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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극도장의 자취를 찾아서

교무부    2017.02.01    읽음 : 2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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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극도장의 자취를 찾아서    

 

 

연구위원 이정만

   

  

  이번 답사지는 무극도장(無極道場)의 자취들이 남아 있는 장소들로 정하고 답사 준비에 들어갔다. 사전 자료 준비를 통해서 처음으로 알게 된 놀라운 사실은 그동안 몇 장의 사진으로밖에 볼 수 없었던 무극도장의 건물이 비록 일부이기는 하지만 무극도장 터에서 그리 멀지 않은 장소로 이건(移建)되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흥분되는 순간이었다.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며칠을 기다려야만 했다. 몇 번의 회의 끝에 답사코스는 무극도장 터 → 경주이씨 재실 → 내소사로 최종 결정되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답사 당일, 우리 일행은 여주본부도장에서 출발하여 무극도장 터가 있는 정읍까지 버스로 3시간 남짓 이동하였다. 다른 때 같으면 잠으로 채웠을 그 시간을 일부나마 무극도장의 실체를 접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렘으로 가득 채웠다. 

 

 

  

  태인 톨게이트를 지나 30여 분을 더 가니 무극도장 터가 있는 도창현(道昌峴: 現 전북 정읍시 태인면 태흥리)에 이르렀다. 이곳은 도챙이 고개 혹은 돌챙이 고개라고 하며 삼리(三里) 마을 동북쪽에서 독양(犢養) 마을로 넘어가는 항가산(恒伽山) 중턱의 고개를 가리킨다. 

 『전경』에 상제께서 도창현이 있기 때문에 태인에 자주 머무셨다는 구절01은 훗날 도주님께서 상제님의 계시로 이곳에 무극도장을 마련하신 것과 무관하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 치마바위 

  

  삼리 마을길로 조금 내려가다 보면 도로 왼편에 고물상으로 들어가는 문이 보인다. 그 안이 바로 무극도장이 있었던 터다. 그날은 아쉽게도 정문으로 들어가 볼 수 없는 상황이어서 고물상 뒤편 언덕 위에 올라가서 보기로 하였다.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니 고물상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발밑은 거의 수직에 가까운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평평한 바위들이 마치 병풍처럼 옆으로 펼쳐져 있었다. 이 바위가 바로 치마바위다. 현재 고물상으로 사용하고 있는 면적은 예전에 무극도장 터로 쓰이던 면적과 거의 비슷하다고 한다. 

  도장 터를 바라보며 무극도장에 있던 건물인 영대(靈臺), 도솔궁(兜率宮) 등을 비롯한 여러 건물의 위치가 어디였을까 나름대로 상상 해보았다. 1920년대 초에 이 정도 규모의 도장을 건립하는 일은 그 당시 우리나라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참으로 엄청난 대공사였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전경』에는 무극도장의 규모나 자세한 구조에 관해서는 서술되어 있지 않지만 1936년에 발행된 『정읍군지』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그 웅장함은 보천교 본부와는 다르지만, 건축물의 장식이 아주 화려해서 원근각지(遠近各地)의 관람객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서술하고 있다.02  

  


▲ 무극도장 터 (아래 사진과 같은 방향에서 찍은 사진이다.) 

  

  무극도장이 이룩되고 나서 교세가 더욱 확장되었고, 도주님께서는 진업단을 구성해서 안면도와 원산도에 간척사업을 하시는 등 전국 각지에서 구세제민을 위한 사업을 추진하셨다. 그러나 1930년대 말부터 무극도를 비롯한 민족종교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결국 도주님께서는 종도들을 각자의 집으로 돌려보낸 후 무극도장을 조선총독부에 기증하고 고향인 회문리로 돌아가셨다.03  

  그 후 조선총독부는 무극도장을 경매 처분하였고, 1943년에 부안의 갑부였던 김상기 씨가 무극도장의 주요 건물인 영대와 도솔궁을 비롯한 몇 개 동의 건물을 낙찰받아서 자신의 집으로 이건(移建)하였다. 그러나 1947년에 김상기 씨04가 사망하자 얼마 후 자손들이 건물 일부를 매각하였다. 

