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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동묘와 첨성대 아래의 암벽

교무부    2017.07.02    읽음 : 1975


본문

만동묘와 첨성대 아래의 암벽

 

 

종단역사연구팀 

 

 
▲ 화양동 전경

 

갑오년 三월에 도주께서 안 상익(安商翊) 외 네 명을 대동하고 청천에 가셔서 황극신(皇極神)이 봉안되어 있는 만동묘 유지(遺址)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오셨는데 돌아서실 때에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밤중에 폭풍과 뇌성벽력이 크게 일어 산악이 무너지는 듯하니라. 다음 날에 숭정 황제 어필(崇禎皇帝御筆)의 비례부동(非禮不動)이 새겨 있는 첨성대 아래쪽 암벽의 좌편에 닫혀 있던 석문(石門)이 두 쪽으로 갈라져 내리고 그 안의 옥조빙호(玉藻氷壺)의 네 자와 만력어필(萬曆御筆)의 네 자가 나타났다는 소문이 전하였느니라. (교운 2장 50절) 

 

  『전경』에 조성옥황상제님(도주님)께서 만동묘의 유지(遺址)를 살펴보신 후, 다음날 첨성대 아래의 암벽에 글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의 장소는 괴산군 청천면 화양리(槐山郡靑川面華陽里)이다. 이곳 화양리는 원래 황양목(黃楊木: 회양목)이 많아서 황양동(黃楊洞)이라 불리었다.01 그러다가 효종 때에 송시열 선생이 이곳에 거처하면서 세계 문명의 중심이라는 중화(中華)의 화(華)와 일양래복(一陽來復)02의 양(陽)을 따서 화양동(華陽洞)이라 고쳤다고 한다.03  

  화양리에는 송시열 선생의 유적지가 많다. 대표적으로 화양서원(華陽書院)과 암서재(巖棲齋) 그리고 만동묘 등이 있다. 만동묘(萬東廟)에 모신 인물과 첨성대 아래의 암벽에 새겨진 글들을 보면, 명나라 황제인 신종(神宗, 1563~1620) 및 의종(毅宗, 1611~1644)과 관련이 깊다. 또한 이 곳은 명나라에 대한 대의(大義)를 지키고자 하는 송시열 선생의 의중이 담겨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화양리에 있는 만동묘를 비롯해 화양구곡 중 제5곡인 첨성대 아래의 암벽에 봉인되었던 글이 나타났다는 기이한 사건은 상제님의 공사와 도주님의 공부와도 관련이 있다. 그래서 이 곳의 역사를 알아보고, 이것을 통해 상제님의 공사와 도주님의 공부를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답사를 계획하였다

  우리는 여주에서 괴산군 화양리로 출발하였다. 이곳 화양리로 오는 동안에 펜션들이 천(川)을 따라 줄지어 있었다. 화양리가 유명한 관광지임을 실감하게 하는 광경이었다. 여주에서 출발한 지 한 시간 반쯤 지나서야 화양리 주차장에 도착했다. 

 


▲ 주차장에서 걸어가는 길

 

  주차장에서 내려 1.2km 정도 떨어진 만동묘를 향해 걸어갔다. 가는 길 좌우로는 소박하고 단아한 자태로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한적하면서도 아늑한 길이었다.  

  송시열 선생도 이곳에 와서 “전에 살던 회덕(懷德)에서 이 화양동 계곡으로 들어오면 몸과 마음이 상쾌해 마치 신선의 세계에 온 듯하다”04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의 말처럼 이곳에 오니 몸과 마음이 상쾌하여 걸음이 한결 가벼웠다. 

  주변을 즐기는 사이에 앞에 기와를 얹은 토담 너머로 기와집 여러 채가 보였다. 그 담을 따라 걷다 보니 입구가 나타났다. 입구에 들어서니, 정면으로 양추문(陽秋門)이 보였고, 좌측으로 화양서원의 건물과 편액이 보였다. 그리고 그 외에 다른 건물도 있었다.

 

 

만동묘와 화양서원  

  화양서원은 나중에 둘러보기로 하고 만동묘로 향했다. 만동묘로 가려면 첫 문인 양추문(陽秋門)을 들어서야 했다. 양추문을 들어서기 전, 양쪽으로 건물 세 채가 보였다. 양추문의 좌측에 증반청이 있는데, 제사를 지내기 위해 음식을 준비하던 곳이다, 그리고 우측에는 존사청이 있는데, 이곳은 제향하기 위해 예복(禮服)을 갖추어 입던 곳이다.

