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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 역사 일번지를 답사하며(상)
연구원 손영배
『전경』 행록 1장 4절01에는 상제님의 강세지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의 마을과 산 그리고 길이 잘 설명되어 있다. 이곳의 지명을 정리하면서 상제님 강세지 주변 지역에 있는 시루산[증산(甑山)]과 부정리(扶鼎里) 그리고 쪽박골이 상제님과 도주님 그리고 도전님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문득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마을과 그 주변이야말로 종단역사의 출발점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번 답사를 ‘종단 역사 일번지’라는 제목을 가지고 답사를 시작하려고 한다.
신작로가 만들어지면서 생긴 덕천(德川)사거리
덕천사거리는 상제님 강세지에서 걸어서 15분 정도 소요되는 곳이며 사방으로 길이 뚫려 있다. 동쪽으로 가면 용두마을과 기름들을 볼 수 있고, 서쪽 고부 방향으로 가면 황토현 전적지와 전봉준기념관이 있는데 그 주변에는 배장골과 유왕골이 있다. 북쪽으로 가면 부정리와 쪽박골이 있으며 남쪽으로 가면 상제님 생가 마을과 필동, 등판재, 강동, 연촌이 있고 이곳을 지나면 정읍에 이르게 된다.
덕천사거리는 상제님 화천 이후 신작로가 만들어지면서 형성되었다. 신작로에 대해 전해오는 일화는 다음과 같다
상제께서 정읍으로부터 진펄이나 논이나 가리지 않고 질러오셨도다. 이것을 보고 류 연회(柳然會)란 동리 사람이 “길을 버려두고 그렇게 오시나이까?”라고 말하니 상제께서 “나는 일을 하느라고 바쁘건만.” 하시며 그대로 가시니라. 이 일로부터 수년이 지난 후에 그가 측량기사가 되어 신작로를 측정하게 되었는데 그 측량이 바로 상제께서 함부로 걸어가신 선이 되니라. 지금 덕천(德川) 사거리에서 정읍을 잇는 신작로가 바로 그 길이로다. 02
현재 신작로는 정읍을 잇는 705번 지방 도로에 속해 있다. 이 사거리에서 서쪽 황토현 방향으로 작은 잡화가게가 있는데 이 지역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이곳이 옛날에 객망리 주막이 있었던 자리이다.
▲ <사진3> 옛 객망리 주막 터
객망리 주막 주변에 얽힌 일화는 『전경』에 보면 이 주막 앞에서 이슬을 맞고 떨며 지나가는 소부(小婦)가 있었는데 상제님께서 그 소부에게 연유를 물으니 친정의 부음을 듣고 간다고 하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지나가는 어느 한 노인이 상제님께 소부의 자취를 묻게 된다. 상제님께서 그 묻는 연유를 노인에게 물으니, 그 소부는 자신의 며느리며 자식과 서로가 좋아서 배필로 맺어졌는데 남편이 죽게 되자, 장사도 치르기 전에 갓난아기까지 버리고 도망갔다는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노인한테서 들은 이 사실을 형렬과 원일에게 이야기를 해주시며 “대저 부모가 정하여 준 배필은 인연이요 저희끼리 작배한 것은 천연이라. 천연을 무시하여 인도를 패하려 하니 ….”라고 말씀하셨다. 상제님께서 천연과 인연의 차이를 설명하시고 동시에 가정을 지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야기해주시는 대목이다.03
신송마을[손바래기]에 있는 상제님 생가와 시루산[甑山]의 호둔바위
덕천사거리에서 남서쪽으로 0.5Km 정도 가면 상제님 강세지인 신송마을이 나오는데 이곳은 강세 당시 객망리였다. 객망리는 원래 전라도 고부군 우덕면에 속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삼봉리, 쌍봉리, 부정리, 송산리와 영달리, 산우리의 각 일부와 신기리를 병합하여 지금의 정읍시 덕천면에 속하게 되었다.
▲ <사진4> ‘증산상제강세지’ 현판이 걸려 있는 집
이 마을은 강세하시기 전, 풍수학적으로 선인독서혈이 있다고 하여 선망리(仙望里)라 불렀고 1871년 강세하신 이후에는 객망리(客望里), 1909년 화천 하신 후에는 신월리 새터로 고쳐 불렸다.04 지금은 신송마을이라고 불리고 있는데, ‘신송’이라고 붙여진 것은 신기리(新基里)와 송산리(宋山里)를 병합하고 그 첫 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상제님 생가가 있는 신송마을로 가면서 멀리 보이는 시루산과 그 마을 주변 경관을 둘러보다 보니 언제 도착했는지 ‘姜甑山上帝降世地(강증산상제강세지)’ 현판이 보였다. 이곳은 상제님의 양아들인 강석환 씨가 상제님 진영을 모시고 ‘강증산상제강세지’라는 현판을 걸어 놓은 곳이다. 그러나 실제 강세지는 조사에 의하면 436번지로 추정된다.
