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함열 회선동과 김보경 종도
종단역사연구팀
“주유하시다가 상제께서 함열(咸悅)에 이르셔서 ‘만인 함열(萬人咸悅)’이라 기뻐하셨도다.” (행록 2장 4절)
상제님께서 광구천하(匡求天下)의 뜻을 세우신 후 인심과 속정을 살피기 위해 3년간 주유하시다가 전라북도 ‘함열(咸悅)’에 이르러 하신 말씀이다. ‘모든 사람들이 즐겁고 기쁘게 사는 곳’이라는 뜻의 ‘함열(咸悅)’은 후천을 상상하게 한다. 그리고 이렇게 기쁨이 가득한 ‘함열(咸悅)’에 신선들이 모인다는 ‘회선동(會仙洞)’이 있다. 이곳에서 상제님과 김보경이 천지공사를 보셨다고 하니 그 즐거움이 더욱 완전해지는 것 같다.
▲ 회선동 마을전경
‘고선지(古仙地)’라고도 불렸던 ‘회선동(會仙洞)’은 김보경이 살았던 당시에는 전라북도 함열군 동일면 회선동(리)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대기리와 종촌리, 회선리(대기리 북쪽에 있는 마을로 내회선리와 외회선리가 있다)의 일부를 병합하여 대기와 회선의 이름을 따서 대선리(大仙里)라 하였다. 그리고 익산군, 여산군, 용안군, 함열군을 합쳐 익산군으로 편입시켜 익산군 성당면 대선리가 되었다가 1995년 익산군이 익산시로 편입됨에 따라 지금의 전라북도 익산시 성당면 대선리(益山市 聖堂面 大仙里)가 되었다. 대기리에서 ‘대기’라는 말의 유래를 살펴보면 마을 앞들이 근처에서는 크다고 하여 ‘큰들’이라는 뜻의 ‘한들’에서 ‘한틀’로, 이것이 다시 한자어인 ‘대기(大機)’로 변한 것이다. 또한 지형이 베틀과 같고 선녀가 베를 짜는 선녀직금형(仙女織錦形)이어서 생긴 이름이라고도 한다.01
아침 6시. 우리는 상제님께서 김보경과 함께하셨던 함열 회선동을 향해 출발했다. 풀잎에 톡 하니 앉은 이슬은 아침햇살을 길게 반사시키고 바삐 움직이는 차들은 상쾌한 에너지를 날린다. 어디쯤 왔을까? 삶의 풍요를 점친다는 이팝나무(쌀밥나무) 꽃이 방울방울 소담하게 늘어선 곳은 전라도 어디쯤. 좀 더 달리다 보니 유난히 붉은 빛의 토지가 나타났다. 당장에라도 뭔가를 피워낼 것처럼 붉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가운데 얕은 언덕처럼 볼록하게 올라온 곳에 ‘대선리’가 자리잡고 있었다. 드디어 회선동이다.
경로당에서 만난 어르신의 안내로 김보경 종도의 증손자며느리를 만날 수 있었다. 수줍음이 함뿍 담긴 정 많은 할머니의 모습에 긴장했던 마음이 사알 녹아 입가엔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할머니께서 시집오셨을 때는 시증조할아버지(김보경)와 시할아버지(김덕유) 두 분 모두 돌아가셔서 뵌 적이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두 분에 대해서 특별하게 들은 이야기도 없다고 하셨다.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해하시면서 혹시 도움이 될까 싶다며 창고에 남아있는 책 뭉치를 내오셨다. 유교 관련 서적이나 김보경이 직접 쓴 족보, 졸업식 답사, 편지글, 공부했던 흔적이 남은 책, 영수증, 계모임 관련 기록 등등 누구 것인지 한눈에 알 수 없는 낡은 것들이 꽤 여럿 나왔다. 그중에 김보경이 직접 쓴 족보(1895년)가 특히 눈에 띄었다.
▲ 김보경 종도 집터에 있던 집은 없어지고 밭이 되었다.
김보경(1861~1934)은 안동 김씨 대사성공파 22세손으로 부친 기원(基源, 1842~1901)과 모친 부여 서씨(扶餘徐氏, 1839~?) 사이의 1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인은 개성 김씨(開城金氏, 1859~?)와 탐진 최씨(耽津崔氏, 1861~?)가 있었다. 개성 김씨와는 장남 현묵(김덕유, 1888~1932)을, 탐진 최씨와는 차남 성묵(1899~?)을 두었다.
