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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神話)의 섬, 제주(濟州) 2

교무부    2018.09.10    읽음 :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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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神話)의 섬, 제주(濟州) 2 

가장 작은 도(道), 가장 큰 도(島) 제주(濟州) 

편집팀

 


▲한라산 

 

가장 작은 도(道), 세 가지 선물                     

  제주도는 행정 구역상 8개 도(道) 가운데 가장 작은 도다. 더욱이 한라산을 지붕 삼아 펼쳐져 있는 제주도를 일컬어 ‘삼다(三多)’, ‘삼무(三無)’, ‘삼보(三寶)’의 섬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제주의 자연환경은 화산과 기후에 기인하는 바가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돌이 많고, 바람이 많고, 여자가 많다고 해서 ‘삼다(三多)’라 했다. 바람과 돌은 제주만이 갖는 독특한 자연환경에 기인한 것이지만, 여자가 많다는 것은 섬이라는 격리되고 척박한 자연환경 속에 적응해온 삶의 결과물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제주의 남자들이 생사를 오가는 뱃일에 의존해 삶을 영위했기 때문에 여자가 수적으로 많았던 데서 연유한다. 그러나 제주의 생활환경이 각박하여 여자들도 남자와 함께 일터로 나오지 않으면 안 되었던 데서 붙여진 측면이 더 크다. 삶이라는 거친 파도를 넘으며 바다와 함께 울고 웃었던 해녀는 여성들이 바다로 나가서 일하는 여다(女多)의 섬 제주를 표상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제주는 삼무의 섬으로도 통한다. ‘삼무(三無)’란 도적이 없고 거지가 없고 대문이 없다고 하여 나온 말이다. 제주인들은 평소 근면 절약하고 상부상조하는 삶을 이루어 집의 대문도 필요 없었다. 집주인이 일터로 나갈 때 사람이 없다는 표시로 집 입구에 긴 나무를 걸쳐두면 되었다. 이 나무가 제주의 ‘정낭’01이다. 마지막으로 제주만이 갖는 ‘삼보(三寶)’는 민속학자들의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정의되고 있지만, 자연·민속·토착산업을 일컫기도 하고, 식용작물·수산·관광의 세 자원을 말하기도 하나, 크게 바다·언어·관광자원이라는 의미로 통용된다. 이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이라는 특수성이 한몫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렇듯 섬 한가운데 우뚝 솟은 한라산을 중심으로 오밀조밀한 자연경관이 빚어낸 세 가지 선물은 무엇보다 우리 도(道)의 후천선경(後天仙境)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한라산 신(神)이 여신(女神)이라는 점과 제주에서 여성이 주류(主流)를 이루는 것은 상제님께서 “후천의 도통군자에는 여자가 많으리라”(예시 45절)고 하셨듯이, 앞으로의 세상은 여성의 기세가 크게 향상됨을 시사하고 있다. 그리고 “후천에는 또 천하가 한집안이 되어 위무와 형벌을 쓰지 않고도 조화로써 창생을 법리에 맞도록 다스리리라. … 병들어 괴롭고 죽어 장사하는 것을 면하여 불로불사하며 빈부의 차별이 없고 … 세상에 수·화·풍(水火風)의 삼재가 없어져서 상서가 무르녹는 지상선경으로 화하리라”(예시 81절)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 세상의 크고 작은 온갖 고통이 없고 세상 사람들 모두 한집안 식구가 되어서 도둑·거지·대문이 필요 없는 후천세계의 모습 그대로 세 가지 선물에 담겨 있는 것이다.

 

가장 큰 도(島), 포한(抱恨)의 자취

  우리나라의 최남단에 있는 가장 큰 도(島). 섬 속의 섬이라는 말이 있듯 제주도는 80개의 크고 작은 도서(島嶼)로 구성된 섬이다. 이러한 제주도를 사람들은 여러 이름으로 부르며 그리워한다. ‘유토피아의 시·공간을 옮겨 놓은 섬’, ‘하늘이 선물한 섬’, ‘누구나 가 보고 싶고, 살아 보고 싶은 그리움의 섬’이 제주도라고. 그러나 역사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면 눈물과 한숨 없이는 가까이할 수 없는 한(恨) 많은 땅이 제주도다.

  그 한의 역사는 삼별초의 대몽항쟁 이후, 제주인들의 고통스러운 원한에서 비롯된다. 고려 원종(元宗, 1219∼1274) 14년에 제주의 삼별초군이 제압된 후, 원(元)나라는 점령지 통치관인 다루가치(達魯花赤)를 보내 내륙의 고려와 달리 제주를 직접 담당했다. 그 이유는 이곳을 목마장(牧馬場)으로 이용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제주는 원나라 국영목장의 하나가 되어 근 100년간 몽골에 예속된 채 식민지 지배를 받는 쓰라린 역사를 겪었다.

