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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부 송월리 최씨 재실

교무부    2018.09.01    읽음 :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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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원 정나연

 

▲ 숙사재(肅事齋: 현 전북 정읍시 정우면 장순리 소재 전주 최씨 재실) 전경

 

“하느님 뵈어지소서.”

 

  이 말은 박공우 종도가 상제님을 만나기 이전인 동학 신도였던 때부터 드렸던 식고(食告)이다.01 원래 동학 신도들이 드리는 식고는 ‘천지부모(天地父母) 특사조반(特賜朝飯) 감사무량(感謝無量)’이었는데,02 보통의 동학 신도와는 다른 그만의 식고였다. 상제님과 함께할 자신의 운명을 알았던 것일까? 생각하면 할수록 궁금증이 커졌다. 오늘은 하느님 뵙기를 소원했던 그의 염원의 흔적이 남아 있을 만한 장소 중 하나인 숙사재(肅事齋)를 찾아 전라북도 정읍으로 향했다.

  전라북도 정읍시 정우면 장순리 192번지(송내길 136)의 전주 최씨 재실 숙사재(肅事齋). 이곳은 박공우가 상제님을 처음 만난 곳이다. 숙사재가 있는 장순리 송내마을은 주변에 소나무가 많은 데다가 마을이 소나무밭 속 깊숙이 있어서 ‘송내리(松內里)’ 혹은 ‘솔안’이라 불렀다고 한다.03 전주 최씨 집성촌이기도 한 이곳은 지금 보아도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도로에서는 마을이 잘 보이지 않았다. 지명처럼 정말 소나무숲 속에 꼭꼭 숨어 있는 마을이다.

 


▲ 숙사재의 위치와 송내마을(송월리)(출처: 다음 지도)

 

  답사를 함께하는 일행 한 분이 처음 숙사재를 찾으면서 있었던 에피소드를 이야기해 주셨다. 

  “송내마을로 들어가서 처음 마주한 재실이 전주 최씨 재실인 줄 알고 열심히 살펴보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나가던 노부부가 그 모습을 보더니 이곳은 전주 최씨 재실이 아니고 경주 김씨 재실이라고 하시면서 전주 최씨 재실이 있는 곳과 그곳을 관리하시는 분의 연락처를 알려주시는 겁니다. 그래서 양지마을 뒤에 사는 재실 관리자와 연락을 한 후 숙사재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전주 최씨 후손분도 함께 오신 겁니다. 우리는 놀라기도 했지만, 무척 반가웠습니다. 알고 보니 그날 문중에 일이 있어서 마을에 오셨다가 재실 관리하시는 분의 연락을 받고 같이 왔다고 하시더군요. 그래서 그분께 숙사재에 대한 설명을 직접 듣게 되었습니다. 김씨 재실로 잘못 찾아갔던 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것이죠.” 

  당시 숙사재를 찾았던 일행은 전주 최씨의 후손을 만나게 되면서 중요한 의문점 하나가 풀리게 되었다고 하였다. 그것은 숙사재의 위치에 관한 것이다. 숙사재가 있는 마을이 『전경』에는  ‘송월리(松月里)’04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증산의 생애와 사상』에는 ‘송월리’와 ‘솔안’05이 모두 사용되었다. 두 문헌에 기록된 지명이 현재 ‘송내마을’로 불리는 지명과 같지 않아서 박공우가 살았던 곳을 제대로 찾아 왔는지 의문이 들었는데, 전주 최씨 후손이 “옛날에 이곳 숙사재에 박공우라는 사람이 와서 공부했었다는 말을 들었다”고 하니 『전경』이나 『증산의 생애와 사상』에 나온 ‘송월리’가 ‘송내마을’임을 짐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 숙사재 입구 비석 

 

  우리는 숙사재로 가기 위해 양지마을 주변 적당한 곳에 주차했다. 숙사재가 송내마을에서 조금 먼 곳에 있기도 했지만, 양지마을에서 출발해 가는 것이 더욱 수월했기 때문이다. 도로를 건너면 전주 최씨 숙사재 입구를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리 오래되어 보이진 않지만, 초행길인 사람들에게 꽤 훌륭한 이정표가 되어주었다. 진입로를 따라 들어가니 길 오른쪽으로 수로 공사가 한창이었다. 일행은 흙먼지를 날리며 다가오는 공사 차량을 피해 가다 서기를 반복하며 천천히 걸었다. 

