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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악산을 오르며
서초3 방면 교감 장선렬
온 산과 들이 꽃과 푸른 잎으로 기지개를 펴는 봄날, 전주 모악산을 향해 답사를 떠났다. 아침 7시에 여주에서 차를 타고 100여 년 전에 상제님께서 공사를 보시고 활동을 하신 전주를 향해 출발했다. 고속도로를 달려 10시 반쯤 되니 모악산 입구가 보였다.
길을 따라 산 입구에 도착하니, 커다란 바위에 ‘모악산(母岳山)’이라는 글씨가 인상 깊게 눈에 들어왔다. 만경들판의 젖줄로서 만민을 품에 안은 어머니 산 모악산! 그 품안에 있기에 편안함이 감도는 듯하다.
상제님께서 남기신 발자취를 밟는다는 기대감이 앞선 탓인지 만나는 사람들이 마치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처럼 반갑기만 하다. 타 지역을 다니다보면 낯설기도 할 법한데 오히려 포근하게 느껴진다.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시작하시기 위해 대원사(大院寺)를 오르셨던 당시의 상황과 그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서전서문(書傳序文)을 쓴 채침(蔡沈, 1176~1230)01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천년 뒤에 태어나 천년 전의 요순우탕문무주공(堯舜禹湯文武周公)의 마음을 헤아리기란 범인(凡人)으로서 어려운 일이었다는 기록을 보면 조금이나마 심정이 이해가 된다.
대원사(大院寺)에 가는 것이 세 번째이다.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서 상제님께서도 이 길을 따라 다니시던 것을 생각하면서 길을 걸었다. 그때의 산길은 이렇게 넓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위 하나 돌 하나 밟아가며, 상제님께서도 이 돌을 밟고 올라가시지 않았을까. 천지공사를 시작하시려고 올라가는 걸음이 어떠했을까? 천하창생을 살리기 위해 공사의 설계를 생각하시면서 올라가는 모습을 생각하니 나의 한 걸음 한 걸음이 경건해진다. 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 보니 대원사 아래 넓어 보이는 골짜기가 나왔다. 여기쯤에서 동물들의 해원공사를 보시지 않았을까. 『전경』 행록 2장 15절에 상제께서 49일간 공부를 마치시고 내려오시면서 대원사 골짜기에서 금수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생각난다. 진묵대사(震默大師, 1562~1633)02가 대원사에 있을 때, 목각사자상을 깎아 위에 북을 올려놓고 북을 치며 동물들의 천도제(薦度祭)를 지냈다고 전해 내려온다. 그때의 인연과 연관이 있는 것일까. 새와 짐승이 상제님 앞에 모여 있는 모습을 잠시 상상하며 올라가니 어느 사이에 대원사에 도착했다.
땀을 흘리며 대원사 마당에 들어서니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상제님께서 답사 온 것을 보시고 반겨 맞는 것 같았다. 오래전 대원사를 왔던 생각이 난다. 천지공사를 본 대원사가 생각했던 것보다 작은 규모라는 것에 실망했던 적이 있었다. 또 선사 때 상제님 생가에 처음 갔을 적에도 시루봉은 자그마한 봉우리에 지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겉모습에 불과한 크기의 규모에서 도를 찾으려 했던 철없던 그때가 부끄럽기만 하다.
마당에 서서 정면을 바라보니 대웅전(大雄殿)이 있고 오른쪽 옆으로 상제님께서 공부하신 곳으로 추정되는 요사채가 있다. 마당 왼편에는 명부전이, 오른편에는 선방이 있으며, 대웅전 왼쪽 위에는 작은 요사채가 있고, 오른쪽 위에는 삼성각이 있어 크기도 크지 않고 소담한 분위기다.
