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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님 외가를 찾아서

교무부    2017.03.27    읽음 :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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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주님 외가를 찾아서

 

 

연구원 이정만

 

  도주님 외가에 대한 내용은 『전경』 교운 2장 1절 “여흥 민씨(驪興閔氏)가 어느 날 하늘로부터 불빛이 밝게 자기에게 비치더니 그 후 잉태하여 한 아기를 나으니라. …”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다. 또한 도주님 외가에 대해서는 아직 소개된 적이 없어서 이 구절을 읽을 때마다 도주님 외가에 대해 궁금증을 가지곤 했다. 그래서 그동안 조사된 자료를 토대로 답사 준비를 하게 되었다.
  도주님 외가는 경남 밀양시 하남읍 파서리에 있다. 파서리는 신라의 파서방부곡(破西防部曲)01의 옛 터전으로, 1896년 행정구역 개편 이후 경남 밀양군 하남면에 속하다가, 지금은 경남 밀양시 하남읍에 속하는 지역이다. 파서리는 파서(巴西), 파내(巴內), 은산(隱山) 세 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 도주님 외가는 파서마을에 있다. 지명의 유래를 보면, 신라가 562년(진흥왕 23)에 이사부와 사다함을 보내어 대가야(지금의 고령)를 칠 때, 신라군이 이 마을에 적군을 경계하기 위한 군막(軍幕)인 파수막(把守幕)을 설치했다고 한다. 이후로 이 마을을 파수막 또는 파수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변해서 파서가 되었다고 한다.

 

 

 ▲ 마을 입구에서 본 파서마을 전경

 
  파서마을은 밀양 종남산의 남쪽 끝자락에 자리 잡고 있으며, 종남산에서 서남쪽으로 뻗어나온 줄기가 성만리를 거치면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파서리까지 병풍을 두른 듯이 펼쳐져 있다. 파서마을 동쪽으로는 종남산에서 흘러내린 구박천(仇朴川: 현재는 상남천)이 넓은 하남평야를 적시고 낙동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여주도장에서 자동차로 3시간 30여 분을 달려 도주님 외가가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은 먼저 도주님 외가를 전체적으로 둘러보았다. 조사한 바로는 도주님 탄강 시(1895년)에 외가 터는 [지도 1]에서 표시된 네 곳(①, ②, ③, ④)으로 추정되며, 중심 건물인 본채는 ②번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나머지 ①, ③, ④번에는 별채와 행랑채 등의 건물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외가 터의 소유권은 도주님 외조부(민중호)께서 돌아가신(1932년) 후 2년 뒤인 1934년부터 점차 분할되어 이전되었는데, 본채가 있던 ②번만은 여전히 도주님 외가 자손 소유로 되어 있다.
  여흥 민씨가 파서 마을에 처음 살기 시작한 것은 15대인 진사(進士) 민경(閔熲)이 단종 폐위 사건(1455년)을 계기로 낙향하면서부터이다. 이후로 이 마을은 여흥 민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어 오다가, 조선 후기에 오면서 고성 이씨(固城李氏)가 이 마을에 들어왔다. 도주님의 외조부(外祖父)께서는 여흥 민씨 27대손으로 휘는 중호(仲鎬)이시며, 참봉(參奉)을 지내셨다. 슬하에 2남 6녀를 두었는데, 도주님의 모친께서는 그 중의 둘째 딸로 1875(乙亥)년에 출생하셨고, 휘는 영명(泳明, 1875~1931)이시다.
  우리 일행은 본채가 있는 ②번 집으로 가보았다. 대문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었다. 혹시 집주인을 만나볼 수 있을까 해서 여러 번 두드려 보았지만,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이웃 사람에게 물어보니 주인은 현재 여기에 살지 않고, 가끔씩 다녀간다고만 했다. 아쉽지만 대문 너머로 안을 살펴볼 수밖에 없었다. 건물로는 본채와 사랑채가 보였다. 본채는 일부 수리를 한 흔적이 있고 사랑채 건물은 거의 옛 모습 그대로였다. 그리고 마당 한가운데는 수백 년은 족히 됐을 법한 회화나무 한 그루가 집안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듯 서 있었다.

