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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노리(避老里), 불가지(佛可止), 신령(神嶺)

교무부    2017.03.27    읽음 : 2338


본문

피노리(避老里), 불가지(佛可止), 신령(神嶺)

 

 

                  연구원 곽춘근

 

  피노리는 상제님의 행적이 많이 묻어 있는 곳이다. 현재는 그 위치를 확인할 수 없지만 종도 이화춘의 집이 여기에 있었다고 한다. 상제님께서 1901년부터 세상의 모든 원과 한을 풀어내는 천지공사를 보실 때, 이화춘의 집에 머물면서 여러 공사를 행하셨던 것으로 보인다. 피노리에서 행해진 공사 중에는 소나무 가지 끝에 시천주를 쓴 종이를 달아 깃대 모양을 만들고 이를 사명기(司命旗)라 하시며, 최수운과 전명숙을 해원시키는 공사가 있었다.01 최수운은 상제님으로부터 받은 가르침을 세상에 펴다가 그 사명을 다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하였고, 전명숙은 최수운으로부터 전해 받은 가르침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상을 염원하는 동학농민군을 이끌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곳에서 이들의 원(冤)을 풀어주는 공사가 있었다. 또 『전경』에 “고부 사람이 오니 바둑판을 가히 운전하리라.”는 상제님의 말씀 역시 고부 와룡리에 사는 황응종이 이곳 피노리로 찾아오는 것을 보고 하셨던 말씀이다.02 이 시기가 1907년 가을 경이다. 그 후 피노리에 계시던 상제님께서 정읍 태인에 있는 행단의 주막을 향해 가시면서 문공신에게 돈 서른 냥을 몸에 지니고 따르라는 말씀을 남기셨다고 전해진다.03 피노리와 관련된 상제님의 이적에 대한 내용도 있다. 하루는 상제님께서 피노리 주막에 머물다가 정읍 태인 백암리를 향해 가시는데, 도중에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지만 비를 한 방울도 맞지 않으셨다고 한다.04
    피노리가 소재한 쌍치면은 순창군의 북서쪽에 있는 면이다. 노령산맥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으며 노령산맥을 경계로 정읍시와 전남의 담양군과 인접한다. 쌍치면은 삼국시대에 도실군에 속했으며, 고려시대 때는 이곳에 관청을 설치하고 관청 위아래 지역을 나누어 상치등방·하치등방이라 편재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시대에 와서는 상치등면과 하치등면이라 불렀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두 면의 19개 리(里)를 묶어서 이름을 쌍치면이라 하였는데, 피노리는 이들 19개 마을 중 하나이다. 마을 이름의 유래는 좀 특이하다. 피노리(避老里)의 한자를 풀이하면 ‘노(老)를 피한다(避)’라는 뜻이다.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은 노론과 소론이 대립하던 1700년대 조선의 붕당 정치 시기 당시 노론(老論)을 피해서 온 소론(小論)들이 이곳에 정착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현재는 ‘피노마을’이라고 부른다.

 

▲ 피노리 마을 전경

 

 

전봉준 장군 피체 유적지
  정읍에서 노령산맥을 넘어 피노리에 들어서면 ‘전봉준장군 피체 유적지’에 도착할 수가 있다. “이 곳에서 전 명숙이 잡혔도다.”05 피노리는 녹두장군 전봉준이 체포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이곳 유적지에는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운동의 전개 과정을 소개하는 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1894년, 갑오년! 새로운 세상을 세우겠다는 동학농민들의 외침은 조선 사회를 뒤흔들었다. 하지만 그 의기는 일본에 의해 좌절되었고, 이들을 이끌었던 녹두장군이 피노리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됨으로써 ‘갑오년의 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유적지 안내문에는 전봉준 장군의 체포 상황을 이렇게 쓰고 있다.

