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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님의 만주 봉천행 길을 따라서

교무부    2017.03.27    읽음 :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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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님의 만주 봉천행 길을 따라서



 연구원 이정만

 

 

 

  여주본부도장 주변으로 봄의 전령사 개나리가 한창 자태를 뽐낼 무렵, 우리 일행은 도주님께서 만주 봉천(奉天) 지방으로 가실 때01 회문리에서 창원역까지 걸어가셨으리라 추정되는 길을 답사하기 위해서 경남 함안(咸安)으로 출발했다. 도주님께서 만주 봉천으로 가시는 과정에 대한 자세한 정황(情況)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자료들은 많지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도주님께서 회문리에서 창원역까지 걸어가신 길을 그 지방 사람들의 증언과 도로 지형 등을 참고하여 추정해 보았다. 

  이번 답사는 [사진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자동차도로가 있는 ①→②, ③→④ 구간은 자동차로 이동하면서 코스를 살펴보고, 천주산 코스인 ②→③ 구간은 직접 걸으면서 도주님의 발자취를 체험해 보기로 했다. 3시간 30여 분을 달려서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도주님 생가02가 있는 회문마을이었다. 

  함안은 가야왕국을 이룬 6가야03 중 아라가야의 본거지로 알려져 있다. 함안이란 지명은 신라 경덕왕 16년(757)에 최초로 불렸고, 고려 성종 14년(995)에 함주(咸州)로 개칭되었다가 현종 9년(1018)에 다시 함안으로 고쳐졌다.  

 

  

  함안의 지세는 특이하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도읍(都邑) 대부분이 서북이 높고 동남이 낮아 북을 등지고 남을 향하여 형성되어 왔는데, 유독 함안만은 동남이 높고 서북이 낮아 고산계곡이 동남에 이루어져 물이 북으로 흘렀다고 한다.04 그래서 왕조시대(王朝時代)에는 물이 임금이 계신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불경스러운 고장이라 하여 홀대를 받았다. 한편, 함안이란 지명은 다 함께 화합하여 안가태평(安家太平)을 기원하는 뜻으로 다 함(咸)과 편안할 안(安)을 사용한 것에서 유래되었다.05 오랫동안 천대받던 곳이면서도 안가태평의 의미가 담겨있기도 한 함안이라는 땅에서 구천상제님의 유지(遺志)를 받드실 도주님께서 탄강하신 것은 단지 우연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회문리(會文里)’라는 지명은 한 도사가 풍수지리를 본 결과 동쪽에는 작대산(爵大山)이 마주 보이고 마을 앞에는 광려천이 유유히 흘러 앞으로 문인이나 선비들이 많이 배출될 것이라 하여 이름을 ‘회문’이라 지었다고 한다.06

 


  회문마을 입구에서 골목길을 따라 안쪽으로 조금만 들어가다 보면 골목길 끝자락에 현대식 2층 주택이 있는데 이 터가 도주님께서 탄강하신 곳이다. 원래는 기와집이던 것을 도주님의 장남인 고(故) 조준래 씨가 1990년대에 새로 지은 것이다.

  함안 조씨(趙氏)의 시조는 조정(趙鼎)이라는 분이다. 그는 후당(後唐)07 때 사람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930년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의 후삼국통일에 크게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에 왕건은 조정을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으로 삼았으며, 조정은 고려의 대장군 원윤(元尹)을 지내며 충장공(忠壯公)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그 후손들이 이 분을 시조로 하고 본관을 함안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나가니, 함안 조씨는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로 이 가문에는 고려 말에 공조전서(工曹典書)로 고려가 망하자 함안으로 낙향하여 조선 왕조의 부름에도 불응하고 끝까지 충절을 지킨 조열(趙悅), 생육신의 한 사람인 조려(趙旅),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전쟁에 공로를 세운 조방(趙垹) 등 우국충절을 중시하는 인물들이 대대로 이어졌다.08 

 

 

 

  또한, 도주님의 조부(祖父)인 조영규(趙榮奎)는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로 있다가 1905년 굴욕적인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통탄한 나머지 분사(憤死)한 배일사상가(排日思想家)였다. 이러한 가풍을 이어받은 부친(휘 용모)과 그의 두 아우(휘 용의·용서) 역시 반일운동에 활약하였다.