현재 이곳은 누군가에 의해 깔끔하게 단장이 되어 있었다. 예전에 모셔져 있던 상제님의 진영과 유물은 볼 수가 없었고, 단지 마당에 깔끔하게 세워진 비석만이 상제님의 생가임을 알려줄 뿐 한적한 분위기였다.
이곳을 나와 다음 목적지인 시루산을 향해 걸어 올라갔다. 얼마 가지 않아 시루산 진입로가 나왔다. 시루산은 신월리 신송마을과 우덕리 배장골에 걸쳐 있으며 해발 87m인 낮은 산이다. 그리고 남북 두 봉우리가 있는데 그중 높은 봉우리는 정상이 평평하여 마치 시루를 엎어 놓은 것처럼 생겼다하여 시루 ‘증’ 자를 써서 증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것은 상제님의 호와 같다.05 이 산 진입로에는 예전에 있었던 우덕리 산성에 대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씌어 있었다.
이 성은 교통의 요지인 시루봉을 에워 싼 테뫼식 산성이다. 산 위에는 중앙부가 말안장처럼 생긴 작은 봉우리가 남북방향으로 있는데, 길쭉한 타원형의 성벽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성의 둘레는 약 415m이며, 계단처럼 되어 있는 산비탈 동쪽에 돌로 쌓은 흔적이 보인다.
북문 터와 서문 터로 추정되는 단절된 부분을 볼 때, 이 성에서는 원래 두 개의 성문이 있었던 듯하다. 이 산성은 성안에서 매우 오래된 그릇 조각들이 발견되고, 초기 성책 형태를 취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백제시대부터 있어 온 성터로 추정된다.
안내문에서 ‘교통의 요지인 시루봉’이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이 문구를 통해 시루산은 신작로가 생기기 이전 우덕리 사람들이 주로 왕래하던 길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하는 내용이다.
안내문에서 조금 올라가니 상제님께서 호둔을 하셨다는 바위06가 보였다. 바위를 살펴보니 위쪽이 평평하여 한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정도 크기였다.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보신 곳이라 그런지 맑은 기운이 깃들어 있는 듯했다. 호둔에 관련하여 상제님께서 보신 공사는 “사람이 전부 돼지 같은 짐승으로 보이니 범을 그대로 두었다가는 사람들이 그 피해를 심하게 입을 것이므로….”라며 호랑이 종자만 남기셨다는 내용이 일화로 전해진다.07
▲ <사진6> 호둔바위
호둔 바위에서 발걸음을 옮겨 시루산 봉우리로 올라가니 몇 분 걸리지 않아 도착할 수 있었다. 시루산이 시루를 엎어 놓은 형상이라서 그런지 봉우리는 주변이 평평했다. 그래서일까? 그 봉우리에 서 있으니 꼭 엎어 놓은 시루 밑바닥 위에 올라 서 있는 느낌이었다. 시루봉에서 옛 성터가 있었다는 흔적은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 찾아보지 못하고, ‘優德里山城(우덕리산성)’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비석만 확인하였다.
시루봉에서 내려오다 보면 산 중턱에 두 갈래 길이 있었는데 물을 마시려고 약수터를 지나는 길로 내려왔다. 약수터 근처에 다다랐을 때쯤, 봉우리에서 숲이 우거져 객망리 마을 전경을 보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는데 여기에서 마을 전경과 기름들을 한눈에 볼 수 있어서 기뻤다.
길을 좀더 내려가니, ‘시루산성수’라고 현판이 붙어 있는 약수터가 보였는데 깔끔하게 개설이 되어 있었다. ‘시루산성수’라는 이름 때문인지 물이 시원하면서 끝 맛은 달콤했다. 이 약수터에 약수터 개설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는데 행사 장소로 ‘덕천면 손바래기 시루봉’이라고 적혀 있어서 상제님의 강세지라고 소개하는 듯했다.
▲ <사진7> ‘시루산성수’ 약수터
등(燈)판재와 연촌(硯村)마을
약수터에서 출발하여 등판재를 넘어 연촌마을로 걸어서 갔다. 등판재 가는 길은 완만하였고 길가에는 예쁜 개망꽃이 넓게 피어 있어 그 꽃의 달콤한 향기로 등판재에 오르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등판재에 오르고 보니 주위는 밭으로 개간되어 있었다.
등판재의 ‘등판’은 기름을 담아 등불을 켜는 그릇으로 등잔을 뜻하며 선인독서혈을 밝혀주는 등불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리고 교통의 요지로서 등판재는 신작로가 만들어지기 이전, 객망리 사람들이 정읍으로 가기 위해 넘나드는 유일한 길이었다.
