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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리(白岩里)와 굴치(屈峙)
연구위원 김성호
『典經』을 보다보면 상제님께서 어느 지역의 특정마을이나 혹은 그 마을에 사는 종도(從徒)들의 집을 왕래하시며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셨다는 내용을 종종 찾아볼 수 있다.
그 중의 한 장소이기도 한 백암리(白岩里)는 한때 박공우와 신원일이 상제님을 모시고 있었던 곳이자, 상제님께서 해원시대(解時代)를 맞이하여 이 마을에 사는 김경학의 집에 대학교를 정하시고 당시 가장 천한 신분계층이었던 무당에게 제일 먼저 교(敎)를 전하신 곳이기도 하다.
또 백암리는 상제님께서 무신년[1908년] 봄에 이 마을에 사는 김경학과 최창조의 두 집을 왕래하시며 성복제(成服祭)와 매화공사(埋火公事)를 보신 곳이기도 하다.
성복제(成服祭)란 초상이 나서 처음으로 상복을 입을 때 차리는 제사(祭祀)를 뜻하는 것으로, 『典經』에 따르면 상제님께서는 김광찬 양어머니[養母]의 성복제를 최창조의 집에서 거행하시기도 하셨다.
게다가 상제님께서는 이 마을에서 매화공사(埋火公事)를 위해 김형렬에게 ‘어떤 일’을 분부하시고, 이를 정해진 때에 맞추어 최내경ㆍ신경원ㆍ최창조에게 행하게 하라고 지시하시기도 하셨다. 이에 형렬은 지체 없이 이를 종도들에게 알렸고, 형렬로부터 이 같은 상제님의 분부를 전해들은 세 명의 종도들은 상제님의 분부를 정해진 때에 맞추어 백암리(白岩里) 최창조의 집 정문 밖에서 이행하였다. 그들이 이 같은 일을 마치고 시급히 상제님께 돌아올 때쯤 하늘에서는 기이한 현상 즉, 갑자기 검은 구름이 일고 폭우가 쏟아지면서 뇌전(雷電)이 크게 쳤다고 한다. 이에 상제님께서는 이 광경을 보시고 형렬에게 “이때쯤 일을 행할 시간이 되었겠느냐.”고 물으셨는데, 형렬은 상제님의 물음에 “행할 그 시간이 되었겠나이다.” 라고 말씀드렸다. 형렬이 상제님의 물음에 이 같이 대답하자 상제님께는 곧, 그들이 분부를 받들어 시행했던 일들에 대해 “뒷날 변산 같은 큰 불덩이로 인해 이 세계가 타버릴까 하여 그 불을 묻었노라.”고 매화공사의 성격에 관해 말씀해 주시기도 하셨다.
한편 매화공사와 성복제, 그리고 상제님께서 이 마을에서 제일 처음 교(敎)를 전하시는 내용 이외에도 『典經』에서는 백암리와 관련된 구절을 더 찾아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이 마을의 화재(火災)와 관련된 것으로, 하루는 상제님께서 태인 백암리로 가시는 도중에 김경학의 집에 불이 나, 이 불이 바람을 타기 시작하여 마을이 위험하게 되었던 적이 있었다.
이때 마침 백암리로 가시던 길에 이 광경을 직접 목도하신 상제님께서는 이 불을 끄지 않으면 동리가 위태로우리라고 말씀하시고 권능으로 바람을 크게 일으켜 이 마을을 화재로부터 구하시기도 했다.(권지 2장 15절 참고)
이처럼 『典經』에서 비교적 자주 등장하는 백암리(白岩里) 상제님 재세시에는 태인현(縣)에 속해 있었지만, 1914년 행정구역이 통폐합됨에 따라 지금은 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에 편입되어 여러 마을과 병합되어져 있다.
대개 마을과 마을이 병합되게 되면 대부분의 지명(地名)이 새롭게 바뀌기 마련이다. 하지만 백암리는 병합되어진 마을 가운데 위치상으로 가장 중심이 되는 마을일 뿐 아니라, 역사적으로도 가장 오래된 마을이라는 이유로 마을 명(名)이 바뀌지 않고 지금까지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행정구역상으로 볼 때 현재의 백암리와 과거의 백암리는 그 범위상에서 많은 차이가 있다. 즉, 상제님 당시만 하더라도 백암리라 하면 백암마을 한 곳만을 지칭했지만, 현재는 병합된 여러 마을을 총칭하는 리(里) 단위의 명칭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이다.
