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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봉서산 - 봉서사를 중심으로

교무부    2022. 06. 05.    읽음 :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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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봉서사 전경 (촬영: 2017.09.12) 

 

 

  상제님께서 전주 봉서산(鳳棲山) 밑에 계시면서 종도들에게 진묵(震默, 1562~1633)과 김봉곡(金鳳谷, 1575~1661)에 관한 옛이야기를 들려주신 적이 있다.01 이야기 속에서 진묵은 김봉곡으로부터 『성리대전(性理大典)』을 빌려서 사원동(寺院洞) 입구까지 가는 동안 그 책을 모두 외우는 기이한 행적을 보인다. 봉서산 아래 지역을 조사해 보니, 진묵이 수행했던 봉서사(鳳棲寺)와 김봉곡이 살던 장소가 발견된다. 그러기에 이야기 속에 언급되는 사원은 봉서사임을 알 수 있다. 이 봉서사에서 진묵은 시해(尸解)로써 천상에 올라가 온갖 묘법을 배워 내려 인세에 베풀고자 하였지만, 김봉곡의 시기심으로 인해 결국 이루지 못하였다.02 훗날 이러한 진묵을 상제님께서는 불교의 종장(宗長)으로 임명하시고 후천선경(後天仙境) 건설에 역사케 하셨다. 이렇듯 봉서사는 상제님의 공사(公事)와 관련된 진묵의 행적을 찾아볼 수 있는 의미 있는 사찰이다. 이에 진묵의 자취가 남아있는 봉서사 일대를 답사하였다.
  봉서사는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 간중리에 있는 천년 고찰이다. 727년(신라 성덕왕 26)에 창건되었다. 이후 고려 공민왕 때 나옹화상(懶翁和尙, 1320~1376)이 중창했고, 조선 선조 때 진묵이 다시 한번 중창했다. 진묵이 이 절에서 중생을 제도하던 당시에는 수행자들이 수없이 몰려들어 열두 암자를 거느리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1945년 전까지 지방 굴지의 대찰(大刹)이었으나 6·25 전쟁 때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이 완전히 소실되어 폐사(廢寺)되었다. 그러다가 1963년에 대웅전과 요사채의 중건을 시작으로 건물들이 점차로 신축되었다.
  ‘봉서사’라는 이름은 절이 자리 잡은 서방산(西方山, 617m)이 봉황의 형상을 하고 있어서 ‘봉황이 깃든다’는 뜻으로 지어졌다. 서방산은 바로 옆의 종남산(終南山, 610m)에서 이어지는 연봉 중 가장 높은 봉우리인데, 옛 지명은 봉서산이다. 이 산은 1935년에 시행된 행정구역 개편 이전까지 전주군(全州郡)에 속하였으므로, 『전경』에는 ‘전주 봉서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 용진 저수지에서 봉서사 방향 전경 (촬영: 2021.06.16)

 


  여주본부도장에서 봉서사를 향해 차로 3시간 정도 가면 완주 톨게이트가 나오고, 다시 10분 정도 더 가면 ‘봉서사’ 이정표를 만난다. 여기서 봉서사까지는 2km 정도 더 가야 한다. 좌측 경사진 길을 오르면 도로 왼편으로 제법 큰 규모의 저수지가 보인다. 이름이 용진 저수지인데, 1926년에 준공되었다. 이 저수지가 생기면서 수몰된 지역에 진묵과 교류했던 김봉곡이 살던 마을이 있었다. 이 일대는 ‘봉서골’로 불리는데, 봉서사 절 이름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저수지 주변을 잠시 둘러본 후, 진묵이 김봉곡의 집에서 『성리대전』을 빌려 봉서사 입구까지 걸어가면서 모두 외웠다는 일화를 떠올리며 봉서사를 향하여 걸었다. 도로 양옆으로 우거져 있는 나무들이 여름날의 따가운 햇볕을 가려준다. 봉서사까지 도보로 한 시간도 걸리지 않는 이 길을 진묵이 걸어가며 『성리대전』 수십 권을 전부 외웠다고 생각하니, 그 재주가 신기하기만 하다.