  원의 멸망으로 식민지에서 벗어나자 제주는 뭍에서 격리된 절해고도라는 여건이 중죄인들의 섬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여기서 중죄인이라고 하면 무슨 큰 범죄를 저지른 사람으로 오해하기 쉽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 사실 이곳 제주에 온 중죄인들은 잔인무도한 범죄자가 아니라 대부분 사회 비판의식이 강한 정치범들이었다. 문제는 영조(英祖, 1694~1776) 33년인 1757년에 “유배객들이 제주목에 집중되어 있어 그들을 제주 삼읍(三邑)에 분배했지만, 유배객들이 계속 늘어나자 제주 사람들이 매우 곤혹스러워합니다”라는 상소문의 기록에서 나타나듯 뭍에서 유배를 와서 한 맺힌 세월을 보낸 이들로 인해 제주인들의 한도 적지 않게 쌓여만 갔다는 것이다.02

 


▲ 제주도 목마장

 

  또 하나, 고려 때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부패한 수많은 벼슬아치가 제주부의 아전과 결탁하여 자신의 승진을 위해 지나친 특산물 진상(進上)을 주민들에게 부과해 제주인들의 삶을 핍박하게 만들었던 점이다. 설상가상 끊임없는 왜구의 침략과 노략질까지 빈번해지자 그들의 선택은 자신이 태어난 고향을 등지고 기회만 되면 뭍으로 나가는 것이 자신과 후세를 위한 최선이라 여겼다. 이에 인조(仁祖, 1595∼1649)는 1629년, 도민들이 육지로 나가는 것을 금지하는 출륙금지령(出陸禁止令) 조치를 단행하기에 이른다. 이후 출륙금지령이 풀린 1850년까지, 200년 이상 제주인들은 고통과 질곡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조정과 제주부의 횡포가 극심해지면서 굶어 죽을 지경에 이른 제주인들은 끝내 한 맺힌 질곡에서 벗어나기 위해 철종 13(1862)년 9∼11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민란을 일으키게 되었다.03

  폐단이 잇따르는 것은 이뿐만 아니었다. 일제강점기라는 뼈아픈 역사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면서, 일제의 세계대전 발판을 위한 군사기지로 강제노역과 징병에 시달리게 되었다. 이들의 마구잡이식 징용과 징병에 안 끌려간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로, 제주인들의 삶은 피폐함 그 자체였다. 그저 인간다운 삶의 존엄을 빼앗긴 채 죽지 못해 하루하루 살아갈 뿐이었다. 시간이 흘러 해방을 맞이하지만, 제주인들의 포한(抱恨)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무고한 인명피해가 2만 5,000명∼3만 명에 이른 1948년에 발생한 4·3사건이 그것이다. 대다수 희생자 유해들은 신원 확인이 안 된 채 장례는커녕 반세기가 넘도록 그 원혼(冤魂)이 구천을 떠돌고 있어 유족들로선 평생 한이 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남은 유족들은 어려서부터 폭도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는 게 일쑤였고, 연좌제의 사슬에 묶여 뭍으로의 진출은 꿈도 꾸지 못했다. 사실상 뭍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된 채 부모의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후세들의 가슴엔 돌덩이처럼 무거운 원과 한이 점철되었다.

  기나긴 겨울잠에서 땅이 깨어나듯 그 한의 실타래가 풀리기 시작했다. 화산섬이라는 제주만의 독특한 자연환경, 그리고 제주 해녀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및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선정된 것이 세계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자연 속의 명소로 주목받게 된 이유이다. 상제님께서 “이제 해원시대를 맞이하였으니 사람도 명색이 없던 사람이 기세를 얻고 땅도 버림을 받던 땅에 기운이 돌아오리라”(교법 1장 67절)고 하신 말씀에서 알 수 있듯, 제주는 그동안 켜켜이 쌓인 원과 한이 풀림으로써 세계인들로부터 주목받는 생태관광지 및 휴양지로 탈바꿈해 하늘이 선물한 도[島]로 입지를 굳혀 나간 것이다.