답사장소로 출발 전 사전 조사에 의해 이 같은 사실을 몰랐던 바는 아니나, 직접 백암리에 당도하고 보니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 범위가 워낙 방대해 통합되기 이전의 백암리를 찾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만은 않을 듯했다. 바로 그때, 때마침 이 지역 토박이로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직접 우리 쪽으로 다가와 이 마을에는 무슨 일로 왔느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이에 우리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 분에게 옛 백암리에 관해 여쭤보았다.
그 분의 말씀 또한 현재는 백암리가 통합되어 이에 관해 잘 모르는 사람은 예전의 백암리와 현재의 통합된 백암리를 동일한 곳으로 여기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말하며 옛 백암리의 위치를 상세히 일러주었다.
이 말을 듣고 지체 없이 그곳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백암리 입구에서 칠보천을 따라 뻗은 한적한 마을길로 얼마를 내달렸을까, 멀리서 희미하게 마을 알림 돌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이 순간 머릿속으로는 혹여나 이 장소가 우리가 찾는 곳이 아니면 어쩌나 하고 내심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마을 초입에 당도하여 원백암이라고 새겨진 커다란 마을 알림 돌을 확인하는 순간 이 같은 걱정은 이내 사라졌다. 원백암(元白岩) 마을을 찾고 나니 한편으로는 고심하던 문제가 풀렸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밀려왔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마을이 상제님께서 과거에 성복제와 매화공사를 보신 장소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마을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을 주변에 자리 잡고 있는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칠세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주변 경관을 유심히 살펴보니 정말이지 이 마을은 풍수지리에 관한 지식이 없는 사람이 보아도 명당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야트막한 산들이 마을을 아늑히 감싸고 있었다.
게다가 마을 한 가운데는 오래된 고목(古木)이 터줏대감처럼 떡하니 지키고 있어, 한눈에 봐도 누구나 오래된 마을임을 짐작할 수 있게 했다.
한편 마을 입구에는 여타의 다른 시골마을과는 달리 목재판으로 아주 깔끔하게 만들어진 마을 소개판이 눈에 띄었다. 소개판에 쓰인 내용을 찬찬히 읽어보니 거기에는 마을의 연혁과 유래, 그리고 이 마을의 역사적 인물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이에 따르면 원백암 마을은 현재 백암리의 중심마을이며, 마을 이름을 백암이라고 부르게 된 까닭은 마을 뒷산에 흰 바위가 많았기 때문이라 한다. 게다가 이 마을에는 원래 24방위에 맞추어 세운 스물 네 개의 당산(堂山)이 있었다고도 한다.
이처럼 마을 소개판에 쓰여진 내용을 쉼 없이 읽어 내려가고 있는데, 순간 다른 마을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었던 내용이 필자의 눈길을 끌었다. 그 내용은 다름이 아니라 상제님에 관한 것이었다.
상제님 강세지(降世地)에서도 ‘姜甑山 降世地’라는 알림판 이외에는 마을 입구에서 상제님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었는데, 강세지도 아닌 이 마을에서 그것도 마을 소개판까지 만들어 상제님에 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는 것은 정말 특이한 경우였다.
마을 소개판에 적힌 내용이 길지는 않았지만, 소개 판에는 ‘한때 강증산의 소요처’라고 명확하게 쓰여 있었는데, 이를 통해 필자는 이 마을이 과거에 상제님께서 머무르셨던 장소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우연히 마을 소개판에 쓰여진 글을 읽으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마을과 관계된 역사적 인물 중에는 눈여겨 볼만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바로 영조 때 효행으로 벼슬을 받았던 박잉걸이다. 박잉걸? 언뜻 들어서는 우리에게 낯익은 인물이 아니라서 이 지역사람이 아니고서는 생소하게 느껴질 것이다. 그의 이름이 생소하기는 하나 ‘굴치’라고 하면 수도인들도 익숙하게 여겨질 것이다. 굴치! 이곳은 『典經』 속에 등장하는 지명(地名)의 한 곳으로서 상제님께서 갑진년(甲辰年) 2월에 잠시 머무르셨던 곳이기도 한데, 백암리로부터 이 굴치로 가는 길을 사재(私財)를 들여 닦은 사람이 바로 박잉걸이다.