  


▲ 경주이씨 재실 (전북 부안군 동진면 당상리 당하마을 소재) 

 

  무극도장 건물 중에서 지금까지 유일하게 소재가 파악된 건물은 도주님께서 기거하셨다는 도솔궁이다. 도솔궁 1층은 김상기 씨 집에 있던 것을 전북 부안의 경주이씨 문중에서 다시 사들여 재실로 사용하게 되었다. 2, 3층은 김상기 씨 집에서 구병서 씨05가 다시 사들였는데, 3층은 1965년 부안의 내소사에 기증하였고, 이후 보종각(寶鐘閣)으로 쓰이게 되었다. 2층은 계속 사용하다가 1980년대에 태풍으로 심하게 훼손되어 모두 폐목 처리했다고 한다.  

  무극도장 터는 (태인)미륵불교에서 사들여 1953년에 태인기술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정식으로 인가된 학교가 아니었기 때문에 1983년에 중등교육과정이 의무화되면서 폐교되었다. 이후 전문대를 세우려던 사람이 이 터를 다시 사들였으나 설립에 실패하였고, 지금은 통일교에서 소유하고 있다. 예전의 화려했던 무극도장 건물은 온데간데없고 기계소음만이 진동하는 이곳에서 세월의 변화를 새삼스레 느꼈다.  

  

 

   

 

 다시 우리 일행은 무극도장의 일부인 도솔궁 1층을 보기 위해 부안에 있는 경주이씨 재실로 향했다. 버스로 40여 분 가니 재실이 있는 부안군 동진면 당상리 당하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로에서 불과 얼마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기에 도로에서도 그 건물을 볼 수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 재실에 당도한 후 얼마 안 있어 현재 이 재실을 관리하고 있는 문중의 한 분을 만날 수 있었다. 

  이분은 올해 연세가 75세라고 했다. 언제 이 건물을 옮겨 왔는지에 대해 여쭈어 보니 지금으로부터 50년쯤 된 것 같다고 했다. 원래 이곳에 조그만 재실이 하나 있었는데 그 당시 부안군 주산면 돈계리에 있는 어느 부잣집(김상기 집)에서 건물을 매각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문중에서 사서 옮겼다고 한다. 그분도 어른들을 따라서 그 부잣집에 직접 갔었는데 그 집(김상기 집)도 예전에 어딘가에서 뜯어서 옮겨지은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조사한 바로는 김상기 씨가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해 건물 일부를 사들인 곳이 무극도장임이 틀림없었다. 아, 무극도장 건물을 눈앞에서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다니! 감개가 무량했다. 일행들도 다들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경주이씨 재실은 무극도장의 도솔궁 1층이 김상기 씨의 집에서 이곳으로 이건된 것이다. 도솔궁은 우리 도장의 영대처럼 외부에서 보면 3층이지만 내부는 4층으로 된 구조였다. 이중에서 경주이씨 재실은 도솔궁의 외부 1층, 내부 2층의 구조물이 옮겨온 것이다. 

 

 

 

  건물의 외부를 살펴보면 목조 건물로서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 모양이다. 도솔궁 1층은 김상기 씨 집에서 이곳으로 이건(移建)되어 오면서 재실의 용도에 맞게 원래 측면 3칸이던 방을 앞쪽 첫 칸을 측면에서 반으로 나누어 마루로 변경했다고 한다. 외부의 단청은 많이 퇴색되어서 희미하게만 남아 있었다. 건물 외부의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면 첫 번째는 귀포06에 용두(龍頭)가 두 개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옛 건물에는 대부분 용두가 한 개 있는 것을 많이 보았는데 이 건물에서는 두 개나 볼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지붕 네 귀퉁이를 받치고 있는 기둥 윗부분에 장식이 없는 경우가 많은데 이 건물은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었다. 세 번째는 공포(?包)07 양식이 주심포 양식(柱心包 樣式)08이 아닌 다포 양식(多包 樣式)09으로서 건물의 화려함을 더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무극도장이 있을 당시 그 화려함에 관람객들이 끊이지 않았다는 기록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 재실 2층 내부 단청 

 

