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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산 집바위를 찾아서…

교무부    2017.02.02    읽음 :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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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달산 집바위를 찾아서…

 

 

연구원 손영배

  

 

  도전님께서 탄강하신 충청북도 괴산군(槐山郡)01 일대를 답사하였다.02 우리 일행이 찾아 간 곳은 백두대간의 줄기인 소백산맥으로부터 뻗어 내려와 마역봉(馬驛峰)에서 신선봉(神仙峰)으로 이어지는 정기를 품은 박달산(朴達山)에서 도전님 부모님께서 자식을 보기 위해 정성을 드렸다는 집바위이다. 이 곳에서 도전님 부모님이 지극한 정성을 드린 이후 도전님을 잉태하게 되었으니, 신성한 바위로서 이번 답사의 의미가 작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일행은 집바위를 찾기 위해 먼저 방곡마을03로 향했는데, 방곡마을을 가려면 방곡삼거리를 지나야 한다. 이 삼거리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이곳을 중심으로 추점리(楸店里) 온천마을인 수안보, 괴산읍, 충주방면으로 길이 갈라진다. 방곡마을이 속한 방곡리(方谷理)는 본래 연풍군(延豊郡) 면의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양방동(兩方洞)·운곡동(云谷洞)·자약동(自若洞) 일부를 병합하여 양방동과 운곡동 이름을 따서 방곡리가 되었고, 괴산군 장연면(長延面)에 편입되었다. 방곡리에는 간곡마을과 방곡마을 등 여러 부락이 흩어져 있다. 방곡 삼거리에서 방곡마을로 들어가면 병방골[兵防谷]이 있다. 이 병방골은 방곡리에서 중심이 되는 마을로 병자호란 때 이곳에서 호병(胡兵)을 막았다고 한다.04 

  도전님 생가로 가던 도중, 방곡마을 주민 중에 혹시 집바위의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마을주민에게 물어보기로 하였다. 마침 밭에서 일하고 있는 할머니가 있어 그 위치를 물어보았더니, 박달산을 가리키면서 “저기 안개가 조금 끼어 있는 곳입니다.”라고 알려 주었다. 신기하게도 박달산 정상 아래 솜뭉치처럼 안개가 조금 덮여 있었고, 박달산 정상 주위에는 안개가 짙게 끼어 있어, 앞으로의 여정이 험난할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박달산(朴達山)의 유래에 대하여 2가지 설(說)이 있다. 하나는 ‘박달(朴達)’이 배달민족의 ‘배달’에서 왔다는 것이다. ‘배달’은 ‘발달’에서 온 말로, 그 어원은 ‘밝다’이며 ‘박’으로 발음되고, ‘달’은 산을 뜻하는 옛말이다. 그래서 ‘배달’은 밝은 산 곧 큰 산을 뜻하는 ‘박달’의 말소리가 변한 것라고 한다.05 또 하나는 옛날에 천지가 개벽(開闢)할 때 이 일대가 모두 물에 잠겼는데, 이 산꼭대기만 바가지를 엎어놓은 것만큼 잠기지 않았다고 하여 박달산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두 가지 지명유래에 관한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박달산이 신령스러운 산인 것만은 분명한 듯하다.

 


▲ 느릅재 등산로입구에서 본 박달산 

 

  우리 일행은 도전님 생가로 가보니, 기와로 잘 단장이 되어 있었다. 생가를 관리하고 있는 관리인의 말에 의하면, 이전엔 초가삼간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도전님 생가 뒤로 박달산이 있고, 좌측에는 주월산(舟越山)이 자리 잡고 있다. 조선의 고승 무학대사가 이 산을 보고 “배가 넘어다닐 것이다.”라는 말을 하였는데, 이에 따라 ‘배 주(舟)’, ‘넘을 월(越)’ 자를 써서 주월산이라고 하였다는 설이 전해지고 있다.06 주월산은 괴산군 감물면(甘勿面)에 있는 산으로 높이라고 해봐야 고작 해발 470m의 야산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바위능선이 병풍처럼 둘러처져 있고 산세가 빼어나 괴산의 명산으로 꼽힌다.

  관리인에게 도전님 부모님께서 기도를 드린 집바위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물어보았다. 그러자 관리인은 “박달산 집바위에서 매일 정성껏 백일정성을 드렸습니다. 간곡마을에서 1시간 남짓 걸리는데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집바위는 큰 바위인데 처마처럼 되어 있어 서너 명은 같이 정성을 드릴 수 있는 공간이 있습니다.”라고 말해주었다. 

  생가에서 인터뷰를 마치고 다시 집바위로 향했다. 조사한 바에 의하면 집바위로 가는 길은 간곡마을과 느릅재 두 곳이 있었다. 우리 일행은 이 두 곳 중 느릅재에서 출발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느릅재는 해발 397m로 괴산에서 충주로 가는 19번 국도의 장연면과 감물면이 경계를 이루는 곳이었다. 

 

 

  

  느릅재에 도착하니 박달산 산행코스를 알려주는 등산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었다. 안내도에는 ‘느릅재→주능선봉우리→ 봉수대→740 헬기장→ 800봉→ 박달산 정상 해발 825m’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박달산 정상으로 발걸음을 재촉해 가다가 봉수대에 도착하여 목을 축이며 잠시 쉬었다. 정상까지는 이제 1.5㎞ 남았다. 산 중턱까지 오는 동안 등산길은 그렇게 험하지 않았다. 

