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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화 종도와 숭림사

교무부    2017.02.01    읽음 :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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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화 종도와 숭림사 

  

 

연구위원 신상미 

  
  

 

  싱그러운 풀잎과 꽃길 따라 흐르는 달콤한 봄을 느끼며 도장에서 3시간 30분 소요하여 전북 군산시(群山市)에 이르렀다. 군산은 전주에서 익산, 익산에서 군산으로 연결되는 도시의 서쪽에 있으며 바다 및 섬들과 평야로 되어 있는 곳이다. 지금은 금강하굿둑의 완공으로 충남의 장항, 서천과 연결되어 군장산업기지개발과 섬들이 육지가 된 새만금지구 간척사업, 서해안고속도로 건설 등으로 인해 크게 변화하고 있다. 상제님께서는 군산에서 군항(군산항), 말점도(말도), 군둔마을에 사는 김성화 종도의 집, 임피 최군숙 종도의 집을 다녀가시며 공사를 보셨다. 이번엔 군둔마을에 살았던 김성화 종도의 집터를 답사하기로 하였다.  

  

   

  

 『전경』에는 김성화 종도가 머물렀던 고을이 임피 군둔리(臨陂軍屯里)01라고 되어 있는데, 임피는 전북 군산시 임피면·서수면·대야면·개정면·성산면·나포면 일대를 말한다. 신라 제35대 경덕왕 때 임피로 정해졌는데 고려 때 현으로 강등되어 현령(縣令)으로 조선조까지 내려왔다. 1895년(고종 32년) 지방관제개정에 의하여 다시 군(전주부 임피군)이 되어 군내 ⋅ 동일 ⋅ 동이 ⋅ 남일 등 13개 면을 관할하다가 1896년 전라북도 임피군이 되었다. 1914년 군 ⋅ 면 통폐합 때 땅을 나누어 하북면 ⋅ 북삼면은 나포면으로 폐합되어 옥구군에 병합되었다. 김성화 종도가 살았던 군둔마을도 이때 신곡리 일부를 병합하여 장상리(蔣相里)라고 해서 옥구군 나포면에 편입되었고, 이후 1995년 군산시에 통합되었다. 그러므로 1914년 폐합하기 전에 김성화 종도의 집은 전북 군산시 임피군 군둔리였으며, 지금은 전북 군산시 나포면 장상리 군둔마을이다.  

   


▲ 군둔마을 입구 

  

  정확한 김성화 종도의 집터를 찾기 위해 군둔마을 입구에 살고 있는 이장(72세)을 만났다. 김 이장은 다행히 김성화 종도의 집터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10가구밖에 남지 않은 지금과는 달리 옛날에는 이 마을에 50가구가 넘게 살았으며, 양조장, 담배, 이발소, 고약 만드는 곳, 한약방 등이 있을 정도로 잘사는 마을이었다고 한다. 김성화 종도의 둘째 아들이 김성화 종도 집에서 한약방을 했었다고 하는데, 집이 비워진 지는 30년이 넘었다고 한다. 30년간 비워진 집이지만 폐가로라도 남아 있어서 참으로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 김성화 종도의 집터  

 

  이장 집을 지나 망해산(望海山) 등산로 쪽으로 5분 정도 올라가다 보니 대나무로 쌓여 있는 허름한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이곳이 바로 30년 동안 비워졌다는 김성화 종도의 집이다. 문이 뜯긴 폐가인데도 푸른 대나무에 쌓여 있어서인지 햇살에 비친 집은 아늑해 보였다. 김성화 종도의 집은 방 두 개에 부엌 하나 그리고 옆에 조금 떨어진 곳에 창고 같은 건물이 있었다. 그냥 모르고 지나쳤다면 폐가에 지나지 않았을 텐데, 상제님께서 머무르셨던 곳이고, 상제님을 모신 종도의 집이었다는 사실에 달리 보였다.  

  


▲ 김성화 종도의 족보 

  

  김성화 종도의 본관은 김해 김씨, 삼현파(三賢派)이며 족보 명은 후두(厚斗), 자는 성화(聖化)이다. 그는 아버지인 창영(昌永), 광주 이씨인 어머니 사이에 무오(1858)년 9월 28일 전북 군산시 나포면 장상리 군둔마을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부인 전주 이씨 사이에 3남(용혁, 용석, 용복) 1녀를 두었으며, 신미(1931)년 9월 20일 군둔마을에서 74세로 작고하였다.  

  김성화 종도의 집에 머무셨다는 내용은 『전경』 제생 15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김 광찬은 상제를 모시고 김 성화가 있는 고을 임피 군둔리(臨陂軍屯里)에 이르러 며칠 동안 머물렀도다. 상제께서 죽게 된 성화의 이웃 사람을 제생하셨느니라. 상제께서 환자를 만나 그 병은 그대로 치료하기 어려우니 함열(咸悅) 숭림사(崇林寺) 노승을 조문하고 돌아오게 하셨도다. 환자는 중병의 몸을 이끌고 그곳을 돌아옴으로써 사경에서 벗어났도다. 그가 이튿날 다시 숭림사에 찾아가니 노승이 죽었는지라. 조문하고 돌아오면서도 상제 말씀에 위력을 느끼고 두려워하였도다.  