요사채 앞에 서서 상상해본다.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시작하실 때 전 우주의 신명이 시선을 집중하여 심판을 기다리는 모습을 잠시 그려본다. 상제님께서는 인세에 내려오시기 전 30년 동안 머무신 금산사(金山寺)도 있는데 왜 대원사에서 공사를 시작하셨을까? 처음 대원사(大院寺)라는 현판을 보고 대원(大院)은 큰 집이라는 뜻으로 대원(大願, 큰 바람)과 한자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대(大)는 부피, 넓이, 역량, 정도, 규모 등 크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원(院)이란 집을 의미하는 말로 불교에서는 도솔천(兜率天)이라는 천계(天界)가 있고, 거기에 내원(內院)·외원(外院)이 있는데 미륵보살은 그 내원(內院)에 거처하면서 중생(衆生)들을 위하여 설법을 한다고 한다. 이처럼 원(院)은 신의 세계에서 미륵이 계시는 곳을 의미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을 보면 충주의 중원 미륵리사지가 신라 말기에 초기의 이름이 미륵대원(彌勒大院)이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대원(大院)은 미륵이 계시는 곳을 말하고 있다. 절의 규모는 작지만 상제님께서 대원사(大院寺)에 머무시면서 천지공사를 시작하신 것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다.
대원사(大院寺)는 삼국통일 직전에 대원(大原)ㆍ일승(一乘)ㆍ심정(心正) 등의 고승이 함께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그 뒤 불교의 종장이 되신 진묵대사(震默大師)가 수도한 절로 유명하다. 정유재란 때 대부분 건물이 불타 없어졌으나, 진묵대사 때 다시 대규모로 중창되면서 번성하였다. 이후에는 금강산 건봉사(乾鳳寺)에 머물고 있던 금곡대사(錦谷大師)가 이곳으로 와 중창하였다.
삼성각(三聖閣) 앞에 서서 눈에 들어오는 기둥의 글귀를 바라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상제님께서 대원사에서 머무르시며 공사를 보셨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듯 글이 쓰여 있었다.
此山局內恒住大聖 (차산국내항주대성)
十方法界至靈至誠 (십방법계지령지성)
萬德高勝性皆閑寂 (만덕고승성개한적)
이 산 도량에는 항상 대성인이 상주하고 계신다.
십방법계의 지극히 존귀한 영(靈)께서 지극한 정성을 들이셨다.
세상의 모든 덕과 수승한 성품을 모두 지니시고 유유자적하시었도다.
상제님께서는 대원사에서 방 한 칸을 얻어 49일 불음불식 공부를 하셨다. 아쉽게도 그 건물은 6.25전쟁으로 불타 없어지고 이후에 그 자리에 요사채03를 지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선천의 신명을 심판하시고, 오룡허풍(五龍噓風)에 천지대도를 여셨다고 하니 상상이 되질 않는다. 『천수경』을 보면 ‘도량이 청정해야 천룡(天龍)이 함께 한다’는 말이 있다. 한 마리도 아니고 다섯 마리의 용이 바람을 일으켰다고 하니 공사를 보신 것이 얼마나 큰 것인지 가히 짐작하기 어렵다.
영화 ‘화평의 길’에서 대원사 장면을 보면 상제님께서 49일 공부를 마치시고 정씨 부인이 불평하고 올린 옷을 “이 옷에 요망스런 계집의 방정이 붙었으니 속히 버려라”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도전님께서 수도하면서 불평과 불만을 감정화한다면 상극을 조장하게 된다고 하신 것처럼, 결국 말 한 마디와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되새기게 한다.
대원사는 상제님께서 신축(辛丑)년 겨울에 아흐레 동안 천지공사를 보셨고, 이후에 도주님께서도 백일공부를 하셨고 상제님께서 심판하여 응기하여 있는 천지신명을 도주님께서 푸는 공사를 보셨던 곳이다.
대원사를 나와 가파른 산길을 따라 진묵대사(震默大師)가 수도한 곳으로 유명한 수왕사(水王寺)로 향했다. 상제님께서도 수왕사를 지나 모악산을 넘어 금산사로 자주 다니셨다고 하니 내딛는 걸음 걸음이 새롭기만 했다. 험한 산길을 30분쯤 올라갔을까 모악산 정상 아래의 수왕사에 도착했다. 수왕사는 작은 암자로 대웅전(大雄殿)과 진묵대사조사전(震默大師祖師殿)이 있고 요사채가 있다. 뒤로는 암벽으로 된 절벽이 있고 앞으로는 낭떠러지로 이루어져 멀리 구이(九耳) 저수지가 보인다.
