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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마을을 찾아서

교무부    2017.03.28    읽음 :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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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마을을 찾아서

 

 

종단역사연구팀


 

  이해 十월에 도주께서 권 태로(權泰魯) 외 몇 사람을 이끄시고 모악산의 대원사에 이르시니라. 이때에 도주께서 “개벽 후 후천(後天) 五만 년의 도수를 나는 펴고 너는 득도하니 그 아니 좋을시구”라 하시고 이 정률에게 원평 황새마을에 집을 구하여 가족들을 그곳에 이사 거주하게 하고 자신은 대원사에 몇 달 동안 머무셨도다. (교운 2장 11절)

 

 
▲ 황새마을 전경

 

  황새마을!이곳은 도주님께서 1918년 10월 안면도에서 이사 오신 후부터 1925년 4월 무극도를 창도하기 전까지 포덕 활동의 중심지로 삼았던 도본부(道本部)가 있던 곳이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에 쓰였던 한 재판기록을 접하고서였다. 1927년에 작성된 그 문서에는 1920년대 초 각지에서 여러 신도가 낸 성금 내력에 대한 간단한 내용도 있는데, 그중 일부 도인은 정읍시 감곡면 계룡리 본부(本部)에 있는 한 간부를 통해 성금을 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호기심이 생겼다. 황새마을에 대한 연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먼저 황새마을과 그 주변 지역에 대한 토지대장을 검토하기로 했다. 황새마을에 도본부가 있었다면 도본부로 쓰였던 장소의 토지대장에 단서가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도본부 주변으로 몇몇 도인들이 이주해 와서 살았을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다. 이러한 추측은 맞아떨어졌다. 검토 결과 크게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는 당시 도본부의 위치와 규모였다. 둘째는 무극도 창도 이후 주선원보(周旋元補)라는 고위 간부였던 조송제(趙松濟) 씨 명의의 땅 주소지였다. 우리는 새롭게 밝혀진 이러한 내용을 현지에 가서 직접 확인해 보고자 답사팀을 꾸려 준비를 하고, 드디어 황새마을로 출발했다. 
  아는 만큼 느낀다고 하더니 지난해 다녀왔던 곳이건만, 알게 된 사실만큼이나 또 다른 새로움이 느껴졌다. 출발한 지 어느새 3시간쯤 흐르고, 내비게이션이 금산사 IC 방향으로 길을 안내했다. 요금소를 빠져나와 정읍 방면으로 가다 보니 원평 교차로가 나왔다. 여기서 좌측으로 700m 정도만 가면 상제님의 주요 행적지 중의 하나인 원평 시내가 나오고, 우측으로 난 경사진 길을 따라 400m 정도만 가면 황새마을이 나온다.
황새마을과 원평 시내가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다 보니, 행정구역상으론 두 지역이 각각 정읍시와 김제시에 속해 있지만 황새마을은 예전부터 원평 생활권이었다. 그래서 황새마을 사람들은 원평 장이 열리는 날이면 항상 원평으로 장을 보러 다녔다. 『전경』에 “원평 황새마을”이라고 쓰인 것도 그런 지역적 특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황새마을의 지명 유래
  마을 입구에 다다르니, 커다란 팽나무 한그루가 우리를 맞이해 주었다. 오랜 세월 동안 이 나무는 마을의 역사와 같이한 듯 보였다. 나무 건너편에 있는 ‘관봉 새마을’, ‘관봉’이라 새겨진 2개의 표지석이 마을 입구임을 알려주었다. 황새마을의 오늘날 행정구역상 명칭은 관봉(觀峰)마을이다. 이 마을은 전북 정읍시 감곡면 계룡리에 속한 4개 마을 중 한 곳이다. 원래 태인군 감산면 반룡리 관촌(鸛村)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계룡리가 만들어졌고 이웃한 계봉리(桂峰里)의 일부가 합쳐지면서 계봉리의 봉 자를 써서 관봉(觀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관의 한자 ‘鸛이 지금의 觀’으로 바뀐 시기는 확실치 않다.01

 



