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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사 천왕문과 종각

금련산(金蓮山) 마하사(摩訶寺)

교무부    2017.02.01    읽음 : 2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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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련산(金蓮山) 마하사(摩訶寺)  

 

 

 연구위원 박영수 

   

우리는 도주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부산 동래의 마하사를 찾았다. 마하사(摩訶寺)는 도주님께서 49일 동안 불음불식 공부를 하셨던 곳으로 우리 도(道)와는 매우 인연이 깊은 절이다.  

해발 415미터의 금련산 서북쪽 산기슭에 자리 잡은 마하사는 천 년이 넘는 역사를 간직한 신라 초기의 고찰로 범어사의 말사이다. 마하사의 창건연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대웅전 ‘상량문’에 따르면 서기 394년 신라 내물왕 39년에 아도화상(阿道和尙)이 경북 선산에 신라 최초의 사찰인 도리사(桃李寺)를 세우고, 남으로 내려와 나한기도도량(羅漢祈禱道場)인 마하사를 세웠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3, 「아도기라(阿道基羅)」에 아도화상은 중국 위나라의 아굴마와 고구려의 고씨도령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한 인물로 적고 있다.  

마하사라는 절의 명칭은 『반야심경』의 정식명칭인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 따왔는데 ‘마하(Maha)’는 범어(산스크리트어)로 ‘훌륭한, 존귀한, 위대한’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마하사는 ‘존귀한 절’이라는 뜻이다. 옛날에는 반야암(般若庵)과 바라밀다사(波羅密多寺)라는 두 개의 말사가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폐사되고 그 터만 남아 있다.  

마하사가 있는 금련산은 산이 연꽃 모양을 해서 금련산이라 한다. 연산동이라는 지명도 금련산에서 유래되었다고 하는데 동래지역 풍수에서는 연꽃이 지천으로 많이 피어 있는 곳이어서 연산동이라 했다고 한다. 또한 예로부터 이 마하사가 위치한 지형은 이른바 금학이 알을 품은 금학포란(金鶴包卵)의 형세라고 하여 절 입구에 들어서면 따뜻한 기운이 느껴진다고 전해온다.  

마하사에는 사찰 3문 중 일주문(一柱門)과 불이문(不二門)이 없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경내로 들어서면 제일 먼저 천왕문을 만난다. 천왕문은 종루를 겸하고 있어 상층에는 범종각이 있고 하층에는 입구 외벽에 금강역사상이 양쪽에 그려져 있는데, 다른 사찰에 있는 것은 목각으로 만들어져 있음에 비하여 그림으로 그린 것이 특이하다.  

천왕문을 지나면 오른쪽에는 대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는데, 세종대왕 이전에 설치된 황령산(荒領山) 봉수대 밑 금련산에 있었던 마하사는 정찰임무를 맡은 호국사찰로서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대나무가 많은 이곳은 전시 때 화살재료를 공급하기도 했다고 한다. 임란 때 마하사가 전소된 까닭은 이러한 역할 때문이 아닌가 한다. 호국사찰로서 마하사의 이러한 내력은 만주로 독립운동을 떠나셨던 도주님의 구국정신과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왕문을 지나면 이내 강당과 종무소 건물을 만나는데 건물 벽에는 부모은중경을 나타낸 그림이 11면으로 그려져 있다.  

대웅전으로 가려면 이 건물의 아래로 나 있는 하심문을 지나가야 한다. 여기에는 벽면에 금강역사, 천장에 비천상이 그려져 있다. 전통사찰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마하사에도 부처님 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물의 아래쪽으로 난 문을 통과해야 한다. 이는 건물 아래를 통과함으로써 자연히 고개를 숙이게 되니 자신을 한없이 낮추라는 불문의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의미가 된다.  

하심문을 통과하여 대웅전 마당에 들어서면 응진전과 대방(마하대복연), 5층석탑, 요사, 삼성각 등이 차례로 보인다. 장구한 역사에 비하여 사찰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전통의 향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아담하고 편안한 분위기였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된 다포양식이며, 문살무늬는 사군자문 장생문 연화문 등이 화려하게 조각되어 있다. 대웅전의 옆 벽면에는 심우도 벽화가 그려져 있으며, 주련의 내용도 음미해 봄직하다.  

 

天上天下無如佛 천상천하에 부처와 같은 것은 없으며 

十方世界然無比 십방세계에 견줄만한 것이 없도다.  

世間所有我盡見 세상에 있는 바를 다 보았으나 

一切無有如佛者 일체가 부처만한 것이 없도다.  

若人一念能名號 만약 일념으로 능히 부처를 부른다면, 

頃刻圓成無量功 경각에 무량 공덕을 이루리. 

   

도주님께서 공부하신 곳은 현재 요사(寮舍 : 절에 있는 스님들이 거처하는 집)로 쓰이는 건물로, 둥그런 모양의 토벽으로 감싸여 있으며 대웅전 맞은편의 동쪽 끝자락에 있다. 부산 보수동에 도장이 마련되던 그 이듬해인 기축(1949)년 겨울, 도주님께서는 이 절에서 49일간을 한 도수로 정화수 24그릇을 받들고 공부를 하셨다.(교운 2장 47절)  

도주님께서 이곳에서 공부를 하실 때 법당의 불상이 고개를 숙이는 신비로운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대웅전 안을 살펴보면 제법 큰 규모의 삼존불이 있고 그 앞에 높이가 1m 남짓한 작은 삼존불이 또 하나 있다. 큰 불상은 최근에 새로 모셔진 것이고 도주님께서 공부하시던 무렵에는 작은 삼존불만이 모셔져 있었다고 한다.  

