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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扶安)(성근리-개암사-우금암-굴바위)

교무부    2017.03.27    읽음 : 2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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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안(扶安)(성근리-개암사-우금암-굴바위)

 

 

연구원 박정욱

 

  부안은 상제님과 도주님의 행적이 있는 곳이다. 『전경』에는 많은 행적들이 보이진 않지만, 사전 조사된 자료를 토대로 행적지인 성근리(成根里)와 우금암(遇金岩) 개암사(開巖寺), 그리고 굴바위에 대해 알아보고자 부안으로 향했다.

 

▲ 개암사 대웅보전

 

 

부안 변산
  내륙으로 넓은 평야와 김제, 정읍, 고창과 경계를 이루는 부안은 바다쪽으로 서해의 칠산바다와 그 너머 위도면(蝟島面)의 여러 섬들이 인접해 있다. 백제 때 흔량매현(欣良買縣)과 개화현(皆火縣) 지역으로, 1416년(조선 태종 16) 분리된 보안현(保安縣)과 부령현(扶寧縣)을 합친 후 두 곳의 이름을 따서 붙여진 명칭이다. 부안에 넓게 펼쳐져 있는 변산(邊山)은 우리나라 팔승지의 하나로 백제 때 ‘변산(卞山)’이라고도 하였으며, 능가산, 영주산, 봉래산으로도 불린다.

 



  『동국여지승람』 「부안현(扶安縣)」 ‘산천(山川)’에 대한 기록에서 고려 때의 문인 이규보는 “변산은 예로부터 나라 재목(材木)의 부고(府庫)다. 스님들이 물건을 사고팔던 중장이 섰으며 … (중략) … 강과 산의 맑고 좋음은 영주(瀛洲)의 봉래(蓬萊)와 겨룰 만하니, 옥을 세우고 은을 녹일 듯한 것은 만고에 변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고 『택리지』에서는 “서·남·북쪽은 모두 서해 바다이고, 산 안쪽에는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있는데, 이것이 변산(邊山)이다. 높은 봉우리와 깎아지른 듯한 산꼭대기, 평평한 땅이나 비스듬한 벼랑을 막론하고, 모두 큰 소나무가 하늘에 솟아나서 해를 가리고 있다. 골짜기 바깥은 모두 소금 굽고 고기 잡는 사람의 집이고, 산중에는 기름진 밭들이 많다. 주민이 산에 오르면 산채를 채집하고 나무를 하며, 내려오면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것을 업으로 하여 땔나무와 조개 따위는 값을 주고 사지 않아도 풍족하다. 단지 샘물에 나쁜 기운이 있는 것이 아쉽다.”라고 기록하고 있다.01
  1988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변산반도는 해안선 주변의 ‘외변산’과 산 안쪽의 ‘내변산’으로 나뉜다. 내변산에는 한때 수많은 사찰과 암자가 있어 그들을 상대로 여는 중장이 서기도 하였고, 의상봉(椅上峰), 낙조대(落照臺), 옥녀봉(玉女峰), 관음봉(觀音峰), 신선대(神仙臺), 쌍선봉(雙仙峰) 등의 산들이 에워싸고 있다. 명소로는 울금바위[우금암], 우금산성(禹金山城), 가마소, 봉래구곡[蓬萊九曲: 대소(大沼)·직소폭포(直沼瀑布)·분옥담(墳玉潭)·선녀탕(仙女湯)·봉래곡(蓬萊曲) 등] 등이 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계곡의 물줄기가 모인다고 해서 붙여진 백천내[百川]가 있다. 백천내는 1996년 완공된 부안 다목적댐에 갇혀 고창·부안 사람들에게 식수원이 되고 있으며 남은 물은 해창(海倉)에서 서해로 흘러간다. 그리고 외변산에는 채석강(採石江), 적벽강(赤壁江)이 있으며, 변산해수욕장, 고사포해수욕장, 격포해수욕장 등 많은 휴양지가 있다.

