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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항(群山港)을 다녀와서

교무부    2017.02.01    읽음 : 1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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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항(群山港)을 다녀와서 

 

 

연구위원 박정욱 

   

 

 

 서해 중부의 큰 항구 도시 군산(群山)은 상제님께서 공사(公事)01를 보셨던 곳이다. 그 내용과 의미는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조금이나마 그 뜻을 헤아려보기 위해 군산의 역사와 일제강점기 때 당시의 상황을 잘 전시해 놓은 군산근대역사박물관과 군산항을 찾았다. 군산은 관내에 군산항, 미제(米堤)저수지, 새만금간척사업지구가 있다. 서쪽은 황해와 동쪽은 익산군 그리고 남쪽은 만경강을 경계로 김제시와 접하고 있고, 북쪽은 금강을 경계로 충남 서천군과 마주하고 있다.  

  

 

  차로 몇 시간을 달려 군산시 장미동(藏米洞)에 위치한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 도착했다. 박물관은 항구 도시에 걸맞게 배의 형태로 지어져 있었고, 박물관 뒤쪽으로는 군산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우선 군산의 역사를 알아보기 위해 박물관 쪽으로 이동했다. 박물관은 총 3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1층은 해양물류역사관으로서, ‘국제무역항인 군산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군산의 삶과 문화’, ‘해상유통의 중심지로서 지리적 중요성과 조운제도’, ‘근현대의 무역’, ‘군산의 바다 문화’라는 주제로 각 공간에 관련 유물과 영상을 배치하여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 있었다.  

 

  그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면, ‘군산’이란 지명은 현재 옥도면(沃島面)에 있는 ‘고군산열도’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군산진지도』의 고적조(古蹟條)에는 “군산진은 처음 군산도에 있었다. 왜구들이 본진을 피해 돌아서 연안으로 침입하므로 숙종 36년(1710)에 이 진을 연안으로 옮기고 군산진이라 불렀다.”라고 기록이 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만경현 소속, 현재 옥도면 선유도리에 있던 군산진을 1710년에 영화동과 해망동 부근에 있던 진포(鎭浦)로 이전하면서 ‘군산’이란 지명까지 옮겨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당시 군산진에는 중함 4척, 별함 4척의 전함과 군사 461명, 초공(梢工) 4명이 근무하였으며 정6품인 수군 만호가 있어 관리했고, 이후 ‘군산’은 군산창(群山倉)·군산진(?山鎭)·군산진(群山津) 등으로 고지도에 기재되어 현재에 이르며 한때 ‘군창(群倉)’이라고도 불렸다.

 

  

 

  군산은 삼국시대 백제 영역의 마서량현(馬西良縣), 부부리현(夫夫里縣), 시산군(屎山郡)이 있었고,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마서량현은 옥구현으로, 부부리현은 회미현(澮尾縣)으로, 시산군은 임피군(臨陂郡)으로 지명이 변경되었다. 조선시대에 군산은 옥구현과 임피현 지역만 속하다가, 이후 두 현이 옥구부, 군산부로 변경, 1914년 임피군이 옥구군에 통합, 1948년 군산부가 군산시로 개편, 1995년 군산시와 옥구군이 통합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백제와 고려시대 때에 군산도[선유도(仙遊島)]는 중국왕조들과의 활발한 교류와 국제외교의 관문으로서 해상교통의 중심역할을 했고, 고려 때에는 백성의 세곡(稅穀)을 저장·운반하는 조운(漕運) 창고로서 진성창(鎭成倉)이 임피현 창안(현재 군산시 개정면 지역으로 추정)에 전국 12조창(漕倉) 중 가장 큰 규모로 설치되었다. 조선 초(1487)에는 진성창을 대신하여 옥구현 북면(현 박물관 인근 지역)에 군산창(群山倉)이 설치되어 옥구, 전주, 진안, 장수, 금구, 태인, 임실 등 7개 읍의 세금을 보관하였고, 이후 조선시대에 군산창은 지리적 이점과 전국 최고의 곡창지대인 호남평야의 세곡 때문에 호남의 중요한 조운창고로 거듭났다. 더불어 군산포도 호남 최고의 항구가 되면서 군산은 경제적,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되었다 한다. 

  

  

 

  1층 해양물류역사관을 다 둘러본 후 2층, 3층으로 이동했다. 2층은 기증자 전시실과 옥구농민항쟁에 대한 전시실이 있었고, 3층은 일제의 통제 속에서 살았던 군산 사람들의 모습을 재현한 근대생활관이 있었다. 근대생활관은 ‘군산항 개항의 역사적 배경’, ‘농토수탈의 현장’, ‘일제강점기 군산 최고의 번화가 영동상가’, ‘일제의 침탈에 대한 민중의 저항’, ‘현존하는 근대 건축물’ 등의 주제로, 각 연출공간에 1930년대 군산의 모습을 재현하여 개항 이후 군산의 역사와 당시의 분위기 그리고 상황을 알 수 있도록 전시되어 있었다.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 군산의 역사를 간략하게 설명하면, 군산항은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부산, 원산, 인천, 목포, 진남포, 마산에 이어 1899년 5월 1일 일제에 의해 강제로 개항되었다. 호남 제일의 도시가 되어버린 군산항은 개항 당시 세관을 중심으로 한 넓지 않은 어촌이었다. 개항과 더불어 해안 일대에 조계지(租界地: 개항장에서 외국인이 자유로이 통상, 거주하며 치외법권을 누릴 수 있도록 설정한 지역)가 설치되어 일본인의 거주 숫자는 점차적으로 늘어갔고, 개항 이후 군산은 일본제국주의의 필요에 의해 종속되어 성장했다. 군산의 성장과 함께 식민지 수탈로 몰락한 충청·전라·경상도의 농민과 지식인, 자산가들은 새로운 삶터를 찾아 군산으로 모여들었고, 다양한 조직을 만들어 자신들의 생존권과 나라를 빼앗기고 차별받는 동포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 (구)군산세관