이 작은 삼존불은 정식 명칭이 ‘석조석가여래삼존상(石造釋迦如來三尊像)’이라 하며 조선 후기에 돌로 만들어진 뒤 금칠을 하여 제작된 것으로, 현재 부산시 문화재자료 18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형태를 살펴보면 중앙의 석가여래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보살상이 1구씩 배치되어 있고, 석가여래상은 등을 곧게 편 자세로 양손을 무릎 위에 얹고 결가부좌한 채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대웅전 옆에 있는 응진전에는 16나한도와 석조 나한좌상이 있는데, 익살스럽고 친근한 표정이 특징으로 원래 16구로 만들어졌으나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12구이고 사라진 4구는 최근에 새롭게 만들어 추가하였다고 한다. 

마하사 응진전의 나한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온다. 조선시대 선조임금 무렵 어느 해 겨울 동짓날 전날 밤에 마하사의 공양승이 늦잠을 자는 바람에 부엌과 화로의 불씨가 모두 꺼져버렸다. 마침 그날은 동짓날이어서 팥죽을 쑤어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야 하는데 불이 없으니 큰 탈이 아닐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공양승은 우선 팥을 씻어 솥에 넣어 놓고는 산 위에 있는 황령산 봉수대를 찾아가서 봉화군에게 불씨를 좀 달라고 하였다. 그런데 봉화군은 조금 전 마하사에서 동자승 하나가 올라와서 불씨를 달라 하기에 주어 보냈고 자기들이 먹기 위해 쑤었던 팥죽까지 한 그릇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었다.  

당시 마하사에는 동자승이 없었고 더군다나 불씨를 얻으러 보낸 적도 없었던 지라 이상하게 여긴 공양승은 서둘러 절로 돌아왔다. 부엌으로 가보니 어느새 아궁이에는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게 아닌가? 이것 참 신기한 일이라며 의아하게 생각한 공양승은 마침 잘 됐다 싶어 그 불로 동지팥죽을 맛있게 끊였다.  

팥죽을 다 끓인 공양승은 정성스럽게 마련한 팥죽 그릇을 들고 나한전에 공양하러 들어갔는데, 오른쪽에서 세 번째에 앉아 있는 나한의 입술에 팥죽이 조금 묻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제야 공양승은 나한이 절에 불이 없는 것을 아시고 동자승으로 화하여 봉수대에 가서 불씨를 얻어 온 것을 알게 되었다. 이는 자신의 게으름을 나무라는 뜻이라 여겨 그 이후로 공양승은 더욱 부지런히 부처님 공양에 정성을 다했다고 전한다.  

또 다른 전설도 전해오고 있는데 어느 해인가 참새가 모여들어 청정한 도량을 시끄럽게 하고 곡물에 피해를 많이 주었다. 참다못한 주지 스님이 나한전에 가서 참새들을 물리쳐 달라고 기원하였더니 어느 날 뜰 가운데 죽은 참새가 한 마리 떨어져 있었다. 그 이후로 마하사에는 참새가 일체 범접하지 않는다고 한다.  

천 년 역사를 간직한 마하사 나한전에는 이런 전설도 있다. 금구(金口)란 일명 반자(飯子), 금고(金鼓)라고 하는데 금속으로 만든 징 같은 납작한 둥근 북이라고 할 수 있다. 금구는 법당 내에 걸거나 요사채 마루에 걸어두고 법회시간이나 공양시간을 알리는 간단한 법구이다.  

마하사의 이 금구를 쳐도 소리가 나지 않는 때가 1860년대와 1910년대에 2회 있었다. 어느 해 절에 불사를 거행하는데 돈이 부족하여 나한전의 불사를 하지 못한 채 뒷날로 미루고 사부대중이 모여 우선 불사 종료 회향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예식에 따라 금구를 치는데 금구 소리가 나무소리처럼 변하며 도무지 금구에서 소리가 나지 않았다. 이에 놀란 수많은 대중이 다시 목욕재계하고 일제히 나한전에 나아가 불사를 거행하기로 결정하니 그때서야 비로소 금구 소리가 났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금구의 행방을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천 년의 불향(佛享)을 간직한 고찰, 마하사. 도주님께서는 이곳에서 49일 불음불식 공부를 마치시고 보수동 도장에 돌아오시어 “…應須祖宗太昊伏 道人何事多佛歌”라는 시를 외우시며 “상제께서 짜 놓으신 도수를 내가 풀어 나가노라.”고 말씀하셨다.(교운 2장 48절) 이곳 대웅전의 불상이 고개를 숙이는 이적을 보인 것은 50년 공부종필로 대도의 진법을 설정하시는 도주님의 위업을 기리는 상징적 표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대순회보》 1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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