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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농암을 찾아서

교무부    2013.03.28    읽음 : 1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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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농암을 찾아서

 

 

종단역사연구팀

 

  상제께서 순창 농암(籠岩) 박 장근의 집에 가셔서 종도들에게 가라사대 “이곳에 큰 기운이 묻혀 있으니 이제 그 기운을 내가 풀어 쓰리라. 전 명숙과 최 익현이 있었으되 그 기운을 쓸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여 동학이 성공하지 못하였느니라” 하셨도다. (공사 1장 27절)

  

  비다!
  전라도 순창까지 가야 하는 중요한 날인데 비가 내린다. 몇 달을 고대하다 이제야 가는데 걱정이다. 혼자 가는 길이라면 다음을 생각하겠지만 여럿이 함께 가는 길이기에 쉽게 시간을 낼 수 없어 빌어본다. 맑은 하늘을 볼 수 있기를. 모두의 마음이 같았을까?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조금씩 잠잠해지더니 회색 구름 어느 한 귀퉁이 사이로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넓어져라 넓어져라….’
  조금씩 드러나는 하늘을 따라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종암리 농암 마을에 도착했다. 상제님의 종도인 박장근이 살았던 이곳은 옷가지나 이불 또는 귀중한 물건들을 보관하기 위해 방안에 두었던 네모난 모양의 농(籠)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농암(籠岩), 혹은 농바우(바우는 바위의 사투리)라고 불렸다. 과연 농바위의 실제 모습은 어떨까? 그리고 상제님께서 풀어 쓰신 큰 기운이 어디에 묻혀 있었을까? 마을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그 궁금증이 더해졌다.
  농암은 현재 쌍치면 종암리에 속해 있다. 종암리는 종현(鐘峴: 북재라고도 함)·농암(籠岩)·홀금·터실이라는 4개의 자연부락으로 형성되었다.01 그 중에 종현(鐘峴)의 ‘종(鐘)’ 자와 농암의 ‘암(岩)’ 자를 따서 종암리가 되었다. 이곳은 조선 시대에는 하치등면(下置等面)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상치등면과 합해져서 쌍치면(雙置面)으로 바뀌었다. 종암리는 단양 우 씨가 임진왜란을 피해 정읍에서 이주하여 정착한 지역이라고 한다.02

  


▲ 농암 마을 전경 (2016년 촬영)


 

농암의 바위들
  농암은 고당산(高堂山 혹은 姑堂山)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다. 그리고 그곳에는 크고 작은 바위들이 산재해 있다. 그중에 이름 있는 바위들을 살펴보면 약 10개 정도가 된다. 마을 입구에서 농바위로 올라가는 골목 왼쪽으로 탱자나무가 담장을 만들며 길게 이어져 있다. 그 담장에서 집 안쪽으로 들어간 위치에 계란바위가 있다.(사진에는 보이지 않는다) 길을 따라 조금 더 올라가면 왼쪽에는 가마바위와 소반바위가 있고 오른쪽으로는 코푼바위, 말바위, 비척바위, 요강바위, 문턱바위 등이 있다. 문턱바위를 지나서 오른쪽에 있는 빈집의 마당 한쪽에 농바위가 있다. 큰 바위 두 짝이 서로 비스듬히 상하로 누워있는 모습이다. 농바위는 정면에서 봤을 때 바위 한 짝의 가로 길이가 성인 남자 2명이 양팔을 벌려 손을 맞잡아야 할 만큼 그 크기가 상당하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원래는 하나로 되어 있었으나 어느 날 벼락을 맞아 두 짝으로 갈라졌다고 한다. 실제로 살펴보면 두 바위가 서로 잘려나간 면이 상당히 유사하여 그 말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정말 엄청나게 커다란 농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거울바위는 농바위 뒤의 빽빽한 대나무 숲 속에 숨겨져 있다. 대숲 속으로 들어가야만 볼 수 있는 이 바위는 겉면이 상당히 매끄러워서 거울바위라는 이름과 잘 어울린다.

  


▲ 농암에 있는 바위의 모습과 위치 (2016년 촬영)

 
  농바위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모여 있는 이 바위들은 이름뿐만 아니라 놓여 있는 위치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바위 이름이 대부분 사람들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들로 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농암의 앞산과 더불어 생각해 보면 그 특별함이 더해진다.