  얼마 후 관리인이 1층 방문을 열었다. 밖에서 보기에는 1층 건물이었으나 내부에 들어가니 2층 구조로 되어 있었다. 1층 바닥은 나무마루였고 천정 반자는 단청이 되어 있었다. 단청의 색은 외부보다는 상당히 잘 남아 있는 편이었다. 기둥 곳곳에 이 건물이 이건되었음을 알려주는 흔적들이 보였다. 얼마 후 2층도 보여 달라는 부탁을 하니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짐을 치우고 문을 열어주었다. 예전에 다녀왔던 사람들 말이 그동안 2층은 얼굴만 내밀어서 잠시만 보았을 뿐 올라가 보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날은 운 좋게도 우리 일행을 위해 기꺼이 개방해 주었다. 먼저 올라간 사람이 보더니 감탄을 연발했다. 직접 올라가 보니 과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천장과 벽을 비롯한 곳곳에 그려져 있는 단청과 벽화들이 그동안의 세월에 비해 너무나 잘 보존되어 있었다.  

  


▲ 재실 2층 내부 천정화  

  

  도주님께서 기거하셨다는 무극도장의 도솔궁을 이렇게라도 직접 보고 만져 볼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한편으로는 앞으로 이곳의 여건이 좀 더 좋아져서 관리가 잘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 일행은 관리인에게 거듭 감사의 말을 전한 다음 마지막 목적지인 부안의 내소사(來蘇寺)로 향했다.  

  약 50여 분을 지나서 내소사 입구에 도착했다. 매표소가 있는 일주문을 지나니 아름답기로 유명한 전나무 숲길이 펼쳐졌다. 이곳은 약 150여 년 전에 전나무를 심어 지금의 울창한 숲길이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너무나 울창해 햇볕이 내리쬐는 한여름에도 시원함을 느낄 수가 있다고 한다. 숲길을 따라 얼마 걷지 않아 능가산의 연봉들을 배경으로 한 시원스런 내소사 경내가 한눈에 펼쳐졌다. 이 사찰은 633년(백제 무왕 34년) 백제의 승려 혜구두타(惠丘頭陀)가 이곳에 절을 세워 큰 절을 대소래사, 작은 절을 소소래사라 했다고 한다. 그 후 대소래사는 불타 없어지고 소소래사만 남은 것이 지금의 내소사라고 한다. 

  


▲ 내소사 전나무 숲길 

  

  내소사는 임진왜란 때 완전히 소실되었다가 1633년(조선 인조 11) 청민(淸旻)선사가 대웅전(大雄殿)을 지으면서 중건하였다. 그 후 1865년(고종 2) 관해(觀海)선사가 중수하고 만허(萬虛)선사가 보수한 뒤, 1983년 혜산(慧山)스님이 중창하여 현재의 가람(伽藍)을 이루었다. 이곳에는 3가지 보물이 있는데 보물 제291호인 대웅보전(大雄寶殿)과 청림사(靑林寺)에서 옮겨온 보물 제277호로 지정된 고려동종(銅鍾), 보물 제278호인 법화경절본사본(法華經切本寫本) 등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고려동종은 높이 103cm, 입지름 67cm 크기로 우리나라 종에서만 보이는 특유의 음통(音筒)10과 용머리 모습을 한 종고리 등을 갖추고 있는 고려 후기 대표적인 종이라고 한다. 종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고려 시대인 1222년(고종 9)에 청림사(靑林寺)에서 만들어진 것을 1853년(조선 철종 4)에 내소사로 옮겼다고 한다. 이러한 고려동종을 보관하고 있는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보기 위해 온 보종각(寶鍾閣)이다. 

   


▲ 보물 제291호 내소사 대웅보전 

  

  이 건물은 현 위치에 있기까지 몇 곳을 거쳤다고 한다. 처음 있었던 곳은 태인의 무극도장이다. 그 당시 외부 3층으로 된 도솔궁 건물의 제일 상층부였던 건물이다. 이후 무극도가 일제 강점기의 종교단체해산령으로 해산될 때 무극도장의 영대와 도솔궁 및 몇 개 동의 건물을 김상기 씨가 사들여 집으로 사용했고, 그가 사망한 후 도솔궁으로 쓰였던 2, 3층 건물은 구병서 씨의 집으로 또다시 이축되었다. 그중 3층은 내소사 주지스님 원경이 법당 앞마당(서남향)에 보종각을 건립할 때 또 한 번 이축되었는데, 현 내소사 회주(會主) 우암 혜산선사가 주지로 재임할 때 현 위치에 옮겨 세웠다고 한다.  

