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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관성묘

교무부    2017.02.01    읽음 : 2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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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관성묘 

 

 

연구위원 장선렬 

    

  호남고속도로를 따라 전주로 들어서니 천 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고장답게 눈에 띄는 관문이 반갑게 맞이한다. 전주의 위상을 대변하는 듯 서있는 호남제일문(湖南第一門)은 원래 전주부성 사대문의 하나인 풍남문의 현판에 적힌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에서 따온 것이다. 전주는 『전경』 속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다. 전주부성, 백남신 집, 서천교 사거리의 서원규 약방, 용머리고개 주막, 만경대와 관성묘(關聖墓) 등 전주 전역이 상제님의 행적이 있는 곳이다. 우선 관운장(關雲長)을 모신 남고산성 내의 ‘관성묘’로 향했다. 

   관운장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운장주(雲長呪)이다. ‘天下英雄關雲長 依幕處 謹請天地 八位諸將 六丁六甲六丙六乙 所率諸將 一般兵營 邪鬼 唵唵?? 如律令 娑婆?’라는 주문 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관운장은 상제님의 명을 받아 ‘관성제군(關聖帝君)’의 위치에서 삼계의 마를 다스려 후천선경 건설에 일임을 하고 있다. 봉의 눈에 삼각수를 휘날리며 적토마를 타고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는 모습은 운장주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생각해보았을 것이다.  

   관성묘는 고덕산 자락의 남고산성 내에 있다. 전주천 한벽루를 지나 전주교육대 옆을 돌아올라 좁은 길로 2km쯤 올라가니 돌을 쌓은 성곽이 나오고 외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길 좌측에 관성묘가 보였다. 들어가는 입구에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라 하여 ‘신분이 높은 사람이건 낮은 사람이건 모두 말에서 내려라’라는 뜻을 지닌 하마비가 우뚝 서 있었다. 30여 개의 돌계단을 올라가니 좌측에 관성묘의 유래에 대한 안내판이 세워져 있고 들어가는 문 위에 ‘關聖墓(관성묘)’의 현판이 걸려 있다. 문 좌우에는 관운장이 타고 다녔다는 적토마와 마부의 상이 준비된 듯이 서 있었다. 문을 지나 다시 돌계단을 올라가면 중간 문이 나오고, 또다시 돌계단을 올라가면 관성묘의 본당이 나온다. 진입로에서 두 개의 문과 3번의 돌계단을 올라야만 본당에 도달할 수 있었다. 관운장을 모신 본당은 길에서 보면 가파르고 높은 위치에 있어 관운장을 숭상하는 곳임을 느낄 수 있었다. 

 

  본당에 도착하니 관성묘를 관리하고 있는 김진문 합장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관성묘는 현재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건물 배치를 보면 본당을 가운데 두고 본당 앞 좌우로는 동무(東?)와 서무(西廡)가 있다. 본당 건물의 형태는 맞배지붕 형식에 정면 3칸, 측면 3칸에 예를 취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본당 앞으로 맞배지붕의 건물을 세워 정(丁) 자 모양의 정자각으로 되어 있다. 본당 앞 좌우의 동무와 서무에는 『삼국지연의』의 내용들이 여러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본당 안에는 황금빛 용포를 입은 관운장이 앉아 있고 좌우로는 장수들의 상들이 서 있었다. 여기서 관운장에 대해 알아보자. 

 


▲  중국의 한 고건물 지붕 위에 조각된 적토마를 타고 전장을 누비는 모습의 관운장 조상 

 

  관우(關羽, ?~219)는 중국 삼국시대 촉(蜀)나라의 명장으로 자(字)는 운장(雲長)이고 본래 자는 장생(長生)이며, 하동군 해현 사람이다. 후한 말 탁현(啄縣) 누상촌(樓桑忖)에서 유비 ? 관우 ? 장비 세 사람이 의형제를 맺고 한날한 시에 죽기로 도원결의(桃園結義)를 했다. 200년에 유비가 조조에게 패하였을 때 그는 잠시 조조에게 의탁하면서 편장군에 임명되고 한껏 예우를 받았다. 안량을 죽여 조조의 후대에 보답하고 한수정후에 봉해졌으나 유비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조조의 유인책에도 넘어가지 않고 적토마를 타고 5관을 돌파하는 의기는 많은 사람들에게 의리(義理)의 표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208년 적벽대전에서 수군(水軍)을 인솔하여 조조군을 대파하였고, 패주하는 조조를 화용도에서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으나 은혜를 갚기 위해 살려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219년에 유비는 한중왕이 되고 그를 오호대장의 우두머리로 삼는다. 그는 조조의 대장 조인을 번성에서 공격하여 우금이 거느린 칠군을 대파하였다. 이 일로 중원에 그의 위용을 크게 떨치면서 조조와 손권마저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손권이 형주를 습격하여 점령하자 그는 맥성으로 패주하는데 포위망을 돌파하다가 사로잡혀 마침내 219년에 죽임을 당했다. 이후 많은 이들의 숭배 대상이 되었다.01 