제주의 상징과 을나(乙那)의 나라

  한라산이 제주를 상징하는 산이자 얼굴이라면, 제주의 오랜 상징 유물이자 마스코트는 ‘돌하르방’이다. 머리에는 벙거지 같은 모자를 쓰고, 뱃살을 가리듯 감싸고 있는 양손, 툭 튀어나온 크고 동그란 눈, 주먹코 등 무척이나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마치 “어서 와! 제주는 처음이지?”라고 하듯이 웃음기 어린 표정으로 서 있는 돌하르방은 ‘돌로 만든 할아버지’라는 뜻의 제주 방언이다. 재미난 점은 아이들 사이에서 애칭으로 부르던 이름을 1971년 문화재위원들이 제주와 더없이 잘 어울리는 것으로 여겨 정했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우석목(偶石木)·박수머리·돌영감·수문장·옹중석(翁仲石)·돌미륵 등 다양한 명칭으로 제주인에게 불렸는데, 그중 우석목이 가장 널리 쓰였다.

 


▲ 돌하루방과 정낭

 

  섬 구석구석 어디 가나 보게 되는 돌하르방이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으나, 1918년 김석익(金錫翼, 1885~1956)의 『탐라기년(耽羅紀年)』에 “영조 30년(1754)에 목사(牧使) 김몽규(金夢奎, ?∼?)가 옹중석(翁仲石)을 제주읍의 성(城) 제주목·정의현·대정현의 삼문(三門) 밖에 세웠다”는 기록에서 대략적인 시기를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옹중석이란 중국 진시황 때 장수인 완옹중(阮翁仲, ?∼?)의 설화에 나오는 수호신적인 의미가 담긴 조형물로,04 제주인들은 잘 쓰지 않는 돌하르방의 옛 이름이다. 그런데 제주 목사가 성문 앞에 돌하르방을 세운 이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돌하르방05이 지니는 수호신적·금표(禁標)06적 기능에서 그 이유를 엿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기능이 의아하게도 육지의 장승과 매우 유사한 의미를 띤다. 장승은 한 마을을 지키고 보호하며, 사찰이나 지역 간의 시작과 경계를 알려줌과 동시에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표시하고 부정한 사람과 잡귀의 접근을 막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돌하르방 역시 그 상징적인 의미에 역점을 둔 것으로 풀이된다. 여기에 조선의 지방관청이 민중의 신앙적 소산물인 돌하르방을 터부하지 않고 이를 성문 앞에 세워 제주만이 갖는 독자적인 문화로 구현해 내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주목의 대상이 될 만하다. 그 덕에 18세기부터 잘 보존되어 내려오는 돌하르방은 모두 47기에 이른다. 제주목 23기, 대정현 12기, 정의현 12기인데, 그중 2기는 경복궁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에 옮겨져 현재 45기가 제주도에 남아 있다.

 


▲ 삼성혈

 

  이렇게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돌하르방 중에서 유독 한 쌍이 눈길을 끈다. 그것은 삼성혈(三姓穴) 입구인 홍살문(紅箭門)에 세워진 돌하르방으로, 제주 시조인 고을나(高乙那)·양을나(良乙那)·부을나(夫乙那)라는 삼신인(三神人)이 깃든 이곳을 수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 을나는 독특하게도 가야나 신라, 고조선처럼 시조가 하늘에서 내려오거나 알에서 태어난다든지 혹은 한 사람인 것에 비해, 독특하게도 제주 시조인 세 을나(乙那)는 땅에서 솟아나고 한 사람이 아닌 세 사람이라는 점이 내륙과 대조를 보인다. 이 세 을나가 나온 삼성혈의 옛 이름은 모흥혈(毛興穴)이었다.

 

  세 신인은 인적 없던 제주 모흥(毛興)이라는 곳의 세 구멍에서 동시에 솟아났다. 맏이를 양을나(良乙那), 둘째를 고을나(高乙那), 셋째를 부을나(夫乙那)라 하였다. 삼신인은 가죽옷을 입고 사냥을 하는 원시의 수렵생활을 하며 살다 하루는 연혼포(延婚浦: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에 떠밀려온 목함(木函) 안에서 나온 세 여인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들은 벽랑국(碧浪國: 동해에 있다고 하는 상상의 나라)에서 온 공주들이었는데, 목함에는 우마(牛馬)와 오곡의 씨앗이 함께 있었다고 한다. 이에 삼신인은 제물(祭物)을 정결하게 갖추고 연못[혼인지(婚姻池)]에서 목욕재계한 후 하늘에 고하여 각기 세 공주와 혼인하였다. 그리고 연못 옆 동굴07에서 신방을 차리니 인세(人世)의 시작이며 이로써 농경사회로 발전하고 정주(定住)의 기초가 되었다 하였다. 삼신인은 각기 정주할 생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하여 도읍을 정하기로 하고 한라산 중턱에 올라가서 거주지를 선택하는 활을 쏘아 제주를 삼분하여 일도(一徒)와 이도(二徒: 지금 삼성혈이 있는 곳이 이도 1동이다)와 삼도(三徒)로 정하니 이로부터 오곡을 심고 우마를 길러 촌락이 이루어졌으며, 자손이 번성하여 탐라국(제주의 옛 명칭)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이때 삼신인과 벽랑국 공주가 결혼하여 낳은 자손이 제주의 고씨·양씨·부씨다.08 