 


▲ 만동묘 전경

 

  존사청 건물의 오른쪽에 있는 풍천재(風泉齋)는 제향하거나 참배하러 온 선비가 잠시 머물던 곳이었다. 이 세 곳은 만동묘에 제향, 또는 참배하기 위해 준비하거나 쉴 수 있는 시설들이었다.  

  양추문을 들어서니 가파른 돌계단이 3·5·3·5·9 숫자로 놓여 있었다. 그리고 우측으로는 만동묘정비(萬東廟庭碑)05가 보였다. 돌계단의 폭은 10cm 정도 되어 보였다. 왜 이렇게 계단을 좁게 만들었을까? 조심스럽게 계단에 발을 올려보았으나 바로 서서 오르기는 힘들었다. 나도 모르게 옆으로 서서 오르게 되었다. 마치 바다의 게가 옆으로 가듯이 계단을 이렇게 만든 것은 아마도 황제를 모신 사당이라 무례를 범할 것을 우려하여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으로 보인다. 좁은 계단을 오르기 위해서는 양손으로 두루마기 자락을 감싸고 조심스럽게 올랐을 것이다. 

 


 

  우리는 옛날 선비처럼 옆으로 계단을 올라 만동묘정비가 있는 곳으로 갔다. 만동묘정비는 1747년에 세워졌다. 묘정비를 보니 비문(碑文)의 글씨가 쪼아져 있었다. 1937년 일제가 비문을 징으로 쪼아 훼손하고, 묘정비를 땅속에 파묻었다고 한다. 다행히 1983년에 홍수로 묻혀 있던 비석이 발견되어 옛 자리에 다시 세워졌다. 훼손된 비문은 그 당시 일본의 만행을 보여주고 있었다. 

 


▲ 만동묘정비의 비신(碑身)

 

  우리는 만동묘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넘어질세라 조심조심 계단을 올라갔다. 마지막 문인 성공문 앞에서 잠시 숨을 가다듬은 뒤, 안으로 들어갔다. 만동묘 건물 중앙을 보니 처마 아래에 ‘만동묘(萬東廟)’라고 쓴 편액(扁額)이 걸려 있었다. 만동묘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유언으로 1703년에 그의 제자 권상하(權尙夏, 1641~1721)에 의해 창건되었다. 그리고 그 편액은 1776년 정조가 즉위하여 직접 어필로 사액(賜額)06하였다. 만동묘는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군을 파병해준 명의 황제 신종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그 안을 드려다 보니 위패가 모셔진 제단에 발이 가려져 있어 확인할 수 없었다. 

 

 

▲ 만동묘

 

  만동묘의 ‘만동’은 ‘만절필동(萬折必東)07’의 첫 글자와 끝 글자를 취해 지은 것이다. 이 ‘만절필동’은 『순자(荀子)』의 「유좌(宥坐)」 편에 나온다. 「유좌」에 “일만 번이나 꺾여 흐르지만, 반드시 동쪽으로 흘러가니 의지가 있는 것과 같다(化其萬折必東 似志)”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황하(黃河)강이 흘러가는 그 모습을 군자의 의지나 절개에 비유한 것이다. 그래서  신종과 의종을 모신 만동묘는 명나라에 대한 큰 의리를 지킨다는 송시열 선생의 의지가 담겨 있는 곳이다. 

  다음은 송시열 선생을 제향하는 곳이며 오랜 세월동안 만동묘와 함께해 온 화양서원으로 내려갔다. 양추문을 나와 우측으로 돌아 화양서원이 있는 쪽으로 갔다. 화양서원의 대문이 닫혀 있어 들어가지는 못하고 담 너머로 까치발을 딛고 서서 두루 살펴보았다.

  원래 화양서원은 1695년 화양동 밖 청천면 도원리 첨류정 아래 만경대에 건립되었다. 14년 뒤인 1709년에 화양서원을 만동묘가 있는 곳으로 옮겼다. 이때부터 만동묘와 화양서원은 같이 흥망성쇠(興亡盛衰)하며 변하여 달라져왔다. 화양서원이 옮겨지게 된 배경은 1703년 화양리에 만동묘가 건립되고 유생들이 만동묘까지 관리하면서부터이다. 유생들이 화양서원과 멀리 떨어져 있는 만동묘까지 왕래하며 유지·관리하는 데 불편했기 때문이다. 