 

  관성묘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게 된 계기는 1594년 명나라 신종(神宗, 1563~1620)02이 관운장을 나라와 백성을 수호하는 무신(武神)이라 선포하면서 시작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명나라에 원병을 요청하고 이여송(李如松), 진린(陳璘) 등 명나라 장수들이 들어오면서 전투에서 승리를 기원하기 위하여 주둔지마다 관성묘를 세울 정도로 신앙의 열의가 대단했다.  

  임진왜란 이후 선조 35년(1602)에 당시 명나라 신종은 조선에서의 왜병을 격퇴시킨 공은 오로지 관운장의 음공에 의한 것이라 하여 내탕금 4천 냥을 보내 동대문 밖 숭인동에 관왕묘를 짓게 했다. 이로부터 조선 조정, 특히 왕가에서는 열성으로 신앙하였다고 한다. 『징비록(懲毖錄)』03이나 『임진록(壬辰錄)』04등에 보면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관우의 신조(神助)에 힘입어 승리하게 된 영험기와 이적 등이 기록되어 있다. 관성묘는 서울 종로구 숭인동의 동묘(東廟), 도동의 남묘(南廟), 혜화동의 북묘(北廟), 서대문 밖 천연동의 서묘(西廟) 그리고 종로 보신각 뒤에 중묘(中廟)가 있었으나 지금은 동묘만 남아 있다. 지방에는 안동, 성주, 전주, 남원, 진안 등에 남아 있다. 

  
▲  전주 관성묘 입구 

  관성묘를 관제묘(關帝廟), 관왕묘(關王廟), 무묘(武廟) 등으로 불리며, 『전경』에서는 관묘(關廟)라고 기록되어 있다. 관우의 호칭은 관운장(關雲長), 관성제군(關聖帝君) 또는 관보살(關菩薩) 등 여러 가지로 불린다. 그는 죽은 후에 명성이 더욱 높아져 ‘제(帝)’라는 칭호가 붙여졌으며, 중국 고전 『좌전(左傳)』05을 모두 외우고 있었다고 하는 데서 문제(文帝)라는 칭호를 받아 문무(文武)를 겸비한 인물로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그는 중국에서 무운(武運)과 재운(財運)의 수호신으로 한(漢)민족 신앙의 대상이다.  

  현재 관성묘는 김병욱의 손자인 김진문 합장이 3대째 대를 이어 관리하고 있으며, 그를 통해 상제님과 관성묘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전주 관성묘가 만들어진 시기가 안내문에는 1895년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은 1598년에 서울에 관왕묘가 세워진 당시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후에 훼손되었다가 1895년(고종 32년)에 전라관찰사 김성근(金聲根)과 남고산성 별장 이신문(李信文)의 발기로 부근 유지들의 도움을 받아 지었다고 한다. 지금으로부터 2년 전에 건물을 보수하면서 대들보의 상량문에 1895년보다 30년을 앞선 기록이 나왔다고 한다. 하지만 현판에 새겨진 기부자의 기록이 1895년으로 쓰여 있었다는 것은 처음 관운장을 초상화로만 모셔졌다가 1895년에 대대적인 중창을 하면서 은행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그 위에 흙으로 입혀 현재 관운장의 상과 여러 장수의 상을 만들었기 때문이라 한다. 그때 지었던 건물을 지금도 그대로 보존해 오면서 유지하고 있다. 

    


▲  주창장군과 왕보장군   

  

  사당에 모셔진 인물들을 보면, 협천대제(協天大帝)라 하여 ‘하늘을 돕는 대제’라는 뜻으로 삼각수에 대춧빛 얼굴의 관운장 상이 황금색 용포를 입고 앉아 있고, 앞쪽 좌우에는 부장들의 상을 모셨는데 오른편은 아들 관평장군과 조무장군이, 왼편으로 주창장군과 왕보장군의 상이 있다. 관우상의 뒤편 좌우로는 제갈공명과 관우에게 도움을 준 옥천사의 보정스님(옥천대사)이 모셔져 있다. 