  10여 분 정도를 걷다 보니 왼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숙사재가 보였다. 소나무가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포근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재실이었다. 발걸음이 조금씩 빨라지기 시작했다. 숙사재 앞에 이르니 통통하고 귀여운 강아지 두 마리가 온몸을 흔들며 반겨주었다. 열렬히 환영해주는 이가 있어서 그런지 숙사재가 한층 정겨워졌다.

  강아지들의 안내와 함께 높다란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서니 숙사재의 전면이 한눈에 들어왔다. 정면 5칸 측면 1칸 반 정도로 이루어진 일(一)자형 건물로 호남지역의 전형적인 재실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지붕은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진 우아한 팔작지붕으로 살짝 들린 처마 끝을 따라 양철 처마가 덧대어져 있었다. 눈이나 비 혹은 강한 햇빛으로부터 건물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 또한 멋스러웠다.

 

 


▲ 숙사재 본채

 

  처마 밑으로 숙사재(肅事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소박하면서도 단정한 모습에서 가문의 내력이 느껴졌다. 엄숙하고 공경스럽게 선령을 모신다는 의미의 숙사재는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삼가라는 뜻으로 이해되었다. 잘 정돈된 재실의 모습은 선령에 대한 후손들의 애정과 정성을 보여주고 있었다. 

  숙사재는 500여 년 전에 전남 화순군 동복 지역의 현감으로 부임했었던 전주 최씨 동복공파시조(同福公派始祖)인 동복공(同福公) 최자목(崔自睦)을 비롯하여 12분의 시제(時祭)를 모시는 곳이다. 시제는 매년 음력 3월 11일에 드리고 있다. 이곳은 1933년에 증축하여 1987년에 수리를 한 후 관리자를 두어 꾸준히 관리해 오고 있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다른 성씨의 사람을 관리자로 둔다는 것이다. 혹시 관리가 소홀하여 관리자를 새로운 사람으로 교체해야 할 경우, 문중의 사람이면 갈등의 요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문중의 화합과 우애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혜로움이 돋보였다. 재실 뒤로는 동복공 최자목의 묘를 비롯하여 후손들의 묘역(墓域)이 잘 조성되어 있었다.   

 


▲ 동복 현감 최공(최자목) 유장비 

 

  과거와 현재가 적절히 어우러진 숙사재의 마루에 앉아 상제님과 박공우가 처음으로 만나셨던 과정을 떠올려 보았다. 지금으로부터 110여 년 전인 정미년(1907) 6월 초.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그를 종도로 맞으신 후 함께 정읍을 향해 가시다가 “대진(大陣)은 일행 三十리라” 말씀하셨다. 이에 차경석은 상제님을 모시고 그의 친구인 박공우의 집(숙사재)으로 향했다. 당시 박공우는 49일 동안 치성을 드리는 중이었다.06  