 

 

▲ 화양서원

 

  화양서원은 소론과 당파싸움이 있던 시기에 노론의 본거지였다. 숙종 말년, 노론 집권 시기에는 국가가 화양서원에 토지와 노비를 지급하는 유례없는 일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관료와 유생들이 그곳에 토지까지 기부하였다. 그 토지가 삼남(三南: 충청도·전라도·경상도)은 물론 강원도까지 분포되었다고 한다. 

  만동묘 또한 1726년(영조2)에 제사를 받들기 위해 쓰도록 관둔전(官屯田)과 그에 필요한 인력으로 노비를 조정으로부터 제공받았다. 1747년에는 예조(禮曹)08에서 90명을 두어 번갈아 가며 관리하고 수호하게 하였다. 그리고 1844년(현종 10)에는 조정에서 정식으로 관찰사에게 봄과 가을에 한 번씩 제사를 지내게 했다. 이러한 혜택과 함께 국가의 권력을 등에 업으면서 이 두 곳은 날로 권세가 높아졌다. 

  권세가 높아짐에 따라 폐단도 심해져 갔다. 특히 유생들의 집합장소가 된 만동묘는 그 폐단이 서원보다 더 심했다고 한다. 이 두 곳에서 발생한 큰 폐단은 화양서원에서 발행한 화양묵패(華陽墨牌)에 의한 강제 봉납과 복주촌(福酒村)이 형성되면서 발생한 군역면제의 비리였다.

 


 

  화양서원에서 발행한 묵패는 원래 검은 도장을 찍어 발행하는 공적인 편지로 당초 서원의 업무를 유지·관리할 목적으로 사용한 문서에 불과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세력을 업고 관(官)·민(民)을 가리지 않고 만동묘에 제수전 봉납을 강요하는 문서로 변모해 버렸다. 만약 화양서원에서 필요한 요구사항을 관료나 양반 그리고 양민들이 이행하지 않을 경우, 서원으로 잡아 와 사사로이 형벌을 가하는 만행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복주촌은 만동묘와 화양서원의 입구 부근에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천막을 치고 만동묘에서 제향한 후 제주(祭酒)를 양반들에게 제공하고 약간의 헌금을 받는 곳이었다. 차츰 이곳을 찾는 유림이 많아지면서 복주호(戶)가 늘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복주촌이 형성되었다. 이곳에서 마련된 헌금은 서원의 재정에 큰 보탬이 되었다.

  복주촌이 형성된 후, 화양서원에서는 조정에 상소를 올려 복주촌에서 일하는 복주호의 군역을 면제받게 해 주었다. 이 제도를 이용해 몇몇 부유한 양민은 군역을 면제받기 위해 돈을 주고 복주호에 이름을 올렸다. 오히려 이것을 악용해 서원에서 부를 축적해 갔다. 그 결과, 군역을 면제받는 자가 많아졌고, 결국엔 나라에 엄청난 폐단을 낳게 되었다. 

  화양서원과 만동묘의 폐단이 극심해지자, 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두 곳은 동시에 철폐되었다. 철폐된 만동묘의 편액과 지방은 서울 대보단에 있는 경봉각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1870년(고종7)에는 화양서원의 건물이 헐리어 없어졌다.

  그러다가 대원군이 세력을 잃고 지위에서 물러나자, 이항로(李恒老, 1792~1868),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송내희(宋來熙, 1791~1867) 등이 만동묘의 재건을 위해 상소를 올려, 1874년에 고종의 명으로 다시 제향하게 되었다. 제향을 계속해 오다가 1908년 일본군이 의병을 토벌한다는 목적으로 만동묘를 다시 철폐하였고, 만동묘에 딸린 재산을 국가 또는 지방관청에 귀속시켜 버렸다. 같은 시기인 1908년 음력 10월에 상제님께서 황극신을 옮겨오는 공사를 보시고, 그 뒤 음력 10월 19일에 광서제가 붕어하였다. 

