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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박정욱
『전경』에 기록된 상제님의 정읍 행적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대흥리는 차경석(車京石, 1880~1936) 종도가 살았던 곳이다. 정읍 대흥리는 차경석을 통해 동학신명들의 해원 공사가 펼쳐지는 곳이다.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때 자칭 몇백만 신도를 자랑한 보천교의 흥망성쇠를 기억하고 있는 정읍 대흥리와 차경석에 대해 살펴보고자 길을 나섰다.
지명의 변천
‘정읍(井邑)’이란 지명은 삼국시대 때 백제의 ‘정촌현(井村縣)’이라는 지명에서 비롯되었다. ‘정촌현’은 현 접지리[대흥리]의 동쪽[정읍시 신정동(新井洞)]에 있는 정해(井海)마을 지역으로 ‘정해’는 ‘샘바다’를 의미한다. 예부터 마을에는 정(井)자 형태인 ‘큰새암’이라는 우물이 있었는데, 샘물이 바다처럼 끝없이 솟아난다고 해서 그 이름이 유래하였다. 풍수설(風水說)에 의하면 정해마을의 지형(地形)이 배[舟]의 형태라, 가정에서 따로 우물을 파면 배가 침몰한다고 하여 파지 않았다고 한다.
정읍에 속한 대흥리(大興里)는 1789년에 조사된 『호구총수』에 의하면 ‘정읍군 서일면 대흥촌리’로 쓰이다가, 1897년에 서일면 중흥리(中興里), 진목리(眞木里), 신평리(新坪里)로 나뉘어졌다.01 특히 참나무가 많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진목리’에는 차경석이 살고 있었다. 그러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서일면 중흥리, 진목리, 신평리가 ‘입암면 접지리’에 편입되었다. 그런데 1920년대 이후 마을 사람들은 ‘접지리’보다 ‘대흥리’로 더 불렀다고 한다. 그 이유는 차경석이 만든 보천교로 인해 지방 교인들이 이주해 오게 되면서 몇 가구 살지 않았던 마을이 크게 번성하였기 때문이다.02
대흥리는 현재 정읍시 입암면 접지리 접지마을에 속해 있다. 대흥리에서 북서쪽으로는 비룡촌과 피란동이, 남서쪽으로는 천원리가, 동쪽으로는 천원천과 접지리 너머로 정해마을이 있다. 특히 천원리는 삼국시대 때 천원역(川原驛)과 천원원(川原院)이 있었던 곳으로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예전에는 천원장(川原場)과 일제 강점기에는 헌병출장소도 있었다.
정읍 대흥리와 차경석의 집
고속도로에서 정읍 IC로 들어온 후, 정읍천변 도로를 따라가니 좌측 멀리에서 정읍역이 눈에 들어왔다. 1920년대 차경석이 만든 보천교로 인해 정읍역에서 내린 교인들이 대흥리 본소로 가기 위해 지금의 시기동 정읍천에 위치한 정주교(井州橋)를 건넜다고 한다.03 물론 지금은 새로운 길이 생겨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지만, 당시 교인들이 가던 길을 생각하며 정주교로 향했다. 잠시 후 보천교 교인들이 건넜다는 정주교를 지나 대흥리 방향으로 몇 분 이동하니 저 멀리 대흥리와 주변의 산세가 보이기 시작했다. 대흥리 너머 뒤편으로는 방장산(方丈山)과 입암산(笠岩山) 그리고 내장산(內藏山)이, 우측으로는 비룡산(飛龍山)과 국사봉(國師峰)이 대흥리를 둘러싸고 있었다.