 



  변산은 궁벽하고 산세가 험하여 은신처나 수행 장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특히 의상봉(義湘峰) 동쪽 기암절벽에 있는 암자 불사의방(不思議房)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험준한 ‘벼랑수행’ 장소이며, 이곳에서 원효, 의상, 진표, 부설거사, 진묵 등 고승들이 수행을 했다. 이 방에 대해 『동국여지승람』에는 “신라의 승려 진표율사가 우거하던 곳인데 백 척 높이의 사다리가 있다. 사다리를 타고 내려가면 방장에 이를 수가 있는데 그 아래는 측량할 수 없는 골짜기이다. 쇠줄로 그 집을 매어 바위에 못질을 하였는데 세상에서는 바다의 용이 한 짓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진표율사는 27살 때 이곳 불사의방에서 3년 동안 고행 중 망신참법(亡身懺法)으로 참회한 결과 지장보살로부터 부처님의 계행(戒行)을 받아 바랐던 미륵보살을 만나 점찰경(占察經)과 간자(簡子) 그리고 도솔천에 다시 태어날 것이라는 수기(授記)를 받았다. 이후 그는 금산사를 중창하면서 계시로 용추못에 숯을 채워 숯 위에 솥[鼎]을 놓고 솥 위에 미륵 장육상을 봉안하게 된다. 이처럼 부안 변산은 진표율사가 금산사를 중창하고 미륵불을 봉안하는데 밑거름이 된 곳이기도 하다.

 

▲ 부안 내변산 위성사진(출처: 다음지도)

 
  부안은 삼면이 바다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바다를 무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해신(海神)을 모시는 제당이 꼭 필요하다. 부안 변산면 격포리 적벽강 절벽에는 해신을 모시는 4평의 단칸 기와집인 ‘수성당(水聖堂, 水城堂)’이 아직 남아 있다. 이곳은 서해바다(칠산바다)를 수호한다는 ‘개양할미’를 모신 당집으로, 전설에 의하면 개양할미는 아득한 옛날에 수성당 아래 벼랑에 있는 여울굴에서 나와 서해바다를 열었다고 한다. 그는 딸만 여덟을 낳아 각 도에 보내고, 자신은 막내딸과 함께 이곳에서 바다의 수심을 재고 풍랑을 다스려 어부들의 풍어를 도우며, 지나는 선박을 안전하게 보호했다고 한다. 그런 개양할미를 물의 성인으로 여겨 수성(水聖)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건립연대는 1850년 이전으로 추정되나, 수성당 주변에서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제사 유물이 발견되어 오래전부터 바다 혹은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왔던 곳임이 확인된다. 제사는 매년 정월 초에 지내고 풍어와 어부들의 무사고를 빈다고 한다.

 



  변산은 상제님께서 각처의 강산 정기(精氣)를 뽑아 합치시는 공사에 등장한다. 그리고 도주님께서는 이곳에서 육정신장을 불러 응기케 하셨는데 의미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전경』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상제께서 각 처에서 정기를 뽑는 공사를 행하셨도다. 강산 정기를 뽑아 합치시려고 부모산(父母山)의 정기부터 공사를 보셨도다. “부모산은 전주 모악산(母岳山)과 순창(淳昌) 회문산(回文山)이니라. 회문산에 二十四혈이 있고 그 중에 오선위기형(五仙圍碁形)이 있고 기변(碁變)은 당요(唐堯)가 창작하여 단주를 가르친 것이므로 단주의 해원은 오선위기로부터 대운이 열려 돌아날지니라. 다음에 네 명당(明堂)의 정기를 종합하여야 하니라. 네 명당은 순창 회문산(淳昌回文山)의 오선위기형과 무안(務安) 승달산(僧達山)의 호승예불형(胡僧禮佛形)과 장성(長城) 손룡(巽龍)의 선녀직금형(仙女織錦形)과 태인(泰仁) 배례밭(拜禮田)의 군신봉조형(群臣奉詔形)이니라. 그리고 부안 변산에 二十四혈이 있으니 이것은 회문산의 혈수의 상대가 되며 해변에 있어 해왕(海王)의 도수에 응하느니라. 회문산은 산군(山君), 변산은 해왕(海王)이니라” 하시고 상제께서 그 정기를 뽑으셨도다. (공사 3장 6절)