  

전봉준 장군은 쫓기는 처지가 되었지만 다시 일어서려는 의지를 품고 정읍을 거쳐 순창 피노리로 몸을 숨겼다. 매서운 바람이 살을 에이는 12월 전봉준 장군은 옛 부하 정읍출신 김경천을 찾아가 몸을 의탁하지만, 현상금과 포상에 현혹된 김경천은 한신현, 김영철, 정창욱 등과 함께 주막을 에워싼다. 수상한 분위기를 직감한 전봉준 장군은 문을 박차고 뛰쳐나가 담장을 뛰어 넘었고, 그 순간 내려치는 몽둥이에 전봉준 장군은 쓰러지고 말았다.

 

  유적지 입구에 있는 ‘전봉준 장군 피체 유적비’를 읽는데 재미있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내용 중간에 ‘당시 고부군 달천면 달천리(현 정읍시 덕천면)출신 김경천의 밀고’로 체포되었다는 문장이 큰 글자로 강조되어 있었다. 전봉준 장군을 밀고한 사람은 ‘순창 출신’이 아니라 이곳에 살았던 ‘고부 출신’ 김경천이라는 것이다. ‘순창 사람이 녹두장군을 밀고했지?’라고 오해할까봐 노파심에서 쓴 내용이겠지만, 어쩌면 정읍 사람들은 씁쓸해 할지도 모를 일이다.

 



  피노리로 이어진 산줄기를 따라가면 오선위기혈로 유명한 회문산이 있다. 피노리가 내려다보이는 마을 앞동산에 올라 해가 뜨는 동쪽을 바라보았다. 저 멀리 어딘가에 회문산이 있으리라! 어느 봉우리가 회문산 주봉인지 궁금했지만, 멀기도 하거니와 큰 봉우리들이 여러 개 있어서 어느 곳이 정상인지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회문산과는 아직 인연이 아닌지 이렇게 바라보는 것으로 그쳐야 했다.

 

▲ 피노리에서 본 회문산

 

 

학동 황샛골과 새터
  다음 답사지는 전북 완주군 이서면이다. 이서면 남쪽에 있는 마을 중에서 『전경』에 나오는 지명은 학동, 이성동(새터), 불가지, 신령 등이다. 이서면이 속한 완주는 현재 전주시를 둘러싸고 있는 군이다. 완주는 그 역사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백제와 통일신라 초기에는 완산주라 하였다가 757년에 전주로 바뀌었다. 고려시대에는 안남도호부 - 순의군 - 완산부 등의 지명으로 몇 차례 변경되기도 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는 태조 이성계의 고향으로 중시되어 완산유수부로 승격되었고, 태종 때 전주부로 바뀌어 조선말까지 계속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에는 고산군을 통합하여 전주군이라 하였는데, 그 후 1935년에 전주군에 속해 있던 전주읍이 전주부로 승격되자 전주읍을 제외한 전주군의 나머지 지역을 완주군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서면은 완주군에서 따로 떨어져서 전주 서쪽에 위치한다. 이서면의 관할 구역은 1914년 행정 구역 폐합 때는 43개의 리(里)였지만 원동리, 상림리, 중리 등이 전주시로 편입되면서 관할 구역이 축소되었다. 이서면(伊西面)이라는 이름은 옛 전주부 이성현(伊城縣)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서면이라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전주의 용머리고개를 넘어서 김제 금구면의 선비로를 따라가다보면 이서면 남쪽 경계 부근에 있는 대야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1km 정도 올라가자 왼쪽으로 학동 마을을 볼 수 있었다. 이곳은 황새들이 많이 살았다고 하여 황샛골 또는 황새 마을이라고도 부른다. 불가지에 계시는 상제님을 찾아왔던 문치도는 이 마을에 살았던 사람이다. 『전경』에 보면, 문치도는 상제님께서 이서면 불가지 김성국의 집에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1907년 봄), 상제님을 뵙고자 옆 마을 이성동(새터)에 살고 있던 송대유를 찾아가서 같이 가자는 제안을 한 인물이다.06 학동 마을의 형세는 마치 길쭉한 황새 부리 주위를 산이 둘러싸고 있는 듯한 모양을 한 분지 지형이다. 황새 부리 모양의 논 주변으로 열 가구가 안 되는 집들이 듬섬듬성 떨어져서 한 마을을 이루고 있다. 상제님의 행적과 직접 관련된 곳은 아니어서 마을을 한 번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하고 다음 행선지로 향했다.

