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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필성과 동곡 앞 팥거리

교무부    2017.02.15    읽음 :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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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필성과 동곡 앞 팥거리

 

 

연구원 신상미

 

 안 필성이 상제를 모시기를 기뻐하여 종종 음식을 대접하였도다. 어느 날 그가 동곡(銅谷) 앞 팥거리에서 상제를 만나 대접하려고 하는지라. 상제께서 그 뜻을 알아차리시고 “내가 반찬을 마련하리라”하시고 못을 휘어서 낚시를 만들어 팥거리 근처에 있는 작은 웅덩이에 던지시니 잉어와 가물치가 걸렸도다. 이것으로써 반찬을 만들어 잡수시면서 필성과 함께 한 때를 보내셨도다. (행록 4장 2절)

  ▲ 안필성 집과 팥거리, 주막 터 위치(출처: 네이버 위성 사진)

  

  안필성(安弼成)은 『전경』에 위 구절을 비롯하여 행록 2장 24절에 등장한다. 그는 상제님을 시종하며 천지공사를 받들었던 종도들과는 다르게 상제님과 식사를 하며 친교를 맺었던 인물이다. 그가 과연 어떠한 인물이었는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팥거리의 위치와 그의 행적에 대해 조사해 보았다. 

  팥거리는 현재 김제시(金提市) 금산면(金山面)에 위치한 금산초등학교 앞 도로를 일컫는다. 금평 저수지에서 금산사로 가는 길에 있는 팥거리는 마을 앞 들판에 있는 정자가 팥처럼 생겼다고 한 데서 유래되었으며 ‘팥정이’ 또는 ‘두정’이라 부른다. 팥거리가 위치한 곳은 본래 금구군(金溝郡) 지역이었는데, 1914년 김제군(金提郡)에 편입되면서 수류면(水流面)이 되었다가 1935년에 하리면(下離面) 용산리(龍山里)와 전주군(全州郡) 우림면(雨林面) 청도리(淸道里)를 병합하여 금산면으로 개칭되었다. 1995년 1월에 김제시와 김제군이 도농통합형태의 김제시로 개편되면서 금산면 금산리가 되었으며 2012년 1월부터는 도로명 주소를 일괄적으로 쓰게 되면서 김제시 금산면 모악로가 되었다.01 

 

  

 

  현재의 팥거리는 울창한 나무들이 길을 감싸고 있어서인지 마치 넓은 산책로처럼 느껴졌다. 안필성의 손자[안일완(安逸浣)]의 증언에 따르면 상제님께서 다니셨을 당시는 길이 좁았으나,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1910∼1945) 때에 일본인들이 길을 넓힌 것이라 한다. 

  팥거리에 주막이 있었는데, 상제님께서 술을 아무리 많이 드셔도 취하질 않으시니 주막 주인이 놀라곤 했었다고 전해진다. 그 터는 현재 모악로 371-1번지 뒤쪽에 있는 공터이다.02 

  이곳에서 팥정이 사거리를 지나 동곡마을 쪽으로 가다 보면 큰 팽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그냥 보기에도 심상치 않아 보이는 팽나무 옆에는 마치 건물이 있었던 흔적을 표시라도 한 것처럼 돌들이 원으로 둘러싸여 있다. 안일완 씨는 이곳 역시 상제님께서 다니시던 주막 터였다고 한다. 안필성 증손자[안덕겸(安德兼)]는 『전경』 행록 2장 24절에 상제님께서 안필성에게 쉬어가며 일하라고 씨나락(볍씨)을 땅에 뿌리신 곳이 이 주막이라고 하였다. 

  『전경』 행록 4장 2절의 내용을 보면 주막에서 가물치를 드셨는지, 안필성 집에서 드셨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래도 팥거리 주막에서 안필성과 상제님께서 술을 자주 드셨다고 하니 지금은 비록 풀로 둘러싸인 공터일지라도 예사로 보아 넘길 수가 없었다. 

 

  

  안필성의 집 또한 팥거리와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안필성(1870.09.24 ~ 1961.01.05)은 순흥안씨(順興安氏) 참찬공파(參贊公派) 24대손으로 족보 명은 성길(聖吉), 자(字)는 필성(弼成)이다. 성산(星山) 배(裵)씨와의 사이에 3남 2녀를 두었다.

  안필성은 어투가 매우 직설적이었으며 190cm 키에 힘도 세고 글을 좀 알다 보니 대하기 어려워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03 안필성의 장남[안영권(安永權)]은 6·25 한국전쟁 당시 백마고지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당시에 안필성이 살았던 집은 현재 증손자가 살고 있다.04 이 집에 살기 전에는 젊은 시절에 부친과 계룡리에서 살았다가 동학혁명에 참여한 후 이곳에 와서 94세에 작고하였다고 한다.05 

  집 구조는 남향인 집에 대문이 옛날에는 동남 방향이었으나 현재 서남방향이라는 것과 외양간이 없어진 것 외에는 변화가 없다. 단 방앗간, 사랑채는 터만 남아 있고 본채는 재건축되었다.06

  상제님의 종도 중에 수제자였던 김형렬(金亨烈)을 소개해 준 사람이 안필성이라고 한다. 동학혁명 때 상제님을 먼저 뵈었고 함께 동학혁명 운동에 참여했던 김형렬을 소개해 준 것이다.07 안필성은 상제님을 절실히 따랐던 종도가 아니다. 종도가 되어 수제자가 되라는 상제님 말씀을 듣지 않고 동학 난 이후 예수교를 신봉하였다. 상제님께서 수박을 드시고 씨를 모아 뭐라고 말씀하신 후 땅에 뿌리면 수박이 열렸다08는 등 도술을 부리는 것을 옆에서 직접 지켜보았으나 잘 믿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09 그러나 후에 상제님 말씀을 따랐어야 했다고 개탄한 적이 있다고 전해 온다.10 

 


  

  『전경』 교법 2장 45절에 상제께서 “춘무인(春無仁)이면 추무의(秋無義)라. 농가에서 추수한 후에 곡식 종자를 남겨 두나니 이것은 오직 토지를 믿는 연고이니라. 그것이 곧 믿는 길이니라.”라고 하신 내용이 있다. 가식(假飾)없이 신앙의 본의(本意)에 어김이 없어야 한다는 의미로 도를 믿음에는 의심을 한다거나 가식적인 믿음이 아닌 진실하고 일관적인 믿음이 필요함을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상제님의 종도가 되어 수제자가 될 수도 있었던 안필성은 자신의 판단을 후회하였으나 상제님께서 공사를 보시고 다니실 때 대화의 상대가 되어 드렸고, 술과 식사를 함께 하였으며, 바둑도 두는 등 친구와도 같은 편안함을 주었던 인물이었음을 이번 답사를 통해 알게 되었다. 

 《대순회보》 14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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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송호열, 『한국의 지명 변천』, 성지문화사, 2006, p.115 참고.

02 2011. 5. 13 안필성 손자 안일완 씨 인터뷰.

03 2012. 5. 10 안일완 씨 인터뷰.

04 2012. 12. 10 안덕겸 씨 인터뷰.

05 2012. 7. 16 안일완, 안덕겸 씨 인터뷰.

06 2013. 1. 22 안덕겸 씨 인터뷰.

07 2012. 5. 10 안일완 씨 인터뷰.

08 2012. 12. 10 안일완 씨 인터뷰.

09 2012. 12. 12 안덕겸 씨 인터뷰.

10 2012. 5. 10 안일완 씨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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