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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칠읍에 흉년을 없애리라(上)

교무부    2017.03.28    읽음 : 1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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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칠읍에 흉년을 없애리라(上)

 

 

종단역사연구팀

 

  하루는 상제께서 종도들에게 오주(五呪)를 수련케 하시고 그들에게 “일곱 고을 곡식이면 양식이 넉넉하겠느냐”고 물으시니 종도들이 말하기를 “쓰기에 달렸나이다”고 아뢰니 상제께서 다시 가라사대 “그렇다 할지라도 곡간이 찼다 비었다 하면 안 될 것이니 용지불갈(用之不渴)하여야 하리라.” 종도들이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음을 아시고 상제께서 백지에 저수지와 물도랑의 도면을 그려 불사르시면서 가르치셨도다. “이곳이 운산(雲山)이라. 운암강(雲岩江) 물은 김제 만경(金堤萬頃) 들판으로 돌려도 하류에서는 원망이 없을 것이니 이 물줄기는 대한불갈(大旱不渴)이라. 능히 하늘을 겨루리라. 강 태공(姜太公)은 제(齊)나라 한 고을에 흉년을 없앴다고 하나 나는 전북(全北) 칠읍(七邑)에 흉년을 없애리라.” 하셨도다. (공사 1장 28절)

  


▲ 섬진강댐 (2016년)

  

  1907년 12월, 상제님께서는 “전북(全北) 칠읍(七邑)에 흉년을 없애리라.” 하시며 섬진강 상류지역의 운암강 물길을 동진강 쪽으로 흐르도록 공사를 행하셨다. 그리고 이 공사는 그 후 땅 위에 서서히 실현되었다. 1925년에서 1927년 사이 운암강에는 거대한 콘크리트 댐인 운암제가 만들어졌다. 이 댐에 담겨 있던 물이 터널을 통해 동진강으로 흘러 주변의 농경지를 옥토로 변모시켰다. 그 후 1965년에는 운암제보다 7배 더 많은 물을 담을 수 있는 섬진강댐이 운암제를 대신하면서, 동진강 일대뿐만 아니라 이 물의 일부가 부안 일대를 관통하여 계화도간척지까지 이어져서 그 주변을 물이 마르지 않는 땅으로 만들어 놓았다. 또한 1990년대 이후 동북아시아의 경제 허브로 개발되고 있는 군산에서 부안을 연결하는 새만금간척지 역시 운암강의 물이 동진강으로 연결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계획이었다. 상제님께서 짜놓으신 도수는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 것일까?

 

  

  

  동진강 물줄기가 지나가는 전라북도의 김제만경평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드넓은 평야로 예로부터 논농사가 발달한 곳이다. 하지만 이 넓은 평야를 가로질러 흐르는 동진강은 수심이 얕고 강폭이 좁아서 기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가뭄이 들면 물이 말라 주변 농지에 댈 물이 부족하였고, 쌀 수확량의 변동이 심하였다. 상제님께서 “곡간이 찼다 비었다 하면 안 될 것이니”라고 말씀하신 것도 오랫동안 이러한 일이 반복되어 왔던 사실을 말씀하신 것으로 짐작된다. 우리는 상제님 공사와 관련하여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에 이루어졌던 수리사업이 어떤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 땅 위에 실현되었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또한 답사를 통해 당시 건설된 운암제와 운암취수구, 운암터널, 운암발전소, 낙양취입수문 등의 수리시설을 둘러보면서 상제님께서 행하신 공사의 의미를 조금이나마 알아보고자 한다.

 


▲ 옥정호 (2015년)

 

 

운암강의 물이 동진강 유역으로 돌려지다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다음 해(1910)에 우리나라는 일본의 강압으로 나라를 빼앗기는 뼈아픈 식민지 역사를 겪게 되었다. 일본에 의한 식민통치는 철저히 진행되었는데, 그 기초 작업으로 시행된 정책이 9년 동안 조선의 전 지역에서 이루어진 ‘토지조사사업’01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조선총독부에서 조선을 일본의 쌀 공급 기지로 만들기 위해 1920년에서 1935년에 걸쳐 추진한 정책이 ‘산미증식계획’이었다. 산미증식계획에는 일본으로 쌀을 안정적으로 반출하기 위해 조선의 식량생산을 늘리려는 계획이 포함되어 있었다. 조선총독부의 산미증식계획은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실시되었다.

