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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智異山)
<교무부>
지리산은 우리나라 남부 지방을 동서로 나누는 소백산맥을 끝머리에 크게 솟구친 산으로 높이 1,915m 국립공원 제 1호로서 산세는 유순하나 산역(山域)의 둘레가 800여리에 달하고, 행정상으로 전라북도 남원군, 전라남도 구례군, 경상남도 산청ㆍ함양ㆍ하동군 등 3도 5군에 걸쳐있다. 이 산에서 발원한 낙동강과 섬진강 지류들의 강력한 침식작용으로 계곡은 깊은 협곡으로 되고 산지 정상부는 둥근 모양을 나타내는 험준한 산세를 나타낸다. 그래서 이들 계곡이 교통로로 이용되고 있으며, 산지의 주변에는 동쪽에 산천, 남쪽에 하동ㆍ광양, 서쪽에 구례, 북쪽에 남원ㆍ함양 등의 도시와 계곡에 마을이 발달하고 있어 원상(圓狀)을 이룬다.
지리산에는 이칭(異稱)과 별칭(別稱)이 많다. 한자로는 지이산(智異山)이라 쓰지만 읽기는 지리산이라고 한다. 실제로 지리산은 그 음대로 지리산(地異山)이라 쓴 기록도 많다. 원래 『智異』는 지리라는 우리말의 음사(音寫)일 뿐이며 지리는 산을 뜻하는 「두래」에서 나온 말인데, 두래는 (달)의 분음(分音)으로서 「두리」∙「두류」등으로 변음하여 「頭流」ㆍ「豆流」ㆍ「頭留」ㆍ「斗星」ㆍ「斗流」등으로 한자를 붙여 지명이 된 것이 많다. 이 중 두류(斗流)는 백두산의 맥세(脈勢)가 흘러 내려서 이루어진 산이라는 설명도 있다. 이러한 지리산(智異山), 두류산(頭流山) 등이 지리산의 다른 이름이다.
한편 지리산 하면 「전경」에서도 도주님께서 쌍계사에서 공사 보신 구절이 있다. 교운 2장 60절에 보면 『박한경이 이해 八월 충청도 지방을 두루 다니면서 교화에 힘을 다하고 있던 중에 급히 도장으로 귀환하라는 도주님의 분부를 받고 류철규와 함께 돌아오니 도주께서 지리산 쌍계사(智異山 雙磎寺)에 갈터인데 배종할 것을 분부하시니라. 다음날에 박한경ㆍ류철규ㆍ한상덕ㆍ김재복이 도주를 모시고 절에 이르러 정하신 바에 따라 청학루(靑鶴褸)의 뒷계단 위에 있는 영주각(瀛洲閣)의 정결한 방으로 주지의 안내를 받았도다. 도주께서 이렛동안의 공부를 마치고 생각하였던 바와는 달리 쉽게 마쳤다고 하시고 「趙鼎山來智異應 一布衣來白日寒」이라고 말씀하셨도다.』에서 보듯 지리산은 우리 道와 무관하지가 않다.
