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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안 반구정

교무부    2018.08.28    읽음 : 25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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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화산 반구정(경남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 333), 2015년 7월

    연구원 손영배

 

   도주 옥황상제님(이하 도주님)께서는 1909년에서 1958년 화천하시는 날까지 50년 동안 구천상제님께서 짜놓으신 천지도수(天地度數)에 의한 공부를 쉼 없이 행하셨다. 이에 따라 공부하신 장소가 여러 곳이 있는데, 그중 한 곳이 함안 반구정이다.

  도주께서 경신(1920)년에 재실(통사동 재실)에서 … 공부하시던 중 二월 열이레에 … 둔궤가 저절로 열려져 있었도다. … 그 후 둔궤는 도주께서 함안 반구정(伴鷗亭)에서 공부하실 때 그곳에 옮겨졌도다. 그러나 당시 심복자이던 창원 사람 조 주일(曺周一)이 둔궤를 훔쳐 갔는데 … 도주께서 “그 시기의 도수에 쓰였으면 족하니라. 둔궤의 둔자는 도망 둔자이도다”고 그들(종도들)에게 이르셨도다. (교운 2장 20절) 

  갑자(1924)년 여름에 도주께서 배 문걸을 데리고 밀양 종남산 영성정(靈聖亭)에 이르시어 폐백 도수(幣帛度數)를 … 다섯 달 계속하시고 다시 함안 반구정으로 옮겨 마치셨도다. (교운 2장 30절) 

   함안 반구정은 둔궤 공부와 폐백 도수 공부와 관련이 있다. 둔궤 관련 공부는 경신(1920)년 음력 2월 17일에 통사동 재실에서 행해졌는데, 도주님께서 공부하시던 중 둔궤가 저절로 열렸다. 이후 둔궤는 반구정으로 옮겨졌다. 폐백도수 공부는 1924년 여름 밀양 종남산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반구정으로 옮겨 마쳐졌다. 이처럼 반구정은 우리의 성적지(聖蹟地)이며, 종단 역사 연구에서 중요한 곳이다. 


 

  본디 반구정은 함안군 칠서면 용성리에 있는 말바위[두암(斗巖)]에 지어졌다고 한다. 말바위에 있던 반구정은 침식되어 후손들에 의해 1858년 용화산 중턱의 옛 청송사(靑松寺)가 있었던 자리로 옮겨졌다고 전해진다.

  얼마 전까지도 조방 선생이 반구정을 처음 지었던 말바위 터를 찾지 못해 궁금하게 여기던 터였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반구정의 내력을 다시 조사하던 중 말바위 터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 답사는 먼저 옛 반구정 터를 거쳐 현재의 반구정에 이르는 코스를 돌아보기로 계획을 세우고 출발하였다.    

 


▲ 반구정, 2013년 4월 


▲ 반구정 유허비 

 

   함안 반구정의 옛터는 여기(여주)에서 꽤 멀다. 자동차로 넉넉히 잡아 3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이다. 올해(2017년) 들어 구간 고속도로공사가 한창이어서 평소보다 30분 정도 더 소요되었다. 옛 반구정 터로 가려면 남지나들목을 지나 남지대교를 건너가야 한다. 낙동강을 경계로 남지대교를 넘으면 함안이다. 남지대교를 건너 우측 편으로 붉은 담장이 보이고, 그 안에 반구정 유허비01가 세워져 있다. 유허비의 모습을 보면 귀부(龜趺) 등위에 비신(碑身)이 있고, 유허비 정면으로는 ‘두암조선생반구정유허비(斗巖趙先生伴鷗亭遺墟碑)’라고 새겨져 있다. 비신(碑身)의 우측 편에는 1981년 10월에 배문준이 해석하였고 조광제가 비문의 글씨를 썼다는 내용이 조판(彫版)되어 있다. 비문의 글은 이가원이 지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배문준은 『전경』 교운 2장에 나오는 배문걸(1905~2004)02 종도이다. 그는 도주님께서 밀양에서 둔 도수와 폐백 도수를, 청도에서 단 도수를 보실 때 시봉하였다. 그리고 도주님 큰 숙부(조용의)의 맏사위이다. 배문걸 종도는 유허비를 설립하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또한, 회문마을03 입구에 있는 도주님 조부의 공덕비문에 있는 글씨도 그가 쓴 것으로 확인된다. 