이 재에서 층층으로 개간된 밭을 가로질러 물씬 풍기는 소똥 냄새를 맡으며 축사를 지나 연촌마을로 들어섰다. 연촌은 우덕리에 속한 마을로 본래 고부군 우덕면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폐합으로 용전리, 시목리, 배장리, 연촌, 쌍정리, 내촌, 두지리, 만종리와 우일면 송덕리 일부를 병합하여 덕천면으로 편입되면서 우덕리로 바뀌었다.
연촌마을은 열 가구 정도가 사는 작은 마을로 마을 뒤쪽 야산에는 대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이 마을은 등판재로부터 남동쪽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지형이 벼루같이 생겼다 하여 ‘베루물’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 마을 뒤에 있는 야산의 이름을 ‘베루물 잔뎅이’라고 하는데 ‘잔뎅이’는 전라도 방언으로 ‘고개 또는 등’08을 의미하며 낮은 언덕을 말한다. 베루물 잔뎅이는 벼루에서 먹을 가는 부분과 먹물이 모이는 연지 사이의 경사진 부분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벼루를 상징하는 지명과 지기(地氣) 때문일까 연촌 마을 주민에 말에 의하면 마을에서 학자들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 <사진8> 밭으로 개간된 등판재
필동(筆洞)과 강동(講洞)
연촌마을에서 다음 행선지인 필동과 강동이 있는 곳으로 이동하였다. 필동과 강동은 우덕리에 속해 있으며 망제봉에서 내려오는 산자락이 현재 덕천초등학교가 있는 곳까지 나지막한 능선으로 연결되어 연촌에서 정읍으로 넘어가는 재가 있었다.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이후 신작로가 생기면서 재의 흔적은 사라져 버렸다.09
필동과 강동 전체 전경을 사진에 담기 위해 덕천면사무소 맞은편에 있는 덕천복지회관 옥상에 올라가 원하는 전경을 촬영하였다. 필동과 강동이라는 곳에 덕천초등학교와 뒤 야산이 있었고 그 우측으로 논밭으로 이루어진 기름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 <사진10> 필동과 강동
필동은 시루산의 동쪽 아래 골짜기에 있던 마을로 한자로 붓[筆]을 의미한다. 옛날에는 ‘붓매미골’이라 불렸다고 하며 서당도 있었다고 한다.10 필동은 현재 사용하지 않는 지명으로 지금은 그 자리에 덕천초등학교가 자리 잡은 것이다. 그 앞으로 도로가 정비되면서 지형이 완전히 바뀌었다. 필동이라는 지명이 사라지고 학교가 생겼다는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하다.
강동은 한자로 ‘배우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덕천초등학교의 뒤편에 위치한 나지막한 구릉이다. 그 구릉을 끼고 돌아오는 모퉁이가 있는데 그곳은 ‘강동모탱이’ 또는 ‘강동끄티’라고 불렸다. 지금은 칠보수력발전소로부터 흘러오는 농수로와 논밭이 있지만, 옛날에는 정읍천의 수심이 깊어 강동모탱이 바로 앞까지 물이 차서 배가 들어왔었다고 한다.11
상제님 강세지인 객망리로부터 시작하여 등판재를 넘어 이어지는 연촌, 강동, 필동 등에 이르기까지 선인독서혈이 뻗쳐 있다. 이곳은 선비들이 글공부하거나 연구할[강동(講洞)] 때 필요한 벼루[연촌(硯村)]와 붓[필동(筆洞)] 그리고 밤에 불을 밝힐 등잔[등(燈)판재]이 지명에 다 갖추어져 있다. 그래서 필동에 덕천초등학교가 세워진 것이 아닐까? 이 학교 운동장에서 넓게 펼쳐진 논밭을 보며 잠시나마 마음의 휴식을 취하고 다음 답사지인 배장골과 유왕골로 이동하였다.
《대순회보》 16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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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이 시루산 동쪽 들에 객망리(客望里)가 있고 그 산 남쪽으로 뻗은 등(燈)판재 너머로 연촌(硯村)ㆍ강동(講洞)ㆍ배장골(拜將谷)ㆍ시목동(柿木洞)ㆍ유왕골(留王谷)ㆍ필동(筆洞) 등이 있으며 그 앞들이 기름들(油野)이오. 그리고 이 들의 북쪽에 있는 산줄기가 뻗친 앞들에 덕천 사거리(德川四巨里) 마을이 있고 여기서 이평(梨坪)에 이르는 고갯길을 넘으면 부정리(扶鼎里)가 있고 그 옆 골짜기가 쪽박골이로다.
02 행록 1장 30절.
03 행록 3장 36절 참조.
04 행록 1장 7절 참조.
05 『한국지명유래집 전라 · 제주편 지명』, 2010.12, 국토지리정보.
06 강석환씨의 증언.
07 교법 3장 19절 참조.
08 『전라도 방언사전』 (서울: 수필과 비평사, 2005), p.287.
09 두지마을 주민 증언, 2010.
10 용전마을 배장골 주민 증언, 2011.
11 두지마을 주민 증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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