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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淸道) 적천사(磧川寺)
- 도솔암 -
적천사(磧川寺)는 경북 청도읍 원리 화악산(華岳山=일명 방장산) 중턱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이다. 밀양시내에서 청도읍 방향으로 20분 정도 가다보면 원리마을 표지판이 보이고 샛길따라 차편으로 15분정도 올라가면 적천사가 나온다. 적천사를 품고 있는 화악산(932m)은 경상남ㆍ북도의 경계를 가르고 있으며, 태백산맥 남부에 우뚝솟은 준령 중의 하나로 동쪽에는 철마산(鐵馬山, 630m)이 서쪽에는 천왕산(天王山, 619m) 북쪽에는 청도군의 진산인 남산(南山, 860m)이 솟아있어 이 일대가 대산악지대를 이루고 있다. 사기(寺記)에 의하면 적천사는 신라 문무왕 4년(664년)에 원효(元曉)가 수도하기 위하여 토굴을 지음으로써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그러던 것이 흥덕왕 3년(828년)에 심지왕사(心地王師)가 중창하였고, 고승 혜철(惠哲)이 수행한 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고려시대에는 보조국사 지눌(知訥)이 명종 5년(1175년)에 대가람으로 중창하게 되는데 동북쪽에는 영산전을 세우고 오백성중을 모시고 한편, 오백여명의 대중스님들을 상주 수용하면서 불립문자(참선) 수행하게 하여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해 내기도 했다. 이절을 지눌국사가 중창하기 전에는 많은 도적떼가 살고 있었는데, 지눌스님이 가랑잎에 범호(虎)자를 써서 신통력으로 호랑이를 만들어 도적떼를 쫓아냈다는 일화는 일반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산내 암자로는 도솔암(兜率庵), 은적암(隱磧庵), 백련암(白蓮庵)이 있었다고 하나 소실되고 도솔암만이 현존한다. 특히 임진왜란때 건물의 다수가 방화로 소실되었고 현종 5년(1664년)에 왕의 하사금으로 중수하였는데, 이때 사천왕상(四天工像)도 조성하였다 한다. 그후 숙종 20년(1694년) 태허(泰虛)선사가 다시 중건하여 크게 번창하였으나 조선말에 의병들이 이절을 중심으로 크게 일어나게 되자 관병들이 이절의 누각과 요사체 등의 건물을 방화하여 소실돼 현존하지 않게 되었다.
현존하는 건물은 대웅전을 비롯한 천왕문ㆍ조계문이 있고, 대웅전 좌우에 적묵당(寂默堂)과 명부전(冥府殿), 그리고 대웅전 뒤쪽으로 조사전(租師殿)과 영산전(靈山殿)이 있고, 그밖에 독성각(獨聖閣)과 사리탑 등 18기의 고승들의 부도가 있다. 또 절 입구의 거대한 은행나무는 보조국사가 심은 것으로 전하는데, 높이가 25~28m이고 둘레는 11m로써 수령은 800년 내외로 추정되고 있으며, 보조국사가 이 절을 중건하고 난 뒤 지팡이를 땅에 꽂은 것이 자라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한편 이 적천사는 도솔암으로 우리에게 더욱더 알려져 있는 바, <전경 교운 2장 28절>에 보면 『계해년(1923년) 9월에 이를 마치시고 도주께서 10월부터 다음해 2월 중순까지 청도의 적천사 도솔암에 있는 칠성각 뒤에 돌단을 높이 쌓고 24방위를 정하고 천지신명을 응기케 하고…… 석달동안 계속하셨는데…… 공부는 단도수라 하셨으며…… 』라는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지금은 당시 도주님께서 공부하셨던 칠성각은 없어지고 그 자리에 무념정사(無念情舍)와 산신과 칠성 및 독성(獨聖)을 모셔놓은 삼성각(三聖閣)이 자리잡고 있다. 1925년 도주님께서 무극도를 창도하기 이전에 주로 경남 밀양과 청도에 공부하시었는데, 이는 우리들에게 시사해 주는 바 크다 할 것이다.
오늘날 화악산에는 많은 전설이 전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오랜 옛날 천지가 개벽된 흔적을 뒷받침 하는 전설이 있어 오늘에까지 주변 마을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데, 오랜 옛날 화악산에는 국화꽃이 만발했었다. 그런데 언젠가 대규모의 지각변동이 일어났고 그 많은 국화꽃이 흙에 묻히고 말았다. 그것이 세월이 지나 화석이 되었다 한다. 지금도 그 사실을 뒷받침이나 해주는 듯 국화 화석이 곳곳에 산재해 있는 것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순회보》 5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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