  비문의 전체 내용을 살펴보면, “세월이 흘러 정사가 침식되어 용화산에 있는 조방 선생의 조카 간송 조임도의 합강정 오른편으로 옛 청송사(靑松寺) 터에 옮겨 지었다. 이후 1981년 10월에 자손들이 선조의 옛터를 잊을 수 없어 유허비를 세웠다”라는 것이다. 두암조선생반구정유허비는 조방 선생이 지은 옛 반구정의 터를 후손들이 찬미(讚美)하기 위하여 세워졌다. 

 


▲ 말바위 옛 반구정 터 


▲ 옛 반구정과 옛 창암정 

 

   반구정의 옛터는 유허비에서 조금 떨어진 강가에 있다. 『기락편방(沂洛編芳)』에 옛 반구정이 어디쯤 있는지 그림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그림은 ‘용화산하동범지도(龍華山下同泛之圖)’의 글자 한 자 한 자에 팔경(景)이 그려져 있다. 이 중 옛 반구정은 ‘범(泛)’에 해당하는 6번째로 우포(藕浦)와 함께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곳이다. 이 그림에서 옛 반구정은 강가에 있는 바위 위에 세워졌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바위가 말바위이다. 실제로 말바위에 가 보면, 넓직하여 그림에서처럼 정면 2칸으로 된 정자를 세우기 좋은 위치이다. 그림 속의 옛 반구정과 그 옆의 우포(藕浦), 그리고 그 주변의 풍경과 함께 걸맞은 시가 쓰여 있다. 

 


第六是藕浦(제육시우포)

僊舟瞥過津(선주별과진)

催帆呼隔手(최범호격수)

江上伴鷗人(강상반구인)

 

여섯째 우포라

신선이 탄 배가 언뜻 나루를 지나가네

배를 재촉하여 손뼉 쳐 불러보지만

강가에는 갈매기와 사람이 짝이 되어 노니네.

 

  반구정의 옛터인 말바위는 반구정 유허비에서 조금 떨어진(80m 정도) 곳에 있다. 옛 반구정이 있었던 말바위는 말 두(斗) 자와 바위 암(巖) 자를 써서 두암(斗巖)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수면에서 이 바위의 높이는 5~6m였다. 말바위에 세워진 옛 반구정은 비가 많이 왔을 때는 물에 잠기곤 했다고 전해진다.

  말바위에 정자를 지었던 분은 조방 선생이다. 그는 1557년 지금의 경남 함안군 가야읍 검암리에 태어났다. 함안 조씨 16대손이고, 두암공파의 파시조이다. 조방 선생의 자(字)는 극정(克精), 호(號)는 두암(斗巖) 혹은 반구정(伴鷗亭)이다. 호를 보면 바위의 이름과 정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조방 선생은 임진왜란(1592~1598)이 일어나자 문중의 장정(壯丁) 100여 명과 함께 곽재우(郭再祐) 장군을 따라 의병을 일으켰으며, 정암나루[鼎巖津]04와 기강(岐江)05을 지키는 등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리고 정유재란(1597년, 왜구의 두 번째 침입) 때에는 창녕 화왕산성에서 의병들과 함께 많은 적을 무찔렀다. 

 

 

▲ 반구정 위치(출처: 다음지도)



▲ 반구정에서 내려다 본 풍경 

 

  한 일화에 따르면, 조방 선생의 충의(忠義)에 감복한 어느 고을 사람들이 조정에 상소하여 포창(褒彰)을 청하려 하자 맏아들을 보내 그 상소장을 빼앗아 불에 태우면서 “신하가 나라를 위함은 당연한 직분인데 어찌 스스로 자랑할 것인가?”라고 하며, 자식들에게 다시금 훈계하기를 “내가 죽은 후에라도 다시 이러한 일이 있으면 너희들이 일절 금지해 지하에까지 수치를 끼치지 말라.”고 훈계할 만큼 충직하고 곧은 성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난이 평정되자 낙동강 우포(藕浦)의 말바위 위에 반구정(伴鷗亭)을 지어 갈매기를 벗 삼아 풍류를 즐겼다. 멀리 마주 바라보이는 곽재우가 머물렀던 창암정(滄巖亭)을 수시로 내왕하면서 회포를 풀고, 자연과 더불어 아무 속박 없이 편안하게 살았다고 한다. 지금은 대교가 가로막고 있어 옛 반구정 터에서 창암정이 보이지 않았다. 