 

  일본은 원활한 쌀 수탈을 위해 1908년에 전주-군산간 포장도로(신작로, 26번 국도)를 전국 최초로 만들고, 1912년에 군산-익산-김제-정읍 순으로 철도를 만들어 호남 최대의 상업도시로 성장시켰다. 1914년 치정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에서 간행한 『군산안내』를 보면 군산은 전국 12부 중 상업항구도시로서 총수출량이 부산 다음인 전국 2위, 총수입량은 전국 4위였는데, 이 수출품은 주로 쌀이라 한다.  

   군산을 이처럼 급격히 항구도시로 성장시킨 배경은 호남, 충청의 농토를 빼앗아 일본의 것으로 만들어 가난한 일본 농민을 옮겨와 살게 하고, 호남, 충청의 쌀을 일본으로 강제 수출시켜 일본의 쌀 부족을 보충하고자 함이었다. 따라서 전북 지역은 가장 많은 일본인 농장이 모여 있던 지역으로 일본 식민지 정책의 중심 터전이 되었다.  

 

 

  

1926년말 30정보(町步: 1町은 3,000평) 이상의 규모를 가진 일본인 농장수를 보면 전북이 1위였다. 일본인 지주들의 가혹한 소작료 강제 징수로 빼앗긴 곡물은 모두 군산부두로 집결되었는데 쌀의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일본인들의 농장은 대개가 철도인근에 설립되었으며 수리조합을 통하여 저수지와 수리시설을 정비했다. 일본인 농장주는 식민권력의 지원을 받으면서 생산력의 증진과 농민의 노동력 수탈로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다.  군산은 이처럼 광복 전까지 일제의 쌀 수탈 전초기지로서 물류유통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박물관을 둘러본 후 바로 옆 군산세관의 역사를 볼 수 있다는 (구)군산세관 건물로 이동했다. 세관 건물은 개항 이후 1908년에 지어져 현존하는 건물로, 지금은 세관 전시실로 이용되고 있었다. 전시실에는 군산 세관에 관련된 사료와 사진 등을 볼 수 있었는데, 특히 개항 이후 군산항의 여러 모습을 담은 사진들은 그때 당시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했다. 

 보잘 것 없는 작은 어촌인데 군산항이 쌀 수탈의 전초기지로서 일제의 강압적 통제를 받으며 발전하다가 해방 후 침체기를 겪었다. 1979년 이후 군산외항에 6개의 부두와 국제여객부두가 준공되면서 수출입화물이 중국, 미국, 캐나다, 인도네시아, 뉴질랜드, 일본 등의 지역에까지 운송되는 국제무역항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군산의 과거와 현재 모습을 알게 되면서 『전경』에 상제께서 군산에 가셔서 공사(公事)를 보신 내용이 생각났다.  

 

  상제께서 군산에 가셔서 공사를 보실 때 “지유군창지 사불천하허 왜만리 청만리 양구만리 피천지허 차천지영(地有群倉地使不天下虛 倭萬里淸萬里洋九萬里 彼天地虛此天地盈)”이라고 써서 불사르셨도다. (공사 3장 30절)  

 

  이 구절의 의미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지금 군산의 모습과 한때 군산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군창(群倉)이라는 한자의 의미[무리 군, 창고 창] 그리고 지금 진행 중인 군산의 새만금간척사업지구에서 앞으로 군산이 국제 물류유통의 중심지로서 큰 역할을 할 것이라는 의미로 생각을 해보았다.  

   
 ▲ 부잔교(뜬다리)

 

  이어 박물관 뒤쪽, 군산의 초기 개항 자리였다는 군산항 부두 쪽으로 향했다. 부두가에는 개항 이후 설치되었던 부잔교(浮棧橋: 뜬다리)가 있었다. 부잔교는 조석 간만의 차가 심한 곳에서 조위(潮位)02에 관계없이 선박이 접안할 수 있도록 부함을 여러 개 연결하여 부두 기능을 갖도록 한 부체(浮體)로 군산항에서는 꼭 필요한 다리였다. 그리고 개항 이후 부두 쪽으로는 물류들을 보관하는 대형창고와 군산의 마지막 역인 군산항역이 있었다고 하는데, 개항 100주년 광장 건립 후 철거되고 옆으로는 그때 당시 사용했던 철로만이 쓸쓸히 자리하고 있었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부잔교 주위로 보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닷물의 유속이 다른 곳과는 달리 빨라 보였다. 잠시 일제의 강제 개항 이후 받았던 식민지 수탈의 고통과 상제님께서 보신 공사(公事)처럼 앞으로 더욱 발전된 군산, 군산항을 생각해보며 일정을 마무리했다. 

《대순회보》 135호

 

  

<참고 자료> 

『한국지명유래집』, 국토해양부 국토지리원. 

군산근대역사박물관 홈페이지. 

군산시청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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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군산(群山)과 관련된 공사(公事)는 공사 1장 17절의 수륙병진 공사와 공사 2장 1절의 말점도 공사 그리고 공사 3장 30절 등에서 볼 수 있다. 

02 풍랑이나 놀, 항만의 고유진동 등에 의한 단주기의 해면승강을 제외하고 일정한 기준면에서 해면을 측정했을 때의 높이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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