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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곡마을과 안동 김씨 종도들

교무부    2018.09.12    읽음 :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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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위원 신상미 

 

 


▲ 수리개봉과 제비봉 사이의 동곡마을 

 

  2009년 무더운 여름날, 김형렬(金亨烈) 종도의 손자인 김현식 씨와 인터뷰하기 위해 처음으로 동곡(銅谷)마을을 찾았다. 이때부터 2014년까지 이곳과 관련한 『전경』의 인물과 지명을 조사하기 위해 여러 차례 들렸다. 금평저수지(金坪貯水池)01 입구에서 바라본 동곡마을은 우뚝 솟은 제비봉(帝妃峰)과 수리개봉(水利開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을 이루고 있었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이어지는 깊고 짙은 쪽빛의 금평저수지를 따라 마을로 들어가다 보면 상제님을 신앙하는 한 교단인 증산법종교(甑山法宗敎) 본부가 보인다. 그곳을 지나서 수리개봉 아랫마을에 다다르면 동곡약방(銅谷藥房)과 그 바로 앞에 증산법종교에서 분파된 청도대향원(淸道大享院)을 볼 수 있다.

 

  동곡은 『전경』에 나오는 중요한 지명 중 한 곳으로 52회 나오며, ‘구릿골’이라는 명칭으로는 16회 나온다. 이 마을은 상제님을 진심으로 믿고 따랐던 김형렬 종도의 집과 상제님께서 화천(化天) 하신 장소인 동곡약방이 있는 곳으로 의미가 남다르다. 특히 동곡마을은 안동 김씨 집성촌02으로 유독 상제님을 따랐던 안동 김씨 종도가 많이 살았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전경』에 나오는 동곡마을과 그곳에 살았던 안동 김씨 종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동곡마을은 상제님 재세 시 전북 전주군(全州郡) 우림면(雨林面)에 속하였으며, 현재는 전북 김제시(金堤市) 금산면(金山面) 청도리에 속하는 마을로 ‘구리골’, ‘도기촌(陶器村)’ 등으로 불린다.03 금평저수지 주변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 ‘오리알 터’라고도 한다. 이는 저수지에 오리가 많은 것과는 관계없이 원래 ‘땅의 중심’으로서 모든 것이 여기로 모인다는 뜻으로 ‘오래(來) 터’라 불리다가 ‘오리알 터’가 되었다고 한다.04

  동곡마을을 감싸고 있는 구성산(높이 488m)의 수리개봉과 제비산(높이 308m)의 제비봉은 상제님께서 “강감찬은 벼락 칼을 잇느라 욕보는구나. 어디 시험하여 보리라”05라고 말씀하시며 번개를 일으키셨던 봉우리이다. 김형렬 증손녀 김봉선 씨는 어릴 때부터 구성산의 수리개봉을 ‘설지봉’이라 불렀다고 하지만 그 이유는 모른다고 했다. 김형렬 종도는 임인(1902)년에 제비산 너머에 있는 하운동의 안동 김씨 재실에서 살고 있었다. 그러다 임인년과 을사(1905)년07 사이에 동곡마을로 이사하여 상제님을 정성껏 모시게 되는데, 정확하게 언제 이사했는지는 알 수 없다.

  『전경』에 등장하는 안동 김씨 성을 가진 종도는 김형렬(1862~1932), 김갑칠(金甲七, 1881~1942), 김준상(金俊相, 1878~1966), 김자현(金自賢, 1874~1927), 김성천(金成天, 1860~?), 김자선(金子善, 1858~?)08, 김보경(金甫京,1861~1934)09 등이다. 이 중에서 동곡마을에 살았던 종도는 김형렬, 김갑칠, 김준상, 김자현, 김성천이다.

 


▲ 1979년에 간행된 『안동김씨대동보』를 참고하여 작성한 동곡마을 안동 김씨 종도 가계도

 

  1979년에 간행된 『안동김씨대동보』를 보면, 이 다섯 명의 종도는 구안동 김씨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자손이다. 가계도를 보면 알 수 있듯 이 김형렬 조부는 김숙명이며, 김형렬의 부친은 김숙명의 둘째 아들 김석필이고, 김성천의 부친은 김숙명의 첫째 아들 김석범이다. 그러므로 김형렬과 김성천은 4촌지간이다. 형제인 김준상과 김갑칠의 부친은 김숙명의 셋째 아들 김기범이다. 그러므로 김준상과 김갑칠 또한 김형렬과 4촌지간이다. 김자현 종도는 김형렬과 10촌지간이다.