  현재 보종각의 모습은 다행히 잘 보존되고 있는 듯했다. 기둥과 공포, 바닥을 비롯한 대부분의 목재가 그 당시 것인 듯했으나 단청과 기와 등은 새로 한 것이었다. 무극도장의 도솔궁 3층 건물이 부안의 유명한 사찰 중의 하나인 내소사에 그것도 우리나라의 중요한 보물을 지켜주는 공간으로 다시 살아나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보물 제291호 내소사 대웅보전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이번에 무극도장의 자취가 남아 있는 세 장소를 답사하면서 도주님께서 창도(創道)하신 무극도의 실체를 피부로 절감하며 우리 종단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좀 더 깊게 할 수 있는 참으로 소중한 시간이 되었다. 아울러 도주님의 유법(遺法)을 그대로 계승하신 도전님의 뜻을 더욱더 바르게 새겨 진정으로 상제님의 덕화를 선양할 수 있는 수도인으로 거듭나야겠다는 다짐을 다시 한번 해보았다. 

 

《대순회보》 134호

 

 

​참고문헌  

 

『정읍군지』, 장봉선 편저, 1936. 

『풍수로 보는 한국사찰』, 임학섭 著, 1996. 

내소사 홈페이지. http://www.naesosa.org/ 

증언, 서영목(1938年生), 2007. 06. 16. 

증언, 김규영(1929年生), 2007. 0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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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행록 4장 6절 참조. 

02 동면(태인면을 말함) 태흥리 도로가에 2, 3층의 주란(朱欄: 붉은 칠을 한 난간) 화각(畵閣: 채색을 칠한 누각)이 있는 고건물이 바로 무극도 본부다. 그 웅장함은 보천교 본부와는 다르나, 구조의 정교함은 별 손색이 없다. 1924년 3월에 시공하여 1926년 4월에 준공하였고, 총 공사비는 7만원에 달하였다고 한다. 건물의 명칭은 가운데 3층이 도솔궁이고, 2층은 영대라고 하며, 주위에 부속 건물 10동이 있다. 그 건축물의 장식의 찬란함이란 장광(長廣)이며, 원근각지(遠近各地)의 관람객들이 끊이지 않았다. (장봉선, 『정읍군지』, 履露齋, 1936, pp.20~21 참고.) 

03 교운 2장 43절. 

04 김상기 씨 : 당시 전북 부안군 주산면 돈계리 돈계 마을에 거주했고, 만석꾼이었다. 

05 구병서 씨: 당시 전북 부안군 보안면 우동리 만화동에 거주했고, 천석꾼이었다. 

06 귀포: 목조건물에서 모서리에 있는 공포를 뜻한다. 

07 공포: 전통건축의 경우 지붕의 무게가 상당하다. 기둥으로만 그 무게를 지탱하게 되면 집중적으로 하중을 받게 되어 건물이 무너지게 된다. 물건을 이고 가는 아낙네의 모습에서 그 모습이 유래되었다고도 하는 공포는 지붕의 집중 하중을 분산하는 역할과 함께 처마를 길게 내고 지붕을 받쳐주는 뼈대로서의 구실을 하며 도리와 보의 처짐을 방지하므로 기둥 사이의 거리를 넓게 할 수 있게 한다. 

08 주심포 양식: 공포가 기둥 위에만 놓이는 건축양식. 

09 다포 양식: 기둥의 사이에도 공포를 놓는 건축양식. 

10 음통: 용통(龍筒), 음관(音管)이라고도 불리는 대롱 모양의 관으로 용뉴(龍紐: 용머리와 휘어진 목으로 구성된 종을 매다는 고리) 바로 옆에 있다. 범종의 울림소리와 관련된 음향 조절의 기능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범종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양식 가운데 하나로 내부가 비어 있고 하부에는 종의 몸체와 관통되도록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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