비단에 써주며 초혼제를 지내게 하였다. 그 뒤 초혼각(招魂閣)을 짓게 하고 인신(印信: 도장)과 토지 등을 하사하였으며, 동학사(東學寺)란 이름을 내려 승려와 유생이 함께 해마다 10월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1864년(고종 원년) 만화와 보선 스님이 재화를 널리 모아 동학사 건물 40칸과 함께 초혼각도 3칸으로 중건하였다. 이때 초혼각 한 건물의 북쪽 벽에는 단종 위패를 모시고, 동쪽 벽에는 삼은과 삼상 및 단종의 시신을 거둔 엄흥도 등 일곱 사람의 7위를, 서쪽 벽에는 사육신과 김시습(영정)의 7위를 모시게 되었다. 다시 1883년(고종 20)에는 초혼각 밖에 동묘·서묘 각 1칸씩을 별도로 세워 동묘에는 생육신이, 서묘에는 사육신이 모셔졌다. 현재는 동묘 47위, 서묘 48위가 봉안되어 있다. 동묘 건물의 좌측에는 김시습의 자화상이 걸려있으며 서묘 건물 내부의 우측에는 사육신의 친필이 적힌 액자가 걸려있다. 삼은각은 1916년에, 동계사는 1956년에 중건되어 현재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역대 충청도 관찰사가 숙모전, 동계사, 삼은각에 모신 충의지사를 관장했다. 1963년부터는 숙모회08가 발족하여 봉안 대상과 의례 절차를 정비, 매년 춘향(春享: 봄 제사)과 동향(冬享: 겨울 제사) 두 차례 대제를 드린다.09 그리고 1992년 숙모재(강의실)를 세우고 충절의 위대한 공적을 강의 선양하고 있다. 

  우리는 드디어 숙모전 좌측에 있는 도주님께서 공부하신 곳인 동학사 염화실(拈花室)을 담 너머로 바라보았다. 염화실에는 신발 한 켤레가 놓여있었으며, 유리창이 있는 미닫이문을 하고 있었다. 염화실은 원래 참선을 지도하는 조실 스님과 방장 스님이 거처하는 방인데, 도주님께서 공부하시기 위해 며칠 빌려 쓰셨다. 여기서 염화실의 ‘염화’라는 말은 염화미소(拈花微笑)에서 온 말로 ‘대중에게 꽃을 들어 보인다’는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라고도 한다. 영산(靈山)에서 범왕(梵王)이 석가에게 설법을 청하며 연꽃을 바치자, 석가가 연꽃을 들어 대중들에게 보였다. 사람들은 그것이 무슨 뜻인지 깨닫지 못하였으나, 가섭(迦葉)만은 참뜻을 깨닫고 미소를 지었다. 이에 석가모니는 가섭에게 정법안장(正法眼藏: 사람이 본래 갖추고 있는 마음의 묘한 덕)과 열반묘심(涅槃妙心: 번뇌와 미망에서 벗어나 진리를 깨닫는 마음), 실상무상(實相無相: 생멸계를 떠난 불변의 진리), 미묘법문(微妙法門: 진리를 깨닫는 마음) 등의 불교 진리를 전해 주었다. 즉, 말을 하지 않고도 마음과 마음이 통하여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뜻이다. 

 


 

  도주님께서 1956년 3월 동학사 염화실에서 공부하실 당시의 일화가 전해진다. 동학사는 6·25 때 건물의 상당수가 불탔다. 당시 한곳에 모아뒀던 동묘와 서묘의 위패들을 도주님께서 가셨던 당시까지 제자리에 배치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곳에 모셔진 충의지사의 후손들이 배향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도주님께서 동학사 염화실에서 공부하시고 나서, 이곳에 위패로 모셔진 충의지사의 후손들 앞에서 동묘·서묘의 위패를 제자리에 배치하여 주셨다.10 이는 동묘·서묘에 모셔져 있는 모든 충의지사의 공적과 가문의 내력을 훤히 아셨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도주님께서는 1956년 3월 동학사에 오셔서 경내에 있는 숙모전, 동묘, 서묘, 삼은각, 동계사를 두루 살피시고 염화실에서 7일간의 신명 해원 공부를 마치시고 한곳에 모여 있었던 수많은 동묘와 서묘의 신위를 바르게 배치해주셨다. 이곳에서 행하신 도주님의 신명 해원 공부는 초혼각지에 모셔져 있는 충의지사의 원을 풀어주신 것이었다.

《대순회보》 19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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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신라 오악 : 동악-토함산, 서악-계룡산, 남악-지리산, 북악-태백산, 중악-팔공산 

02 조선 삼악 : 상악-묘향산, 중악-계룡산, 하악-지리산

03 학림(鶴林)과 같은 뜻으로, 석가모니가 입멸이 슬퍼서 사라쌍수(沙羅雙樹)의 숲이 모두 말라 흰빛으로 변하여 마치 흰 학들이 모여 있는 것처럼 되었다는 데서 유래.

04 박남수 외 2인, 『갑사와 동학사』 (서울: 대원사, 1999년), p.113 참조.

05 조려 선생은 도주님의 17대 선조이며 생육신으로 태학[성균관]에 있었으며 김시습의 정신적인 벗이었다. 단종이 폐위되자 낙향하여 낙동강 백이산(伯夷山: 훗날 숙종이 조려 선생의 충절을 기려 이름지어준 산)에 은거하였다. 『영월읍지(寧越邑誌)』에 실린 ‘호배도강전설(虎背渡江傳說)’에 따르면 당시 함안에 살면서도 오백여 리나 되는 영월 땅을 매월 세 번씩 찾아가서 단종께 문안드렸다고 할 정도로 충절이 깊었던 분이었다. 

06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긍익(李肯翊)이 찬술한 조선시대의 사서(史書)로 태조 이래 각 왕대의 중요한 사건을 기사본말체 방식으로 여러 서책에서 관계기사를 기입하면서 출처를 밝히는 방식을 활용하였다.

07 병자사회(丙子士禍) 때 사육신과 연좌되어 순절한 충신 백여 명이 서명된 표제.

08 숙모회는 사단법인으로 숙모전, 삼은각, 동계사의 수호 및 계승발전 등을 위한 사업을 목적으로 발족됐다.

09 춘향대제는 매월당 김시습 등이 단종의 원혼을 불러 최초로 제사한 날인 음력 3월 15일에 행해지며, 동향대제는 단종이 유배지인 영월 청령포에서 사사된 날인 음력 10월 24일에 행해진다.

10 성 ○○ 교감 인터뷰(2003년 12월 14일) 참조: 도전님께서 동학사에 가셨을 때(1970년대 후반에서 1980년대 초반쯤 어느 날), 임원들에게 “도주님께서 당시 위패를 배치해주셨다”라고 말씀해주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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