  


▲ 1910년대 군산항(출처: 디지털군산문화대전)


  첫째, 당시 일본은 만성적으로 쌀이 부족하여 외국에서 매년 5백만에서 6백만 석을 수입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1914년) 이후 급속한 산업화로 농업인구가 도시로 몰리면서 농업 생산량이 정체기에 접어들었다. 특히 1918년에는 쌀 도매상들의 담합으로 가격이 폭등하자 민중들이 폭동을(일명 ‘쌀 소동’) 일으키기도 하였다. 일본은 자국 내의 이러한 식량 문제에 대한 대책으로 식민지인 조선과 대만에서 쌀을 공급받아 해결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둘째, 조선에서 일본으로 식량을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해서는 조선의 쌀 생산량을 증대시킬 필요가 있었다. 조선의 쌀 수확량이 급격히 감소한다면 일본은 식량 공급에 직접적인 어려움을 겪게 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1919년에 조선의 중부 이북지역에서 일찍이 보지 못했던 큰 가뭄으로 아무런 수확을 하지 못한 토지 17만 8천 정보를 포함해서 피해면적은 약 1백 2만 정보에 달하는 피해가 발생하였다.02 이러한 상황은 일본으로 식량을 공급해야 하는 조선총독부로 하여금 즉각적인 대응책 마련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에서 쌀 생산량을 증대시키기 위한 적극적인 정책을 추진하였고, 이것이 1920년부터 시작된 ‘산미증식계획’이었다.
  토지조사사업을 진행하면서 조선총독부에서는 1917년경 전국의 수리시설 확충을 위한 기본 조사와 계획을 내놓았다. 그중에서 특히 동진강의 부족한 물을 확충하기 위해 동진강 상류지역에 큰 저수지를 축조할 계획을 세우고 조사를 실시하였다. 하지만 동진강 유역의 곡창지대에 충분한 물을 공급하기 어렵다는 부정적인 결과를 얻었다. 그 뒤 1919년에 동진강 상류지역과 산 너머에 있는 운암강(현재 옥정호) 일대에 항공답사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이곳에 댐을 건설하면 운암강 일대에 많은 물을 저장할 수 있고, 이 물을 터널을 통해 동진강으로 흐르게 한다면 동진강의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조사결과를 얻었다.

 

 
▲ 정읍 일대의 수리시설

 
  그러나 당시 법률에는, 댐 건설과 터널 공사 그리고 수로를 만드는 등의 수리사업 시행은 이 사업으로 이익을 얻는 지주들이 모여 수리조합을 설립하고 추진하도록 되어 있었다. 조선 최대의 곡창지대인 동진강 유역에는 이미 일본인 지주들이 진출하여 농장을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총독부에서는 이들에게 수리조합 결성을 촉구하였다. 그런데 지주들 사이에서 조합비 분담액을 놓고 의견 대립이 심해지면서 수리조합 설립은 계속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24년 큰 가뭄이 발생하자 동진강 유역은 물 부족으로 큰 피해를 입었고, 지주들은 서둘러 1925년 8월에 총독부로부터 ‘동진수리조합’ 설립을 인가받았다. 그리고 총독부의 기술지원을 받아 수리사업을 진행하였다.
  1925년 11월에 동진수리조합에서는 정읍시 산내면 종성리에 운암제(댐)를 착공하였고, 1926년 2월에는 임실군 운암면 운정리에서 정읍시 산외면 종산리까지 뚫는 터널 공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1927년 5월에 운암터널이 완공된 후 이어 12월에는 운암제가 완공되었다. 이 공사 기간에 물을 농경지로 보내는 수로건설과 농경지를 늘리기 위한 개간사업도 동시에 진행되었다. 특히 동진강 길이(약 50km)의 7배나 되는 수로가 김제만경평야 곳곳으로 거미줄처럼 뻗어 나갔다. 이로 인해 동진강 유역의 김제만경평야는 새롭게 변모하였다.

 

 

운암제와 운암취수구 

 

  운암제와 관련된 수리시설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던 중 희소식이 있었다. 작년 늦가을, 그동안의 큰 가뭄으로 물속에 잠겨 있던 운암제가 드러났다는 것이다. 운암제를 옛 사진으로만 보다가 옥정호 속에 잠겨있던 운암제를 직접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서둘러서 정읍일대를 답사하기로 계획하고, 답사코스를 정읍 산내면 종성리에 있는 운암제를 시작으로 운암취수구, 운암방류구, 운암발전소를 거쳐 마지막으로 태인 낙양리에 있는 낙양취입수문으로 정하였다.

