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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란동 안씨 재실과 안내성 종도
연구원 신상미
또 어느 날 상제의 말씀이 계셨도다. “이제 천하에 물기운이 고갈하였으니 수기를 돌리리라” 하시고 피란동 안씨의 재실(避亂洞安氏齋室)에 가서 우물을 대(竹)가지로 한 번 저으시고 안 내성에게 “음양이 고르지 않으니 재실에 가서 그 연고를 묻고 오너라”고 이르시니 그가 명하신 대로 재실에 간즉 재직이 사흘 전에 죽고 그 부인만 있었도다. 그가 돌아와서 그대로 아뢰니 상제께서 들으시고 “딴 기운이 있도다. 행랑에 가 보라”고 다시 안 내성에게 이르시니 내성은 가보고 와서 “행랑에 행상(行商)하는 양주가 들어 있나이다”고 아뢰니라. 그 말을 들으시고 상제께서 재실 청상에 오르셔서 종도들로 하여금 서천을 향하여 만수(萬修)를 크게 외치게 하시고 “이 중에 동학가사를 가진 자가 있느냐”고 물으시는도다. 그 중의 한 사람이 그것을 올리니 상제께서 책의 중간을 갈라 “시운 벌가 벌가 기측불원(詩云伐柯伐柯其則不遠)이라. 내 앞에 보는 것이 어길 바 없으나 이는 도시 사람이오. 부재어근(不在於近)이라. 목전의 일만을 쉽게 알고 심량 없이 하다가 말래지사(末來之事)가 같지 않으면 그 아니 내 한(恨)인가”를 읽으시니 뇌성이 대발하며 천지가 진동하여 지진이 일어나고 또한 화약내가 코를 찌르는도다. 모든 사람이 혼몽하여 쓰러지니라. 이들을 상제께서 내성으로 하여금 일으키게 하셨도다. (공사 3장 21절)
상제님께서 수기(水氣)를 돌리는 공사를 보신 곳인 피란동 안씨 재실과 그 공사에 참여한 안내성 종도에 대해 조사하고자 답사를 하였다. 피란동 안씨 재실은 순흥(順興) 안씨 집성촌인 왕심리(旺尋里) 마을사람에게 물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전북 정읍시 입암면 마석리 475-1(현 전북 정읍시 입암면 접지서부2길 73)에 위치한 피란동 안씨 재실은 순흥 안씨의 시조인 통덕랑 안극(安屐)을 모시는 곳이다.
마석리(磨石里)는 본래 정읍군 서일면의 지역으로서 반질반질한 반석이 있으므로 가는 돌 또는 마석이라 하였고,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신기리, 양동리, 비룡리, 서암리 일부를 병합하여 마석리라 해서 입암면에 편입되었다.01 비룡산에 위치한 양동 북쪽에 있는 새로 생긴 마을을 신마석이라 하며, 바로 이 비룡산에 재실이 있다. 피란동이란 말은 임진왜란 때 이곳으로 피난을 왔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마을사람들은 피란골이라 부른다.02
신마석리 마을의 대흥교회에 주차하고 약 10분 정도 비룡산(飛龍山)을 오르다 보면 통덕랑순흥안공비석(通德郞順興安公碑石)이 보인다. 이 비문을 통해 1899년 기해년에 피란동 재실이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다시 15분 정도를 오르다 보니 오른편으로 고즈넉한 숲 속에 기풍 있는 재실이 눈에 띄었다.
30년 전만 해도 재실 관리인인 김씨가 있었으나, 지금은 관리인 없이 쇠락해진 모습에 마음이 안타까웠다. 따로 관리하는 분은 없으나 아직도 집안의 어른들은 재실에서 제를 모신다고 한다.03
상제님께서 수기를 돌리는 공사를 보실 때, 행상 하는 부부가 있었던 행랑과 상제님께서 ‘만수((萬修)’04를 외치시고 동학가사를 읽으셨던 청상05은 확인이 되었으나, 아무리 보아도 재실 주변에 우물이 있었던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왕심 마을에 내려가서 물어보고 다시 확인하였다.