  그 후 일제의 감시에도 유림은 비밀리에 명나라 두 황제에게 제향을 계속하였으나, 일본의 강압으로 1940년부터 제사를 지내는 명맥이 영구히 끊어져 사당의 기능을 잃게 되었다. 마침내 1942년에 만동묘의 건물은 총독부에 의해 완전히 철거되고, 빈터만 남게 되었다. 현재 있는 만동묘와 화양서원, 그 외 건물들은 2006년에 복원되었다.

 

 

첨성대 아래의 암벽에 새겨진 글들 

  화양서원과 만동묘의 건물이 철거되고 빈터만 남은 채 세월이 흘렀다. 도주님께서 부산 보수동 도장에 계실 때, 1954(甲午)년 음력 3월에 종도 5명을 대동하고 황극신이 봉안된 만동묘의 유지를 살펴보고 오셨다. 그날 밤중에 폭풍과 뇌성벽력이 크게 일어났고, 다음 날에는 첨성대 아래의 암벽에 석문이 갈라지며 글이 나타났다고 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의 장소인 첨성대로 발걸음을 옮겼다.

  첨성대는 만동묘에서 5분 거리에 있다. 화양 3교에서 첨성대를 보니 큰 바위가 겹겹이 쌓여 있었다. 아이가 블록을 쌓듯, 누군가가 바위를 쌓아놓은 것 같았다. 우리는 첨성대 아래의 암벽에 새겨진 글을 가까이에서 보려고 계곡으로 내려갔다. ‘도명산’ 가는 길을 알려주는 이정표를 따라 조금 걷다 보니 계곡으로 내려가는 길과 산으로 오르는 갈림길이 나왔다. 우리는 조심스레 계곡 쪽으로 내려갔다. 물이 흐르는 소리와 함께 화양천이 바로 보였다. 콸콸, 물이 흐르는 소리에 답답한 마음이 시원하게 뚫렸다. 우리는 천(川)을 따라 글이 새겨진 암벽이 있는 곳으로 갔다. 족히 60여 명은 서서 볼 수 있는 평평한 바위가 보였다. 그 바위에 올라서니 암벽이 한눈에 들어왔다.  

 


▲ 첨성대와 그 주변 경관

 

  그 암벽에는 음각으로 새겨진 ‘대명천지 숭정일월(大明天地 崇禎日月)’09과 ‘비례부동(非禮不動)’의 글이 보였다. 비례부동의 글 옆에는 사각 형태의 홈이 파여 있었다. 이 홈에는 ‘만력어필 옥조빙호(萬曆御筆 玉藻氷壺)’라는 글이 새겨진 판이 끼워져 있었다고 전해온다. 

 


 

  ‘대명천지 숭정일월’은 송시열 선생의 존명대의(尊明大義) 하는 의미가 들어있는 글이다. 송시열 선생의 글 위에 ‘숭정황제어필 비례부동(崇禎皇帝御筆 非禮不動)’10이 새겨져 있었다. 이 글은 명나라의 숭정황제(崇禎皇帝: 의종)가 쓴 비례부동이라는 뜻이다. 숙종 때 송시열 선생의 부탁으로 판서 민정중(閔鼎重, 1628~1692)이 북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구해온 것이다. 민정중에게 이 글을 받은 송시열은 첨성대 아래의 암벽에 음각으로 새겨 놓았다. 

  비례부동의 글 옆에 파여 있는 사각 홈에 대한 이야기로 『전경』에 1954년 3월에 도주님께서 만동묘 유지를 살펴보고 돌아가신 후, 다음 날 비례부동의 글 옆에 석문이 갈라지면서 ‘만력어필 옥조빙호(萬曆御筆 玉藻氷壺)’의 글이 나타났다고 한다.11 이 글은 명나라 만력제(萬曆帝: 신종)가 쓴 옥조빙호라는 의미이다.  

  옥조빙호의 어원을 보면, 옥조에서 옥(玉)은 면류관 앞뒤의 유(旒)12에 늘어뜨린 옥이며, 조(藻)는 색실을 꼬아서 옥을 꿰는 데 쓰는 끈이다. 따라서 옥조는 비유적으로 쓰여 임금을 가리킨다. 그리고 빙호는 본래 얼음을 담는 옥 항아리이다. 그래서 옥조빙호는 임금의 마음이 차고 맑아야 한다13는 정치 철학의 의미가 담겨 있다. 