▲ 대흥리 주변 전경
특히 입암산은 정상에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의 모습이 마치 사람[임금]이 머리에 갓[관]을 쓰고 있는 듯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차경석의 집에 교단이 세워진 이후에 유행했던 『정감록』의 “母岳山下에 金佛이 能言하니 天冠山下에 琴人이 奉璽라”는 구절을 ‘모악산 아래에 금산사 미륵불의 화신(化身) 강증산이 창교(創敎)함으로써 천관산 아래에 금인(琴人)이 옥새(玉璽)를 받들어 제위(帝位)에 등극(登極)한다’는 것으로 해석하여 ‘천관산’은 ‘입암산’, ‘금인’은 ‘차경석’으로 보기도 하였다.04
지방도로를 따라 조금 더 내려가니 도로 우측으로 차경석의 바로 아래 동생인 차윤경이 살았던 비룡촌[현 신마석]과 피란동 안씨 재실이 있는 비룡산이 눈에 들어왔다. 비룡촌은 상제님께서 차공숙을 통해 팔괘를 맡기는 공사를 보신 곳이며,05 피란동 순흥안씨 재실은 고갈된 천하의 물기운을 돌리는 공사를 보신 곳이기도 하다.06 도로 좌측으로는 천원천을 끼고 있는 접지마을, 대흥리가 보였다.
현재 접지마을은 동부·서부·남부·중부로 나뉘는데, 이것은 대흥리에 보천교가 생기면서 나눠진 것이라 한다. 비룡촌을 지나 도로에서 비룡산 쪽으로는 접지서부마을이, 천원천 쪽으로는 접지동부·중부·남부마을이 있다.
▲ 차경석의 집 전경
차경석의 집은 접지동부 쪽으로 현재 보천교중앙본소와 같이 자리하고 있다. 마을 입구에 위치한 보천교중앙본소 이정표에 따라 길을 가다 보니 작은 사거리에서 담장 너머로 오래 전에 지어진 건물 몇 채가 머리를 내밀고 있었다. 담장 안으로 차경석이 만든 보천교중앙본소 성전(聖殿)을 비롯하여 차경석이 주로 거주했다는 정침(正寢)이 눈에 들어왔다. 정침은 원래 초가(草家)였다고 하며, 정침을 중심으로 뒤로는 후당(後堂), 오른쪽으로는 아래 사랑채와 교단의 사무를 보았던 총정원(總正院) 건물 등이 있다.
차경석의 집안은 원래 타지에서 살다가 조부 때부터 현 정읍시 입암면 마석리 신마석[옛 비룡촌]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그러다가 현 입암면 접지리 접지동부로 삶의 터전을 옮긴 것은 아버지 차치구(1851~1894) 때부터였다.07 차치구는 동학농민혁명 때 전봉준의 부탁으로 정읍 동학접주로 활약하다가 밀고로 붙잡혀 참혹한 형벌로 사망한다. 그런 부친의 영향으로 차경석 또한 동학에 일찍 몸을 담고 있었다. 상제님을 좇기 전 차경석은 일진회 회원으로 활동하였으나 뜻이 맞지 않아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던 중이었다.
차경석을 통한 공사의 내용
차경석은 상제님을 따른 이후, 상제님의 천지공사에 봉행하며 많은 행적을 남긴 종도이다. 『전경』의 내용을 토대로 차경석의 행적과 상제님께서 차경석을 통해 본 공사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차경석이 상제님을 처음 뵙게 된 것은 정미(1907)년 5월 17일경 소송관계로 전주로 가던 길에 점심을 먹으려고 용암리 주막[현 김제시 금산면 쌍용리]에 들리면서부터이다. 차경석은 상제님을 배알하고 그 비범하심과 위대하심에 좇게 되었다.08 상제님께서는 일진회가 활동한 후부터 의관을 버리고 대삿갓을 쓰고 계셨다. 그런데 차경석을 만나신 후부터 의관을 하셨으며, 머리와 수염을 자른 차경석에게 “망건(網巾)을 준비하고 머리와 수염을 기르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그리하여 차경석은 머리와 수염을 길렀는데, 이후 보천교의 교주가 되어서도 수염과 머리를 기르며 망건을 착용하였다고 한다.09
정미(1907)년 6월 초,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을 종도로 받아들이시고 그의 집으로 가시자는 간곡한 요청에 어쩔 수 없이 승낙하시며 정읍 대흥리로 향하셨다.10 정읍으로 가는 도중 상제님께서는 원평 주막에 들러 지나가는 행인을 불러 술을 사서 권하고 “이 길이 남조선 뱃길이라. 짐을 많이 실어야 떠나리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30리(里) 되는 곳에 이르러 “대진(大陣)은 일행 30리(里)라” 하셨다. 이에 차경석은 친구 박공우가 머물고 있던 고부 송월리(松月里: 현 정읍시 정우면 장순리 송내마을) 최씨 재실로 상제님을 모셨다. 이때 상제님께서는 공우와 경석에게 “이제 만날 사람 만났으니 통정신(通精神)이 나오노라”, “나를 좇는 자는 영원한 복록을 얻어 불로불사하며 영원한 선경의 낙을 누릴 것이니 이것이 참 동학이니라. 동학 신자 간에 대선생(大先生)이 갱생하리라고 전하니 이는 대선생이 다시 나리라는 말이니 내가 곧 대선생이로다”고 하셨다.11 이후 동학을 했었던 박공우도 상제님을 좇게 되었다.
