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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각교 터
연구원 한수진
전북(全北) 정읍시(井邑市) 태인면(泰仁面)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인근지역의 중심지였다. 그러나 1912년에 신태인역(新泰仁驛)이 생기면서 새로운 마을이 조성되었고, 명칭을 구분하기 위해 구태인(舊泰仁)으로 불리게 되었다. 예전에 비하면 많이 쇠퇴한 상태지만 아직도 과거의 번영을 보여주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지금은 지명만 남아있는 ‘태거원(泰居院)’은 태인이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했음을 알려준다.01 또한 태산선비문화권02에 걸맞게 공자를 비롯한 옛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大成殿)이 있는 향교(鄕校)와 선비들에게 학문을 권하기 위해 세웠다는 읍원정[挹遠亭, 시정(時亭)], 최치원(崔致遠, 857~?)이 풍류를 즐겼다는 피향정(披香亭) 등 선비정신을 담고 있는 문화유적들이 있다. 이 외에도 신잠(申潛, 1491~1554)이 세운 동헌(東軒)과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신잠비(申潛碑) 등 다수의 유형문화재도 남아 있으며 향교 바로 뒤에 있는 성황산(城隍山)은 동학농민군이 연합군(관군·일본군)과 최후의 결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 태인면 위성사진(출처: NAVER 지도)
태인에서 우리와 관계있는 지역은 항가산(恒伽山) 중턱의 도창현(道昌峴)03이다. 도창현은 상제님께서 공사를 보셨고 도주님께서 무극도장(無極道場)을 세우신 장소이기도 하다. 일제가 민족문화와 관련된 것은 철저하게 파괴하던 시절에 무극도가 해산되어 도장의 건물도 모두 해체되어 버렸다. 완공 당시에는 여기저기에서 몰려온 구경꾼이 제법 많았을 정도로 명소(名所)였다고 하지만, 지금은 그 일부만 두 군데에 남아있을 뿐이다.04 건물의 원형을 볼 수 없는 것뿐만 아니라 상제님께서 공사를 보셨다는 젖샘의 흔적을 찾을 수 없게 된 것도 아쉬웠다.
무극도장 건물이 전부 이건(移建)된 이후 도장 터를 매입한 사람이 ‘태인기술학교’를 설립했었다. 그 학교에서 서무과장을 맡았던 분께 여쭤보니 당시에 맑은 물이 나오던 샘05이 있었지만 상수도 공사를 할 때 덮어버려서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고 했다. 이 두 가지 외에 아쉬운 점이 또 있다. 이제는 터만 남아있는 대각교06가 그것이다.
▲ 현재의 도창현
▲ 대각교 터 근처에 쌓아둔 대각교 상판, 좌대 무더기
『전경』 예시 45절을 보면 상제님께서 도창현에 있는 우물을 가리켜 이것이 젖[乳]샘이고 후천의 도통군자는 여자가 많으리라 하시며 “상유 도창 중유 태인 하유 대각(上有 道昌 中有 泰仁 下有 大覺)”이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나온다. 지도를 놓고 보면 북동쪽에 도창현이 있고, 서쪽으로 내려가면 동헌과 향교, 피향정 등이 있는 태인의 옛 중심지가 있다. 이 일대는 면사무소와 버스터미널, 학교 등이 있어서 현재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서쪽으로 조금 더 가면 ‘숙빈 최씨 만남의 광장’07이 있는데 그 뒤편에 대각교 터가 있다.
대각교는 태인천에 놓여있던 다리이다. 태인에서 고부(古阜)로 가려면 반드시 건너야 했지만 큰비만 내리면 유실되곤 해서 이용하기가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러던 것을 약 300년 전, 인근의 백암리에 살던 모은(慕隱) 박잉걸(朴仍傑, 1676~?)08이 자비(自費)로 장대석(長大石)을 구입하여 다리를 다시 만들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이 ‘큰 다리’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이 명칭을 한자어로 표기한 것이 대각교이다. 대각교는 큰물이 져도 별 손상 없이 잘 버티고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그 위로 국도 1호선이 개통되면서 헐리고 말았다.
▲ 땅 주인의 정원 둘레에 놓아둔 대각교 좌대
그 후 대각교는 몇 십 년 동안 땅 속에 묻혀 있다가 1979년에 모래 채취 작업을 하면서 발견되었다. 작업을 의뢰하셨던 분09과 그 땅의 주인10께 여쭤보니 상판과 좌대로 쓰인 장대석 및 소나무로 깎아 만든 커다란 말뚝이 대량 발견되었으나 원래 형태나 놓인 방향은 정확히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장대석이 가장 많이 발견된 곳 근처에 조선시대까지 사용하던 길과 주막도 있었는데 이 역시 국도 1호선 개통과 농경지 개간 때문에 없어졌다고 한다. 땅 주인은 장대석을 발견했을 당시에는 필요하다는 곳이 있으면 좀 넘겨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다 ‘숙빈 최씨 만남의 광장’이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언젠가 대각교를 복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파낸 장대석 대부분은 땅에 다시 묻고, 농토로 사용할 부분에 묻혀 있던 돌들은 근처에 쌓아 놓거나 정원 둘레에 놓아두었다고 한다.