김보경의 족보명은 영준(榮駿)이고 자(字)는 주팔(周八)이다. 초명(初名)은 병준(柄俊)이고 재명(再名)은 영세(永世)이다. 호(號)는 두 가지로 나타났다. 1895년 그가 직접 쓴 족보에는 만호(晩湖)였으나 1979년 족보에는 농호(聾湖)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김보경이 쓴 것으로 생각되는 『농호집(聾湖集)』의 겉 표지에 ‘丙寅臘月(병인 납월, 1926년 12월)’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1926년에 농호라는 호를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호를 바꾼 이유가 있을 것 같아 농호(聾湖)의 의미를 살펴보니 농(聾) 자가 ‘귀머거리’, ‘어리석다’, ‘어둡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관리였던 그가 이렇게 스스로를 낮춘 것은 상제님을 모셨기 때문이 아닐까?
김보경은 토목이나 건축 따위의 공사를 감독하는 감역관(監役官)을 지냈다. 족보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대대로 관직을 지냈던 명망 있는 가문의 후손이어서 꽤 재산가였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갑진(1904)년에 함열에서 도적이 성했을 때 그의 집이 부자라는 헛소문으로 인해 집에 도적이 들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다.(행록 3장 24절)
김보경이 상제님을 따랐던 계기가 무엇일까? 아마도 김형렬과 깊은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김보경과 김형렬은 안동 김씨 대사성공파(安東金氏 大司成公派)로 김보경은 익산에, 김형렬은 동곡에 살면서 문중일을 통해 왕래가 잦았을 것으로 보인다. 김형렬이 상제님의 첫 종도로서 진정으로 끝까지 상제를 좇았던 것을 생각하면 김보경이 김형렬에 의해 상제님의 종도가 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 회선동 표지석과 마을
김보경의 가족 중에 상제님을 따랐던 이는 큰아들 덕유와 소진섭(蘇鎭燮)이 있다. 큰아들의 이름은 현묵으로 자(字)가 덕유(德有: 『전경』에는 德裕라고 표기되어 있다)이며 내부주사(內部主事)02를 지냈다. 덕유는 아버지와 함께 상제님의 공사에 참여하였다. 특히 진묵의 초혼으로 추측되는 공사에 참여할 당시 폐병 중기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데 공사에 참여한 후 치유되었다.(공사 1장 15절) 이 일은 상제님에 대한 그의 신심을 더욱 깊게 하여 상제님께서 화천하실 때 동곡약방에 함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김보경의 다섯 명의 누이 중에 넷째 누이의 남편인 소진섭은 1895년 당시에 익산(益山) 간촌(間村)에 살았으며(1895년 족보) 덕유와 함께 위의 공사에 참여하였다.
족보를 살펴보다 생몰연대가 기록되어 있는 부분에 눈이 멈췄다. 『전경』에 보면 김보경의 모친이 위급할 때 그의 가족들이 상제님의 사자가 되어 명부사자(冥府使者)로부터 환자(김보경의 모친)를 구하고자 하셨던 공사(행록 1장 34절)가 있는데 그 시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혹시 그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런데 족보에는 그 집안으로 시집 온 여자들의 태어난 시기는 있지만 이름과 사망시기는 정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아 아쉽게도 그 공사의 시기를 알 수 없었다.
김보경이 살았던 집의 위치를 할머니께 여쭤보니 잘 모른다고 하셨다.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기 위해 서류를 찾아보니 지금 할머니께서 사시는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서류를 들고 김보경이 살았던 곳의 위치를 찾아보았다. 그의 집은 현재 할머니께서 살고 계시는 집 건너편에 보이는 공장의 왼쪽에 있었다. 아쉽게도 이미 오래전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다가 이제는 밭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김보경의 묘지에 대해 말씀을 드렸더니 묘는 김보경이 살았던 집 부근에 있었는데 몇 년 전에 묘를 정리하면서 화장(火葬)하였다고 하셨다.
천곡(泉谷)과 사명당(四明堂) 갱생공사(행록 5장 15절), 호소신 공사(공사 1장 16절), 수륙병진 공사(공사 1장 17절), 유불선과 관련된 공사(교운 1장 6절) 등 상제님의 공사에 참여하여 많은 일을 하였던 김보경 종도에 대해 알아보고자 찾아갔던 회선동에는 이제 깊게 주름지고 굵게 마디진 손을 가진 증손자며느리만 집을 지키고 계셨다. 비록 할머니께서 시증조할아버지인 김보경에 대해 알고 계신 것은 거의 없었지만, 오랜 세월속에 헤진 몇 권의 책들은 만인의 기쁨이 가득하고 신선들이 노닐었다는 함열 회선동에서 농호(聾湖)라는 호로 스스로를 낮추며 상제님을 따랐던 김보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대순회보》 174호
참고문헌
『전경』
익산시사편찬위원회, 『익산시사 상권』, 2001.
---------------------------------
01 익산시사편찬위원회, 『익산시사 상권』, 2001, p.240.
02 내부주사(內部主事): 조선26대 고종 32년(1895)에 내무행정을 맡아보는 내무아문(內務衙門)을 개칭한 관청인 내부(內部)의 하위관직인 판임벼슬.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