  도주님께서는 이러한 가문에서 탄강(誕降)하시어 배일사상의 영향을 받으시면서 성장하셨다. 그러다가 일본에 의해 나라의 주권이 빼앗길 상황이 임박했음을 개탄(慨嘆)하시고, 1909년 음력 4월 28일에 부친, 숙부 등과 함께 만주(滿洲) 봉천(奉天) 지방으로 망명(亡命)길에 오르시게 된다.09

  도주님께서 만주 봉천으로 망명을 하실 때의 행로 및 교통수단을 추정해 보면 그 당시 함안의 지형이나 국내·외 교통수단 등을 고려해 볼 때 회문리에서 창원역까지는 몸소 걸어가시고, 창원역에서 신의주까지는 기차를 이용하셨을 것이며, 신의주에서 만주 단둥(丹東)까지는 배편으로, 단둥에서 만주 봉천까지는 육상교통수단을 이용하셨을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창원역에서 신의주까지 기차를 이용하셨을 것으로 추정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1899년 경인선 개통을 시작으로 1905년 1월 1일에는 경부선(서울~부산)을 개통하였고, 1905년 5월 26일에는 마산선(삼랑진~마산)을 개통하였으며, 1906년 4월 3일에는 경의선(서울~신의주)을 개통함으로써 도주님께서 만주 봉천으로 가시던 1909년에는 이미 창원에서 신의주까지 기차가 운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의주에서 만주 단둥(丹東)까지는 아직 압록강 철교10가 완공되기 전이어서 배를 이용할 수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이번 답사는 도주님의 만주 봉천행 길 전체구간 중 몸소 걸어가신 회문마을 생가에서 창원역 구간까지로 정하고, 그 중에서도 특히 함안에서 창원으로 넘어가는 지름길이었던 천주산 길을 직접 걸어보는 것에 비중을 두었다.

  회문마을에서 출발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천주산(天柱山) 등반 출발지점인 함안군 칠원면 무기리(咸安郡 漆原面 無沂里) 산정(山亭)마을 회관 앞에 도착했다. 회문마을에서 산정마을회관까지 거리는 9km 정도이고 자동차로 20여 분 정도 걸린다. 지형을 고려해 이 구간 자동차도로 코스를 살펴보면, 옛사람들이 걸어 다닌 것으로 추정되는 길과 큰 차이가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산정마을은 크게 두 군데로 형성되어 있다. 아래쪽은 양달마을이라 하고 위쪽은 음달마을이라 부른다. 마을회관이 있는 곳은 음달마을이다. 산정마을이 자리잡고 있는 곳은 청룡산 줄기에 있는 작대산 골짜기에 있는데 이곳에는 옛날 용이 살다가 승천한 자리인 용지굴이 있다. 그런데 칠원현에서 날씨가 가물 때 용지굴 앞에서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꼭 온다고 전해져 예전에는 마을 이름을 용골[龍谷]이라 하였다. 그 후 1728년(영조 4) 무기리에 이인좌의 난을 평정한 주재성(周宰成)의 덕을 칭송하고 높은 뜻을 기리기 위하여 무기연당(無沂蓮塘)이라는 연못을 만들었다. 그런데 이후에 무기연당의 윗마을인 용골의 지명이 너무 거창하다고 여겨 작대산과 연관하여 뫼[山]자를 따고, 마을에 정자나무가 있어서 정자 정(亭)을 따서 지명을 산정이라 고쳐 부르게 된다. 산정마을회관에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임산물의 운반이나 산림 관리를 위해 설치한 임도(林道)가 시작되는데, 평소에는 이 길로 차가 들어갈 수 없어서 우리 일행은 천주산(天柱山) 임도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 도주님께서 걸어가셨으리라 추정되는 천주산 길(출처: 네이버 위성지도)  

 

  천주산은 칠원(漆原)의 주산(主山)인데 해발 638.8m로 하늘을 받치는 기둥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주봉우리는 용지봉(龍池峰)으로 창원과 마산, 함안을 품고 있다. 천주산은  매년 4월이 되면 진달래 군락이 장관을 이루어 진달래의 명산으로도 유명하다. 장차 구천상제님의 계시를 받으셔서 종통을 세우실 도주님께서 ‘하늘을 떠받치는 기둥’이라는 뜻을 지닌 천주산을 몸소 걸어가셨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기이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함안 쪽 임도는 왼쪽으로 작대산, 오른쪽으로는 천주산 사이의 골짜기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얼마쯤 올라가다 보니 임도 오른쪽 가장자리에 조그마한 표지석이 하나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임도가 1997년에 함안군에서 준공했음을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 함안 쪽 임도 준공 표지석(2013년 4월 19일) 