수왕사(水王寺)의 절 사(寺)자를 자전에서 찾아보면 ‘접대하다’, ‘간직하다’, ‘모시다’라는 의미도 있는데, 강(江)도 바다도 아닌 793m 라는 모악산 정상 아래에 특이하게도 ‘물의 왕을 모셨다’라고 하니 쉽게 이해가 가질 않았다. 모악산 물의 근원이 여기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여도 물의 근원인 수원이라는 말은 이해가 되겠지만 물의 왕이라는 말은 모든 물의 왕이라는 것인데, 그곳에서 상제님께서 공부를 하셨다고 하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대웅전 뒤편으로 올라가니 절벽 밑으로 진묵대사 조사전이 있다. 수왕사는 정유재란 때 불에 탄 것을 진묵대사가 중창하여 그 인연으로 모셔 놓은 것 같다. 진묵대사 조사전 계단을 내려오다 보니 요사채 지붕 위로 술을 빚는 도구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도 술을 빚고 있는 것일까. 진묵대사는 술을 잘 마시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술이라고 하면 안 마시고 곡차라고 해야 마셨다고 한다. 절벽 밑 바위 틈 사이로 옛날 선녀가 마셨다고 전하는 석간수가 흘러나온다. 이 물로 곡차를 빚어 내려온 것이 오늘날 송화백일주(松花百日酒)와 송죽오곡주(松竹五穀酒)로 도장이나 회관에서 치성을 모실 때 쓰이기도 했다.
진묵대사는 신이한 많은 이적(異跡)을 행하였다고 전해지며 석가의 소화신(小化身)으로 추앙받았던 조선의 거승이었다. 하지만 진묵대사도 처음부터 추앙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고 전한다. 하루는 진묵대사가 공양을 하러 대원사로 갔는데 시간이 지나 밥이 없다고 하자 두부 만들고 남은 비지라도 달라고 하니 화장실에 버렸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진묵대사는 화장실에 버린 비지를 걷어 갔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불교의 종장까지 되신 진묵대사도 푸대접을 받으면서 수도를 했다고 생각하니 상제님의 덕화 속에서 수도를 하고 있는 나의 모습을 생각하니 고맙고 감사한 마음이 밀려든다.
건물 뒤로는 큰 바위로 이루어진 깎아지는 듯한 절벽이 있다. 현재 이 절의 주지 벽암(碧岩)스님의 증언에 의하면 상제님께서 모악산에서 가장 많이 앉아 계셨던 곳이 건물 뒤편 절벽 위의 큰 소나무 아래라고 전해내려 오고 있다 한다. 바위 위에서 멀리 구이(龜耳)저수지를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상극으로 인해 멸망지경에 이른 전 인류를 살리기 위해 인간의 큰 원, 대원을 들어주시기 위해 선(善)으로 먹고 살 도수를 짜셨을 것이다. 그렇게 공사를 보셔도 모두 구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시지 않았을까?
수왕사를 나와 모악산 정상을 바라보며 다짐해 본다. 오늘의 답사를 계기로 반복되는 생활을 깨고 한 차원 나아지는 새로운 나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도록 해야겠다. 상제님께서 한 발 한 발 밟으셨던 그 길을 따라 내딛는 발걸음이 모여 깨달음을 이루고, 수도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니 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대순회보》 9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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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중국 남송의 성리학자 주희(朱熹)의 제자이자 사위며 주희의 유언에 따라 서경(書經)의 주해를 달아 서집전(書集傳)을 펴냈다. 서경(書經)은 상고(上古)시대 요(堯)순(舜)으로부터 주대(周代)까지 나라의 법도와 제왕들의 행적 등을 기록한 책이다.
02 조선 인조 때의 스님. 이름은 일옥(一玉). 석가의 소화신(小化身)으로 추앙받았으며, 곡차를 잘 마시기로 유명하고 많은 이적(異跡)을 행하였다고 한다.
03 스님들이 머물면서 거주하는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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