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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점도(末店島)를 다녀와서

교무부    2017.02.01    읽음 : 18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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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위원 장선렬 

   

 동쪽 하늘에 어둠이 깔려 있을 새벽 5시. 여장을 꾸려 여주를 떠나 전라북도 군산시를 향했다. 3시간이 걸려 군산연안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하니 바닷가 특유의 짠내가 찬바람과 함께 온몸에 스며들었다. 

 하루에 두 번 운행하는 여객선은 기상악화로 일주일간 출항을 못하다가 우리 일행이 가는 날 다행히 출항을 재개하였다. 운이 좋게도 기상악화가 풀리기는 하였지만, 섬지역 날씨가 워낙 변덕스러워 섬에서 되돌아오는 배의 출항여부는 장담할 수 없었다. 우여곡절 끝에 일행은 오전 9시 말점도행 장자훼리호에 승선하였다. 

 배가 출항하자 배 안에서 말점도에 대해 사전에 조사해 온 내용들을 다시 한번 꼼꼼히 점검했다. 미리 조사하여 둔 내용에 따르면 말점도(末店島)는 섬 둘레가 3km에 불과한 작은 섬으로 군산시에서 약 40km 떨어진 고군산군도(古群山群島)01의 최서단에 위치, 행정구역상 전북 군산시 옥도면 말도리에 편재되어 현재 말도(末島)로 불리고 있었다.  

 최서단에 위치한다 하여 말도로 불리우는 이곳은 1907년 3월에 상제님께서 김광찬과 함께 내왕하신 곳이기도 하다. 게다가 상제님께서는 만경 남포에서 이곳을 향하시면서 김갑칠과 김형렬에게 “내가 지금 섬으로 들어가는 것은 천지공사로 인하여 정배됨이니 너희들은 성백(成伯)의 집에 가서 그와 함께 四十九일 동안 하루에 짚신 한 켤레와 종이등 한 개씩을 만들라. 그 신을 천하 사람에게 신게 하고 그 등으로 천하 사람의 어둠을 밝히리라.”(공사 2장 1절)고 말씀하셨다.  

 상제님께서 말점도에서 천지공사를 보시며 천하 사람의 어둠을 밝힌 연유는 무엇 때문일까? 한동안 곰곰이 생각에 잠겨 궁리한 결과 말점도가 조선시대에 관리들의 유배지로 유명하였음이 머릿속을 스쳤다. 최서단에 위치한 이곳 유배지에는 나라에 대한 충성과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상소했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유배된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진멸지경에 이른 삼계(三界)를 광구하시고자 천지공사를 행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제님께서는 “내가 천지공사로 인하여 정배된다.” 하시며 말점도로 들어가셨을 때 그 심정은 어떠하셨을까? 

 배 멀미까지 잊은 채 이런 저런 생각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는데, 갑자기 높아진 거친 파도는 궁리 중에 빠져있던 나를 깨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배는 말도에 다다르고 있었다. 1시간 40분 만에 도착한 말도 선착장에서 가장 먼저 우리를 반겨준 것은 우뚝 솟은 돌산의 한 그루 천년송(千年松)과 하얀 등대였다.  

 작은 섬이긴 하지만 해변가에 물결문양으로 파도를 연상케 하는 웅장한 지층은 말점도의 운치를 더하는 듯했다. 이 지층은 ‘군산 말도 습곡구조’라 하여 약 5억 9000만 년 전인 고생대 선캄브리아기의 지질구조로, 중생대의 쥐라기 시대가 2억 년 전인 것을 보면 보존가치가 높아 2009년 6월 9일에 천연기념물 제501호로 지정되었다 한다. 

 가파른 해변가 절벽 밑으로 자동차 한 대 다닐 정도의 길이 마을로 이어져 있었다. 우리 일행은 마을로 들어가면서 말도에서 가장 오래 사신 분의 댁이 어딘지 같이 동승했던 마을 사람에게 물어보았다. 안내를 받아 찾아간 곳은 말도 이장 부친이신 고동완(77세)옹이셨다. 