우리나라의 기본 골격은 백두산으로부터 지리산에 이르는 산맥계가 중추가 된다는 인식은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다. 이것은 우리나라 전래의 지리 사상인 풍수지리설에서도 받아들인 바이거니와 실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전혀 이의 없이 전수되어 온 땅에 대한 우리 민족의 기초적인 관념인 것이다. 이것을 가장 극명하게 밝힌 이가 신경준(申景濬)이다. 신경준은 그의 <산수고>에서 산의 족보라고 할 수 있는 산맥세의 산경표(山徑表)를 만들었다. 백두산을 시작으로 하여 지리산에서 끝나는 맥세를 백두대간(白頭大幹)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지리산은 민족의 진원지이며 영산으로 추앙 받는 백두산의 한반도 남부를 대변하는 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이것이 풍수사상에서는 민족적인 주체의식을 상징하는 의미를 띠게 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실상사』의 풍수전설이 아니겠는가 한다. 백두산 기맥(奇脈)이 이곳을 지나 일본으로 연결되는데 그 지기(地氣)를 끊어놓기 위해 창건한 사찰이 바로 「실상사」라는 것이다. 예컨대 경내 약사전에 봉안된 4,000근짜리 무쇠로 제작된 약사여래철불은 높이 2.5m로 좌대 없이 땅바닥에 그대로 모셔져 있다. 이 불상은 지리산 주봉인 천왕봉과 일본 후지산을 일직선상으로 바라보도록 좌정되어 있는데, 맨바닥에 철불을 모신 이유가 일본으로 흘러가는 지기를 막자는데 있다는 것이라 한다. 또 이산은 정감록 신앙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산이기도 한데 <도선비결: 道詵秘訣>ㆍ<삼한산림비기: 三韓山林秘記>ㆍ<남사고 비결: 南師古 秘訣>ㆍ<서계 이선생가장결: 西溪 李先生家藏訣> 등 도참서류에는 대부분 피란ㆍ보신의 장소로 열 군데(이름하여 十勝地라고 한다.)를 제시하고 있는데 그 중 운봉두류산(雲峰頭流山) 즉 지리산이 반드시 포함되고 있다.
『전경』 교법 3장 17절에도 보면 믿음을 교훈 하시면서 피난의 장소가 바로 十勝地중의 하나인 지리산인 것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면 또한 흥미롭다. 『그리고 하루는 종도들에게 지난 날의 일을 밝히시니라.「최풍헌(崔風憲)이라는 고흥(高興)사람은 류훈장(柳訓長)의 하인인데 늘 술에 취해 있는 사람과 같이 그 언행이 거칠으나 일처리에 남보다 뛰어난 지라 훈장은 속으로 그 일꾼을 아꼈도다. 훈장은 왜군이 침입한다는 소문에 민심이 흉악해지는 터에 피난할 길을 그에게 부탁하였으되 풍헌은 수차 거절하다가 주인의 성의에 이기지 못하여 가산을 팔아서 나에게 맡길 수 있나이까 고 물었느니라. 류훈장이 기꺼이 응락하고 가산을 팔아서 그에게 맡겼도다. 풍헌은 그 돈을 받아가지고 날마다 술을 마시며 방탕하여도 류훈장은 아예 모르는 체 하더니 하루는 최풍헌이 죽었다는 부고를 받고 뜻밖의 일로 크게 낙담하면서 풍헌의 집에 가서 보니 초상이 난지라. 그는 하는 수 없이 그의 아들을 위로하고 혹 유언이나 없었더냐고 물으니 그 아들이 류훈장에게 통지하여 그 가족들에게 복을 입혀 상여를 따라서 나를 지리산(智異山) 아무 곳에 장사하게 하라고 전하니라. 이 유언을 듣고 류훈장은 풍헌을 크게 믿었던 터이므로 집에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의논하니 다만 큰 아들만이 아버지의 말씀을 좇는도다. 사흘이 지나 모두들 운상하여 지리산 골짜기에 이르렀을 때 산상에서 상여를 버리고 이곳으로 빨리 오르라는 소리가 들리는 지라. 모두 그 쪽을 바라보니 최풍헌이라. 모두들 반겨 쫓아 올라가니 그 곳의 집 한 채에 풍부한 식량이 마련되어 있느니라. 다시 최풍헌을 따라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그가 가리키는 대로 내려다 보니 사방이 불바다를 이루고 있는지라. 그 까닭을 물으니 그는 왜병이 침입하여 마을마다 불을 지른 것이라.」이르도다.』 이렇듯 이 산은 풍수지리를 믿는 사람들에게 불행에 대한 절대적 피난처로 인식되고 있으며, 희망과 꿈을 부여하는 산중의 산, 명산으로 길이 남아있다.
《대순회보》 53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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