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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보수동(寶水洞)을 다녀와서

교무부    2018.09.27    읽음 : 281


본문

연구원 이정만
 
一九四八년(무자년) 九월에 도본부(道本部)를 경상남도(慶尙南道) 부산시(釜山市)에 설치(設置)하시다. (『대순진리회요람』, p.12)
  
도주께서 마하사에서 도수를 마치고 도장에 돌아오시니 여러 사람들이 모여 있느니라. 도주께서 그 자리에서 少年才氣拔天摩 … 道人何事多佛歌의 상제의 글귀를 외우시고 “상제께서 짜 놓으신 도수를 내가 풀어나가노라”고 말씀하셨도다. (교운 2장 48절)

  부산 보수동은 한때 도주님께서 창설하신 태극도(太極道)의 본부(本部)가 있었던 곳이다. 도주님께서 보수동에 도장을 마련하신 것은 1948년이었다.01 그때부터 도주님께서는 회문리 회룡재에 더는 가지 않으시고, 보수동을 중심으로 공부와 포덕 활동을 하셨다. ‘보수동 시기’02는 1956년 11월(음) 본부가 부산 감천(甘川)으로 옮겨지면서 막을 내린다. 우리 일행은 보수동 시기 8년 동안에 있었던 도주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보수동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보수동은 조선 시대에는 동래군 사하면(沙下面) 지역으로 부평동이라 하였는데, 1896년 부산부에 편입되었다. 1914년 부산부 보수정(寶水町) 1·2·3 정목이 되었다가, 1947년 일본식 동명(同名) 변경에 의하여 보수동 1·2·3가로 개칭되었다. 보수동에 도장이 마련되고 이듬해 1949년에는 부산부가 부산시로 승격되었고, 1951년 중부출장소가 설치되며 그 관할이 되었다. ‘중부출장소’라는 이름은 당시 이 지역에 부산시청 등 주요 공공 기관과 금융 기관, 각종 기업체, 주요 소비 시장 및 유통 산업이 집결해 있어서 부산의 중추 지역이라는 의미로 붙여졌다. 1957년에 중부출장소가 중구로 승격되었다. 1959년 부산시 동제(洞制) 개편에 의하여 보수동 1가를 보수 제1동으로, 보수동 2가와 3가를 합하여 보수 제2동으로 하였다. 1963년에는 부산시가 부산직할시로 승격되었고, 1995년 부산직할시가 다시 부산광역시로 승격되며 부산광역시 중구 보수동 1·2·3가가 되었다.03
  보수동은 보수천(寶水川)04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보수천은 원래 법수천(法水川)으로 불렸는데, 부산개항 직후에 법(法)을 같은 의미인 보(寶)로 고쳐 붙여진 지명이다. 법수(法水)의 의미를 불교에서는 ‘중생의 번뇌를 씻어주는 물’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법수천이라는 명칭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보수동에서 멀지 않은 구덕산(九德山, 565m)에 있던 구덕사(九德寺)05의 승려들이나 신도들에 의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06
  여주에서 출발한 지 4시간 정도 지나 보수동 도장에 도착했다. 도장이 위치한 곳은 보수산(寶水山, 169.1m) 아래 부산시 중구 보수동 1가 21-2번지이다. 도장 앞에 이르니 현관 대문 위에는 ‘寶水道庭(보수도정)’이라 새겨진 나무현판이 걸려 있었다. 도장 이름이 보수도정으로 바뀐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도장 규모가 작아 보수도정이라 했다고 한다.07 대문 너머로 보니 마당 안쪽으로 2층 주택이 하나 있었다. 도장 건물로 쓰던 것이다. 아쉽게도 대문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었다. 외부에서나마 도장을 잘 볼 수 있는 장소를 찾아보기로 하였다. 다행히 도장 위쪽에 조망할 수 있는 장소가 있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도장 건물과 그 주변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 보수동 도장 전경 (촬영: 2013년 7월) 