 

 

 

농바위에서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는 앞산을 옥녀봉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모습이 대숲 속의 거울바위와 이어져 있다. 마치 옥녀가 다소곳이 앉아 거울을 보고 화장하고 있는 것 같은 형상이기 때문이다. 옥녀봉을 비롯해서 농바위와 각종 바위들의 이름과 그 위치가 아주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마치 한 가정집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들게 했다.

 

 

농바위 전설
  상제님께서는 이곳에 묻혀 있는 큰 기운을 풀어 쓰셨다고 하셨다.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큰 기운이 어디에 묻혀 있었던 것일까? 이리저리 둘러봐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땅 속에서 불뚝불뚝 솟아난 듯한 크고 작은 바위들뿐이었다. 마을 어르신께서도 이 마을은 바위투성이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농암은 고당산의 끝자락에 있으면서 바위 위에 자리 잡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은 돌산에 거대한 기운이 응집해 있다는 옛말을 생각나게 하였다. 어쩌면 큰 기운이 있었던 곳을 알 수도 있겠다는 기대감에 조금씩 마음이 급해졌다. 조급해지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심호흡을 하고 난 후, 이곳에서 80여 년을 사셨다는 토박이 어르신께 여쭤 보았다. 혹시 무슨 특별한 전설 같은 것이 전해져 오는지. 기대감이 너무 컸던 탓일까? 아쉽게도 어르신께서는 특별하게 알고 계신 이야기가 없다고 하신다. ‘아~!’, 안타까운 탄식이 절로 났다. 결국 마을에 대한 전설도, 농바위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도 알 수 없었다.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농암이라는 마을 이름과 농바위에 생각을 집중했다. 비록 전해지는 이야기는 없지만 번개를 맞아서 갈라졌다는 말과 마을을 대표하고 있다는 것에는 뭔가 의미가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먼저 다른 지역에도 농바위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지역은 다르지만 농바위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면 상제님께서 하셨던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전국적으로 농바위가 참 많이 있었다. 그중 몇 곳만 예를 들어보면 경상남도 하동군 횡천면 횡천리(동), 경상북도 군위군에 있는 팔공산, 경상남도 사천시 늑도, 부산시 남구 이기대,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어재리, 충청북도 괴산 농바위 마을 등이 있다. 그리고 이곳 외에도 농바위는 더 있었다. 그중에는 전설을 가지고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었다. 전해져 오는 이야기 중에서 관심을 끄는 것으로는 경상남도 하동군 횡천면 횡천리(동)의 ‘농바위 이야기’와 충청남도 금산군 부리면 어재리의 ‘농바우끄시기’가 있다. 『하동군지』에 수록된 ‘농바위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횡천면 횡천동에 농바위라는 돌이 있는데 이것은 그 돌의 생김새가 꼭 장농귓 같아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거기엔 옛부터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오고 있으며 모두가 신기해 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조 때 어느 유명한 장군이 있었는데 그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으면서 남긴 말이,
  “뒷날 나라가 위태롭고, 외적이 침입해 올 것을 대비하여 내가 무기를 감추어 두었으니 그때 나라를 구할 분이 나타나 이 바위를 깨고 무기를 끄집어내어서 구국제민(救國濟民)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이 바위는 그 장군이 장롱처럼 만들었다고 하며 장롱처럼 된 바위에 무기와 갑옷, 투구 등을 감추어 두었다고 한다. 이 전설을 확인하기 위하여 광복 후 다섯 명의 장정이 바위 뚜껑을 열려고 하자 갑자기 뇌성과 번개가 쳐 중단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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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암과 주변 지역 (출처: 다음지도)

 

  그리고 ‘농바우끄시기’는 마을의 여인들이 돌산 위에 있는 농바위를 끌어당겨 금방이라도 떨어뜨릴 것처럼 흔들어서 비가 오게 하는 기우제(祈雨祭)를 말한다. 이 기우제는 농바위가 땅바닥으로 굴러 떨어지면 천지가 개벽한다는 속설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것은 여인들이 농바위를 떨어뜨려서 천지개벽을 도모하는 행동을 보이면 이를 보고 놀란 하늘에서 비를 줄 것이라는 사고를 전제로 성립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04 이러한 특징은 ‘농바우끄시기’의 유래로 여겨지는 ‘아기장수 이야기’에 더욱 잘 나타난다. 특히 아기장수가 가지고 있는 신이한 능력은 그가 비범한 인물로 개벽을 이끌어 갈 만한 존재임을 유추해 보게 한다.