마을의 한 분06은 재실 밖 정문에서 앞을 바라봤을 때 오른쪽으로 2시 방향에서 15m 되는 위치에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분은07 안씨 재실 가는 길목 옆에 우물로 썼던 곳이 있었는데 거의 메워지고, 시제 모실 때 허드렛물로 쓴다고 하였다. 두 분이 일러준 곳을 가보니 과연 재실에 들어가기 전 길 왼쪽, 정문에서 앞을 바라봤을 때 오른쪽으로 2시 방향에서 15m 되는 위치에 계곡물이 흘러 고여 있는 곳이 보였다. 길 때문에 그 밑으로 계곡물이 흐르게 파이프를 장치했다고 하였는데 정말 그렇게 되어 있었다. 옛날부터 이곳을 우물로 사용하였다고 하니, 상제님께서 공사 보신 그 우물이 아닌가 한다. 상제님께서는 재실 안으로 들어가시지 않고 우물이 있는 밖에서 안내성(安乃成, 1867~1949) 종도에게 재실 안의 상황을 알아보라고 하시고 음양이 고르지 않은 이유를 아신 후 재실 안으로 들어가셔서 청상에서 ‘만수’를 외치시고 동학가사를 읽으셨던 것이다.
상제님께서 동학가사집의 중간을 펼치시고 “시운 벌가벌가기측불원(詩云伐柯伐柯其則不遠)이라. 내 앞에 보는 것이 어길 바 없으나 이는 도시 사람이오. 부재어근(不在於近)이라. 목전의 일만을 쉽게 알고 심량 없이 하다가 말래지사(末來之事)가 같지 않으면 그 아니 내 한(恨)인가”를 읽으신 부분은 『용담유사』 중의 「흥비가」에 나온다. 그 뜻은 대략 다음과 같다.
『시경(詩經)』에서 노래하기를, “도끼자루를 벤다, 도끼자루를 벤다.” 하였으니, 이는 도끼자루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도끼로 나무를 찍어 베어야 한다는 뜻이다. 즉, 이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도끼자루에 준하여 그 굵기에 맞는 나무를 찍어 베면 알맞은 도끼자루를 마련할 수 있다는 말이다. 비유해 보면, 어진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진 사람이 가야 된다는 법칙과 같은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그 법칙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도끼자루를 깎으려면 바로 그 나무를 찍는 도끼에 달려 있는 자루에 준해서 나무를 베면 되듯이 그 법칙은 결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앞에 있는 일이기 때문에 그 법칙을 어기지 않을 듯하지만, 이는 결국 사람의 일이기 때문에 잘못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법칙이 다만 가까이에 있는 것은 아니다. 눈앞에 있는 일을 쉽게 알고 깊이 헤어려보지 않다가 끝내 일이 생각같이 되지 않는다면, 그 아니 한(恨)이 되겠는가?08
이때 뇌성이 대발하여 천지가 진동하고 지진이 일어나며 화약 냄새가 코를 찔러 모든 사람이 혼몽하여 쓰러지자 상제님께서는 안내성을 시켜 이들을 일으키게 하셨다. 이 공사를 통해 상제님께서는 “천지에 수기(水氣)가 돌 때 만국 사람이 배우지 않아도 통어(通語)하게 되나니 수기가 돌 때에 와지끈 소리가 나리라.”09고 알려 주시며 수기가 제대로 돌기 위해선 음양의 조화가 중요하며, 음양의 조화가 잘 되고 수기가 제대로 돌 때에 와지끈 소리가 날 것임을 말씀해주셨다.