상제님께서 굴치 마을에 계실 때, 당시 도술(道術)을 배우고자했던 영학에게 상제님께서는 그것을 원치 말고 『大學』을 읽으라고 명하셨는데, 영학은 이를 듣지 않고 황주 죽루기(黃州竹樓記) 엄자능 묘기(嚴子陵廟記)만을 읽었다. 이에 상제님께서는 “대(竹)는 죽을 때 바꾸어 가는 말이요. 묘기(廟記)는 제문이므로 멀지 않아 영학은 죽을 것이라.” 말씀하시며 ‘골폭 사장 전유초(骨暴沙場纏有草) 혼반 고국 조무인(魂返故國弔無人)’이라는 시(詩) 한 귀를 이도삼을 불러 영학에게 전했다.
하지만 영학은 상제님으로부터 이같은 시(詩) 한 귀를 전해 받고도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하고 여전히 술서(術書)만을 공부했는데, 이로 인해 결국 상제님의 말씀대로 영학은 죽게 되었다. 백암리에서 굴치마을로 이동하기 전, 우리 일행은 『典經』을 통해 상제님께서 굴치마을에 머무시면서 영학에게 하신 이 같은 말씀과 시(詩) 한 귀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며 굴치마을로 향했다.
백암리에서 굴치마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백암리 뒤로 나있는 옛 산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는 길이 거리상으로는 가장 가까운 최단거리다. 하지만 지도상에서 보았던 것과는 달리 실제도로는 조금은 먼 길로 우회해서 돌아가게 되어 있었다.
어지러움을 참아가며 얼마나 내달렸을까 어느새 목적지에 당도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사전에 조사한 대로라면 분명히 이곳에 굴치마을이 있어야 하는데 있어야 할 굴치마을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고 주변에는 오직 널찍한 저수지 한 곳만 보일 뿐이었다.
혹시 우리가 지명을 잘못 찾은 것일까? ‘분명히 이 장소에 있어야 하는 것이 맞는데’…… 혼잣말로 중얼거려가며 지도와 지명 관련서적을 몇 번이고 다시 뒤적였다. 확인 결과 우리가 찾은 장소가 틀림없었다. 정말이지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주위에 마을이라도 있으면 물어보기라도 할 텐데 주위를 둘러봐도 주변에는 도로만 보일 뿐 마을은 어디에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우리 일행은 지나가는 차를 손을 흔들어 세우기로 했다. 끼이이익~~ 쌩쌩 내달리는 차를 미안함을 무릅쓰고 세운 후, 굴치에 관해 물어보았다. 달리는 차를 갑자기 세운 터라 운전자는 화가 날만도 하건만 오히려 그 분은 참 잘된 일이라고 하며 직접 차에서 내려 우리의 물음에 아주 친절히 답해 주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조금 의아스럽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뜸 첫마디부터 자신을 만난 것이 잘된 일이라고 하니 말이다. 대답을 듣고 난 뒤에야 알게 된 것이지만, 옛 굴치마을에 관해 잘 아는 사람은 현재 이 지역에서 몇 안 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만난 것을 더더욱 인연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백암리를 찾을 때도 느낀 것이지만 가는 곳 마다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면 꼭 어디선가 이에 관해 잘 아는 사람이 나타나서 도움을 주는 것이 마치 신명들의 도움을 받고 있는 듯했다.
그 분의 설명에 따르면 현재 굴치마을은 수몰되었다고 한다. 이렇게라도 영문을 알고 나니 답답함이 조금은 해소 되는 듯했다. 마치 풀지 못한 수수께끼의 답을 찾은 양 마음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답답함이 해소되니 이내 궁금증이 일기 시작했다. 왜 수몰 되었을까? 그 이유에 관해 묻자 그 분이 답하기를 1986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마을이 있었는데, 그 마을이 굴치마을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1986년에 저수지가 들어서면서 마을이 모두 수몰되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현재는 이곳에서 굴치마을의 모습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다만 마을의 흔적 대신 수청저수지 그 모습을 대신하고 있었다. 마을이 수몰되었다니! 한편으로는 마을의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 없다는 것이 조금은 안타까웠다. 하지만 세월이 100여 년이나 지났지 않은가? 모든 것이 급변하는 시대에서 이 같은 일쯤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아쉽지만 다음 답사지로 발길을 돌렸다.
《대순회보》 7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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