 

 

   조금 더 올라가다가 작은 사거리에서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이성동이라 불리는 새터마을이 나온다. 문치도가 찾아갔던 송대유가 살았던 마을이다. 학동과는 불과 5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을까? 원래 학동, 새터, 불가지 지역은 고려시대 때부터 있었던 마을들로 보인다. 조선시대 때에는 이성현으로 전주에 속해 있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 때 이서면에 편입되었다고 한다. 새터라는 명칭은 새로 생긴 마을 이름처럼 보이지만, 마을을 이루기 시작한 고려시대 때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짐작된다. 이 새터 역시 10여 가구의 작은 마을인데 길가 주변으로 집들이 죽 늘어서 있고, 마을 뒤에는 굵은 대나무 밭이 병풍처럼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맞은편 작은 야산에 올라 찬찬히 마을을 둘러보는데, 마치 마을의 지붕인양 가지를 넓게 펼치고 있는 큰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그 나무가 서있는 곳을 향해 길을 따라 올라가니 위에 거대한 나무가 떡 하니 서있었다. 세상에! 이렇게 큰 느티나무는 태어나 처음 본다.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큰 나무라서 몇 아름이나 되는지 팔로 나무 둘레를 재보았다. 네 아름이 넘었다. 이 나무는 새터마을이 요즘 새로 생겨난 마을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듯했다. 나무의 나이를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도 이 느티나무는 새터마을과 역사를 함께 했을 것 같았다.

 

▲ 새터 느티나무

 

 

가활만인 불가지(可活萬人 佛可止)
  새터에서 외길을 따라 쭉 더 올라가니 불가지가 보였다. 새터에서 불가지까지는 한 700m 정도밖에 안 되는 거리다. 중간에 1번 국도가 놓여 있어서 새터육교를 건너야 불가지로 갈 수가 있다. 불가지는 낮은 야산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산 아래 골짜기에서 시작된 경사가 비스듬히 흘러내려 찌그러진 부채꼴 모양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집이 없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집이 두 채가 있다. 마을이라 부르기에는 조금 무색하다. 어쨌든 버려졌던 땅이었는데 사람과 땅이 다시 더불어 살아가게 된 곳이다.
  지명의 유래는 고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불가지는 불가절이라고도 부르는데, 고려시대 때 불가절 또는 불가사라는 절이 이 마을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절의 이름을 따서 마을 이름이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같이 답사를 온 일행이 마을 사람에게 전해들은 절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지목해 주었다. 그곳의 지형을 살펴보며 절터로 적당한 곳인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불가절이 있었다는 곳은 골짜기 입구에서 멀지 않은 평탄한 땅으로 불가지 전체 지형 상에서는 위쪽에 위치한다. 그곳이 절터라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멋진 소나무 한 그루가 오롯이 서있었다.

 

 