 

  이렇게 제주인의 독특한 발상지 신화를 갖는 삼성혈은 현재 빽빽하게 우거진 소나무 숲 가운데 품(品) 자 모양으로 배열된 구멍[혈(穴)]의 자취만이 남겨져 있다. 언뜻 보면 가운데가 동그랗게 우묵히 푹 패인 질그릇에 바닥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는 시루를 연상케 한다. 놀라운 것은 이 구멍이 비가 와도 물이 고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바다와 맞닿아 있을 정도의 깊이를 갖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더욱이 주위의 노송들이 신하가 어소(御所: 임금이 계시는 곳)를 향해 읍(揖)하듯 시루 구멍 쪽으로 수그려서 경건함과 신비로움을 동시에 자아낸다. 그래서 돌하르방 한 쌍이 삼성혈 홍살문에서 제주인의 시원(始元)을 받드는 성역(聖域)이니 몸과 마음을 경건히 하라며 근엄하고 의젓하게 수호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돌하르방이 지닌 수호와 금표의 상징적 의미는 제주에만 국한된 것은 아닌 듯하다. 그 이유는 양위 상제님을 봉안하고 천지신명이 깃든 신성한 성지(聖地)인 대순진리회 여주본부도장 숭도문(崇道門) 앞과 금강산토성수련도장 정원에도 돌하르방이 서 있기 때문이다.09 도장의 돌하르방은 외부의 사악함을 감시하고, 도법(道法)을 수호하는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대순회보> 19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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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정낭이 놓여 있는 것에 따라 집주인의 생활 반경을 알 수 있다. 정낭 3개가 정주목에 다 걸쳐 있으면 주인이 먼 곳에 출타 중이라는 표시이며, 다 내려 있으면 주인이 집 안에 있다는 징표다. 또 정낭이 2개는 걸쳐지고 1개가 내려지면 주인이 조금 먼 곳에, 1개가 걸쳐지고 2개가 내려 있으면 가까운 곳에 볼일 보러 갔다는 표시이다.

02 이영권, 『다시 쓰는 제주사』 (서울: 휴머니스트, 2005), pp.174∼183 참조.

03 앞의 책, pp.262∼283 참조.

04 완옹종은 중국 안남(安南) 사람으로, 힘이 천명의 기운에 달하는 거인장수로 알려진 인물이다. 진나라가 흉노의 침입을 막느라 만리장성을 쌓을 때 완옹종 장수가 매우 용맹하여 흉노족이 벌벌 떨었다고 한다. 그가 죽자 진시황은 구리로 그의 형상을 만들어 성문 앞에 세워놓았다. 흉노는 완옹종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고 진나라에 쳐들어왔지만, 멀리 성문 앞에 우뚝 서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그대로 도망갔다. 이후 만리장성의 각 성문 앞에는 수호상으로 옹종석을 세웠다고 한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7』 (경기: 창비, 2012), p.211 참조.

05 돌하르방이 어디서 왔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하다. 남태평양 이스터 섬의 석상처럼 거인숭배신앙이 우리나라에 전파된 것으로 보는 남방기원설, 제주가 원나라의 지배받을 때 몽골로부터 영향받은 것으로 추정하는 몽골기원설 등이 있다.

06 금지나 경고 등을 나타낸 표지(標識)로, 금송(禁松)·금줄 등도 포함된다. 마을 어귀나 아이를 낳은 집 대문에 새끼줄로 된 금줄을 쳐서 잡귀의 접근을 막는 풍습이 그러한 사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외에도 돌하르방은 미륵과의 유사한 생김새로 인해 미륵신앙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특히 육지와는 달리 기복, 풍어, 득남 등의 기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07 신방굴(神房窟)이라 하는데, 그 안에 각기 세 개의 굴이 있었다고 한다.

08 『한국민속신앙사전 마을신앙 편』 (서울: 국립민속박물관, 2009) 참조.

09 《대순회보》 35호, 「도전님 훈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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