  마을 이름을 ‘황새멀’, ‘황새물’이라고도 부른다. 이런 지명을 갖게 된 것은 그 지형이 황새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이라는 설02이 있고, 황새가 날아오르는 형국이라는 설03도 있다. 어느 풍수가가 이름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 종단 역사의 흐름에서 본다면 ‘알을 품고 있는 지형’으로 보는 것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황새마을에서의 시기를 거치고 난 후, 마치 어미 뱃속의 알이 세상에 나오듯이 비로소 종단의 형태를 제대로 갖춘 무극도가 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 마을 입구에 있는 팽나무

 

 

도본부 터에 가다
  입구를 따라 이어진 골목길을 내려가니, 옹기종기 모인 집들로 이루어진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35가구 정도가 모여 사는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다. 우리 일행은 먼저 도본부가 있던 장소로 향했다. 이번 조사가 있기 전까지 도본부 터로 알고 있던 장소는 계룡리 155번지 한 곳이었다. 그런데 조사 과정에서 도본부 터로 추정되는 곳이 추가로 발견되었다. 그 주소지는 소유권 이전 당시 계룡리 156-1번지였던 장소인데, 지금의 156-1번지의 일부, 156-2번지, 156-3번지 세 곳이다.
  먼저 155번지로 갔다. 검은색 개량 기와지붕을 한 단층집이었다. 현재 대지면적은 380㎡(115평)인데 도본부로 사용될 당시와 차이가 없었다. 이 터가 도주님 부친(조용모) 명의로 이전된 시기는 1926년 4월이었다. 그런데 도본부 터라고 확신하는 것은 두 가지 문서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었다.
첫 번째는, 상제님 성골 발굴 사건과 신도들이 도본부에 낸 성금 내력에 대해 간단히 기록하고 있는 도주님 부친 관련 재판기록이다. 1927년에 만들어진 그 문서에는 “제2. 대정 12(1923)년 음력 1월 중에 전라북도 정읍군 감곡면 계룡리의 본부에서 ○○○에게서 ○○○ 간부의 손을 거쳐 돈 150원을. 제5. 동년(1923년) 음력 12월 중에 위의 전라북도 본부에서 ○○○에게서 피고 조용모의 손을 거쳐 돈 650원을.” 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 내용을 보면 계룡리에 도본부가 있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두 번째는, 도주님 부친의 호적 내용이다. 여기에는 도주님 부친의 본적지 이전 시기와 과정이 있는데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가장 먼저 본적지 등록을 한 시기는 만주에서 안면도로 건너온 바로 직후인 1918년 2월인데, 주소는 충남 서산군 안면면 창기리 1183번지이다. 이곳은 1925년 무극도 창도 이후 도주님께서 안면도에서 간척사업을 할 때 공부 장소로 썼던 홍일우 근처이다. 다음 본적지는 이번 답사지인 전북 정읍군 감곡면 계룡리 155번지인데 그 등록 시기는 나와 있지 않다. 그러다가 1925년 무극도 창도 이후인 1927년 4월에는 무극도장 자리인 전북 정읍군 태흥리 524번지로 본적지를 이전하셨다.
  그러면 도주님 부친의 본적지와 도본부가 어떤 연관이 있다는 것인가? 그 연관성을 알기 위해선 도주님 부친께서 무극도에서 어떤 위치에 있었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제가 만든 ‘무극대도교개황(無極大道敎槪況)’에 보면 무극도 도규(道規)에 도장(道長)이라는 직책이 나와 있다. 이 직책은 도중(道中)의 내외사무(內外事務)를 총할(總轄)한다고 적혀있다. 그런데 여러 자료를 통해 보면,04 당시 도주님 부친께서 도장(道長)의 직책을 수행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역할은 황새마을 시기에도 거의 같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므로 도주님 부친의 주소지는 곧 도본부라고 봐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곳의 내력에 대해 혹시 좀 더 알 수 있을까 해서 현재 이 집에 살고 계신 분들을 만났지만, 한참 이후에 이사 오신 분들이라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다음으로 확인한 곳은 추가로 발견된 도본부 터 추정지였다. 현재 156-1번지 주변 일대로 155번지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 소유권 이전 당시 주소 156-1번지의 장소를 추적하여 대지면적을 계산해보니 185㎡(56평)였다. 이 터가 도주님 부친 명의로 이전된 시기는 155번지와는 불과 한 달 차이인 1926년 5월이었다.