 

 

▲ 파서리 일대 주변 위성사진(출처: Daum 지도)

 
  회화나무는 회나무, 홰나무, 괴화나무 등으로도 불리는 나무로 우리 선조들이 최고의 길상목(吉祥木)으로 손꼽았던 나무이다. 예부터 이 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가문이 번창하고 대 학자나 큰 인물이 난다고 하였다. 또한 이 나무에는 잡귀신이 감히 범접을 못하고 좋은 기운이 모여든다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이 나무를 고결한 선비의 집이나 서원, 절간, 궁궐 등에 심었으며, 임금이 특별히 공이 많은 학자나 관리에게 상으로 내려주기도 하였다.02  한편 이웃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예전에는 이 터에 지금보다 건물이 더 있었다고 한다. 현재 7칸짜리 본채 건물과 고목 사이에 3칸짜리 사랑채 건물이 있었고, 3칸 사랑채 옆에는 작은 대문이 있었으며, 대문 옆으로는 방앗간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집 규모나 위치로 볼 때 도주님 외가 터 중에 이곳에 본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해 보인다.
  집 내부를 보지 못해 못내 아쉬웠지만, ①번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대문을 두드리자 연세 많으신 할머니03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이 집에 대한 할머니의 증언과 조사한 자료를 종합해 보면, 그 내력은 다음과 같이 추정된다. 이 집은 현재 이 마을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건물인데, 백여 년 전에 고성 이씨가 처음 지었다고 한다. 이후 도주님 외가에서 집을 사들여 소유하고 있다가, 도주님 외조부께서 돌아가신 지 2년 뒤인 1934년에 먼 친척인 민갑철 씨가 이 집을 매입하여 살았다. 민갑철 씨는 한때 천석꾼으로 이 마을에서 가장 부자였다고 하는데, 가세가 기울자 이 집을 내놓았다고 한다. 그러자 1961년에 지금 사는 할머니의 남편이 이 집과 ⑤번의 일부 땅을 사서 1962년에 이사를 왔다. 이사 왔을 당시에도 현재 있는 건물들이 모두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 가족이 이사 온 이후 지금까지 건물들의 일부 모습은 바뀌었지만, 대체로 본래의 모습이 잘 간직되어 있다.

 

▲ ①번에 있는 본채 / 정면 6칸 건물이며, 샤시문 안쪽에는 대청마루가 그대로 남아있다.

  

 

▲ ①번에 있는 사랑채 / 낡은 나무 기둥, 갈라져 있는 흙벽체 등이 건물의 오랜 나이를 보여준다.

 

  집 전체를 두루 살펴본 뒤, 할머니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다음으로는 노부부가 살고있는 ③번 집으로 향했다. 노부부는 1972년에 민중호(도주님 외조부) 씨의 차남인 민영돈 씨 며느리의 권유로 집을 샀다고 한다. 이사 왔을 당시에는 사랑채, 창고 등의 건물이 더 있었다고 한다. 본채는 원래 좌향(坐向)이 정남향이었는데, 집을 새로 지으면서 풍수를 고려하여 동남향으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자료 조사를 하다 보니 도주님의 주소지와 관련하여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도주님 집안 호적을 보니, 도주님 부친께서 1918년에 주소지를 경남 밀양군 하남면 파서리 356번지04(④번 구주소)에서 충남 서산군 안면면 창기리 1183번지로 옮기신 것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도주님 가족의 주소지가 1918년까지 파서리 356번지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 ②번에 있는 도주님 외가 소유의 집