   『전경』에 있는 불가지에서의 상제님 행적은 1907년 봄과 1909년 4월의 두 시기에 걸쳐 있는데 1909년 4월이 거의 대부분이다. 1909년 4월 당시 함열 회선동(현 익산시 성당면 대선리)에 사는 김보경의 집에 머물며 천지공사를 보시던 상제님께서는 백지 위에 ‘二十七年’(이십 칠년)이라 쓰시고 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홍성문이 회문산에서 27년 동안 공부한 것이 헛된 일이니라. 그러므로 이제부터 27년 동안 헛도수가 있으리라.” 07며칠 후 다시 종도들에게 “불가지는 불(佛)이 가히 그칠 곳이라는 말이오. 그곳에서 가활 만인(可活萬人: 모든 사람을 살린다)이라고 일러왔으니 그 기운을 걷어 창생을 건지리라.”라는 말씀을 하시고, 교자를 타고 불가지로 가셨다고 한다. 이때 불가지로 가시며 읊으신 시 한 수가 전해지고 있다.08
  불가지에는 상제님의 종도인 김성국의 집이 있었다. 1909년 4월 불가지로 오신 상제님께서 김성국의 집에 머물며 공사를 보시다가, 하루는 김덕찬을 불러 전주 용소리에 있는 김의관의 집에서 자고 오라고 하셨다. 김덕찬은 평소 상제님의 말씀을 흘려듣고 마음 없이 건성으로 상제님을 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가는 길에 술주정꾼에게 심한 봉변을 당하게 되자 잔뜩 화가 나서 김의관의 집으로 가지 않고 되돌아왔다. 그러자 상제님께서 그를 불러 술을 권하며 “사람을 사귈 때 마음을 통할 것이어늘 어찌 마음을 속이느냐?”고 이르셨다고 한다.09
  상제님의 공사 중에는 ‘불이 가히 그치는 곳’이라는 불가지의 의미를 짐작케 하는 행적도 있다. 상제님께서 불가지 김성국의 집에서 공사를 행하시던 어느 날 김덕찬과 김성국이 그물을 치고 꿩잡이를 하고 있었다. 이를 보고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잡는 공부를 하라. 나는 살릴 공부를 하리라.”고 하시자 꿩이 한 마리도 그물에 걸리지 않았다고 전한다.10 또 1909년 4월에 불가지에서 신령을 넘어 가실 때 고사리 캐던 노인을 만나자 양식을 청하여 얻으신 후 “중은 걸식하나니 이 땅이 불가지라 이름하는 것이 옳도다.”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11
  석가여래께서 불도를 편 것은 고해에 빠져있는 뭇 중생을 건지려는 ‘가활만인’의 마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불도(佛道)의 이러한 ‘가활만인’의 기운이 불가지에 모여 있었기(可止) 때문에, 상제님께서 ‘걸식하는 중’에 비유하여 불가지라는 이름이 옳다고 이르시며, 그 기운을 쓰서 공사를 행하신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불가지는 ‘모든 사람들을 살린다.’는 의미가 담겨 있던 곳이요, 이 기운을 써서 창생을 구하시겠다는 상제님의 말씀과 공사가 행해졌던 곳이다. 이 불가지가 등지고 있는 산에 신령이 있다.

 

 

 

신령을 넘으며
  이번 답사의 마지막 행선지는 상제님께서 넘으셨다는 신령(神嶺)이다. 신령은 불가지 마을에서 산 너머에 있는 금평리로 가는 고개로 추정된다. 이 고개를 넘어 곧게 가면 지금의 전주대학교 방향이다. 그래서 신령은 전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고개라 할 수 있다. 불가지에서 전주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었다고 한다. 하나는 불가지 위쪽 골짜기를 따라 넘어가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불가지의 산 정상 쪽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골짜기 쪽으로 넘어가면 빙둘러 전주로 가야 하기 때문에 고개는 낮지만 거리가 멀고, 산 정상 쪽은 짧지만 길이 약간 험하다. 신령은 아마도 가까운 쪽인 산 정상 쪽 길로 추정된다. 신령의 령(嶺)자의 뜻인 ‘산봉우리’와도 관계가 있는 것 같다. 불가지에서 보면 신령의 높이는 40여 미터 정도인데 나무가 우거지고 산의 둘레가 커서 높이보다 훨씬 높아 보인다.
  지도에서 신령을 살펴보면 야트막한 산이라서 길이 없더라도 어렵지 않게 넘어갈 수 있을 듯했다. ‘상제님께서 신령을 넘다가 고사리 캐던 노인을 만난 곳이 어디 쯤이었을까?’ 이런 궁금증을 품고 신령에 올랐다. 나무를 쳐 길을 내기 위해 마침 준비해 온 정글칼과 낫을 하나씩 들었다. 산은 잡목이 그렇게 많지 않아 오르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차근차근 걸어서 한 7부 능선 정도 올라가니 앞이 훤하게 트였다. 편백나무 군락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좀 더 올라가자 두 갈래 길이 나왔다. 왼쪽 길은 산 정상 쪽으로 향하는 길이고 오른쪽 길은 산을 내려가는 쪽의 길이었다. 산을 충분히 올랐다고 생각되어 산을 내려가는 길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편백나무 숲길을 편안하게 걷고 있는데 왠지 빙빙 돌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 신령 오르는 길