  연중행사는 치성(致誠)이라 하여 여섯 차례 오시(午時)에 행하며, 절기로는 경칩 · 상강에 모시고, 5월 13일(음력)은 관평장군(아들) 생일로 살아생전에 아들이 옷을 지어 올렸다고 하여 이날은 치성과 함께 용포를 갈아입는 날이다. 그다음 6월 24일(음력) 생신날과 10월 19일(음력) 제삿날, 12월 6일(음력) 적벽대전 출전한 날에 한다. 치성 진행은 지정된 주문을 하며, 그날 참석하는 단체가 있으면 그 단체 형식에 맡긴다고 한다. 

  
▲ (사진 2) 관성제군, (사진 3) 아들 관평장군과 조무장군   

  

  상제님에 대한 행적을 보면 관성묘는 상제님께서 자주 들리시던 곳이라 한다. 1908년(무신)에 상제님께서 전주 김준찬의 집에 가셔서 “근자에 관묘(關廟)에 치성이 있느냐”고 하시기에 낙범이 있음을 아뢰었도다. 이에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그 신명이 이 지방에 있지 않고 멀리 서양(西洋)에 가서 대란을 일으키고 있나니라”06고 하신 내용이 있다. 김진문 합장의 말에 의하면 고모와 친분이 있는 김호연 할머니로부터 어린 시절 상제님을 따라다니면서 겪은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고 한다. 그중에서 몇 가지를 소개하면 상제님께서 대원사 쪽에 계시다가 이곳으로 오셔서 관운장과 대화를 하시는 광경을 주위 사람들이 목격했다고 하며, 진안 마이산의 이갑용 처사가 오행탑과 천지탑을 쌓을 당시 이곳에서 상제님과 만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두 분이서 만날 때는 마치 약속하신 듯이 오시는데 서로 반대 방향에서 다른 출입문으로 동시에 들어오시면서 만났다고 한다.  

  


▲  관성묘 

 

  관성묘를 나오면서 근방에 있는 김병욱 종도의 집터를 들렀다. 김병욱(金秉旭, 1874∼1938)은 남원에서 동학혁명 때 육군 장교로 있었으며 평정의 명을 받고 전주에서 전봉준과 대치하기도 했던 인물이다. 1903년(계묘)부터 상제님을 따르면서 많은 공사에 참여하였다. 일화로 상제님께 명당(明堂) 자리를 원하니 상제님께서 “믿고 있으라.”고 하셨다. 얼마 후 김병욱은 바라던 아들을 하나 얻게 되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도 말씀이 없으시기에 그가 “주시려던 명당은 언제 주시나이까?”고 여쭈었더니, 상제님께서는 “네가 바라던 아들을 얻었으니 이미 그 명당을 받았느니라.”07고 일러주셨다. 상제님께 명당을 원하니 아들을 주셨다고 한 구절이 나온다. 손이 귀한 집안에서 태어난 김진문 합장은 어린시절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다고 한다. 

  관성묘를 내려오면서 한편으로 찹찹한 마음이 들었다. 관운장은 많은 이들의 숭배와 의리의 표상이었다. 그러나 함께 살아가야 할 세상은 관운장의 바람과는 달리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 관운장은 성인이나 현인들처럼 훌륭한 진리나 철학을 가르친 적은 없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의리와 어려움 속에서도 변치 않는 신의, 나라와 백성을 위한 충의, 두려움 없는 용맹함은 그가 몸으로 보여준 가르침이다. 이러한 그이기에 관성제군이라는 위치에 오르고 1800년의 세월이 흘러도 분향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 김병욱 종도 집

《대순회보》 127호  

  

  

참고자료 

ㆍ전주문화원 사이트, http://jeonju.kccf.or.kr/ 

ㆍ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jsp 

ㆍ김창수, 『천하영웅 관운장』, 하문사, 2009. 

ㆍ 陳壽 저, 김원중 역, 『正史 三國志』, 신원문화사, 2001. 

ㆍ 심백준ㆍ담소량, 정원기(외) 역, 『삼국지 사전』, 범우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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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본문 중 ‘도원결의’, ‘5관돌파’, ‘화용도’ 일화는 중국 명대 초기 나관중의 장편소설인 『삼국지연의』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02 중국 명(明)나라 말기의 황제로 연호는 만력(萬曆, 1573~ 1620)이며,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군사를 파견하여 도와주었다. 후에 송시열의 유명으로 충북 괴산 화양리에 만동묘를 세워 제사를 지냈다. 

03 조선 중기의 문신인 서애 유성룡(1542∼1607)이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책으로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는 뜻이다. 

04 작자와 연대 미상,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조선시대의 역사 소설.  

05 공자의 『춘추(春秋)』를 해설한 주석서로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이라 한다.  

06 행록 4장 11절. 

07 행록 1장 3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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