그리고 상제님께서 후천의 음양 도수를 보실 때 안내성 종도는 종이에 여덟 점을 찍어 8명의 아내를 두고자 하는 마음을 표현하였다. 상제께서는 “팔선녀란 말이 있어서 여덟 점을 쳤느냐.”고 물으시고 한 점을 찍은 문공신에게 “너는 정음 정양의 도수니 그 기운을 잘 견디어 받고 정심으로 수련하라.”고 하신 구절10이 있다. 수기를 돌리는 공사11를 보실 때 음양이 고르지 않음을 지적하시며 동학가사를 읊어 주심에는 깊은 의미가 있겠지만, 한편으로 안내성 종도를 비롯하여 다른 종도들에게 잘못된 생각임을 깨닫게 하고자 하심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여덟 점을 찍었던 안내성 종도는 실제 상제님께서 화천 하신 후 8명의 부인을 두었다.
이렇듯 상제님께서는 종도들에게 교훈이 되는 말씀을 아끼지 않으셨다. 특히 안내성 종도에게는 “불의로써 남의 자제를 유인하지 말며 남과 다투지 말고 천한 사람이라 천대하지 말고 남의 보화를 탐내지 말라. 보화라는 글자 속에 낭패라는 패자가 들어 있느니라.” 12하셨다. 그리고 “너는 부지런히 농사에 힘쓰고 밖으론 공사를 받드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말라. 안으론 선령의 향화13와 봉친 육영14을 독실히 하여 내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라.”15고 하셨다. 과연 무슨 이유로 안내성 종도에게 이러한 말씀을 하셨을까? 상제님께서 안내성 종도에게 교훈하신 말씀을 토대로 안내성 종도에 대해 알아보고자 후손들이 사는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백운마을로 향하였다. 백운마을 입구에서 꼬불꼬불 15분 정도를 차로 올라가니 몇 가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청도리(淸道里)는 조선 말기 전주군 우림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두정리·동곡리, 금구군 수류면 용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청도리라 하고, 1935년 김제군 금산면으로 편입하였다. 그리고 1995년 1월 1일 김제시와 김제군이 통폐합됨에 따라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가 되었다.16 마을 전체가 모악산도립공원(母岳山道立公園)에 속해 있는 산간 지역이며 자연마을로 동곡(銅谷)·백운(白雲)·하운(夏雲)·유각(有角)·청도(淸道) 등이 있다.
여기서 안내성 종도가 살았던 백운마을은 청도리 동남쪽에 있는 마을로, 높은 산기슭에 자리한 탓에 항상 흰 구름에 싸여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8·15광복 뒤 담배 구하기가 몹시 어려웠을 때, 마을 사람들은 집집마다 담배 마는 기계를 설치하고 담배를 팔아서 생계를 꾸려 나갔다. 그 뒤 단속이 심해지자 담배 말던 기계를 없애고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쳐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지금은 산자락 아래에서 오디 농장하는 몇 가구만이 남아 있다.17
그 몇 가구에 안내성 종도의 후손들이 포함된다. 안내성 종도는 순흥안씨(順興安氏) 감사공파(監司公派) 취우정공(聚友亭公) 25대로 족보 명은 원주(元周), 자(字)는 원여(元汝)이다. 부(父) 성유(成有)와 모(母) 의령 남씨 사이에 독자로 태어났다.
아들 안광춘 씨 증언18에 따르면 안내성 종도가 어릴 때 고향인 도음실19에서 작은아버지, 할머니와 집을 나왔다고 한다. 작은아버지와 할머니는 행상을 다니셨고, 안내성 종도는 절에서 공부했었다고 한다. 안내성 종도는 집을 나간 부친을 찾고자 전국으로 안 간 곳 없이 다녔으며 중국까지 갔었다고 한다. 다시 한국에 와서 진주 촉석루에 이르러 어디선가 천(天) 선생을 찾으라는 말을 듣고 정읍으로 가서 상제님을 뵙고 입도하게 된 것이라 한다.