  박달산 정상에 도착하자마자 산 아래 방곡리 주변 마을을 살펴보려고 했으나, 숲이 우거져서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또 집바위를 찾으려고 했지만 그곳으로 가는 등산로를 찾을 수 없어 방곡마을 주민이 가르쳐 준 곳을 참고하여 길이 없는 산속을 헤집고 다녔다. 1시간 정도 헤매고 다니다가 가까스로 등산로를 찾을 수 있었다. 반갑게도 나뭇가지에 길을 안내하는 띠가 묶여 있었고, 옹달샘과 50m라고 적혀있는 이정표도 보았다. 50m 앞에 무엇이 있는지 참으로 궁금하여 걸어가 보니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큰 바위가 나타났다. 

  도전님 생가 관리인이 말했듯이 서너 명이 앉아 함께 정성을 드릴 수 있는 공간이 있었고, 처마처럼 바위가 앞으로 나와 있어 비를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집바위의 옆 모습은 마치 사람 얼굴 형상처럼 우뚝 선 코와 입을 벌리고 웃고 있는 모습이었다. 느릅재에서 시작하여 3시간 동안 힘들게 산을 헤맸다는 것을 아는지 우리 일행을 반갑게 맞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산행의 고단함도 금새 사라지고 마음이 즐거웠다.  

  

 

  바로 이곳이 도전님 부모님께서 정성을 드린 곳이라고 생각하니, 신성함과 엄숙함이 주변을 감싸는 듯했다. 그곳을 꼼꼼히 살펴보고 사진 촬영을 마친 후, 하산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1시간 정도 내려가다 보니 마을이 보였는데, 그곳은 바로 간곡마을이었다. 이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에 ‘희망찬 간곡마을’ 이라고 새겨진 표지석을 볼 수 있으며, 표지석 하단에는 마을의 유래를 이렇게 적어 놓았다.

 

  “본 마을의 옛 지명은 병방골 샛골이었다. 후에 한자표기에 의하여 간곡(間谷)으로 불리어졌으며, 마을의 형성연도는 임진왜란 전후로 추정된다. … (중략) … 옛적에는 경주 김씨네의 세거지로도 전하나 그 후로는 각 성들이 모여 사는 농경 촌으로 부촌은 아니었지만, 인심이 순후하고 예절이 있는 예촌(禮村)으로 칭송되었던 마을로 전한다.”

 


▲  간곡마을 표지석

 

  한편 우리 일행은 산행의 고단함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간곡마을 중간 정도까지 내려와 답사차량에 탑승하였다. 이 마을에서 출발하였다면, 별 고생 없이 집바위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아쉽기 짝이 없었다. 집바위가 있는 곳은 박달산의 해발 750m쯤에 있다. 간곡마을에서 출발하여 보통사람 걸음으로 등산하면 약 1시간 30분이 걸리고, 하산하는 데는 약 1시간 정도 걸린다, 이 길은 줄을 잡고 올라갈 정도로 경사가 심해서 발목과 장딴지의 근육이 아플 정도로 힘든 코스이기 때문에 등산 장비를 준비하여 등산하는 것이 안전하다. 다행히 박달산 중턱에 산림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산림 내의 도로인 임도(林道)가 공사 중이었다. 이 공사가 완공되면 임도 입구에서 집바위 등산로까지 2.7km 정도 거리여서 편하게 등산할 수 있을 것이다. 간곡마을에서 집바위 등산코스의 중간지점까지는 이미 임도가 나 있는데, 여기서부터 가파른 산길을 45분 정도 올라가면 옹달샘과 집바위에 도달할 수 있다.

 
▲ 도전님 생가가 있는 방곡마을

 

  비록 이번 답사가 힘들기는 했지만, 집바위를 찾기 위해 일심으로 노력한 팀원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신명의 가호로 도전님과 관련된 유적지를 찾을 수 있었고, 또 이것을 기록으로 남겨 다른 수도인들에게 작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

《대순회보》 14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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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괴산(槐山)은 600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고장이다. 이곳 지명에 대한 유래를 살펴보면, 고구려(475년) 때는 잉근내군, 통일신라(757년) 시대에는 괴양군, 고려(940년) 조는 괴주군, 조선태종(1413) 때는 괴산군으로 명명되었다. 특히 조선 초기에 이르러 괴산 지역은 고려 말에 양광도(楊廣道)에서 충청도(忠淸道)로 그 소속이 변경되었다. 괴산군은 조선 태조(太宗) 3년(1403)에 지괴주사(知槐州事)로 승격되었으며, 태조 13년(1413) 10월 15일에 괴산군(槐山郡)으로 불리게 되었다.

02 현 생가 복원 집주소: 충북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 62번지(새주소: 충민로 방곡8길 25-5번지)

호적등본상의 생가 주소: 충북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 63번지(새주소: 충민로 방곡8길 25-4번지)

해방 후에서 6.25사변 직전에 지었던 집: 충북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 57-2번지(현주소: 충민로 방곡8길 25-27번지)

03 충북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 소재.

04 괴산군청 홈페이지 참조.

05 안옥규, 『어원사전』, 한국문화사, 1996, p.206 참조.

06 「조명받은 무학대사 예언 ‘舟越山’」,『충청 타임즈』(2008년 1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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