  조방 선생이 자연을 벗 삼아 생활을 했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말바위에서 용화산을 보며 해가 지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말바위 서쪽에 있는 용화산에 걸쳐 있는 붉은 노을, 그리고 낙동강 물 위에 그 노을이 비쳐 나타난 붉은 비단 물결! 그야말로 장관이 아니겠는가!  말바위에서 용화산 반구정으로 가려면 용화산의 임도(林道)가 시작되는 입사 마을(경남 함안군 대산면 장암리)로 가야 한다. 입사 마을 입구에서 용화산 중턱에 있는 반구정까지 임도여서 걸어가는 데에 어렵지 않다. 대략 50분이 소요되는 거리이다. 

  반구정으로 가는 길가에 뽕나무 몇 그루가 서 있었다. 먼 길 가는 사람에게 열매를 따 먹으며 쉬엄쉬엄 가라는 시골 인심이 가득한 길이었다. 따먹은 뽕나무 열매로 입 주위를 까맣게 물들이며 걸어가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임도를 따라 걸어가면서 문득 생각이 들었다. 임도가 없었던 그 당시의 길은 어떠했을까? 그때 이 길을 꼭 가야 하는 사람은 어떠한 어려움이 있었을까? 지금의 임도는 그 사람의 염원이 담긴 길이 아니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1998년 여름 반구정 

 

  임도를 따라 한참 걷다 보니 이정표가 보였다. 반구정으로 가려면 ‘이쪽으로 내려가야 한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반구정으로 내려가는 도중에 낙동강과 주변에 펼쳐진 평야, 그리고 우뚝 솟은 아파트가 한눈에 보이는 곳이 있다. 우리는 그 경치를 감상하며 50여 분 동안 걸어온 피로를 풀었다. 휴식을 취한 뒤, 우리는 가벼워진 몸으로 목적지인 반구정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지금의 반구정은 1858년에 옮겨졌으며 용화산 중턱의 옛 청송사가 있었던 자리이다. 반구정의 건물은 정면에서 보면 4칸, 옆면에서 보면 2칸으로 되어 있고, 지붕은 기와로 덮여 있었다. 건물 앞으로는 휴식공간을 꾸밀 수 있는 넓은 마당이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아늑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반구정 좌측에 관리하는 분이 사는 사택이 보였고, 반구정 앞쪽에는 650여 년 동안 이 자리를 지켜온 느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반구정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믿음직스럽게 보였다. 그리고 느티나무 아래에는 앉아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정자가 있었다. 바로 이곳 반구정이 도주님께서 공부하셨던 장소이다. 

  1919년에 도주님께서 둔궤의 행방을 확인하시고, 이해 음력 9월에 둔궤를 통사동 재실로 옮겨오게 하셨다. 그 이듬해인 1920년에 통사동 재실에서 밤낮으로 불면 불식하며 공부하시던 중, 음력 2월에 둔궤를 봉안한 곳에서 벼락 떨어지는 소리가 나면서 둔궤가 저절로 열렸다. 그 후, 둔궤는 도주님께서 용화산 중턱에 있는 반구정에서 공부하실 때 이곳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당시 이곳에서 도주님을 심복하던 창원 사람이 둔궤를 훔쳐 갔다. 이것을 알게 된 종도들이 매우 안타까워하기에, 도주님께서는 종도들에게 “도수에 쓰였으면 족하니라. 둔궤의 둔 자는 도망 둔(遁) 자이도다”라고 이르셨다.06  

  그리고 1924년 여름(5~6월)의 일이었다. 도주님께서 배문걸 종도를 데리고 밀양 종남산 영성정에 이르러 폐백 도수07를 보시며, 밤 열 시부터 시작하여 아침 여섯 시까지 다섯 달 동안 진행하셨다. 이 도수는 함안군 반구정으로 옮겨와 마치셨다.08  폐백 도수를 마치신 그 이듬해 1925년 음력 4월에 전북 구태인 도창현에 도장이 완성되었다. 이때 도주님께서는 무극도를 창도하셨으며, 상제님을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상제’로 봉안하시고 종지 및 신조와 목적을 정하셨다.09

  반구정은 도주님께서 공부처로 이용하신 후, 몇 년이 지난 1929년에 함안 조씨 문중에서 다시 중수하여 1980년대 초까지 관리되다가 그 이후 17년 동안 방치되었다. 1998년 여름에 문중 사람들이 이를 보고 안타깝게 여겨 함안 조씨 후손들의 기금으로 퇴락한 정자(亭子)와 황무지로 변한 정원을 보수하고 정리하였다. 그리고 2002년 6월 이전에 임도에서 정자까지 진입로가 개설되었다고 한다. 현재 이곳은 함안 조씨 후손인 조성도 씨가 관리하고 있다.