정미(1907)년 11월 3일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의 집에서 경석의 이종매 고판례(1880~1935)를 수부(首婦)로 맞이하셨다.12 그리고 12월, 고부 와룡리에 머무시며 후천 음양 도수를 보셨다. 이때 열두 점을 찍은 경석에게 그 이유를 물었는데, 경석은 “열두 제국에 하나씩 아내를 두어야 만족하겠나이다”고 대답하였다.13 그러고 나서 상제님께서는 역도(逆度)를 조정하는 공사에 착수하셨는데, 경석을 대흥리로 돌려보내고 종도들에게 “경석은 성(誠) 경(敬) 신(信)이 지극하여 달리 써 볼까 하였더니 스스로 청하는 일이니 할 수 없도다” 하셨다. 그리고 “본래 동학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였음은 후천 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음은 각기 왕후장상(王侯將相)을 바라다가 소원을 이룩하지 못하고 끌려가서 죽은 자가 수만 명이라. 원한이 창천하였으니 그 신명들을 그대로 두면 후천에는 역도(逆度)에 걸려 정사가 어지러워지겠으므로 그 신명들의 해원 두목을 정하려는 중인데 경석이 12제국을 말하니 이는 자청함이니라. 그 부친이 동학의 중진으로 잡혀 죽었고 저도 또한 동학 총대를 하였으므로 이제부터 동학 신명들을 모두 경석에게 붙여 보냈으니 이 자리로부터 왕후장상(王侯將相)의 해원이 되리라” 하셨다.14
무신(1908)년 6월,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의 집 서쪽 벽에 24장과 28장을 써 붙이고 박공우의 왼팔을 잡고 “만국 대장(萬國大將) 박공우(朴公又)”라고 음성을 높여 부르셨다. 이후에 공우가 어디에 떠나려면 문밖에서 방포성(放砲聲)이 갑자기 울리곤 하였다.15
무신(1908)년 11월 28일에는 상제님께서 차경석의 집에 머무시며 포정소(布政所)를 정하는 공사를 보셨다.16 그리고 12월에는 상제님께서 차경석의 집에서 무당 도수라 하시며 고부인(高夫人)에게 춤을 추게 하시고 친히 장고를 치시며 “이것이 천지(天地) 굿이니라” 하신 후, “너는 천하 일등 무당이요 나는 천하 일등 재인이라. 이 당 저 당 다 버리고 무당의 집에서 빌어야 살리라”고 하셨다.17 같은 12월에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의 집에서 “있는 기운 그대로 풀어버릴 수밖에 없다”고 하시며 경석에게 백목[무명천]을 가져오게 하고 공사를 행하시다가 백목이 모자라 그로 하여금 백목을 더 가져오게 한 후 상량 공사를 마치셨다.18
기유(1909)년 1월 1일에는 상제님께서 대흥리에서 현무경 세 벌을 종필하시어 한 벌은 상제님의 품속에 지니시고 한 벌은 도창현에서 불사르시고, 나머지 한 벌은 차경석의 집에 맡기셨다.19 다음날[2일] 차경석에게 “내일[3일] 자정에 문틈을 봉하고 고기를 굽고 술병의 마개만 열고 심고하라. 이것이 곧 고사니라”고 하셨다. 이에 차경석은 3일 새벽 명하신 대로 고사를 지냈다.20 당시 상제님께서는 차경석과 고수부에게 고사를 지낼 때 백지에 ‘옥황상제하감지위(玉皇上帝下鑑之位)’라고 써서 벽에 붙이고 고사를 마친 뒤에 소각(燒却)하도록 명하셨다고 한다.21
▲ 고사
차경석의 교통 주장
차경석은 상제님께서도 성·경·신이 지극하여 달리 써볼까 했을 정도로 아꼈던 종도이다. 실제로 차경석을 통해 중요한 공사가 행해졌는데, 포정소도 그 중의 하나이다. 포정(布政)은 글자 그대로 정사(政事)를 편다는 의미이다. 상제님께서 차경석을 대동하고 그의 집을 포정소라 이름하신 일은 차경석이 상제님을 신인으로 받들어 상제님의 공사에 의해 이 땅에 후천선경이 수립될 때에 그 포정의 권한이 자기에게 주어져 있다는 허망한 꿈을 꾸게한 요인이 되었다고 이강오 교수는 평가하였다.22