  

  을축년(1925)에 구태인 도창현에 도장이 이룩되니 이때 도주께서 무극도를 창도하시고 상제를 구천 응원 뇌성 보화 천존 상제로 봉안하시고 종지 및 신조와 목적을 정하셨도다. 봄 어느날에 도주께서 부안 변산(邊山)에 가셔서 육정(六丁)신장을 불러 응기케 하시니 뇌성벽력이 크게 일고 산천이 진동하는 듯하였도다. 이때부터 도주께서는 토지를 해원하고 제민(濟民)하고자 안면도와 원산도(元山島) 두 섬에 간사지(干潟地)를 개척하기 시작하셨도다.(교운 2장 32절, 34절, 35절)

 

 

성근리(成根里)
  어느덧 부안에 이르러 처음 향한 곳은 상제님께서 머무셨던 성근리(成根里) 이환구 종도의 집이다. 부안 IC에서 나와 채 10분이 안 되어 부안군 동진면 하장리 성근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성근마을은 주변이 다 논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지형이 나무를 거꾸로 세워 놓은 것 같아 뿌리가 있어야 한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본래 부안군 상동면의 지역으로서 장등의 아래쪽에 있어서 하장(下長)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폐합에 따라 주변 지역의 일부를 병합하여 하장리에 편입되었다. 

 



  마을 주민들을 통해 쉽게 찾을 수 있었던 이환구의 집에는 90세가 넘은 세째 아들이 살고 있었다. 잠시 상제님과 부친에 대해 여쭈어 보았으나 많은 얘기를 듣지는 못했다. 상제님께서 이곳에서 여러 날을 머무셨다고 하지만 어떤 일을 하셨는지는 알 수 없었다. 『전경』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상제께서 을사(乙巳: 1905)년 정월 그믐날에 형렬과 함께 부안군 성근리(扶安郡成根里) 이 환구(李桓九)의 집에서 여러 날을 머물고 계셨는데 환구가 부안 사람 신 원일(辛元一)을 자주 천거하기에 상제께서 그를 부르니 원일이 와서 배알하고 상제를 자기 집에 모시고 공양하니라. 그의 아버지와 아우가 상제의 장기 체류를 싫어하므로 원일이 상제께 “가친이 본래 해마다 어업을 경영하다가 작년에 폭풍 때문에 큰 손해를 보았으니 선생님께서 금년에는 풍재를 없게 하여 주시면 가친을 위하여 행이 되겠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풍재를 없게 하고 어업을 흥왕케 하리니 많은 이익을 얻으면 후에 돈 千냥을 가져오라” 이르시니라. 원일의 부자가 기뻐하여 승낙하니라. 과연 말씀대로 그해에 풍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칠산 바다의 어업 중에서 원일의 아버지가 가장 흥왕하였도다. (제생 16절)

  

