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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세제민의 현장, 원산도(元山島)
연구위원 신상미
봄바람의 흐름 따라 만발한 꽃들이 춤을 추며 떨어지는 고남리 영목항에서 배를 타고 15분 정도 짠 바다 향을 맡으며 원산도 선촌항에 도착하였다. 도주님께서 토지를 해원하고 제민(濟民)하고자 간석지를 개척하신 원산도(元山島)를 가기 위해 끝없이 넓고 깊은 바다를 가르는 배에 몸을 싣고 보니 간척지를 확인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간척하러 가는 일꾼이 된 기분이 들었다.
원산도는 충남 보령(保寧)시 오천(鰲川)면에 속하는 섬으로 충남 일대에서 안면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고려 시대 때는 고만도라 불렸으나, 그 뒤 고을을 뜻하는 원(元) 자와 섬의 지형이 뫼 산(山) 자 모양을 하고 있어 뫼 산(山) 자를 써서 ‘원산도’라고 했다. 인구 1,240명(2010년), 501가구, 면적은 7.07㎢이며 해안선 길이는 28.5㎞이다. 푸른 하늘을 비추는 거울처럼 잔잔한 물 위로 우뚝 솟은 섬의 생김새는 정말 ‘뫼 산(山)’ 자를 떠올리게 한다. 바로 ‘山’ 자의 각 획에 해당하는 곳에 원산 1리, 2리, 3리로 이루어진 마을들이 자리 잡고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원산 1리는 원산도의 행정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선촌과 진고지, 간사지 등으로, 원산 2리는 선촌항과 더불어 대천항에서 출발하는 여객선이 취항하고 있는 저두(猪頭)와 점촌(店村), 개경, 구치(鳩峙) 마을로, 그리고 원산 3리는 진촌(鎭村), 사창(射倉), 초전(草箭), 관가 마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01
일찍이 고려 시대부터 홍주목(洪州牧: 지금의 충남 홍성) 관할의 섬으로 유지되어 오던 원산도의 마을들이 현재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1914년 일제에 의해 시행된 행정구역 통폐합에 의해서이다. 처음 원산도의 중심은 진촌(鎭村)이었다. 진촌은 세종 때부터 말 목장으로, 그리고 말 목장이 이전된 이후에는 수군 주둔지인 원산진(元山鎭)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그러다 1930년 사립 광명학교가 원산 8리의 중간 길목인 점촌(店村)02에 설립되면서 지역의 중심이 진촌에서 점촌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1960년대까지 점촌이 원산도의 중심지였다가 대천으로 바닷길이 생기고 여객선이 운행되면서, 선착장이나 각종 행정 관서들이 들어서게 된 선촌(船村)이 점촌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를 한 원산도의 특징을 들자면 ‘반농반어(半農半漁)’의 생산 활동이 주가 된다는 것이다. 바다와 관련된 주민의 생산 활동은 어업과 염업, 양식업, 수산물 가공업 등으로 구성된다. 그중에서 염업은 1920~30년대 방조제 축조로 확보된 간척지를 염전으로 개발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현재는 값싼 중국 소금의 수입과 정부의 폐업보상금 지급정책에 따라 ‘간사지’ 한 곳에서만 염전이 유지되고 있는 실정이다.
바로 염업이 시작된 그 무렵이 도주님께서 ‘진업단’을 구성하여 간척 사업을 하신 후이다. 『전경』을 통해서는 정확한 때를 알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도주께서는 토지를 해원하고 제민(濟民)하고자 안면도와 원산도(元山島) 두 섬에 간사지(干潟地)를 개척하기 시작하셨도다. 신도들로 구성된 진업단(進業團)과 헌금 二만 원과 구태인 일대의 개간지에서 얻어진 곡물 三百석이 동원 투입되었도다. 그러나 두 섬의 네 곳에서 뜻을 이룩하고자 하셨으되 심한 풍랑으로 두 곳은 뜻을 이룩하지 못하고 그 후 일본(日本) 마상 회사(馬上會社)가 성과를 거두게 되었도다. 안면도의 二十만 평의 농지와 원산도의 염전(鹽田)은 두 곳의 여러 마을 사람을 구제할 수 있었도다. 도주께서 제민 사업을 돕는 한편 안면도 창기리에 있는 재실 홍일우(洪一宇)에서 공부를 하셨도다. 이때에 서산읍의 사람 이 동만(李東萬)이 도주를 가까이 모셨도다. (교운 2장 35절)
위의 구절을 보면 때가 을축년(1925년) 구태인 도창현에 도장을 이룩하신 이후이며, 교운 2장 34절을 보면 년도 표시 없이 봄 어느 날이라고만 되어 있으므로 이것으로 보았을 때 명백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저 1925년 이후라는 것이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간척이 이루어진 때를 마을 사람 인터뷰 내용과 역사적 흐름을 보았을 때 도주님께서 1928년에 진업단을 구성하여 안면도 2곳(김제 방조제, 참새골 방조제)과 원산도 2곳(간사지 마을, 구치 마을)에 1932년부터 1935년까지 간척사업을 하셨음을 추정할 수 있다.