 그분의 말씀에 의하면 말도에서 맨 처음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중엽으로 서울에서 심판서라는 사람이 귀향을 와서 정착을 하면서부터 차츰 인구가 늘어나 마을을 이루었다고 한다. 말도를 예전에는 ‘끝도’ 또는 ‘끝점’이라고 불렀다 하며, 마을 위에는 심판서를 모시는 영신당(靈神堂)이 있는데 이곳에서 지내는 당산제에 얽힌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말도로 귀향 온 선비가 조종에서 혐의가 풀려 다시 돌아오라는 통보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배를 타고 나가려고 하면 풍랑이 일어 되돌아오기를 10여 차례 했다고 한다. 어느 날 꿈에 어떤 노인(심판서)이 나타나 자신이 가지고 있던 단검을 모시고 사당을 지으라는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사당을 지어 단검을 모시고 제를 올리니 풍랑이 일지 않고 무사히 육지로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말도에는 마을에서 가장 청렴한 사람을 뽑아 영신당을 관리하고 제사용 돼지를 새끼 때부터 손수 기르게 했다고 한다. 일 년에 두 번 동짓날과 봄에 200근이 나가는 돼지를 잡아 당산제를 지냈다고 한다.  

 우리는 이장댁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당산제를 지냈던 영신당을 찾아가 보았다. 올라가는 산길에는 좌우로 시누대 숲이 있어 마치 동굴을 통과하는 것 같았다. 시누대 숲을 지나 올라가 보니 영신당은 무너지고 잔해만 남아 있었다.상제님께서 1907년 3월 초에 말점도로 가셨고 영신당은 그해 4월에 중창을 했다고 한다.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모르나 상제님께서도 이곳을 다녀가시지 않았을까. 이후에 기독교가 마을에 들어오면서 당산제는 사라지고 건물은 5~6년 전에 무너져 현재는 건물의 잔해만 남아 있다. 영신당에 모셔둔 단검은 전북대 어느 교수가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산에서 내려와 처음 도착할 때 보았던 말도 등대를 찾아갔다. 등대 아래 우뚝 솟은 바위산 위의 천년송은 이 섬의 명물인데, 다른 나무는 찾아볼 수 없고 단지 소나무 한 그루만 살아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하고 사육신 중 한 분인 성삼문의 옛 시조가 저절로 나왔다. 

   

이 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 하리라  

   

 ‘독야청청하다는 말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들었다. 실제로 천 년을 살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700년 되었다는 말도 있으니 족히 수백 년은 된 듯하다. 상제님께서도 이곳에 와보셨을 것이다. 단단한 바위틈에 뿌리를 박고 모진 풍파를 맞으며 의연히 서 있는 모습은 진정 도인의 모습을 닮았다. 그리고 『전경』에 “불과 물만 가지면 비록 석산바위 위에 있을지라도 먹고 사느니라.”고 하신 상제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언덕길을 따라 등대를 찾아가니 관리소장이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었다. 안내를 받아 등대 위로 올라가 내려다 본 말도의 전경은 가히 한 폭의 그림 같았다. 이곳에 최초로 등대가 세워진 것은 1909년이라고 하니 상제님께서 말도에서 공사(1907년 3월)를 보시고 기유년에 화천하신 해이다. 상제님께서도 말점도로 들어가시면서 종도들에게 “그 등으로 천하 사람의 어둠을 밝히리라.”고 말씀하신 것이 생각났다. 등대는 어두운 밤바다에서 풍랑을 해치며 운행하는 배들이 길을 잃지 않도록 불을 밝혀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등대 아래 선착장에는 풍랑으로 지친 배들의 피신처가 마련되어 거센 파도를 피할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었다. 

 오후로 접어들면서 파도는 점점 높아지고 물살은 거세게 일었다. 오늘 육지로 나가지 못하는가 하여 걱정을 하다 다행히 군산에서 배가 출항했다는 소식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바삐 등대에서 내려왔다. 오후 3시 30분이 되자 아침에 타고 왔던 배를 다시 타게 되었다. 

 배를 타고 출항하면서 서쪽 바다의 끝 섬인 말도를 바라보았다. 절벽 위의 하얀 등대와 바위섬 위의 천년송을 바라보며 생각해본다. 어두운 밤바다에 불을 밝혀 길 잃은 배들을 안내하고 오가는 선박들의 길잡이를 하는 등대와 같이 재리에 눈이 어두운 이 세상에 후천선경의 희망의 빛을 밝히고, 천년송과 같이 어떠한 풍파에도 흔들림이 없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도성덕립(道成德立)을 향해 나아가는 수도인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해본다.  

   《대순회보》 1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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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고군산군도는 63개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고 유인도는 그중 16개의 섬으로 관광지로도 유명한 곳이다. 그중에 무녀가 너울너울 춤추는 형상을 하고 있다는 무녀도, 신선이 머물러 놀다갔다는 선유도, 장사가 나왔다는 장자도, 신라시대 최치원이 이곳에서 글을 읽었다는 신시도, 서북단에서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는 방축도, 해와 달이 합해 있는 형국에 물이 맑다는 명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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