실제로 차경석은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이후 교통(敎統)을 주장하는데, 이 주장에 대한 근거가 무엇인지 추정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을 종도로 맞이하신 후 의관을 갖추셨다. 그리고 “경석을 데리고 농암(籠岩: 용암)을 떠나 정읍으로 가는 도중에 원평 주막에 들러 지나가는 행인을 불러 술을 사서 권하고 “이 길이 남조선 뱃길이라. 짐을 많이 실어야 떠나리라.”고 말씀하시고 다시 길을 재촉하여 30리 되는 … 최(崔)씨의 재실에 거주하는 박공우(朴公又)의 집에 유숙하셨다. 공우와 경석에게 가라사대 “이제 만날 사람 만났으니 통정신(通精神)이 나오노라. …”23 고 하셨다. 이 구절에서 차경석은 상제님께서 말씀하신 남조선 뱃길을 자신이 세운 보천교(普天敎)가 앞으로의 남조선 운수를 같이 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또 상제님께서 차경석과 박공우 두 종도에게 만나야 할 사람임을 밝히시고 강세하신 신로와 인연, 장차 행하고 이루실 일을 말씀하시고 이 일이 동학신도들이 바라마지 않던 ‘참동학’임을 설하신 부분에서 차경석은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전경』 권지 1장 11절의 내용은 차경석보다는 오히려 박공우에게 더 많은 비중이 있어 보인다.
둘째, 상제님께서는 현무경(玄武經) 세 벌을 종필하시고 현무경을 다른 사람에게는 주지 않고 오직 차경석에게만 한 벌 주었다는 점과 이후 차경석에게 고사를 지내게 한 점이다. 차경석은 훗날 이 고사 지낸 일을 두고 상제님께서 자신에게 교통(敎統)을 전수(傳授)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차경석은 상제님으로부터 들은 말씀과 상제님께서 자신에게 하신 행동과 지시 때문에 교통을 전수받은 것으로 생각한 것 같다. 물론 상제님의 말씀과 행동 그리고 지시가 차경석과 관련된 공사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차경석은 후에 자신이 주장하는 교통 전수일(1월 3일)은 인정하면서 상제님을 스스로 부정하며 신앙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자기 모순에 빠지게 된다.
▲ 차경석의 집과 보천교중앙본소 성전
차경석과 동학신명 해원공사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에 대해 성·경·신이 지극한 사람이라고 평가하셨다. 그리하여 그의 야망을 아시고 그것을 고치려고 충고와 경계의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 한번은 경석의 집에서 모해자의 밀고로 해를 입은 차경석 부친의 원을 복수코자 하는 경석과 형제들에게 마음을 돌리게 하신 후, “천고춘추 아방궁 만방일월 동작대(千古春秋阿房宮 萬方日月銅雀臺)”24란 글을 벽에 써 붙이시고 마음에 두게 하여25, 그 마음을 경계토록 하셨다. 또 한번은 모시밭 가에서 잠에 취해 혼미에 빠진 경석을 보시고 “천자를 도모하는 자는 모두 죽으리라”고 하셨다.26 그리고 종도들에게 각기 소원을 물으셨을 때 경석이 “유방백세(遺芳百歲)를 못하면 유취만년(遺臭萬年)이 한이로다.27 열지(裂地)28를 원하나이다”고 하는 말에 “너는 병부가 마땅하니라”고도 하셨다.29 또 화천 직전에도 경석에게 “똑똑치도 못한 것이 무슨 정가냐”고 나무라셨는데,30 정가는 정씨(鄭氏)가 왕이 된다는 『정감록』의 비결을 두고 하신 말씀이셨다. 이런 정도령 신앙은 일제 강점기에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원했던 조선인들에게 희망이 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무신(1908)년 5월 상제님께서는 이(李)씨가 정(鄭)씨의 화(禍)를 받을까 염려스러워 그 살을 풀고자 이씨의 기운을 돋우고 정씨의 기운을 꺾는 공사를 보셨다.31
차경석은 상제님의 여러 차례의 충고에도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상제님께서 결국 역도(逆度)를 조정하고 왕후장상을 원했던 동학신명들을 해원시키기 위한 공사로 12제국을 원하며 천자를 꿈꿨던 차경석을 동학신명들의 해원 두목으로 정하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천자를 꿈꿨던 차경석, 그의 야망은 1911년 고수부가 기이한 능력을 보임으로써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대순회보 2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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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 (한성: 조선총독부, 1912) 참고.
