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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 세천마을 일대 전경
연구원 이정만
도주께서 계해년 정월에 함안 회문리를 순회하고 그곳에 잠시 머무시다가 밀양 종남산(密陽終南山) 세천동(洗川洞) 김 병문(金炳文)의 집에 가셨도다. 이때 배 문걸이 도주를 모시고 따르니라. 그곳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많은 종이에 글을 쓰셔서 둔 도수라 하시고 석 달 동안 행하셨는데 그 종이가 심한 바람에도 날리지 않았도다. (교운 2장 25절)
날로 도주를 흠모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므로 태인에 갑자년 四월에 도장이 마련되었도다. 도주께서 밀양 종남산 세천에서 보시던 둔 도수를 마치고 도장에 돌아와 치성을 올리시니라. 치성을 끝내고 칼을 자루에서 뽑아들고 육정신을 외우시면서 보두법을 행하고 종남산 세천에서 공부할 때 써놓았던 여러 글종이를 불사르셨도다. (교운 2장 29절)
도주님께서는 1909년 봉천명(奉天命)하신 이후부터 1958년 부산 감천도장(甘川道場)에서 화천(化天)하실 때까지 50년 동안, 구천상제님께서 짜놓으신 천지도수(天地度數)를 풀어나가는 공부를 쉼 없이 하셨다. 밀양 세천에서 행하신 둔도수 공부도 이 중의 하나였다. 둔도수 공부는 계해(1923)년 정월에 밀양 세천 김병문의 집에서의 석 달 동안 공부로 시작되었다.
도주님께서는 둔도수 공부를 하시는 과정에서도 회문리에서 전교(傳敎)를 내리시는가 하면 청도 유천 박동락의 집에서 단도수 공부, 청도 적천사 도솔암에서 단도수 공부 등을 하셨다. 그리고 갑자(1924)년 4월 정읍 태인 도창현(井邑 泰仁 道昌峴)에 무극도장(无極道場) 터가 마련될 무렵에 둔도수 공부를 마치셨다.
김병문 종도 집은 이러한 둔도수가 행해진 곳일 뿐만 아니라, 도주님께서 무오(1918)년 10월 황새마을로 이사한 이후 한때 밀양 세천 일대에서 포덕 활동이 가장 활발히 이루어진 곳이기도 했다. 이렇듯 밀양 세천과 김병문 종도 집은 우리 종단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그동안 조사된 관련 자료를 검토한 후, 도주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답사를 떠났다.
▲ 마을 입구에 있는 세천저수지
여주에서 출발하여 이른 아침 공기를 가르며 달린 지 3시간 남짓, 밀양 세천으로 들어가는 남밀양 나들목에 이르렀다. 요금소를 지나자마자 저 멀리 눈앞에 굽이굽이 펼쳐진 산들과 마주했다. 그중 가장 높은 봉우리가 밀양 종남산(終南山)의 주봉(主峰)이다. 종남산은 도주님께서 갑자(1924)년 둔도수 공부를 마치시고, 그해 여름부터 다섯 달 동안 폐백도수(幣帛度數)01를 보셨던 영성정(靈聖亭)02이 있던 곳이기도 하다.
10여 분쯤 더 가노라니 도로 왼쪽으로 버스정류장이 있는데, 바로 옆에 ‘세천마을’이라고 쓰인 표지석이 세워져 있었다. 김병문 종도 집이 있는 마을 입구였다. 표지석 바로 뒤쪽에는 조그마한 저수지가 있었다. 이름은 ‘세천저수지’인데, 1945년에 만들어졌다.03 도주님께서 둔도수 공부를 위해 이 지역을 오고 가실 때는 없던 것이다.
▲ 경남 밀양시 상남면 동산리세천마을
▲ 김병문 집 본채(복원 전)
표지석을 지나 조금 더 가니 도로에서 왼쪽으로 조금 떨어진 산자락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 중심부 조금 위쪽에 김병문 종도 집이 있다. 여기는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경남 밀양시 상남면(上南面) 동산리(東山里)에 속해 있다. 원래는 세천리에 속해 있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이웃한 동산(東山)마을을 합쳐 동산리가 생기면서부터 동산리에 속하게 되었다. 세천은 다시 상세천(上洗川, 웃마), 중세천(中洗川, 중마), 하세천(下洗川, 매나골) 3개의 자연마을로 나뉜다. 김병문 종도 집이 있는 곳은 상세천으로 세천의 본동이다.