 


▲ 도본부 추정 위치

 


  이번 조사를 하면서 알게 된 몇 가지 정황들이 여기도 언제부터인가 도본부 터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케 한다. 첫째는, 안면도에서 이사 올 때는 신도들 숫자가 수십 명에 불과했지만, 그 이후 황새마을을 중심으로 포덕 활동이 활발히 일어나 무극도장이 건립되기 전에 이미 전국의 신도들이 수만 명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도주님 부친 관련 재판기록을 보면, 본부에 성금을 낸 신도들 수만 해도 3만여 명인 것으로 보아, 실제 신도 수는 그 이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답사를 통해 155번지를 둘러봤을 때, 그 터에 있는 집 규모가 가족과 일가친척들의 살림 장소로 쓸 정도는 되어 보였으나, 도의 업무까지 보기에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주인 말씀에 의하면, 30년 전쯤에 이사 와서 처음 집을 개량했을 때는 큰방 2칸, 부엌 1칸, 앞 마루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최근에 구조를 일부 변경했다고 했다. 둘째는, 예전 155번지와 156-1번지가 서로 붙어있었다는 점이다. 두 주소지 사이에 현재는 골목길이 통과하고 있어서 터가 분리되어 있지만, 당시에는 붙어있었기 때문에 도본부 터로 같이 쓰기에 쉬웠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155번지만으로는 부족했던 공간을 이 터를 같이 씀으로써 해결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황새마을에 마련된 도본부는 도주님의 공부 장소의 역할보다는 포덕 활동을 위한 중심지의 역할에 더 많은 비중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도주님께서 이 마을에 오신 다음 해인 1919년부터 황새마을에서 3km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통사동 재실(通士洞齋室)을 마련하여 공부하셨던 여러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또 이 재실 외에도 무극도장이 건립되기 전까지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반구정(伴鷗亭), 영성정(靈聖亭) 등 여러 장소를 옮겨 다니면서 공부를 하신 기록들을 볼 수 있다.
  황새마을을 중심으로 한 포덕 활동은 일제의 종교탄압 정책하에서 전개되었다. 활동 지역은 경상도를 위주로 하여 전라도, 강원도 등이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포덕 활동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황새마을에 이사 오실 당시만 해도 수십 명에 불과하던 신도 수가 무극도를 창도할 무렵에는 수만 명에 이르렀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본부 주변의 관련 터들
  이 마을에는 도본부 터 외에도 한때 주선원보(周旋元補)라는 무극도 간부로 있던 조송제 씨 명의의 터도 있었다. 주선원보는 도주님께서 1923년 전교의 임무를 맡기기 위해 마련하신 두 직책(주선원·주선원보) 중 하나인데, 무극도 창도 이후에도 이어져서 당시 수도조직 체계상 주선원 다음의 고위 직책이었다. 발견된 터는 모두 세 곳이었다. 두 곳은 대지로 되어 있는 계룡리 161-1·186번지이고, 나머지 한 곳은 임야로 되어있는 계룡리 산 60-1번지이다. 대지 두 곳은 1938년에 동시에 사들여서 1940년에 동시에 팔았다. 또 임야는 1931년에 사들여서 그다음 해인 1932년에 팔았다.
  조송제 씨는 왜 이 마을에 땅을 세곳이나 매입하셨을까? 그것도 1930년이 훨씬 넘어서 말이다. 답사를 해보니, 161-1번지 터 위치는 공교롭게도 도본부 터 바로 옆에 있었다. 186번지 터도 도본부 터에서 걸어서 불과 5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조송제 씨가 도주님의 측근이었고 터 위치도 본부 터 근처에 있는 것으로 봐서, 조송제 씨 명의의 터는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 도주님의 포덕 활동과 밀접한 관련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밖에 계룡리의 4개 마을 중 하나이며 황새마을 바로 옆에 위치한 반룡마을에는 1925년 무극도장 터를 처음 등기할 때 소유주였던 조주혁(趙周赫) 씨의 주소지[당시 주소 계룡리 69번지(현주소 산69-1)]가 있다. 토지대장에서 그분 이름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곳에 잠시 살았거나 아니면 주소지만 그쪽으로 해 놓았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이분의 신원에 대해서는 아직 아는 바가 없으나, 무극도장 터의 소유권자로 되어 있을 정도라면 황새마을 시기에 입도를 해서 무극도장을 건설할 무렵에는 도주님의 두터운 신뢰를 받았던 인물이었을 것이라 짐작된다.  