02 1929년 『每日申報』에서 밝힌 대흥리 보천교 본소 부근으로 이주한 각 도별 교인 수가 경기 239인(人), 충북 100인, 충남 101인, 전북 389인, 전남 189인, 경북 919인, 경남 251인, 황해 106인, 평남 90인, 평북 451인, 강원 131인, 함남 38인, 총 3,004인(人)이었다고 한다. (출처: 《每日申報》 1929년 8월 24일자, 3면 1단 참고)
03 김재영, 「풍수와 땅이름으로 본 정읍의 종교적 상징성 -보천교를 중심으로-」, 『신종교 연구 』 제2집 (서울: 한국신종교학회, 2000), p.80 참고.
04 李康五, 「普天敎; 韓國 新興宗敎 資料篇 第一部-甑山敎系 各論에서」, 『전북대학교 논문집』 8집(전북: 전북대학교, 1966), p.24 참고.
05 교운 1장 53절 참고.
06 공사 3장 21절 참고.
07 역사문제연구소ㆍ동학농민전쟁백주년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동학농민군 후손 증언록) 다시 피는 녹두꽃』 (경기 고양: 역사비평사, 1994), pp.102~108 참고.
08 행록 3장 37절 참고.
09 행록 2장 23절 참고; 李英浩, 『敎祖略史』 (정읍: 중앙총정원, 1935), pp.3~4 참고.
10 행록 3장 38절 참고.
11 권지 1장 11절 참고.
12 교운 1장 26절 참고.
13 공사 2장 16절 참고.
14 공사 2장 19절 참고.
15 예시 38절 참고.
16 교운 1장 27절 참고.
17 공사 3장 33절.
18 교운 1장 28절 참고.
19 교운 1장 66절 참고.
20 행록 5장 2절 참고.
21 李康五, 같은 책, p.48 참고.
22 李康五, 같은 책, pp.12∼13 참고.
23 권지 1장 11절 참고.
24 천고의 세월을 누리고자 진시황이 지은 아방궁, 만방에 해와 달처럼 빛나고자 조조가 지은 동작대.
25 교법 3장 15절 참고.
26 교운 1장 51절 참고.
27 ‘유방백세(流芳百世) 유취만년(遺臭萬年)’은 ‘아름다운 이름이 100세를 간다면 더러운 이름은 1만 년을 지속한다’는 의미로, 유방백세(流芳百世)는 『晋書』 ‘桓溫傳(환온전)’에 나오는 말이다. 환온이 진나라에 이민족의 침입을 없애는 공을 세워 대사마로 임명되었다. 그는 높은 지위에 군사력을 장악하고 중원을 회복함으로써 황제가 되려는 야심을 품었다. 그는 일찍이 “대장부가 이미 훌륭한 명성을 후세에 전할 수 없다면, 나쁜 이름을 길이 남기는 일인들 가능하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나이가 들어 병상에 누워서도 그 야심을 버리지 못하고 죽었다 한다. [출처: 조기형 외1인, 『한자성어ㆍ고사명언구사전』 (서울: 이담북스, 2011)]
28 나누어 준 땅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권력을 가져 천자를 도모하려는 것을 말함.
29 교운 1장 54절 참고.
30 행록 5장 34절 참고.
31 권지 2장 29절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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