 

  길은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콘크리트로 잘 포장되어 있다. 경사도 대체로 완만한 편이어서 일행들 모두 크게 힘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도주님께서 봉천으로 가실 때에는 길이 지금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좁고 험했을 듯하다. 이러한 길을 도주님께서는 어둠을 헤치며 가셨으리라! 한참 동안 당시의 상황을 상상하고 있노라니 갑자기 마음이 뭉클해졌다.  

 

 

  

  도주님께서 만주 봉천으로 가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일행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걷다 보니 시간은 벌써 한 시간 정도 흘렀고, 우리는 함안과 창원의 경계지역에 도달해 있었다. 때마침 천주산 정상 부근으로 진달래꽃 동산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이 지점을 중심으로 세 갈래 길이 나 있었는데, 왼편 산으로 올라가면 작대산이고, 오른편 산으로 올라가면 천주산 정상인 용지봉이 나오고, 그 사이로 나 있는 완만한 길을 내려가면 창원 쪽 임도다. 이 세 갈래의 길 중 창원 시내로 가려면, 임도를 따라가는 방법과 천주산 정상인 용지봉을 거쳐서 가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용지봉을 올라가는 코스는 대부분 경사가 꽤 가파른 계단식 길이어서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는 길은 아니다. 얼마 전에 답사했는데 이 코스는 다른 코스에 비해 거리도 더 멀고 시간도 훨씬 많이 걸렸다. 산의 형세로 보아 예전에 사람들이 다니던 산길도 상황은 비슷했으리라 생각된다. 아마도 도주님께서도 지금의 창원 쪽 임도 부근으로 나있던 산길을 택하셨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창원 임도를 따라 계속 걷기 시작했다. 이 길은 함안의 임도보다는 1년이 앞선 1996년도에 준공되었다. 경사도 상당히 완만하여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는 길이다. 진달래꽃의 아름다움을 만끽하며 임도를 따라 20분 정도 천천히 내려가니 만남의 광장이 나왔다. 이름에 걸맞게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공간도 있고, 앉아서 쉴 수 있는 정자(亭子)도 있었다. 이곳에서는 천주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이 훤히 보인다.

 

 

  

  만남의 광장부터 천주암 입구 주차장으로 가는 내리막길은 조금 가파르다. 계단식으로 된 등산로 숲 안쪽으로는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걸어 다녔을 법한 좁은 길이 산 아래로 계속해서 이어져 있다. 길 양쪽 옆으로는 편백나무가 늘어서 있어서 쌓였던 피로를 풀어 주는 듯했다.  30분 정도 걸어 내려와 천주암 입구 주차장에 도착해서 마지막 목적지인 창원역(昌原驛)으로 향했다. 차를 타고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다.

  창원역은 창원시 의창구의 서쪽 끝 부분인 천주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처음 업무를 시작한 것은 1905년 5월 1일 삼랑진과 마산을 잇는 마산선 개통으로 1905년 8월 5일 가역사(假驛舍)를 설치하면서부터다.11 마산선은 러일전쟁 때 일본 군용(軍用)철도로 건설되었으며, 1904년 9월부터 공사가 시작되어서 1905년 5월 26일에 열차운행이 시작되었다. 얼마 후 1905년 6월 6일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게 되자 군용철도였던 마산선은 1905년 11월 1일부터 일반 민간용 철도로 개방되었다.12 마산선의 중간 간이역이었던 창원역은 업무를 시작한 후 여러 차례 모습을 달리하였다. 지금의 창원역사(昌原驛舍)는 2010년 12월에 경전선(慶全線)13 복선전철화 사업에 따라 신축된 것이다.  

 

▲ 창원역 (2013년 3월 11일 촬영) 

 

  도주님께서 만주 봉천으로 가시던 때에 창원역은 한적한 시골 간이역이었을 것이다. 나라의 주권을 송두리째 빼앗길 위기에 처한 참담한 현실 속에서 구세제민의 뜻을 품고 망명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던 도주님, 그 심정이 어떠하셨을까?