 
  언제 회문리에서 파서리로 주소가 옮겨졌을까? 여러 정황으로 보아 도주님 부친께서 1909년 가족들과 만주로 망명하시기 전에 거주지를 회문리에 두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그 당시 도주님 외조부의 도움으로 옮기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다가 도주님께서 1917년에 만주에서 귀국하여 안면도에 가셔서 홍일우 부근에 거처를 정하시면서 1918년에 주소를 다시 옮긴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터는 이후 1943년에 ⑤번의 일부와 함께 조선신탁주식회사05에 넘겨지는데, 이는 그때까지만 해도 ④번과 ⑤번이 한 사람의 소유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터는 1970년 후반에 ③번에 사는 사람이 다시 매입하여 현재까지 소유하고 있는데, 지금은 이 터에 빈 집 한 채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 ③번에 있는 노부부가 사는 집

  

 ▲ ④번에는 현재 파란색 지붕의 집 한 채가 있다.

 
  그런데 도주님 모친께서는 어떤 인연으로 도주님 부친과 혼인을 하시게 되었을까? 두 집안 간의 인연은 도주님 조부이신 조영규(1861~1905)와 민영환(1861~1905)06 그리고 도주님의 큰 외삼촌인 민영하(1869~1910) 세 사람의 친분관계로 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도주님 조부께서는 1891년 31세에 문과에 합격해서 홍문관 정자 등을 지내셨고, 민영환과 교우관계로 지내셨다. 한편 민영하는 민영환과는 같은 여흥 민씨이며, 정계 진출 후 한때 고위 관직인 중추원 의관07까지 지냈던 인물이다. 그러므로 도주님 모친께서 혼인하시기 이전, 세 사람이 중앙정계에서 1891년 이후에 서로가 교류하며 지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마도 그 인연으로 두 집안 사이의 혼사가 이루어진 것이 아닐까?
  두 집안의 인연은 도주님께서 밀양지역 일대에서 도를 펴셨던 것과도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주님 외가가 있는 경남 밀양 지역은 무극도인들이 상당수 있었던 지역이기 때문이다.08 도주님 외가와 밀양지역에서 전개된 무극도 포덕활동과의 연관성은 아직 연구된 결과가 없어서 앞으로 많은 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번에 얻은 작은 성과를 바탕으로 이곳에서의 도주님의 행적과 무극도의 포덕활동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볼 생각이다.

 <대순회보> 16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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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부곡(部曲)은 신라 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있었던 특수한 지방의 하급 행정 구역이었다. 부곡 사람들은 일반적인 양민과 달리 그 신분이 노비ㆍ천민에 유사한 특수한 열등 계급(劣等階級)의 지위에 있었다.
02 출처: 산림청 홈페이지
03 이○○ (1926년 生)
04 현재 이 지역은 356-2번지만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356번지가 중간에 356-1, 356-2번지로 분할되었다가 다시 356-2번지로 통합된 것으로 보인다.
05 일제가 신탁분야에서 효율적으로 자본을 동원, 일본 독점자본의 축적을 돕겠다는 취지로 1932년 12월 서울에 설립했던 신탁회사이다. 1934년 11월까지 조선 내 다른 신탁회사를 흡수, 통합함으로써 조선 내 신탁업분야에서 독점회사가 되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06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호조 판서 민겸호(閔謙鎬)의 친아들이다. 1877년(고종 14)에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으며, 이듬해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 정자(正字)ㆍ동부승지(同副承旨)ㆍ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905년에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자결하였다.
07 1895년(고종 32) 중추원 관제에 따라 설치되었다. 의장ㆍ부의장 밑에 속하며 1ㆍ2ㆍ3등으로 나뉘고 인원은 50명 안팎이었다. 1905년(광무 9) 찬의(贊議)로 명칭이 바뀌었다. 도주님께서 1895년에 탄강하셨으므로 도주님 어머니가 혼인하기 이전에는, 민영하 씨는 중추원 의관 자리에 있기 전이다.
08 『무극대도교 개황』〈무극도 간부 일람표〉(1925년 11월 5일 기준)를 보면, 무극도 간부 25명이 경남 밀양 지역(현재의 상남면, 삼랑진읍, 내일동, 산외면 등)에 본적지를 두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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