현재의 기술로도 힘든 작업인데 당시에 지게를 지고 어떻게 그 넓은 갯벌을 육지로 만들 수 있었는지 한없이 놀라울 뿐이다.
원산도에 도착하여 선촌을 지나 끝없이 펼쳐진 논과 염전을 15분 정도 감상하며 다다른 곳은 진업단(進業團)의 인부들 숙소가 있었던 곳으로, 현재는 원산 염전을 운영하는 김00 씨 댁이었다. 당시는 약 50~55평 규모의 토담을 쌓아 만든 초가집이 있었는데 현재는 그 터 주변으로 새롭게 집이 지어져 있다.
현재 52세인 김00 씨가 10살 무렵에 토담으로 만들어진 숙소가 너무 오래되어 부친이 뜯었다고 하며 그 당시의 건물 모습을 설명해 주었다. 주인 입장에서 오래된 집을 허무는 것은 당연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역사적인 건물이 보존되지 않아 안타까웠다. 7평 정도의 6개 방과 10여 평이 넘는 부엌에는 4개의 솥이 있었으며, 토담을 쌓아 서까래로 만든 집은 정말 간단하게 지은 집이었으며, 숙소 앞에 우물과 사철나무가 있었고 숙소 옆으로는 부식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김00 씨가 이곳이 고향이었던 부친께 들은 바로는 대략 80~85년 전 제방(堤防)작업을 하러 전라도 사람인 무극도인들이 왔었다고 한다. 주로 먹었던 음식은 보리죽으로 변을 보면 마치 소(牛) 대변과 비슷했다고 한다. 그렇게 보리죽만 먹고도 1년간을 근처 산으로 올라 바위를 깨서 지게에 지고 옮겼으니 그 고생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도주님께서 대략 1년간을 간사지 마을에서 간척하신 후에 구치 마을로 가셨다고 한다. 『전경』에 안면도와 원산도(元山島) 두 섬의 네 곳 중에서 심한 풍랑으로 두 곳은 실패하여 일본 마상 회사03가 사업을 이어 성과를 거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04 실패를 한 곳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원산도가 있기까지 도주님의 간척사업이 크게 이바지하였다는 것이다.
도주님과 당시 인부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염전의 소금 맛을 보니 참으로 짜면서도 달았다. 마치 사람의 땀 맛과도 같았다. 김00 씨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바로 구치 마을로 향했다. 그곳은 간사지 마을과는 다르게 염전이 이루어지지 않아 ‘여기가 어디인가?’ 할 정도로 공터로 되어 있었다. 당시 도주님과 진업단 인부들이 해원상생의 뜻을 품고 노력하신 곳이 허무하게도 공터로 변해 있으니 기분이 착잡했다.
그러나 김00 씨가 작별인사를 하며 해주신 말씀을 되새기며 다시 힘차게 대천항을 향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자신들도 하지 않았던 일을 멀리 다른 지역에서 와서 매일 무거운 돌을 옮기며 어렵게 일하였던 무극도인들을 고맙게 여기고 있다.”라는 그 말을 듣고 참으로 뿌듯하면서도 다행이다 싶었다. 어업으로만 생활하다가 간척사업으로 농업이 같이 이루어져 먹고 살기가 더 좋아졌으니 고마워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수칙에는 남이 나의 덕을 몰라도 괘의치 말라고 하였다. 그래도 토지를 해원하고 제민(濟民)하고자 하신 도주님의 큰 뜻과 목숨을 걸고 노력한 인부들의 노력도 모르는 채 지낸다는 것보다 알고 고마워한다는 말이 오히려 고맙게 느껴졌다. 이렇게 원산도의 간척지를 돌아보고 나니 도주님의 구제창생과 보국안민의 뜻을 이어받아, 대순진리회의 3대 중요사업인 구호자선사업ㆍ사회복지사업ㆍ교육사업에 도움이 되고자 노력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대순회보》 1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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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충남대학교 마을연구단, 『보령 원산도』, 대원사, 2007, pp.16~18 참조.
02 고려ㆍ조선 시대 각종 장인(匠人)이 집단적으로 거주한 일종의 수공업 생산장.
03 마생상점(麻生商店)을 말하는 것으로 아소타로수상의 증조부인 ‘아소타키치(麻生太吉)’가 탄광을 경영하기 위해 만든 기업체이다. (http://www16.ocn.ne.jp/~pacohama/kyosei/2asou.html 참조)
04 교운 2장 35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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