  그날 밤 상제님께서는 이곳 숙사재에 머무시면서 박공우와 차경석에게 “이제 만날 사람 만났으니 통정신(通精神)이 나오노라. 나의 일은 비록 부모형제일지라도 모르는 일이니라”고 하셨다. 그리고 “나는 서양(西洋) 대법국(大法國) 천계탑(天啓塔)에 내려와서 천하를 대순하다가 삼계의 대권을 갖고 삼계를 개벽하여 선경을 열고 사멸에 빠진 세계 창생들을 건지려고 너희 동방에 순회하던 중 이 땅에 머문 것은 곧 참화 중에 묻힌 무명의 약소 민족을 먼저 도와서 만고에 쌓인 원을 풀어 주려 함이노라. 나를 좇는 자는 영원한 복록을 얻어 불로불사하며 영원한 선경의 낙을 누릴 것이니 이것이 참 동학이니라. 궁을가(弓乙歌)에 ‘조선 강산(朝鮮江山) 명산(名山)이라. 도통군자(道通君子) 다시 난다’라 하였으니 또한 나의 일을 이름이라. 동학 신자 간에 대선생(大先生)이 갱생하리라고 전하니 이는 대선생(代先生)이 다시 나리라는 말이니 내가 곧 대선생(代先生)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07 

  이것은 상제님께서 두 사람에게 당신이 어떠한 분이신가 하는 정체성을 직접 밝혀주신 것이다. 그리고 상제님께서 조선에 오신 이유와 앞으로 행하실 천지공사의 의미와 중요성, 상제님을 믿는 이들에게 돌아올 영광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셨다. 그러자 박공우는 다음날 차경석과 함께 상제님을 따라 정읍으로 향했다. 

  110여 년 전 상제님은 숙사재의 어느 방에서 위의 말씀을 하셨을까? 제사를 모시는 중앙의 방이었을까? 아니면 각종 제기와 물건들이 보관된 그 옆의 방이었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솟을대문 양옆으로 조그맣게 만들어져 있는 방이었을까? 확인할 길 없는 아쉬움에 사람이 머물만한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이렇게 상제님을 따르게 된 박공우는 그동안 맡았던 일진회 간부 자리를 그만두고 일심으로 상제님을 모시게 되었다. 그러던 가을 어느 날 상제님께서는 그에게 “이제부터 네가 때마다 하는 그 식고(食告)를 나에게 돌리라”고 말씀하셨다. 이 식고는 동학신도들과 달리 오직 박공우만이 드리는 것이었는데 상제님께서 그의 심경을 마치 보신 듯이 통찰하시자 그 권능에 매우 감탄하였다. 또한, 상제님께서 임의로 조화를 행하시는 모습에 이분이 바로 그가 그토록 뵙고자 했던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되며 더욱 지성으로 상제님을 받들었다.08  

  결국 정미년(1907) 6월부터 3년 동안 상제님께서는 박공우의 성격과 습관 등을 새롭게 고쳐서 만국 대장(萬國大將) 공사, 과부를 개가케 하는 공사, 묵은 하늘이 상제님과 박공우의 살을 쓰고자 했던 공사, 수기를 돌리는 공사, 만국의원(萬國醫院)과 관련된 공사 등 많은 천지공사에 쓰셨다. 그리고 공사가 끝날 때마다 박공우는 각처의 종도들에게 연포하라는 상제님의 명을 받들며 상제님을 따랐다.  

  숙사재가 만들어주는 그늘에 앉아 박공우와 상제님의 만남을 생각해 보았다. 매일 밥을 먹을 때마다 잊지 않고 하느님 뵙기를 발원하였던 박공우. 그리고 그가 간절히 염원했던 하느님을 만난 곳, 고부 송월리 최씨 재실 숙사재. 1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 모습은 달라졌지만, 상제님을 향한 박공우의 변함없는 마음은 숙사재가 지닌 뜻과도 닿아있는 듯하다. 엄숙하고 공경스럽게! 이것은 시대를 이어 상제님을 모시며 수도하고 있는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덕목인 것 같다.

  《대순회보》 20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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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교운 1장 25절 참조.

02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56)」, 《대순회보》 120호, p.15 재인용.

03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 12, (서울:한글학회, 1984), p.444.

04 권지 1장 11절 참고.

05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증산의 생애와 사상』, (서울: 대순진리회 출판부, 1994), pp.168~170.

06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앞의 책, p.168.

07 권지 1장 11절 참고.

08 교운 1장 25절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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