  도주님께서는 만주 봉천으로 가신 이후부터 1958년 음력 3월 6일 화천 하실 때까지 50년 동안 쉼 없이 구천상제님의 유지(遺志)를 받들기 위해 온갖 고초(苦楚)를 겪으시면서 오늘날 대순진리회의 수도법방(修道法方)을 짜 놓으셨다. 이번 답사가 비록 짧은 구간이었지만, 도주님께서 만주로 망명길에 오르셨을 때의 역정(歷程)과 그 과정에서 겪으셨을 고초를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 창원역 앞 일대 전경 (1975년 1월 11일)(출처: 창원시)

《대순회보》 14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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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도주께서 기유년(十五歲時) 四월 二十八일에 부친과 함께 고국을 떠나 이국땅인 만주에 가셨도다.”(교운 2장 4절)

02 도주님 생가 주소 변천 과정.

① 탄강전 주소: 경상도 칠원현 서면 회문리.

② 탄강시 주소: 경상도 칠원군 서면 회문리(1895년 5월 26일 이후 현이 군으로 승격).

③ 재세시 주소: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문리(1896년 8월 4일 경상도가 남북으로 분리, 1906년 칠원군이 함안군으로 병합). 

④ 번지 주소: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산리(회문마을) 195번지(회산리는 본래 칠원군 서면의 지역인데, 1908년에 함안군 칠서면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안기리, 신산리, 회문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회문과 신산의 이름을 따서 회산리라 함).

⑤ 도로명 주소: 경남 함안군 칠서면 회문길 80-26.

03 42년부터 562년까지 낙동강 중 하류 서쪽에 자리 잡았던 여섯 나라로 금관가야(김해), 아라가야(함안), 고령가야(진주), 대가야(고령), 성산가야(성주), 소가야(고성)를 말한다.

04 함안문화원,『咸安의 地名由來』, 2010, p.40 참조.

05 함안군지편찬위원회, 『함안군지』, 1997, pp.1031~1032 참조.

06 함안문화원,『咸安의 地名由來』, 2010, p.176  참조.

07 중국 오대(五代)의 두 번째 왕조로 존속기간은 923~936년. 돌궐(突厥) 사타부(沙陀部) 출신의 이극용(李克用)이 당(唐)에 봉사하며 황소(黃巢)의 난(875~884) 진압에 공을 세워 895년 진왕(晉王)으로 훈봉(勳封) 되었고, 아들 이존욱(李存勖, 재위 923~926)은 923년 후량(后梁)의 뒤를 이어 국호를 당(唐)이라 칭하고 뤄양(洛阳)에 건국하였다. 그러나 말제(末帝)에 이르러 거란(契丹)과 결탁한 부장(部将)인 절도사(节度使) 석경당(石敬瑭, 892~942), 즉 후진(后晉)의 고조(高祖)에 의하여 936년 4대 13년 만에 멸망하였다.

08 『대순소식』 30호, pp.6~7 참조; 『대순소식』 31호, pp.10~11 참조.

09 『대순진리회요람』, pp.11~12 참조.

10 평안북도 신의주와 중국 단둥(丹東)을 잇는 다리로서 한반도와 중국 둥베이(東北) 지방을 연결하는 관문이다. 한반도와 중국 둥베이(東北)지방을 연결하는 관문으로서 압록강을 사이에 둔 한ㆍ중 국경의 한 명물로 1908년 8월에 착공하고 3년 동안 연인원 5만 명을 동원하여 1911년 10월에 준공하였다. 중앙에 철도를 부설하고 좌우 양쪽에 2.6m의 보도를 깔았으며, 교항(橋桁)은 12연(連)으로 강을 오르내리는 범선을 통과시키기 위하여 우리 쪽에서 아홉 번째 연을 개폐식(開閉式)으로 만들어 열면 십자(十字)가 되고 닫으면 일자(一字)가 되도록 설계되었다.

11 창원시사편찬위원회, 『창원시사』, 1988, p.869 참조.

12 이학렬 저, 『간추린 마산역사』, 2003, p.119 참조.

13 경상남도 밀양시 삼랑진과 광주광역시 송정동을 연결한 간선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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