  

  옛날에 어재리 느재마을에 마음씨 착한 노부부가 살았다. 부부는 농사를 지으며 화목한 가정을 이루었지만, 후사를 이어줄 자식이 없다는 것이 커다란 근심거리였다. 그래서 노부부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지성으로 불공을 드렸다. 그들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는지 부인에게 태기가 있더니 마침내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갓 태어난 아이는 이빨이 나고 또 겨드랑이에는 날개와 같은 비늘이 달려 있었다. 노부부는 불길한 징조라 여겼지만 만년에 얻은 자식인지라 금지옥엽으로 열성을 다해 키웠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아이의 나이가 세 살이 되었다. 이때부터 집안에서는 해괴한 일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부부가 농사일을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면 도저히 어린이의 힘으로 움직일 수 없는 물건들이 여기저기 옮겨져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루는 일을 하러가는 척하고 밖으로 나갔다가 몰래 집으로 돌아와서는 문구멍으로 방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랬더니 아이가 빗자루를 가지고 주문을 외워 군사를 만들고, 그 군사들을 호령하면서 병정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이를 본 노부부는 집안이 망할 징조라 여겨 궁리 끝에 아이를 질식시켜 죽이고 말았다. 
  아이가 죽고 나자 멀쩡하던 하늘에서 뇌성번개가 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집 앞에 있는 구라리(제원면 용화리 소재)라는 산에서 백마 한 필이 슬피 울면서 뛰어오더니 지금의 농바우가 있는 곳에서 죽는 것이었다. 그 백마는 장차 아이가 장성해서 군사를 지휘할 때 탈 말이었고, 백마가 죽은 농바우에는 아이가 장수가 되면 입을 갑옷이 들어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은 뒤 소문은 삽시간에 퍼져나가 이웃 마을에 사는 욕심 많은 석수쟁이의 귀에도 흘러들어 갔다. 소문을 들은 석수쟁이는 바위 속의 갑옷을 꺼내 입을 요량으로 산 정상에 있는 농바우에 올라가 징으로 쪼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이 얼추 마무리될 무렵에 날이 저물어 더 이상 작업을 할 수 없었다.
  이튿날, 남의 눈에 뛸세라 부랴부랴 농바우가 있는 산으로 향하던 석수쟁이는 그만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산꼭대기에 있어야 할 농바우가 굴러 떨어져 뒤집힌 채로 산 중턱에 걸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 후로는 주변 마을에 극심한 가뭄이 들어 모두가 굶어 죽을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주민들은 하늘만 원망할 뿐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을 지나던 스님이, “석수쟁이가 농바우를 건드렸기 때문에 하늘이 진노하여 가뭄이 들게 한 것이다. 하늘을 더 노하게 하면 비를 줄 것이다.” 하고 일러주었다. 촌로들이 그 방법을 묻자, “농바우를 흔들어라. 농바우를 끄셔서 하늘을 노하게 하되 반드시 여자들만 가야 한다.”라고 일러주고는 홀연히 사라졌다. 스님의 말대로 마을의 모든 부녀자들이 몰려가서 농바우를 끄시니 과연 응함이 있어 멍석날 같은 비가 쏟아졌다. 그 뒤부터 가뭄이 들면 이웃 마을의 부녀자들은 농바우를 끄시며 비가 내리기를 기원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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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외에도 현재 남아 있는 몇 가지의 농바위 관련 전설들을 모아서 간단히 정리해보면, 위급한 시기에 위대한 인물이 나타나 농바위에 숨겨진 갑옷 등을 꺼내어서 나라를 구하거나 혹은 농바위와 관련된 인물이 개벽의 주체가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전설의 내용을 농암의 농바위와 연결하여 생각해 보면 전봉준이 동학농민운동을 일으키고,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켜서 외세를 물리쳐 조선을 구하고자 힘썼던 그들의 행보와 서로 통하는 면이 있다. 하지만 상제님께서는 그 두 사람은 큰 기운을 쓸 만한 재질이 되지 못한다고 하셨다. 비록 그들의 혈성에 감동한 신명의 도움으로 난을 일으키기는 하였지만 자신들의 뜻을 제대로 펼쳐보지 못하고 오히려 나라를 더욱 위태로운 상황으로 이끄는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
  그렇다면 혹시 농바위에 갈무리되어 있는 기운이 한 나라가 아니라 인류를 살리는 데 쓰일 정도의 큰 기운이어서 전봉준과 최익현이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은 아니었을까? 상제님께서 “…영원한 복록을 얻어 불로불사하며 영원한 선경의 낙을 누릴 것이니 이것이 참 동학이니라.”06고 하셨던 말씀에서 진정한 동학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신 말씀을 보면 어쩌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상제님께서 농암에 묻힌 기운에 대해 자세하게 하신 말씀이 없으셔서 그 정확한 의미를 짐작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마을에 대한 이야기도, 농암에 있는 농바위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도 들을 수 없었다. 다만 다른 지역의 농바위에 깃든 전설들과 전봉준, 최익현의 상황들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어서 어쩌면 그 큰 기운이 농바위에 묻혀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추측을 해본다. 그리고 번개를 맞아 갈라졌다는 농바위의 모습이 신비감을 더 해준다.