  상제님을 믿고 따랐던 것으로 보이는 이환구 종도의 행적은 이 구절 외에는 나오지 않는다. 단지 알게 된 사실은 사전 조사된 김형렬 종도의 호적과 양쪽 집안의 족보를 통해 이환구 종도가 김형렬의 여동생과 1897년에 혼인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환구 종도의 셋째 아들이 ‘어머니께서 49일 동안 매일 한 시루씩 떡을 찌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하였는데, 이를 통해 『전경』 행록 1장 29절에 49일 동안 매일 시루떡을 찌은 인물이 바로 김형렬의 여동생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마 이환구 종도가 상제님과 인연을 맺은 것도 김형렬의 여동생과 혼인하면서 그렇게 되지 않았나 싶다. 한편 이환구 이름의 한자가 족보상의 한자와 차이를 보였는데,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족보상에는 아홉 구(九) 자가 아닌 구할 구(求) 자를 쓰고 있었다. 
  성근마을을 벗으나면서 마을의 유래와 이환구의 이름 구(求) 자가 끊어진 도(道)의 근원을 바로 세우고 광구천하하기 위해 이 땅에 머무신 상제님의 뜻을 담고 있는 듯하여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아마 상제님께서 성근리에 머무신 것도 그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며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다.

 

 

우금암 개암사

  
▲ 능가산 개암사 일주문

 
  우금암 개암사는 상제님께서 개벽공사를 보신 곳으로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에 있다. 개암사의 일주문에 다다르니 현판에 ‘능가산 개암사(楞伽山開巖寺)’란 글귀를 볼 수 있었다. ‘능가산’이라는 말은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여기서 잠시 머물며 『능가경(楞伽經)』을 강의했다고 해서 변산을 대신해서 불렀다고 한다. 일주문에서 조금 더 올라가니 주변 산세와 어우러진 개암사의 전경이 눈에 들어 왔다. 경내를 둘러보기 위해 중앙 계단을 오르니 개암사 대웅보전과 그 뒤편으로 보이는 우금암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개암사는 『개암사지(開岩寺誌)』에 의하면 기원전 282년에 변한의 문왕이 진한과 마한의 난을 피하기 위해 이곳에 우(禹)와 진(陳) 두 장수를 보내어 성(城)을 쌓는데 감독케 하고 좌우의 계곡에 왕궁과 전각을 짓게 하였다. 동쪽은 묘암(妙岩), 서쪽은 개암(開岩)이라고 불렀는데, 지금의 개암사는 634년(백제 무왕 35년)에 묘련왕사가 변한의 궁전을 절로 고쳐 부른 데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통일신라 문무왕 16년(676년)에 원효대사와 의상대사가 이곳에 들어와 다시 지었다고 전한다. 그 뒤 여러 선사가 중수했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버려 폐허가 되었다. 개암사가 본격적으로 재건된 것은 1658년(효종 9년) 밀영(密英), 혜징(慧澄) 두 선사가 중창사업을 계승하여 대법당을 짓게 되면서부터이다. 보물 292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정면 3간, 측면 3간의 팔각지붕인데, 1783년(정조 2년)에 승담선사가 중수하였고 그 후 여러 차례의 중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개암사에는 석가삼존불을 봉안하고 있는 ‘대웅보전’과 석가가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을 그린 ‘영산회괘불탱’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로는 고려시대의 ‘석조지장보살좌상’이 있으며, 이는 원래 부안군 상서면 청림리 서운마을의 청림사지(靑林寺址)에서 전해오던 것이었으나 개암사로 옮겨져 봉안되고 있다. 그리고 숙종 15년(1689)에 제작된 조선시대 후기의 범종인 ‘동종(銅鐘)’과 부처님의 제자 중에서 불교의 정법을 지키기로 맹세한 열 여섯분을 조각한 ‘16나한상’이 있다.
  개암사는 신원일이 상제님께 개벽공사의 빠른 시행을 간청함에 상제님께서 신원일에게 개벽(開闢)의 모습을 보여준 곳으로 『전경』에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무신년(1908) 七월에 이르러 상제께서 원일을 이끄시고 부안 변산 우금암(遇金岩) 아래에 있는 개암사(開岩寺)에 가시니라. 그때 상제께서 원일에게 삶은 쇠머리 한 개와 술 한 병과 청수 한 그릇을 방안에 차리고 쇠머리를 청수 앞에 진설하게 하신 후에 원일을 그 앞에 꿇어 앉히고 성냥 세 개비를 그 청수에 넣으시니라. 이때 갑자기 풍우가 크게 일어나고 홍수가 창일하는도다. 상제께서 원일에게 “이제 청수 한 동이에 성냥 한 갑을 넣으면 천지가 수국(水國)이 될지니라. 개벽이란 이렇게 쉬우니 그리 알지어다. 만일 이것을 때가 이르기 전에 쓰면 재해만 끼칠 뿐이니 그렇게 믿고 기다려라”고 일러 주시고 진설케 하신 것을 모두 거두니 곧 풍우가 그쳤도다. (공사 2장 27절)