  


▲ 숭림사 일주문   

  

  구절 그대로 보자면 김성화 종도의 이웃 사람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 함열 숭림사 노승을 두 번 조문하고 돌아온 것으로 이해된다. 조문(弔問)이란 남의 죽음에 슬퍼하는 뜻을 드러내어 상주(喪主)를 위문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죽은 사람에게 할 수 있는 것인데, 『전경』에는 조문을 다녀오고 나서 이튿날 또 다시 숭림사에 찾아가니 노승이 죽었다고 하였다. 예부터 미신으로 조문하러 갔을 때 돌아가신 분에게 가족이나 주변 사람들의 병도 함께 가져가 달라고 빌곤 하였는데, 상제님께서는 그런 차원에서 이 방법을 말씀해 주신 것이었을까⋅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노승은 주지 스님이 아닌 그냥 말 그대로 늙은 스님일까⋅ 이런 점들을 궁금해 하며 김성화 종도 집터에서 30분가량 차를 타고 익산시 함라산 골짜기에 남향하고 있는 숭림사(崇林寺)에 도착하였다.  

  


▲ 숭림사(전북 익산시 웅포면 송천리 5) 

  

  맑게 지저귀는 새소리를 들으며 들른 숭림사는 생각보다 규모가 작고 아늑하였다. 열심히 땀 흘리며 공사를 하는 인부들 외에는 인적이 없었다. 알고 봤더니 그 인부 중에 한 분이 숭림사 주지 스님인 지광 스님이었다. 주지 스님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보통 주지 스님이라 하면 나이가 많고 흰 수염에 고고한 이미지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은데, 그와 다른 모습에 다소 의아했다. 우리 일행을 맞아 작업을 잠시 멈춘 주지 스님 말에 의하면 숭림사라는 절 이름은 선종의 초조인 달마대사가 중국 하남성(河南省) 숭산(崇山)의 소림사(少林寺)에서 9년 동안 면벽좌선02한 고사에서 유래한 것으로 숭산의 ‘숭’ 자와 소림의 ‘림’ 자를 따서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드넓은 호남평야를 눌러준다는 진압사찰로, 임진왜란 때 뇌묵당 처영대사(處英大師)03가 숭림사와 금산사를 중심으로 승병을 일으켰다고도 한다. 그래서인지 숭림사는 고요한 듯하면서도 패기가 느껴졌다. 

    

  

  숭림사의 설화에는 1345년 고려 충목왕의 왕비가 등창에 걸려 힘들어 할 때, 꿈속에서 어느 사찰에 머무는 동안 병이 씻은 듯이 낫게 되어 그 사찰과 비슷한 곳을 찾으니, 바로 숭림사였다고 한다. 숭림사에서 일주일간 기도를 모시는 동안 정말 꿈에서처럼 병이 완치되었다고 하는 이 설화는 김성화 종도의 이웃 사람이 중병을 치료하게 된 이야기가 생각나게 한다.  

 

 

 

  상제님이 김성화 종도의 이웃 사람 병을 치료해 주셨을 때가 대략 1906년으로 추정되는데, 지광스님은 당시 주지였던 분에 대해서는 남겨진 기록이 없어 모른다고 하며 1960년에 입적하신 황성렬 주지스님에 대해서만 설명을 해주었다. 상제님께서 계실 무렵에 있었던 노승이 주지 스님이 아닌 말 그대로 노승을 뜻함인지 확인할 수 없어 아쉬움을 남겼다.  

  군둔마을에서 숭림사까지는 차로 약 30분 정도가 소요되는데 당시 중병을 앓고 걸어서 얼마나 걸렸을까⋅ 길도 제대로 없는 곳을 힘겹게 걸었을 모습을 눈감고 한번 그려 본다. 사람은 물론 이 세상을 구하고자 노력하신 상제님과 상제님 말씀을 따른 종도들과 이웃들의 모습에서 내가 과연 당시에 살았던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처신했을 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믿음 없이는 그 무엇도 이루어질 수 없음을 다시 한번 생각하며 다음 목적지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대순회보》 133호

  

 

(참고문헌)  

 

『한국지명총람 12』(전북 편 下), 한글학회, 2003. 

『군산시사』上, 군산시사편찬위원회, 2000. 

『익산시사』上, 익산시사편찬위원회, 2001. 

金海金氏世系(上, 下합본) 

군산시청 홈페이지. http://www.gunsan.go.kr  

인터뷰, 김종풍(1941년) 마을 이장, 2012. 03. 30. 

인터뷰, 숭림사 지광 스님, 2012. 04.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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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제생 15절. 

02 벽을 보고 앉아 수행을 하는 것. 

03 자세한 생몰년이나 행장은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어려서 금산사에서 출가하였고, 뒤에 서산대사의 제자로 들어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격문(檄文)을 받고 호남(湖南)에서 1,000명의 승군(僧軍)을 일으켜, 전라도 순변사(巡邊使) 권율(權慄)의 군사를 따라 북상하여 평양·개성 등지에서 싸워 공을 세웠다. 

07 그 앞을 지날 때에는 신분의 고하(高下)를 막론하고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리라는 뜻을 새긴 석비(石碑)이다. 대개 왕장(王將)이나 성현, 또는 명사ㆍ고관의 출생지나 분묘 앞에 세워졌다.  

08 좌우의 행랑채보다 기둥을 훨씬 높이어 우뚝 솟게 지은 대문. 

09 건물의 모서리에 추녀가 없이 용마루까지 측면 벽이 삼각형으로 된 지붕. 

10 『신종교연구』10집, 한국 신종교학회, 2004, pp.5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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