▲ 대각교 터 위성사진(출처: NAVER 지도)
▲ 대각교 터 전경
지금은 대각교 터 위를 지나 동진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 ‘대각교’라는 이름이 붙어 있는데, 이것은 땅 주인의 민원으로 이루어졌다. 원래의 대각교가 없어지면서 주민들이 그 옆에 있던 거산교를 대각교와 혼용해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땅 주인은 문화재로 지정되어야 마땅할 대각교가 이름까지 사라지는 것은 옳지 않다고 여겨 민원을 제기하였고, 그 뜻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대각교는 원래 있던 터와는 거리가 좀 멀고, 오히려 신내교 아래쪽이 더 가까운 위치이다. 국도 1호선 설계 당시에는 신내교가 설치된 부분이 둑 형태로 시공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하천을 막으면 홍수가 났을 때 물이 빠질 곳이 없고 주민이 왕래하기도 불편하다는 민원 때문에 다리형태로 설계가 변경되었다. 땅 주인은 초기 설계 계획을 보고 민원을 제기하였기 때문에 지금의 다리가 ‘대각교’가 되었다고 한다.
대각교 터를 끝으로 예시 45절에 나오는 지명의 위치가 모두 확인되었다. 예전의 모습들이 좀 더 남아있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에 아쉬움이 들면서도 이렇게나마 조금씩 상제님의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었다는 점에 뿌듯함을 느낀다.
《대순회보》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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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한양에서 충청ㆍ전라ㆍ경상도 방향으로 가는 길을 삼남대로(三南大路)라고 하는데, 전국 각지로 가는 노선이 9개 있었다. 그중에서 제7로는 동작진을 지나 삼례ㆍ금구ㆍ태인ㆍ정읍을 거쳐 제주에 이르는 970리 길이었다. 이 노선으로 인해 태인은 교통의 요충지가 되었고, 여행객에게 말이나 숙식을 제공하는 거산역(居山驛), 태거원(泰居院), 주막 등이 설치되었다.
02 정읍시 북면ㆍ칠보면ㆍ태인면ㆍ옹동면ㆍ산내면ㆍ산외면을 ‘태산선비문화권’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신라시대 때 ‘태산(泰山)’이라 불렸던 곳으로, 선비정신을 담고 있는 문화유적들이 현재까지 많이 보존되어 있다. 통일신라 말기에 최치원이 태산군수로 부임한 이래 선비기질의 유풍이 계승되어 조선시대에 정극인, 송세림, 김약묵, 신잠, 이항 등의 유학적 선비인맥이 형성된 곳이다.
03 『한국지명총람』12권(전북편 下)을 보면 ‘돌챙이(도챙이)고개’라고 적혀있다. 그러나 태인 주민들은 예전부터 도창현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단어의 조합은 서울의 아현동(兒峴洞)과 같은 경우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아현’에서 ‘아’는 아이[兒]라는 뜻에서 따온 것이고, ‘현(峴)’은 고개의 한자어이다. 일제강점기 때 조선의 지명을 정리하면서 비슷한 발음의 한자 ‘도창’과 고개의 한자어 ‘현’을 조합하였다는 설도 있다.
04 『대순회보』134호, 답사기「무극도장의 자취를 찾아서」 참조.
05 “샘에 이름은 없었지만 (주민들이) 젖줄이라고 부르는 것은 들었다.” (2012년 5월 9일 김○○씨 인터뷰 내용 중에서 발췌)
06 한자 표기에 대한 부분은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 다만 대각교가 문헌 종류나 구전에 따라 대각교(大角橋), 대각교(大脚橋), 태거교(泰居橋), 대거교(大居橋) 등의 다양한 표기로 쓰이고 있다는 점, 상제님께서 청국 공사를 청도원(淸道院)에서 행하신 것이나(공사 2장 6절) 어음(語音)이 같은 신호(神戶)를 통해 신방축 공사를 보셨던 점(공사 3장 31절) 등을 미루어 볼 때 대각교의 지명 역시 비슷한 경우로 추측된다.
07 영조 생모인 숙빈 최씨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곳으로 2006년 3월에 개장되었다. 천애 고아였던 어린 최씨가 남루한 행색으로 대각교를 지나다가 마침 그곳에서 쉬고 있던 민유중 일행과 마주치게 되었다. 민유중의 부인은 측은한 마음에 소녀를 데려다 친딸과 함께 키웠고, 훗날 딸이 간택을 받자 소녀도 함께 보내어 보필하도록 하였다. 후에 딸은 인현왕후가 되었지만 장희빈의 계략으로 폐출되고 만다. 최씨는 밤마다 인현왕후의 안위를 위해 기도를 올렸는데 우연히 숙종이 그 모습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승은을 입는다. 숙종의 총애를 받은 최씨는 숙빈까지 오르게 되고, 그녀가 낳은 아들은 훗날 조선의 21대 임금이 된다.
08 박잉걸은 만년에 이르러 정읍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자선활동을 펼친 인물이다. 그가 가난한 이들이 언제라도 가져갈 수 있도록 나무에 옷과 신발을 걸어놓았기 때문에 그 일대를 ‘걸치기’라고 부르게 되었고, 이 지명은 아직도 남아있다. 또한 1745년에 칠보면 시산리의 구절재(구절치)고갯길을 닦았고, 이듬해 봄에는 굴치의 잿길을 닦았다. 현재의 정읍시 태인면에 대각교라는 다리를 놓고, 태인의 고을 육방(六房)들에게 많은 토지를 희사하여 아전들이 민폐를 끼치지 않도록 하였다. 정유재란 때 불에 탔던 석탄사(石灘寺)를 중건하고, 마을의 평안을 위해 남근석(男根石)을 세우고, 춘궁기에는 집의 곳간을 열어 곡식을 나누어 주었다. 효행도 뛰어나 나라에서 정려[旌閭: 국가에서 미풍양속을 장려하기 위해 효자ㆍ충신ㆍ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일]가 내려지기도 했다.
09 여○○씨 (2012년 4월 19일 인터뷰 내용)
10 시○○씨 (2012년 5월 9일 인터뷰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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