 

 
▲ 조송제 씨 명의의 터(노란색 원)와 조주혁 씨 주소지(빨간색 원) 위치

 

 

황새 마을 시기의 주요 행적들
  1918년 가을에 도주님께서는 상제님께 치성을 올리신 다음 “김제 원평에 가라”는 명에 따라 상제님께서 9년 동안 행하신 공사의 주요 행적지인 원평을 거쳐 구릿골 약방까지 두루 돌아보셨다. 그해 10월에 원평 황새마을에 도본부를 정하셨다.
  황새마을에 도본부를 정하신 다음 해(1919년) 정월 보름에 도주님께서는 정읍 마동으로 가셨다. 그곳에서 상제님의 누이동생인 선돌부인을 만나 상제님의 유품인 봉서(封書)를 전해 받으셨다. 상제님께서 화천하시던 해인 1909년에 을미생이 정월 보름에 찾아오면 전해주라고 하시며 선돌부인에게 봉서를 맡기셨던 것이다. 마동에서 보름 동안 머무시다가 황새마을로 오셨다.

 

 

  ▲ 통사동 재실, 지금은 그 모습을볼 수 없고 터만 남아있다. (2003년)

 
  도주님께서 황새마을 인근에 있는 통사동 재실에서 도수를 보고 계셨는데, 선돌부인께서 하루는 “구릿골 약방에 비치하셨던 둔궤가 천지도수의 조화둔궤라, 하루바삐 그것을 찾도록 함이 어떠하겠나이까”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래서 그해(1919년) 9월에 도주님께서는 차경석의 보천교 본부에 둔(遁)궤가 있음을 확인하시고 통사동(通士洞) 재실로 모셔오게 한다. 도주님께서는 재실에서 둔궤를 모시고 공부를 하시다가 함안 반구정(伴鷗亭)으로 옮겨 공부를 마치셨다.
  이후 1921년 9월에는 도주님께서 동곡에 초빈되어 있던 상제님의 성골을 수습하여 통사동(通士洞) 재실로 모셔와서 밤낮으로 치성을 올리며 공부를 하셨다. 둔궤와 상제님의 성골을 모시고 공부를 하셨던 통사동 재실은 황새마을 도본부로부터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이 재실은 도주님께서 1919년에 공부를 위하여 따로 마련하신 곳이었다.
  상제님의 2가지 유품과 상제님의 성골을 모두 모셔온 이후 도주님께서는 도수에 따라 공부를 하시고, 1923년 “금년이 이재신원(利在新元) 계해년이라.”말씀하시고 ‘전교(傳敎)’를 발표하셨다.
  이후에 도주님께서는 1925년 무극도 창도 전까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도수에 의한 많은 공부를 계속하시게 된다. 밀양 세천 김병문 집에서의 둔도수, 청도 유천 박동락 집에서의 단도수, 청도 적천사 도솔암에서 4달 동안의 단도수, 밀양 종남산 영성정(靈聖亭)에  5달 동안의 폐백 도수(幣帛度數) 등이 그것인데, 이는 아마도 무극도 창도와 깊은 관련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러한 공부를 마치신 후, 마침내 1925년 4월에 무극도를 창도하신다. 그리고 도본부를 황새마을에서 전라북도 구태인 도창현으로 옮기시게 된다.

《대순회보》 19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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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최순식, 《김제 시민신문》 2005. 2. 5.
02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 12(전북편하)(1988), p.383.
03 재경감곡면향우회, 『내고향 甘谷』 (2006), pp.130~131.
04 그중에 하나는 《동아일보》, 1926. 9. 21, 5면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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