  ‘옥조빙호’라고 새겨진 석판에 대해 화양동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글이 나타난 이후 몇 년간은 계속 암벽에 붙어 있었다”고 한다. 원래 글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석문으로 봉인이 되어 있어서 어떤 사람도 알지 못했다. 석문이 갈라지고 글이 나타났을 때, 우인규라는 사람이 탁본14한 것이 현재까지 전해 오고 있다. 안타깝게도 ‘만력어필 옥조빙호(萬曆御筆 玉藻氷壺)’가 새겨진 석판은 누군가에 의해 사라지고 없다.

 

  만동묘가 1703년에 건립되면서 200여 년(1703~1908) 동안 조선에서 명나라 황제 신종과 의종에게 극진히 제향(祭享)해 왔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상제님께서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 오게 될 인연은 만동묘를 세움으로부터 시작되었느니라15”라고 하신 말씀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이어 도주님께서 1954년 음력 3월에 황극신이 봉안된 만동묘 유지를 두루 살펴보고 가신 후, 다음 날 갑자기 첨성대 아래의 암벽에 석문이 갈라지며 ‘만력어필 옥조빙호(萬曆御筆 玉藻氷壺)’의 글이 나타났다는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지금은 암벽에 ‘옥조빙호’의 글은 볼 수 없고, 흔적만 남아있다. 그 흔적이 남아 있는 파진 사각 홈을 보며 도주님께서 황극신이 봉안된 만동묘 유지를 살피시는 모습을 생각해 본다. 

 

 

▲ 첨성대 아래의 암벽에 새겨진 글씨

《대순회보》 1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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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한글 학회, 『한국 지명 총람』 3 충북편 (서울: 한글 학회, 1989), p.74.  

02 음(陰)이 끝나고 양(陽)이 돌아온다는 뜻으로 음력 12월 또는 11월 동지를 일컫는 말이다. 또한 겨울이 가고 봄이 온다는 뜻으로 궂은 일이 걷혀지고 좋은 일이 돌아옴을 말하기도 한다.

03 탐방지원센터와 제2곡 운염담 사이에 위치한 ‘왜 화양동이라 불릴까요?’라는 제목의 안내문 참조.

04 권상하, 『한수재집』, 「암서재중수기(巖棲齋重修記)」. 

05 이 비석은 이재(李縡, 1680~1746)가 비문을 짓고, 유척기(俞拓基, 1691~1767)가 전액(篆額)을 썼는데,  글씨체는 안진경(顏眞卿, 709~785)의 글자를 찾아 모아서 세워졌다.

06 임금이 사당(祠堂), 서원(書院), 누문(樓門) 따위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던 일을 말한다.

07 경기도 가평군 조종면 대보리에 있는 조종암(朝宗巖)에 선조의 어필인 ‘만절필동 재조번방(萬折必東再造藩邦)’이 새겨져있다.  ‘일만 번 꺾여도 반드시 동녁으로 흐르거니 명나라 군대가 왜적을 물리치고 우리나라를 다시 찾아 주었네’라는 뜻이다. 조종암에 새겨진 만절필동을 모본하여 화양동 첨성대에 새겨놓았다.

08 조선 시대에 육조 가운데 예악, 제사, 연향, 조빙, 학교, 과거 따위에 대한 일을 맡아보던 관서이다.

09 大明天地 崇禎日月, ‘명나라의 하늘과 땅, 숭정의 해와 달’이라는 뜻이다.

10 숭정황제[명의 마지막 황제 의종]가 쓴 글씨로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11 교운 2장 50절 참조.

12 유(旒)는 색실로 꼬아 놓은 끈에 구슬[옥(玉)]을 꿰고 면류관 꼭대기의 앞뒤로 늘어뜨린 것으로 면류관의 끈을 일컫는 말이다.

13 이상주, 「일제강점기 옥조빙호(玉藻氷壺)·만동묘비(萬東廟碑) 탁본에 관한 고찰」 《괴향문화》 20 (2012), p.102 참조.

14 옥조빙호를 새긴 석판이 사라지기 전, 유학자이자 교육자인 우인규(禹仁圭, 1896~1967)라는 사람이 탁본했다고 한다. 위의 탁본사진은 2012년 김근수(괴산향토사연구회장)씨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 

15 공사 3장 22절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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