  김형렬 종도의 출생은 족보에 임술(1862)년 5월 5일이라 기록되어 있으나 제적등본에는 을묘(1855)생으로 기록되어 있다.10 자손의 증언에 따르면 임술(1862)생이라고 한다. 김형렬 종도의 본적은 현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597번지이다. 상제님께서는 동곡약방이 마련되기 전에는 김형렬의 본가에서 주로 머무셨다. 동곡약방을 차리신 후에 김형렬의 본가에서 동곡약방으로 왕래하실 때 뒷문을 자주 사용하셨다고 한다.11 뒷문으로 나가면 바로 동곡약방이다.

 


▲ 상제님께서 머무셨던 김형렬의 본가

 


▲ 상제님께서 김형렬 종도 본가에 계실 때 동곡약방으로 왕래하셨던 뒷문

 

  상제님 최초의 종도인 김형렬이 본격적으로 상제님을 모신 때는 대략 임인(1902)년이다.12 그러므로 김형렬의 안내로 상제님을 뵙게 된 김준상과 김갑칠 형제는 1902년 이후에 상제님을 따랐을 것이다. 아우인 김갑칠은 임인(1902)년에서 갑진(1904)년 사이로 추측되고13 형인 김준상은 정미(1907)년쯤에 상제님을 따른 것으로 추측된다.14 동곡약방은 김준상 부인의 발바닥에 종창이 나서 위중해지자 상제님께서 병을 치료하신 후 김준상의 방 한 칸을 수리하여 마련되었다.15

 


▲ 동곡약방이 있었던 김준상 종도의 본채 (2003년 촬영)와 상제님께서 머무셨던 동곡약방 실내 (2003년 촬영)

 

  동곡약방의 옛 모습은 현재 그대로 남아 있지 않다. 당시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재현해보기 위해 당시의 집 구조에 대해 알아보았다. 김준상 종도의 본채는 부엌 하나에 방이 세 개였다. 그중에서 방 하나를 동곡약방으로 사용한 것이다. 당시는 사랑방이 있는 집이 거의 없었는데 동곡약방 맞은편에 사랑방이 있었다고 한다. 김준상 종도 집 이외에 그 주변으로 집이 3채(김동식, 김갑칠, 서백일의 집)가 더 있었다. 상제님 화천후 동곡약방으로 사람들이 많이 오갔는데, 치성 때가 되면 김갑칠 종도 집에서 음식을 마련하여 동곡약방에서 치성을 모셨다고 한다. 김갑칠 종도 본채에 대한 명확한 구조는 모르지만, 본채 아래에 행랑채가 있었다고 한다. 김갑칠 종도 본채에는 동곡약방으로 통하는 대문이 있었으며, 김동식 씨 집과 행랑채 사이에는 울타리가 없었다고 한다.16 지금은 높은 담장이 가로막고 있다. 김준상 종도의 묘는 그의 손자(김진식) 집 바로 앞에 보이는 제비산 아래에 있다.17

 


▲ 상제님 재세 시 동곡약방 배치도

 

  때나 화천하시기 전에 상제님 곁에서 잘 보필했던 인물이다. 성품이 불같았던 김갑칠18은 상제님께 응석하여 고집을 부리기도 하였으나19 김형렬과 함께 천자부해상 공사20, 사명당 공사21, 진묵의 초혼 공사22, 말점도에서의 공사23, 신방축 공사24 등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상제님을 모셨다. 그의 묘는 2012년에 화장하여 부인의 묘와 합장한 후 ‘조양월’이라는 식당 맞은편 제비산 아래에 있다.25

  김자현 종도의 증손자인 김용희 씨 증언에 따르면 김자현 종도가 몸이 많이 안 좋았을 때 김형렬 종도의 소개로 상제님을 뵙게 되었다고 한다. 상제님께서 지시하신 말씀대로 하여 병이 낫자 따르게 된 것이다.26 김자현 종도가 상제님을 따른 시기는 계묘(1903)년 전후로 추정된다.27 김자현은 상제님께서 백의군왕 백의장군의 도수28를 보실 때 참여한 종도로 고부화액(1907년 겨울)을 겪으면서도 상제님을 따랐으며29 상제님께서 화천하실 당시에 남아 있었던 종도 중의 한 사람이었다.30 그는 운장주를 짓는 공사31, 액을 운장주와 태을주로 푸는 공사32, 상제님께서 박순여를 살려주시는 일 등에 참여하였다.33 상제님께서는 화천하시기 전에 김자현 종도를 대동하여 처족(妻族)을 돌아보셨고,34 김자현 종도 노모의 관 속에 누워보기도 하셨다.35