세천이란 이름은 조선 숙종 때 이 마을에 살만한 터를 정하여 세거지(世居地)04로 삼은 광산(光山) 김씨에서 연유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곳에 처음으로 터를 잡은 쌍괴정(雙槐亭) 김시성(金時省)은 벼슬을 버리고 은퇴(隱退)하자 성자(姓字)인 김(金)을 깨끗이 씻어 밝고 맑은 마음으로 여생을 보낸다는 뜻으로 흐르는 내의 이름을 세천(洗川)이라 했다고 한다. 숙종이 왕으로 즉위한 해가 1674년이니, 광산 김씨가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300년도 훨씬 더 된 일이리라.05
김병문 종도 집 마당에 들어서니 본채와 별채 건물 등이 있었다. 자손들 얘기로는, 어릴 적 이곳에 부모님과 같이 살 때는 본채 좌우로 건물이 더 있었다고 한다. 본채 건물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는 디딜 방앗간, 소 마굿간, 변소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왼쪽으로는 사랑채 2칸과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집 주위를 둘러보다 보니 본채 옆으로 작은 돌절구통이 눈에 띄었다. 알아보니 예전 디딜방앗간에서 쓰던 것이라고 한다. 도주님께서 이곳에서 공부하실 때도 이 절구통은 많은 일을 묵묵히 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당 앞에는 제법 나이가 들어 보이는 감나무가 있었다. 자손들 말에 의하면 도주님께서 공부하실 때 이 자리에 감나무를 심으셨다고 한다.
▲ 디딜방앗간에 있던 돌절구통
▲ 마당에 있는 두 그루의 감나무
도주님께서 이곳에서 둔도수 공부를 하시기 위해 처음 오신 때는 계해(1923)년 정월이었다. 그때 도주님을 시봉(侍奉)하기 위해 동행한 사람은 19살의 배문걸(1905~2004) 종도였다. 그는 함안군 칠서면 구포리 사람으로, 도주님의 큰 숙부인 조용의 씨의 맏사위이기도 했다. 1921년에 혼인했고06 『전경』에 계해(1923)년 둔도수 공부 때 처음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배문걸 종도가 도주님을 시봉(侍奉)하기 시작했던 때는 이 공부 무렵부터가 아닐까 짐작된다. 이때 시작된 공부는 먼저 석 달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행해졌다. 그리고 1년여 후인 1924년 4월경 무극도장 터가 마련될 무렵에 마쳐졌다.
둔도수 공부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도 도주님께서는 여러 가지 무극도 창도를 위한 준비 및 도수에 의한 공부도 하셨다. 먼저, 둔도수 공부를 시작하시고 얼마 후 전교(傳敎)의 임무를 담당할 주선원(周旋元)과 주선원보(周旋元補)란 직책을 마련하셨고, 계해(1923)년 6월 23일에는 전교를 내리셨다.07
주선원과 주선원보란 직책은 1926년경 작성된 『무극대도교개황』08이란 문서의 내용에서도 발견된다. 그 문서 안에 기록된 무극도의 조직체계를 보면, 본소에는 주선원(周旋元), 주선원보(周旋元補), 찰리(察理), 순동(巡動), 종리(從理) 등이 있었고, 지방에는 연락(聯絡), 차연락(次聯絡), 부분(府分), 포덕(布德) 등이 있었다. 이러한 조직체계에서 주선원과 주선원보는 도주님 다음으로 무극도 최고 위치에 있는 직책이었다. 그러므로 도주님께서는 둔도수 공부가 이루어질 무렵에 이미 무극도를 창도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계셨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계해(1923)년 6월 24일 구천상제님 화천치성 이후부터 계해(1923)년 9월 사이에 경북 청도 유천의 박동락의 집에서 단도수를 행하셨다. 이 공부는 진인보두법(眞人步斗法)으로 공부를 하셨고, 이때 시종을 들은 사람은 둔도수 공부와 같이 배문걸 종도였다.