  도장 건물은 파란색 지붕을 한 2층 목조주택이다. 건축물대장을 보면 1층 면적은 69.55㎡(21평), 2층 면적은 37.68㎡(11평) 규모의 건물이다. 보수동 시기 이 건물에서 도의 치성 행사가 이루어졌고, 1955년에는 영대가 모셔졌다. 필자의 생각으론 보수동 시기의 초창기에 도장에서 산 정상 쪽으로 약간 떨어진 또 다른 공부처 ‘산정’이 마련되기 전까지 도주님 공부 장소로도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도주님께서 보수동에 도장을 마련하신 후에는 이전 공부처였던 회룡재에 잘 가지 않으셨고, 더군다나 회룡재는 1950년 한국 전쟁으로 불에 타 소실되었기 때문이다.08 2층 구조의 도장 건물은 본부도장(本部道場)으로 쓰였다고 하기엔 너무나 규모가 작고 초라해 보였다. 도주님께서 당시 얼마나 어려운 처지에서 공부를 해나가셨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도장 건물 왼편으로는 넓고 평평한 바위가 거의 수직으로 펼쳐져 있다. 마치 큰 병풍을 펼쳐놓은 듯했다. 규모는 다르지만 이 바위는 마치 정읍 태인의 무극도장 터 주변에 있는 치마바위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도주님 자제분 말씀에 의하면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도장 입구 쪽에 도주님 가족분들이 거주하셨던 건물도 있었다고 한다.09
 
 

  또 다른 공부처인 산정이 마련된 시기와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도인들 숫자가 늘어나면서 도장 건물이 협소하게 느껴지자 마련하신 것으로 짐작된다. 지금은 지형이 바뀌어서 그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도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고 한다.10 도주님께서 이렇게 공부처를 별도로 두신 것은 무극도가 창도 되기 전 황새마을에 도본부가 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때는 황새마을에서 가까운 통사동 재실을 주요 공부처로 쓰셨다.
  도주님께서 보수동 산정에서 공부하실 때 있었던 일에 관한 내용이 교운 2장 52절 “이해(1954년) 봄 어느 날 도주께서 산정에서의 공부를 멈추고 대청에 나오셔서 ‘앞으로 신도들의 동(動)이 두 번 있으리라’고 말씀하시고 그 주변에 사는 신도들의 사정을 물으셨도다. 이때 박 한경·오 치국·임 규오·박 중하·박 봉상·이 인호 등이 시좌하였도다”라는 구절이다.
 
▲ 보수동 도장과 산정 추정지(출처: 다음 지도) 