  『전경』의 예시 37절을 보면 상제님께서 김자현 종도에게 그의 방이 후에 반드시 약방이 될 것이라고 일러 주시는 내용이 나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옛집은 현재 금평저수지 아래에 잠겨 있다. 김자현의 증손자인 김용희 씨는 옛집이 그리워서 집에 있었던 기둥이며, 자재를 자신의 집에 보관하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김자현 종도의 옛집은 조양월 식당에서 1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김용희 씨의 집에서 정면으로 잘 보이는 위치에 있었다. 김용희 씨의 증언에 따라 김자현 종도의 옛집 배치도를 그려보았다.36 당시의 집 구조를 보면 꽤 큰 집이었다. 김자현 종도의 묘는 동곡마을에서 차로 15분 거리인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 1길에 있다.

 


▲ 김자현 종도 옛집 구조

 


▲ 김성천의 나물밭(행록 2장 21절) (금산면 청도리 589번지 사진)

 

  행록 2장 21절에 나오는 김성천(金成天)의 자는 성천(聲天)이며 족보명은 김대회(金大會)이다. 『전경』 내용으로는 그가 종도였는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김형렬과 4촌지간이고, 동곡마을에 가뭄이 들었을 때 상제님께서 그를 도와주신 것을 보면 상제님을 따르는 인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김성천의 나물밭 위치는 2009년에 김형렬 종도의 손자인 김현식 씨를 통해 알 수 있었다. 김형렬 종도의 본가에서 마을 입구방향으로 내려오는 길 좌측에 있다. 정확한 조사를 위해 토지대장을 살펴보니 1914년에 청도대향원 근처인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589번지(모악7길 169-9) 땅이 김성천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 김성천의 명의로 된 나물밭(589번지)의 지적도

 

  동곡마을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동곡약방이라고 할 수 있다. 상제님께서는 이곳에서 삼계(三界)를 개벽하고 창생을 구제하기 위해 천지공사를 행하셨다. 또한 이곳에서 태양을 멈추게도 하시고,37 죽은 김사명의 아들 성옥을 살리시기도 하셨다.38 앉은뱅이를 일어날 수 있게도 하셨으며,39 김갑진의 문둥병을 고치시는 일40 등 여러 권능을 보여주셨다. 천지공사를 마치신 상제님께서는 기유(1909)년 6월 24일 이곳에서 화천하셨다. 상제님을 모신 초분41 장소는 동곡약방에서 남서쪽 방향으로 구성산 아래에 있다.

  동곡약방에서 상제님을 모셨던 김형렬의 본가를 지나 초분 장소로 가는 길에 문득 『전경』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42 화천하시기 전날(6월 23일) 상제님께서 약방 마루, 뜰, 싸리문밖에 번갈아 눕고 김형렬에게 업혀 그의 집에 가서 누우셨다가 다시 약방으로 돌아오시기를 네다섯 번반복하신 일 등의 일련의 행동에 대해서는 그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쉬우니라. 몸에 있는 정기를 흩으면 죽고 다시 합하면 사나니라”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 이는 화천을 암시하신 것으로 생각한다.

  상제님께서는 김형렬에게 “하도낙서지인지감 김형렬(河圖洛書知人之鑑金亨烈) …”43이라 하셨는데, 이는 김형렬이 사람의 성품이나 능력을 잘 알아보는 식견이 있다고 평하신 것이라 짐작된다. 그리고 상제님께서는 김형렬이 금전이나 권세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따르고 있다는 사실을 아셨다.44 김형렬은 상제님의 이러하신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변하지 않는 진실한 마음으로 동곡마을뿐만 아니라 다른 마을에 사는 이웃들까지도 상제님을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보필했던 종도이다. 김갑칠 종도는 진묵의 초혼 공사에서 의식을 잃어 숨을 잘 쉬지 못하는 상황45을 겪으면서도 김형렬, 김준상 종도와 함께 상제님을 따랐다. 김자현 또한 고부화액을 겪었음에도 상제님을 원망하지 않고 김형렬 종도와 끝까지 상제님 곁에 있었던 종도이다.46 그런 그에게 상제님께서는 “네가 나를 믿느냐”고 다짐하시며, 지성으로 믿는다는 김자현 종도에게 일을 행하고 돌아올 것이니 믿고 기다리라고 당부하셨다.47

  천지공사에 참여한 안동 김씨 종도들이 살았던 이 마을에는 아직도 그 자손들이 살고 있다. 당시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상황을 겪음에도 불구하고 상제님에 대한 믿음으로 지성껏 상제님을 모신 종도들의 마음을 자손들을 통해서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들의 옛 자취가 남아 있는 동곡마을을 둘러보며 “진실로 마음을 간직하기란 죽기보다 어려운 것”48이라고 하신 상제님의 말씀을 되새겨 본다.