그리고 계해(1923)년 10월에는 경북 청도 적천사(磧川寺) 도솔암에서 단도수 공부를 하셨다. 이 공부는 넉 달 동안 계속되었는데 공부시간은 저녁 일곱 시부터 다음 날 아침 여섯 시로 정하여 일분일초도 어김없이 계속되었다. 참으로 보통 인간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공부의 연속이었다.
둔도수 공부가 이루어졌던 밀양 세천은 도주님께서 안면도에서 황새마을로 이사 온 이후, 포덕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지역 중의 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한 근거는 1925년경 전북 도청에서 작성한 『무극대도교개황』문서 내용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 내용 가운데에는 무극도에서 지방 간부 중의 하나였던 연락(連絡)09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던 사람이 밀양 세천리에 김병문(金炳文), 김규만(金圭萬), 강환홍(姜桓洪) 3명이나 발견된다. 연락이라는 직책은 중앙본부와 지방 도인간의 연락 사무를 주관하던 직책으로, 2개의 부분(府分)10에서 최대 125부분까지 책임지고 이끌어 나가는 자리였다. 세천리의 3명의 도인 즉 김병문, 김규만, 강환홍은 각각 15명의 부분원, 7명의 부분원, 4명의 부분원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러므로 세천리 지역에서는 김병문 종도가 가장 많은 포덕 사업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무극대도교개황』 문서와 함께 밀양 세천 부근에서는 김병문 종도 집에서 주변 신도들이 주로 모였다고 하는 자손들의 증언을 고려해 보면, 한때 김병문 종도 집이 밀양 세천 일대에서 포덕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번에 답사한 밀양 세천 지역은 무극도 창도 시기 전후로 포덕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졌던 지역이었다. 그중에서도 김병문 종도 집은 밀양 세천 일대에서 포덕 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도주님께서는 이러한 김병문 종도 집에서 계해(1923)년 정월부터 갑자(1924)년 4월경 무극도장 터를 마련할 무렵까지 1년여에 걸쳐서 둔도수 공부를 하셨다. 또한, 공부를 마치고 무극도장 터에 돌아와 치성을 모신 후에 둔도수 공부 때에 써 놓았던 여러 글 종이를 그 자리에서 불사르셨다. 그리고 이듬해인 1925년에 무극도를 창도하셨다.
《대순회보》 2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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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곽춘근, 「상생의 길: 폐백 도수에 대한 고찰」, 《대순회보》 191호 (2017), pp.92-112 참조.
02 종단역사연구팀, 「전경지명답사기: 밀양 종남산 영성정(靈聖亭」, 《대순회보》 192호 (2017), pp.22-31 참조.
03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 9(경남 Ⅱ)』, p.52.
04 조상 대대로 사는 고장
05 밀양문화원, 『상남면ㆍ부북면 마을지 자료집』 (2012), p.37.
06 「서산공 묘갈명」, 『咸安趙氏斗巖公派世譜卷之一(함안조씨두암공파세보권지일)』, p.186.
07 교운 2장 26절 참조.
08 일제강점기에 전라북도 도청에 의해 만들어진 내부 보고용 비밀 문건으로 대략 1925년에 작성이 완료된 것으로 판단된다. 이 문서의 전반부 일본어 자료는 그 어투나 정확성으로 볼 때 탐문 및 정보원에 의한 정보 수집을 통해 작성되었다고 추측된다. 하지만 후반부 한국어 및 한자 자료의 경우 그 성격상 종교 단체가 내부적으로 정리하여 의무적으로 관공서에 제출하는 문서라고 추정된다. 따라서 일본어로 기재된 전반부는 일부 사실이 부정확하고 악의적으로 왜곡되어 있지만 무극도 내부에서 만들어져 외부로 유출되었다고 보여지는 후반부의 자료는 1925년 당시의 무극도 관련 사실에 대한 상당히 정확한 정보가 기재되어 있어 연구 자료로서는 중요한 문서라 할 수 있다. (대순종교문화연구소에서 작성한 『무극대도교개황』 번역 자료 참조)
09 차연락(次聯絡)과 부분(府分)과 포덕(布德)을 관리하며 본소(本所)와 지방 도인의 연락(聯絡) 사무(事務)를 봄. 단, 2개 부분(府分) 이상으로부터 125부분(府分)까지 이끌어가는 사람을 연락이라 칭함.
10 부분은 도인 120명을 관리하는 직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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