 


▲ 운암제 (1928년)

  

  답사 당일 우리는 먼저 운암제로 출발하였다. 운암제에 도착하니, 아쉽게도 전날 온 비로 물이 불어나 운암제의 가장자리 일부분과 기념비만 보였다. 멀리서 바라본 운암제는 배를 타는 선착장처럼 보였다. 좀 더 가까이에서 보려고 비탈길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높이 솟은 비석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니 운암제가 만들어진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이었다. 암석 위에 세워진 5m가 넘어 보이는 이 비석에는 ‘운암호(雲巖湖)’라는 큰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이곳 옥정호가 예전에는 운암호로 불렸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운암호는 1928년 운암제가 완공되면서 생긴 호수다. 그 뒤 1938년부터 2년에 걸친 큰 가뭄으로 운암제의 물이 말라 김제만경평야 일대가 큰 피해를 입으면서 이곳에서 2km 떨어진 하류에 다시 새로운 댐 건설을 계획하게 되었다. 1940년 초 운암제를 대신할 댐을 착공하였다. 하지만 이 댐은 일본의 2차 세계대전 패망과 6.25전쟁으로 건설이 중단되었다가 1965년 12월에 ‘섬진강 다목적댐’으로 완공되었다. 이 댐의 건설로 만들어진 거대한 호수를 ‘옥정호’라고 부르는데 저수용량은 운암제보다 7배나 크다. 운암제는 높이가 26m이고 길이는 316m로 부채꼴모양의 아치형의 콘크리트 댐이었다. 현재 운암제는 섬진강 댐이 건설되면서 잠겨있었으나 이번 가뭄처럼 옥정호의 수위가 낮아져 있을 때 그 모습을 일부 볼 수가 있다. 이 운암제 건설은 섬진강 주변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주었다.

  


▲ 가뭄으로 드러난 운암제와 기념비

 
  운암강은 지리산 줄기에서 내려오는 물과 만나 남해로 흘러들어 간다. 평야가 그리 넓지 않아서 농경지에 물이 많이 이용되지 않았던 섬진강 유역은 큰 비가 오면 운암강과 지리산의 물로 홍수의 피해가 잦았다. 그런데 섬진강 상류인 운암강에 운암제가 만들어지면서 섬진강 중하류 지역은 홍수의 피해가 줄어든 것이다. “운암강 물은 김제 만경 들판으로 돌려도 하류에서는 원망이 없을 것”이라는 상제님의 말씀이 새롭게 다가왔다.

 


▲ 운암취수구(전북 임실군 운암면 운정리)

 
  다음으로 향한 곳은 호수를 가로질러 직선거리로 4.4km 가량 떨어진 운암취수구였다. 그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구불구불한 산길을 30여 분 둘러가야 했다. 취수구 부근에 차를 세우고 운암취수구까지 걸어내려 갔다. 이곳은 현재 한국농어촌공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운암취수구는 운암제의 완공으로 생긴 운암호(현재 옥정호)의 물을 산 너머에 있는 동진강의 상류로 보내는 시설이다. 운암취수구와 동진강 상류의 도원천으로 이어지는 수로터널은 1926년 2월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1927년 5월에 완공되었다. 이곳의 취수구는 관계자에 의하면 5개라고 하는데, 우리가 답사했을 때는 가뭄으로 높이와 방향이 다른 취수구 3개가 드러나 있었다. 취수구는 지름이 약 3m의 원형 관이고, 입구에는 나뭇가지 등이 들어가지 못하도록 금속구조물로 막아 놓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나무 바로 밑에 물이 찬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가뭄이 있기 전에는 그곳까지 물에 잠겼었음을 알 수 있었다.

 

 
▲ 옥정호 (2016년)

 
  운암취수구는 우리나라 최초로 산을 뚫어 운암강의 물길을 동진강으로 흐르게 하는 유역변경식 시설이다. 상제님께서 “백지에 저수지와 물도랑의 도면을 그려” 불사르신 공사가 이렇게 산을 뚫어 새로운 물길을 만드는 것으로 실현된 모습을 직접 보니 새롭고 놀라웠다. 이곳은 상제님의 공사로 운암강의 물길이 돌려진 시작점이다.
  다음 답사지는 상제님 공사로 인한 덕화가 김제만경평야로 퍼져 나가는 관문인 운암방류구다. 우리는 이러한 의미를 품고 있는 운암방류구로 향하였다.

《대순회보》 18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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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1910~1918년 일본이 한국의 식민지적 토지소유관계를 확립하기 위해 전국적으로 실시한 토지조사사업.
02 김의원, 「우리의 국토(国土)」, 《매일경제신문》, 1983.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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