  
  상제님께서 개벽공사를 왜 우금암 아래에 있는 개암사에서 보셨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산 정상에 있는 우금암을 바위 봉우리가 둘로 나뉘어 열려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개암(開巖)이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개암사 경내를 둘러본 후 내변산에 속한 우금암(遇金岩, 禹金岩)을 살펴보기 위해 다시 산을 오르기로 했다. 산 정상에는 우금암 능선으로 삼국시대 석축산성으로 알려져 있는 우금산성(禹金山城, 우진고성)이 있다. 이 산성은 백제 의자왕 20년(660) 무렵에 백제 부흥을 위하여 복신 장군이 유민을 규합하고 군비를 정돈하여 항전하다가 나당 연합군의 주장인 김유신과 소정방에게 패한 곳으로 전해오는 유서 깊은 곳이다.

 


▲ 우금암(베틀굴, 복신굴, 원효굴)

 
  30여 분이 지나서야 산 정상에 도착하였는데, 암벽 밑으로 3개의 굴이 있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왼쪽 바위 밑으로는 백제 부흥운동을 위해 복신(福信) 장군의 백제 부흥군이 마지막까지 항전했다 하는 복신굴과 군인들의 옷감을 지었다는 베틀굴이 있었다. 그리고 오른쪽 낭떠러지 벼랑길을 지나면 신라의 고승 원효대사가 굴속에서 백제유민들의 아픔을 달래면서 수도했다고 하는 원효방(굴)이 있었다. 이 굴 안쪽으로는 만년필 굵기로 패어진 도랑과 어른 주먹 2개가 들어갈 정도의 작은 웅덩이를 볼 수 있었는데 여기에 물이 고였다고 하니 신기했다. 전하는 말로는 원래 물이 없어 곤란했는데 원효가 이곳에 수도하기 위해 오고 나서부터 샘이 솟아났다는 것이다. 한편 이 방이 금산사 미륵불을 봉안한 진표율사의 수도 장소로 이용되었다고 하니 새롭게 느껴졌다. 이렇게 우금암을 둘러본 후 이곳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며 다음 목적지로 이동했다.

 

 

굴바위
  굴바위는 도주님께서 공부와 설법을 하셨다는 곳으로, 부안군 보안면(保安面) 우동리(牛洞里, 우반동)의 서북쪽에 위치하며 깎아지른 듯한 암벽에 천연적으로 뚫린 굴이다. 우동저수지[우동제]를 옆에 끼고 가다보니 굴바위 진입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진입로에서 보면 세운지 얼마 안 된 듯한 감불산 대불사와 웅장한 굴바위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진입로에서 15여 분이 걸려 도착한 굴바위 입구는 멀리서 볼 때와는 다르게 상당히 커 보였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약간의 온도 차이가 느껴졌고, 공간은 생각보다는 넓었다. 굴 내부의 길이는 약 30m 정도로 바닥에서 천장까지 높은 곳은 10m가 넘어 보였다. 한편 굴바위에는 전해오는 전설이 있다. 굴바위 안의 천정에 옥정 또는 참샘이라 부르는 샘이 있는데 이 옥정에 은복지개가 있어 이 은복지개로 참샘의 약수를 떠 마시면 모든 병이 낫는다 하며, 특히 문둥병에 신효하다 하여 예전에는 문둥병 환자들이 많이 찾아와 병을 고쳤다고 한다. 그런데 왜정 때 줄포에 사는 일본인들이 가져가 참샘의 약효가 적어 졌다고 한다. 또 천장에 ‘아들구멍’이 뚫려 있는데 아들 못 낳는 사람이 돌을 던져 맞히거나 구멍 안으로 돌이 들어가면 아들을 낳는다고 한다. 굴은 안쪽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져서 끝까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옥녀봉 자락에 위치한 굴바위는 굴 내부에 얽힌 전설과 굴 입구의 모습에서 묘한 인상을 주었다.