 

《대순회보》 21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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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1957년 1월 1일 착공하여 1961년 4월 30일 준공된 농업 관개용 저수지로 모악산(母岳山)에서 내려오는수 량으로 인해 마르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다. 동곡마을은 모악산 금산사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다.

02 1979년에 간행된 『안동김씨대동보(安東金氏大同譜)』를 보면 대략 1450년 이후에 안동 김씨 자손들이 청도리靑(道里) 하운동(夏雲洞)과 동곡마을에 정착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두 마을은 현재 차로 10분 정도걸 리는 가까운 거리다. 세월이 지나면서 점차 안동 김씨 집성촌이 되었다.

03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 권 11, (서울: 한글학회, 2003), p.148 참고 .

04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 1. 전북 (서울: 돌베개, 2000), pp.75-76 참고.

05 권지 1장 23절 참고.

06 교운 1장 3절 참고.

07 행록 3장 32절 참고.

08 집의 위치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그의 묘는 동곡마을에 있다.

09 전북 함열군 동일면 회선동(현 전북 익산시 성당면 대선리)에 살았다.

10 1979년에 간행된 『안동김씨대동보』과 1952년에 재제(再製)한 제적등본 참고.

11 신상미, 「김형렬 종도의 행적」, 《대순회보》 108호 (2010), pp.102-103 참고. 김형렬 종도의행 적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대순회보》 참고하세요.

12 교운 1장 6절 참고.

13 행록 3장 10절 참고.

14 제생 21절 참고.

15 제생 21절 참고.

16 김준상 종도의 손자인 김진식 씨 인터뷰(2012. 3. 30)와 김갑칠 종도의 손자인 김민식 씨 인터뷰(201. 35. 18) 내용이다. 어떤 치성이었는지는 잘 모른다고 하였다.

17 손자는 어디를 갈 때마다 대문을 열면 보이는 할아버지의 묘에 항상 먼저 인사를 드린다고 한다. 김준상 종도 묘가 제일 위 오른쪽에 있으며 그 주변으로 김진식 씨의 큰아버지, 큰어머니, 어머니, 아버지의 묘도 있다. 비문碑(文)이 없는 이유를 물었더니 제비산에는 돌을 두면 안 된다고 해서 비문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김준상 종도의 손자인 김진식 씨 인터뷰(2012. 3. 30))

18 김갑칠 종도의 손자인 김민식 씨 인터뷰(2013. 5. 18).

19 권지 2장 31절 참고.

20 공사 1장 17절 참고.

21 행록 5장 15절 참고.

22 공사 1장 15절 참고.

23 공사 2장 1절 참고.

24 공사 3장 31절 참고.

25 김갑칠 종도의 손자인 김민식 씨 인터뷰(2013. 5. 18)와 김형렬 종도의 증손녀인 김봉선 씨 인터뷰(2031. 7. 15) 내용이다.

26 김자현 종도의 증손자인 김용희 씨 인터뷰(2012. 12. 27).

27 행록 2장 21절 참고.

28 행록 3장 53절.

29 행록 5장 19절.

30 행록 5장 36 참고.

31 교운 1장 22절.

32 행록 3장 31절 참고.

33 제생 26절 참고.

34 행록 5장 6절.

35 행록 5장 13절 참고.

36 김자현 종도의 증손자인 김용희 씨 인터뷰(2012. 12. 27).

37 권지 1장 27절 참고.

38 제생 9절 참고.

39 제생 11절 참고.

40 제생 14절 참고.

41 신상미, 「상제님의 성골」, 《대순회보》 139호 (2012), pp.42-47 참고. 상제님 초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대순회보》를 참고하세요.

42 행록 5장 32절 참고.

43 공사 1장 30절 참고.

44 교운 1장 7절 참고.

45 공사 1장 15절 참고.

46 행록 3장 66절 참고.

47 행록 5장 19절 참고.

48 교법 2장 6절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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