안내성 종도의 아들인 안정남 씨 증언20에 따르면 상제님께서 안내성 종도를 처음 만났을 때 “자네 아버지는 언제 돌아가셨으니 그때 맞춰 제사를 지내드려라.”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족보를 살펴보면 안내성 종도의 부친께서 작고하신 년도는 없으나 3월 10일이란 날짜가 적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안내성 종도의 부친은 고향에서 부자로 잘 살고 있었는데, 안내성 종도가 공부를 않고 놀고 다니니까 조부께서 공부를 안 시키려고 하시자, 화가 나셔서 집을 나가신 것이라고 한다. 키도 크고 몸집이 컸던 안내성 종도는 단발령이 내렸을 때 일본 순사가 찾아와서 상투를 자르려고 해도 그 기운에 자르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그저 챙겨주는 밥을 먹고 갈 정도로 카리스마가 있었다며 안정남 씨는 사진을 보여 주었다.
안내성 종도는 상제님을 모실 때 따로 거처가 없었다. 3년간 정읍에서 상제님을 모시고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후 청도리 백운마을에서 살게 되었다. 아들인 안석기 씨의 말에 의하면 여기 근처에 백운암과 백운암자가 있었는데, 암자에 있던 중이 안내성 종도를 보고 이제 동네 주인이 왔으니 난 가겠다며 떠나자 안내성 종도가 암자의 이름을 따서 백운동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곳에 오기 전 제대로 된 거처 없이 상제님을 모셨으니 안내성 종도의 고생은 말로 다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끼니도 제대로 못 챙겼고, 잠도 편하게 못 잤을 것이니 말이다. 또한 『전경』에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상제님께서 유독 안내성 종도를 천대하고 구박하셨다고 한다.21 당시는 상제님께서 왜 그러시는지 몰랐다가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후 자신의 행동을 생각하고 깨달으며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그는 후손들에게 “좋은 때가 오니까 욕심 내지 말고, 남이 욕을 하고 때려도 화내지 말고 오히려 날 때린 손을 잡고 손 아프지 않냐고 물어봐라.”고 말하며 그저 “힘들더라도 죄 짓지 말고 조금만 더 기다리고 태을주를 읊어라.”라고 했다고 한다. 안광춘 씨, 안정남 씨, 안석기 씨 모두 이 말을 전해주면서 조용히 그 말씀을 따르고자 노력하고 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상제님께서 수기를 돌리는 공사를 보시며 동학가사를 읊어주신 것에는 어떤 뜻이 담겨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도낏자루를 베는 법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앞에 있는 것으로 눈앞에 있는 일을 쉽게 알고 깊이 헤아려보지 않다가, 끝내 일이 생각같이 되지 않아 후회하게 될 수도 있으니 매사 신중히 생각하고 처리하라는 당부의 말씀이셨던 것이라 생각한다.
《대순회보》 14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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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 12』, 한글학회, 1988, p.439.
02 2012. 5. 9. 왕심마을 이장 안길서 씨 인터뷰.
03 2012. 5. 9. 안정용 씨 인터뷰.
04 28수 중 자수(觜宿)를 다스리는 신명이다. 자수는 『홍연진결(洪烟眞訣)』에 따르면 경기도 여주, 장호원 지역을 담당하는 별자리이다.
05 건물의 대청(大廳) 위.
06 2012. 5. 9. 안길경 씨 전화 인터뷰.
07 2012. 5. 9. 왕심마을 이장 안길서 씨 인터뷰.
08 윤석산 주해, 『용담유사』, 동학사, 2000, p.227.
09 예시 51절.
10 공사 2장 16절 참고.
11 공사 3장 21절 참고.
12 교법 1장 38절 참고.
13 선령(先靈)의 향화(香火): 선조(先祖)의 영혼(靈魂)에 제사 지내는 것.
14 봉친 육영(奉親育嬰): 어버이를 받들어 모시고, 어린아이를 기르고 가르치는 것.
15 행록 4장 44절 참고.
16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 11』, 한글학회, 1988년, p.148.
17 디지털김제문화대전 사이트
(http://gimje.grandculture.net/Contents/Index?contents_id=GC02600289) 참고.
18 2012.4.19, 아들 안광춘씨 증언.
19 경상남도 함안군(咸安郡) 가야읍(伽倻邑) 신음리(新音里) 도음(道音)마을.
20 2012.6.12, 아들 안정남씨 증언.
21 2012.06.12, 아들 안정남씨 증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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