  긴 세월과 함께 변모(變貌)한 반구정! 그러나 그 건물에 변함없이 꿋꿋하게 세월을 이겨온 물건이 있다. 그것은 반구정의 글이 새겨진 현판이다. 이 현판은 옛 반구정에 걸려있었던 것으로 400여 년이 넘는다고 한다. 그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사건 사고를 보아 왔을 것이다. 아마도 이 현판은 도주님께서 공부하시는 모습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지금은 우리를 보면서 묵언 수도를 하는 척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당시 도주님의 행적을 들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리고 반구정의 기둥에 오랜 시간의 흔적이 느껴지는 주련(柱聯)10이 보였다. 

 

洛水之陽名勝區(낙수지양명승구) 낙동강 볕이 잘 드는 명승지에


君恩許我此間遊(군은허아차간유) 임금의 은혜로운 허락으로

나는 이곳에 노닐고 있다. 


囂塵不到閒翁耳(효진불도한옹이) 시끄러운 속세의 소리가 한가로운

늙은이의 귀가에 이르지 못하고 


踈雨三便夢伴鷗(소우삼경몽반구) 거친 비가 오는 삼경에 갈매기와

짝을 이루는 꿈을 꾸는 도다. 

 

 

▲반구정 앞마당에서 본 전경


▲ 반구정 주련 

 

   이 한시에서 ‘반구정’의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이 시를 보면 조방 선생은 임진왜란이 평정된 이후, 옛 반구정에서 자연을 벗 삼아 생활을 하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시구(詩句) 중에 나의 마음을 울리는 구절이 있었다.

 

君恩許我此間遊(군은허아차간유)

 

   이 구절에는 조선의 신하로서 임금에 대한 충(忠)이 깃들어져 있었다. 조방 선생은 직접 경비를 들여서 말바위 위에 옛 반구정을 지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름다운 절경(絶景)을 즐기며 생활할 수 있게 된 것은 임금의 은혜, 즉 허락이 있었기에 가능하다고 표현했다. 상제님의 대순(大巡)하신 진리를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 상제님의 덕화 속에서 현재 살아가고 있음을 각인(刻印)시켜 주는 시구였다.

  반구정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절경은 누가 보아도 절로 감탄할 만하다. 반구정 앞마당에는 650년이 넘는 느티나무와 그 이전부터 흐르고 있었던 낙동강 그리고 그 주변으로 들판이 있고, 멀찍이 6·25전쟁을 겪었던 남지철교가 보였다. 오랜 시간을 걸쳐 살아온 모습이 느껴진다. 특히, 오랜 세월 동안 아침에 변함없이 뜨는 해의 모습은 장관이 아닐 수 없다. 변함없는 자연의 위대한 진리를 담기 위해 사진작가들이 찾아오게 되는 이유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느티나무 옆에서 절경을 바라보며, 도주님께서 구천상제님의 천지도수에 의한 공부를 행하시고 반구정 앞마당에 서 있는 느티나무 아래 앉아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시며,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시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대순회보> 20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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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위치는 함안군 칠서면 용성리 896번지다.

02 자(字)는 원부(元裒), 호(號)는 소명(少溟), 분성군(盆城君) 21세손, 호적상 이름은 배문준(裵文準). 『전경』 교운 2장 에 도주님께서 공부하실 때 시종을 들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영남의 근세 유학자로도 유명하여 여러 성씨(姓氏) 문중(門中)에 기문(記文)과 묘갈명(墓碣銘), 묘지명(墓誌銘)을 지었다. 그리고 1991년부터 2004년 돌아가실 때까지 유계(柳溪)서당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다고도 한다. 

03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산리 회문마을로 도주님의 생가인 회룡재가 있는 마을이다. 

04 정암은 함안군 군북면 월촌리와 의령군 의령읍 정암리 사이에 있는데, 강 가운데 바위가 있어 그 모습이 마치 솥 위에 겹겹이 쌓인 바위와 같다고 정암(鼎巖)이란 명칭이 생겼고 강가에 정암나루가 있다. 

05 경상남도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의 낙동강과 남강이 합류하는 지점을 기강(岐江)이라 하는데 일명 거름강이라고도 불린다. 

06 교운 2장 14~17절 ; 교운 2장 20절 참조.

07 《대순회보》 192호, 「밀양 종남산 영성정(靈聖亭)」 참조.

08 교운 2장 30절 참조. 

09 교운 2장 33절 참조. 

10 기둥이나 벽 따위에 장식으로 써 붙이는 글귀를 말하며 영련(楹聯)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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