  도장이 있던 보수동 일대는 한국 전쟁(1950.6~1953.7) 발발 이후 한동안 태극도 도인들이 집단촌을 형성하고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전쟁으로 민간인뿐 아니라 정부의 모든 기관이 부산으로 피난을 왔다. 전쟁 직전에 40만 명 정도였던 부산의 인구가 1·4 후퇴 후 84만 명을 넘었다. 전쟁 전보다 부산 인구가 거의 2배가 된 셈이다. 피난민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살 집과 생계 수단이었다. 피난민들은 부산항과 부산역 등을 통해 들어와 산비탈이며 다리며 가릴 것 없이 어디든 일단 가족이 살 자리를 잡았다. 거처를 마련한 피난민들은 대부분 판자 조각이나 미군 부대에서 나온 박스와 천, 가마니 따위로 바람과 비를 피할 수 있는 판잣집을 짓고 살았다. 보수동은 당시 피난민들의 주요 주거지 중의 한 곳이었다. 아마도 그때 보수동으로 이주해 온 사람들 상당수는 태극도 도인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보수동 일대의 판자촌이 이때 형성되었다.
  피난민 중 대부분은 하루하루가 힘들고 고단한 생활을 하였다. 그 가운데 일부 사람들은 부산항이나 역에서 특별한 기술이 없어도 할 수 있는 하역 인부나 지게꾼을 하며 하루하루 생계를 이었고, 또 어떤 사람들은 대규모 시장이었던 국제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가족의 생계를 근근이 지탱했다고 한다.11 보수동 도인들의 삶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태극도를 이끌어 나가셨던 도주님께서는 얼마나 어려운 점이 많으셨을까!
  보수동 시기의 이와 같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도주님께서는 여전히 쉼 없이 공부를 계속하셨고, 많은 중요한 행적을 남기셨다. 『전경』에 기록된 도주님의 공부로는 ‘동래 마하사(摩訶寺) 49일 공부(1949년)’, ‘보수동 산정 공부(1954년)’, ‘합천 해인사 3일 공부(1954년)’, ‘공주 동학사에서의 신명 해원 공부(1956년)’, ‘지리산 쌍계사 7일 공부(1956년)’ 등이 있다. 또한, 주요 행적으로는 화양동에서 ‘만동묘 관련 도수 보심(1951·1954년)’, ‘동남풍을 조절하여 보수동 일대의 불을 끄심(1954년)’, ‘해인사에서 다녀오신 후 해인(海印)에 대해 말씀하심(1954년)’, ‘조수(潮水)의 이치에 대해 말씀하심’ 등이 있다.
  보수동 시기에 도주님 관련 행적 외에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사실은 도전님의 행적이다. 도전님께서는 보수동에 도장이 마련되기 전인 1946년에 도(道)를 받으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고향인 충청도 지방을 중심으로 강원도, 경상도 등지에서 포덕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셨다. 그리고 보수동 시기였던 1951년경부터는 지방에서 포덕 활동을 하시는 한편 도주님의 주요한 명을 직접 수행하셨다. 이에 관련한 행적으로는 ‘도주님 명으로 화양동 만동묘를 다녀오심(1951년)’, ‘도주님 명으로 사략 상하권(史略上下卷)·사서삼경(四書三經)의 구판을 구하여 올림(1954년)’, ‘도주님의 합천 해인사(海印寺) 공부에 시종(侍從)(1954년)’, ‘도주님의 공주 동학사(東鶴寺) 공부에 시종(1956년)’, ‘도주님의 지리산 쌍계사(雙磎寺) 공부에 배종(陪從)(1956년)’ 등이 있다. 또한, 1956년 3월(음)에는 도인 대표로 『태극도통감(太極道通鑑)』을 근초(謹抄)하셨다. 이러한 일련의 일을 통해 볼 때 도전님께서는 보수동 시기에 이미 도주님으로부터 신임을 받으시고 종통계승자로서의 위상을 지니셨을 것으로 보인다.
  보수동 시기는 1956년 도주님께서 부산 감천으로 본부를 옮기시면서 막을 내린다. 도장을 옮기게 된 이유는 1955년에 있었던 ‘판자옥철거령(板子屋撤去令)’이라는 정부시책에 따른 것이었다. 이것이 외부적 요인이었다면, 내부적으로는 도수(度數)에 의한 것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도전님께서는 “도주님께서 모든 공사를 마치시고 1958년에 화천하실 때까지 감천에서는 치성을 자주 모시고 보수동 영대는 1년에 음력 정월 치성 딱 한 번 모셨다. … 감천도장으로 옮기신 뒤에는 보수도정에 잘 가시지 않으셨다. 도주님께서는 도수에 이미 쓰셨던 곳은 잘 가시지 않으셨다”라고 말씀하셨다.12 보수동에서 감천으로의 이주는 도주님의 명에 의해 보수동에서 살던 도인들부터 먼저 시작되었고, 1956년에는 도주님께서도 도본부를 부산 감천으로 옮기셨다. 도본부가 보수동에서 감천으로 옮겨짐에 따라 종단사에 있어서 보수동 시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기를 맞게 된다.
  새벽부터 먼 길을 달려 도착한 부산 보수동! 그곳은 묘하게도 오래전부터 ‘중생의 마음속 때를 씻어주는 물’이라는 의미가 담긴 땅이었다. 한국 전쟁이 발발한 이후에는 전국에서 살 곳을 찾아 피난해 온 도인들을 위한 안식처이기도 했다. 그러한 땅에 도주님께서는 상제님의 뜻을 받드시고자 도장을 마련하시고 공부와 포덕 활동을 하셨다. 보수동에 도장이 마련된 1948년부터 1956년까지의 보수동 시기는 한국 전쟁과 같은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도 있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오로지 상제님의 뜻을 받드시기 위해 공부에 전념하셨을 도주님을 생각하니 절로 숙연한 마음이 들었다. 도주님의 이러한 공부가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어떻게 수도를 할 수 있을까? 감사한 마음과 함께 수도에 대한 새로운 다짐을 하게 되는 답사였다.
 <대순회보> 2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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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대순진리회요람』, p.12. 참고.
02 필자는 편의상 우리 종단 역사에 있어서 보수동에 도본부가 있었던 기간인 1948년부터 1956년까지를 태극도의 ‘보수동 시기’라고 칭하겠다.
03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 10: 경남편ㆍ부산편 Ⅲ』 (서울: 한글학회, 2003), p.562 참고.
04 보수천은 보수산(寶水山)에서 발원하여 중구 보수 제1동, 보수 제2동 앞을 지나 동남쪽으로 흘러 부평동과 서구 토성동, 초장동을 거쳐 남해로 들어가는 하천이다.
05 18세기 중엽 왜인의 약탈로 폐사되었다고 전해진다.
06 황홍섭, 「보수동 1ㆍ2ㆍ3가」, 부산역사문화대전,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19146
07 도전님 훈시(1988. 12. 5) 참고.
08 도전님 훈시(1989. 6. 25) 참고.
09 도주님 자제분 故 조○○ 인터뷰(2014.1.25).
10 도주님 자제분 故 조○○ 인터뷰(2014.1.25).
11 김선미, 「보수동 책방 골목을 지키는 사람들」, 부산역사문화대전, http://bu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busan&dataType=01&contents_id=GC04219146 참고.
12 도전님 훈시(1988. 12. 5)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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