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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 행단에 있는 시천교인의 무덤

교무부    2017.08.17    읽음 : 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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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단역사연구팀

 

  그 이튿날 아침에 공신이 술과 고기 값으로 서른석 냥을 몽땅 갚은 뒤에 상제께서 공신을 데리고 행단을 떠나 솔밭 속으로 지나시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이놈이 여기에 있도다” 하시는도다. 공신이 놀라서 옆을 보니 동자석(童子石)만이 서 있도다. 그곳에서 원평으로 행하시는 도중에 공신에게 “훗날 보라. 일본 군사가 그곳에 매복하였다가 여러 천 명을 상하게 할 곳이니라. 그러나 글자 한 자에 하나씩밖에 죽지 않게 하였으니 저희들이 알면 나를 은인으로 여기련만 누가 능히 알리요”라고 상제께서 말씀하셨도다. (행록 3장 18절)

 


▲ 시천교인 무덤

 

  정읍에서 순창 방면으로 가기 위해 태인 행단을 지날 때면 화경산(火鏡山) 산비탈에 늘어선 회색의 대형 송수관이 눈에 들어온다. 이 송수관은 상제님께서 전북 칠읍의 가뭄을 없애기 위해 운암강물을 만경강으로 돌리는 공사01를 보신 후 건설된 섬진강 수력발전소의 수관이다. 운암강의 물을 만경강으로 돌리는 공사와 관련하여 섬진강 수력발전소 주변을 답사할 때면 들르는 곳이 있다. 그곳은 섬진강 수력발전소에서 남쪽으로 200여 미터 지점, 그러니까 순창으로 넘어가는 구절재 왼쪽에 있는 시천교인들의 무덤이다. 

 『전경』에 기록된 이들 시천교인의 무덤과 관련된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문공신과 함께 피노리를 떠나신 상제님께서는 태인 행단 주막에 도착하셔서 어떤 공사를 행하셨다. 상제님께서는 삶은 돼지고기를 그릇에 담아 뜰 가운데 두고, 물을 붓지 않은 새 독의 술을 걸러서 마루 위에 놓게 하시고, 글 한 편을 써서 주인을 시켜 불사르게 하여 공사를 보셨다. 그러고 나서 술과 고기를 그곳 주막에 모여서 공사를 참관한 사람들과 나누어 잡수셨다. 이때 상제님께서 큰 소리로 “무엇을 더 구하느뇨. 글자 한 자에 하나씩만 찾아가면 족하리라(행록 3장 17절)”고 외치셨다.02

  이 공사를 마치신 상제님께서는 문공신을 데리고 행단을 출발하여 원평으로 향하셨는데, 가시는 도중에 어느 솔밭을 지나시면서 공신에게 말씀하셨다. “훗날 보라. 일본 군사가 그곳에 매복하였다가 여러 천 명을 상하게 할 곳이니라. 그러나 글자 한 자에 하나씩밖에 죽지 않게 하였으니 저희들이 알면 나를 은인으로 여기련만 누가 능히 알리요(행록 3장 16절)”라고 말씀하시면서 원평으로 가셨다. 상제님께서 1907년 10월에 행하신 이 공사는 태인 행단에 있는 시천교인들의 무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

  시천교(侍天敎)는 동학의 분파로 1906년 이용구(李容九, 1868~1912)가 세운 교단이다. 이용구는 일본에 망명 중이던 손병희(孫秉熙, 1861~1922))의 명령에 따라 1904년 2월 민족주의 개화운동단체인 진보회(進步會)를 결성하였다. 한편, 친일 성향이 있는 송병준(宋秉畯, 1858~1925)은 1904년 8월 18일 독립협회의 회원들을 포섭하여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1904년 8월 20일 그 단체의 명칭을 일진회(一進會)로 개정하였다. 이용구는 같은 해 12월에 송병준이 만든 일진회에 합류하여 친일활동에 앞장섰다. 이용구가 친일활동을 하면서 손병희와 마찰을 빚게 되자 천도교를 나와 1906년 서울 견지동에 시천교를 세웠다. 교단의 명칭인 시천교는 동학의 경전에 있는 문구인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에서 따왔다.  

  시천교인들이 태인 행단에 묻히게 된 것은 상제님께서 행단 주막에서 공사를 보신 이듬해인 1908(무신)년의 일이다. 이들은 전라북도 순창군 구암면 낙양동에 거주하던 33인의 시천교 교인들이다. 시천교인들은 만경군 옥동지방 교당에 봉안하는 동학의 2대 교주 최시형 선생의 영정을 맞이하기 위해 가던 중 날이 저물어 태인 행단 주막에 숙박하게 되었다. 이들은 주막집 주인에게 근처 명천리에 있는 일본 수비대에 가서 여행의 목적을 신고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주막집 주인은 신고하러 가서는 어떤 이유에선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일본 수비대는 시천교인들을 의병으로 단정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잠든 깊은 밤중에 행단 주막에 출동하여 주막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고 칼을 휘둘러 33명 중 21명의 교인을 숨지게 하였다.03

  시천교인들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할 당시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과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하려 하였다. 일본은 이것을 이유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고, 정미칠조약을 체결하는 한편 군대를 강제로 해산하였다. 이에 불만을 품은 민중들과 해산 군인 중 일부가 의병운동에 가담함으로써 의병은 더욱 조직화되었고 그 규모와 성격이 점차 전쟁의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이 때문에 일본은 의병의 활동과 관련하여 촉각을 곤두세우고 사람들의 모임이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이라도 의병과 연관이 있거나 의심이 가는 사람은 마구 죽이거나 감옥에 보냈다. 

  이때 주막에서 숨진 21명의 시신은 수천 명의 조문객이 운집한 가운데 주막 앞에 있는 행단 구절재 아래에 안장되었다. 무덤 앞에 세워진 비석에는 당시 행단 주막에서 숨진 21명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상제님께서 주막에서 공사를 마치고 큰소리로 “글자 한 자에 하나씩만 찾아 가면 족하리라”고 외치셨는데, 여기서 말하는 글자는 기도주의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지기금지원위대강’ 의 21자라는 해석이 있다. 

  시천교인 21명의 무고한 희생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다. 하지만 이 사건이 발생할 당시 시천교인의 수가 4~5만여 명 정도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제님의 이 공사가 아니었더라면 더 많은 희생이 발생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상제님께서는 태인 행단 주막에서 삶은 돼지고기와 새로 담은 술을 준비하고 글을 써서 불사르는 공사로써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하셨다.

《대순회보》 1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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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공사 1장 28절 참조

02 행록 3장 17절 참조

03 김기선, 『김구암과 동학』 (파주: 정민사, 2010), pp.195~198;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 『한국 일진회 역사』, 권6 (1911년). p.35;「대한매일신보」 (1908. 10.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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