 
 다들 방향을 잃은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나침반이라도 가져올 걸 그랬어요!”라는 소리가 들렸다. 낮은 산이라서 쉽게 넘을 수 있을 것이라고 너무 얕잡아 보았다는 후회가 들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숲 사이로 저 앞에 자동차와 도로가 보였다. 내려 갈수록 헤치고 나가기 어려울 정도로 잡목과 풀이 너무 많아 20여 미터 앞에 보이는 도로로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 다시 옆으로 둘러둘러 칡넝쿨을 헤쳐 간신히 도로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 길이 아니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보니 산 정상에서 뻗어 내려온 두 갈래 능선 중 하나를 겨우 넘어온 것이다. 산 정상 쪽 길로 가야 신령을 쉽게 넘을 수 있었는데 잘못 길을 잡은 것이다.
  신령을 넘어 보기로 하고 시작한 답사인데 그만둘 수는 없었다. 능선 하나를 더 넘기 위해 다시 정상을 향해 올라갔다. 다행히 사람들이 다녔던 길이 중간에 있었고, 짐승 발자국이 나 있는 길들도 보여서 길을 차근차근 따라갔다. 이번에는 다행히 어렵지 않게 산을 넘을 수 있었다.

 

▲ 신령 편백나무 군락

 
  넘어오고 나서 생각하니 조금 허탈했다. 처음 신령을 오를 때는 상제님께서 가셨던 길을 더듬어도 보고 ‘고사리 캐던 노인을 만난 곳이 어디 쯤 이었을까?’라는 생각을 하며 걸었다. 그런데 길을 잃고 나서는 신령을 넘는 길을 찾느라 그 생각도 못하고 길만 보다가 산을 넘어와 버렸던 것이다. 너무 쉽게 생각하고 대충 준비한 결과였다. 한편으로는 꼭꼭 감추어 둔 안일한 마음이 신명의 수찰에 걸려서 길을 헤매게 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정성을 다하지 않으면 신명의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데….’ 그런데도 이것을 항상 반복하는 것은 아직도 마음이 어리석기 때문일 것이다. 답사를 마치고 숙소로 향하면서 상제님께서 불가지로 가실 때 읊으셨던 시 한 수를 들여다보았다. 마음에 남아 있는 때를 더 벗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렸다.

  

金屋瓊房視逆旅 石門苔壁儉爲師  (금옥경방시역려 석문태벽검위사)
絲桐蕉尾誰能解 竹管絃心自不離  (사동초미수능해 죽관현심자불리)
匏落曉星霜可履 土墻春柳日相隨  (포락효성상가리 토장춘류일상수)
革援瓮畢有何益 木耜耕牛宜養頣  (혁원옹필유하익 목사경우의양이)
12

  

금으로 된 집과 옥으로 된 방을 여관처럼 보고
돌문과 이끼 낀 벽의 검소함을 스승으로 삼아야 하리.
사동과 초미의 거문고 소리를 누가 풀이할 수 있을까?
퉁소와 현의 소리는 저절로 어우러지는구나.
별이 지고 새벽별이 뜰 때 서리를 밟으니
흙담(에 늘어선) 봄버들은 날로 서로 가까워지네.
마원과 필탁(의 일)이 어떤 유익함이 있겠는가?
나무 쟁기로 소 몰아 농사지으며 마땅히 가꿀 것을 길러야 하리라.

 <대순회보> 161호

 

 

참고 문헌
『전경』
『한국지명총람』 11(전북편ㆍ상), 한글학회, 2003.
『한국지명총람』 12(전북편ㆍ하), 한글학회, 2003.
《두산백과》
완주군홈페이지(http://www.wanju.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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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공사 3장 2절 참조.
02 예시 32절 참조.
03 행록 3장 17절 참조.
04 권지 2장 14절 참조.
05 공사 3장 2절.
06 교운 1장 24절 참조.
07 예시 53절.
08 예시 54절 참조.
09 행록 4장 18절 참조.
10 권지 1장 26절 참조.
11 예시 56절 참조.
12. 예시 5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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