 

 

농암에서의 타지 행로
  상제님께서 농암에 머무르시며 공사를 마치시고 그곳을 떠나려고 하셨다. 이때 차경석이 와서 상제님을 배알하고 길이 질어서 한 걸음도 걷기 어려움을 아뢰었다. 이에 상제님께서는 도로신장에게 명을 내리셔서 땅을 굳어지게 하셨다. 그리고 다음 날 새 신발을 신고 차경석을 앞장세우고 정읍으로 가셨다.07
  과연 이때 상제님께서는 어느 경로로 가셨을까? 궁금한 마음에 마을 어르신께 여쭤보며 상제님께서 가셨을 만한 경로를 추정해 보았다. 또한 농암을 중심으로 상제님께서 공사를 행하시기 위해 다니셨던 몇몇 지역으로 통하는 길은 어떻게 되는지 확인해 보았다.

  


▲ 농암 주막터(좌)와 마을회관(우)

  

  농암은 정읍과 피노리, 태인 행단, 굴치를 다니는 길목에 있어서 이곳을 왕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종암리에는 3개 정도의 주막이 있었다. 그중에 농암에 있던 주막은 현재 농암 마을회관 맞은편에 있는 밭에 있었다고 한다. 공사를 행하실 때 주막을 자주 이용하셨던 상제님께서도 이 주막을 한 번쯤은 이용하지 않으셨을까?
  농암에서 정읍으로 갈 때는 북재를 지나 수통목을 거쳐서 다녔다고 한다. 마을 어르신도 어렸을 때 그 길을 자주 넘어 다녔다고 하신다. 그 말씀을 듣고 북재를 바라보았다. 한때는 고개를 넘어 다니는 사람들과 마을 사람들로 꽤 북적거렸을 곳이 이제는 그저 그곳에 마을이 있었다는 흔적만 겨우 찾아 볼 수 있는 곳이 되어 있어 마음이 뭉클하다. 
  전봉준이 잡혔던 피노리를 가기 위해서는 터실을 지나 내동을 거쳐서 다녔다고 한다. 태인 행단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농암에서 피노리를 거쳐 산내면 쪽으로 가는 방법과 다른 하나는 학선리를 지나 굴치를 넘어가는 것이다. 지금은 피노리에서 출발해서 산내면 쪽으로 가는 길 외에는 등산객들이나 다니는 산길이 되었다.

  


▲ 농암에서의 타지 행로 (출처: 다음지도) 

 

  어둑하게 닫힌 하늘과 비와 함께 출발했던 답사. 농암으로 향하는 길은 하늘이 열리기를 바라는 기도와 함께했다. 그렇게 도착한 농암은 커다란 바위들이 마을을 지키고 있었다. 비록 큰 기운이 묻힌 곳이 어디였는지 찾을 수 없었지만 어떠한 힘에도 끄떡없을 것 같은 거대한 농바위가 벼락을 맞아 갈라졌다는 모습은 혹시 이 바위에 그 기운이 묻혀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하게 했다. 상제님께서 농암을 찾으신 지 백여 년이 넘는 오랜 세월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농바위의 모습은 천하를 살리고자 천지공사를 행하시며 이곳을 찾으신 상제님을 기억하고 있노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대순회보》 1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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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쌍치면사무소(http://ssc.sunchang.go.kr), 지명유래.
02 순창향지사, 『순창향지(지명고)』 (순창: 향지사, 2003), p.865.
03 하동군지편찬위원회, 『하동군지 하권』 (하동군: 하동군지편찬위원회, 1996), p.1893.
04 강성복, 『한국세시풍속사전』 (서울: 국립민속박물관, 2010), (http://folkency.nfm.go.kr).
05 금산군지편찬위원회, 『금산군지 2』 (금산군: 금산군지편집위원회, 2011), pp.207~208.
06 권지 1장 11절 참조.
07 권지 1장 13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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