 



  『전경』에 1919년 도주님께서 이상우와 이곳에 오셔서 공부를 하시고 상제님의 대순하신 진리를 설법하시니 따르는 무리가 200명이 넘었다02고 하였는데, 이 시기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하에 있으면서 거족적(擧族的)인 민족운동[3.1 운동]이 있었던 때다. 이를 계기로 일본의 식민지배체제가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로 바뀌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기도 하였다. 도주님께서 공부와 설법을 굳이 이곳에서 하신 다른 이유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보며 굴바위에서 내려왔다.
  한편, 굴바위 진입로에서는 예사롭지 않은 곳을 볼 수 있는데, 의미가 있는 곳이라 생각되어 소개하고자 한다. 그곳은 우동저수지를 가로질러 건너편에 있는 기암절벽이다. 이 절벽에는 선계폭포가 있는데, 보통 때는 폭포를 볼 수 없지만 비가 많이 오면 폭포 너머에 있는 선계(仙溪)안 분지의 물이 넘쳐 폭포를 형성한다.

 

▲ 기암절벽에 있는 선계폭포

  

  살기 좋은 곳으로 알려진 우동리는 풍수상 옥녀봉과 상여봉을 주산으로 하고 상여봉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좌청룡, 옥녀봉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매봉을 만들어 우백호, 남쪽에는 안산인 천마산을 갖춘 명당이다. 그래서 그런지 선계폭포 너머에는 피난처로서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 1509~1571) 선생이 말한 우리나라의 십승지(十勝地) 중 한 곳으로 얘기되고 있는 ‘선계안[선계골]’이란 곳이 있다. 부안에서는 이곳 선계안과 주변의 형세를 선녀가 치부(恥部)를 드러내고 있는 형세라고도 하는데, 이곳에는 예전에 변산의 4대 사찰(내소사, 실상사, 청림사 등) 중 하나였다는 선계사가 있었다. 또한 이곳은 진표율사가 의상봉에 있는 불사의방에 가기 전 스승인 금산사 숭제법사의 말을 듣고 21일 동안 수행을 하였던 곳이며, 조선왕조를 세운 이성계(1335~1408)가 청년시절 지나가다가 이곳이 영산(靈山)임을 알고 머문 후 두 노인을 만나 학문과 무예를 배웠던 곳으로 ‘성계골’이라고도 부른다. 그리고 『홍길동』의 저자 허균(1569~1618)이 조선시대 4대 여류시인 중 한 사람인 이매창과 시문과 인생을 논했던 곳으로 소설 홍길동의 활동무대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한편 우동리에는 조선 실학에 큰 역할을 한 반계 유형원(1622∼1673) 선생이 『반계수록』을 집필하며 머문 곳이 ‘반계선생유적지’로 해서 남아 있다.

 

 

 

  답사를 마치며 부안 변산을 다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부안 변산이 왜 수행 장소나 살기 좋은 곳 혹은 은신처로 이용되었는지 조금은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상제님께서 우금암 아래 개암사에서 개벽공사를 보신 것과 도주님께서 우동리 굴바위에서 공부와 설법하신 것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와 부안 변산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대순회보》 1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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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신정일, 『(신정일의 새로 쓰는)택리지 9: 우리 산하』(서울: 다음생각, 2012), pp.198~200 참고.
02  교운 2장 19절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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