 

 

▲ 봉서사 대웅전 (촬영: 2021.06.16)

 


  봉서사에 이르러 주위를 둘러보니 절 규모는 그리 크지 않다. 하지만, 성천자(聖天子)의 상징인 ‘봉황’이 머무른다는 절 이름처럼 고승(高僧)이 살았을 만한 장소라고 느껴진다. 뒤편 서방산은 화강암으로 된 바위산이고, 절의 좌우로는 겹겹이 산이 둘러싸고 있어 서방산의 기운을 머금기에 좋은 지형이다. 또, 앞쪽으론 전망이 탁 트여 있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주요 건물로는 대웅전을 비롯하여 진묵전(震黙殿)ㆍ관음전ㆍ칠성각ㆍ범종각(梵鐘閣)ㆍ요사채 등이 있다. 6ㆍ25전쟁 전에는 이 밖에도 명부전ㆍ나한전ㆍ삼성루ㆍ천왕각ㆍ동루ㆍ서전ㆍ일주문ㆍ상운암 등을 갖춘 대규모 사찰이었다고 한다.03 
  봉서사는 진묵이 7세에 출가하여 72세로 입적하기까지 승려 생활의 시작과 마지막을 보낸 사찰이기에 그에 관한 일화가 많이 전해진다. 경전을 읽을 때 한번 보기만 하여도 쉽게 이해하고 바로 암송하였다는 일화, 진묵이 사미승일 때 그 절의 주지가 진묵에게 향을 사르고 신중(神衆)에 예배하라고 시켰더니 그 주지의 꿈에 신중들이 나타나 “우리는 그저 평범한 신중들인데, 어찌 감히 부처님의 예배를 받겠는가. 다시는 그가 향을 사르도록 하지 말아서, 우리로 하여금 아침ㆍ저녁으로 편안하게 하라.”고 한 일화 등이 있다.04
  해인사 팔만대장경과 장경각 화재에 얽힌 일화도 있다. 진묵이 봉서사에 주석(主席)하고 있을 때, 해인사를 자주 내왕하며 대장경을 모두 암송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해인사 팔만대장경판에 필유곡절이 생길 것 같다”며 행장을 꾸려 해인사로 갔다. 진묵이 해인사에 도착한 날 밤 경판을 소장해 놓은 장각 옆에서 불이 나 대장경을 소장해 놓은 장각으로까지 번졌다. 이때 진묵이 솔잎에 물을 적셔 불길이 번지는 곳에 몇 번을 뿌리자 한두 방울 뿌리던 비가 갑자기 폭우로 변해 불길을 잡았다.05
  대웅전을 둘러보고 돌계단을 내려와 왼쪽으로 가다 보니 범종각이 보인다. 정면 3칸ㆍ측면 2칸 구조의 2층 건물로, 2층에 종과 북 그리고 목어가 모셔져 있다. 1층 네 기둥에 한자로 된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가까이 다가가 글귀의 내용을 보니 진묵이 남겼다는 유명한 시다. 진묵이 대둔산 태고사(太古寺)에서 수도할 때 지은 것으로 알려진 이 시는 그가 천지자연과 하나로 호흡하며 그 무엇에도 걸림이 없는 절대 자유의 경지에서 소요(逍遙)하였음을 느끼게 한다.

 

天衾地席山爲枕(천금지석산위침) 
하늘을 이불로 땅을 자리로 산을 베개로 삼고
月燭雲屛海作樽(월촉운병해작준) 
달을 촛불로 구름을 병풍으로 바다를 술동이로 삼아
大醉遽然仍起舞(대취거연잉기무) 
크게 취하여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却嫌長袖掛崑崙(각혐장수괘곤륜) 
도리어 긴 소맷자락 곤륜산에 걸릴까 꺼려지노라.

 

 

▲ 범종각 기둥에 새겨진 글씨 (좌) 범종각 (촬영: 2021.06.16) (우)

 

 

  천지만물을 포용할 만큼의 그의 호방함 때문일까? 그는 평생 극심한 당쟁과 참혹한 전란 등으로 암울한 시기를 살았지만, 피해가 심했던 호남지역을 떠나지 않고 고통받는 민중들과 함께 살았다. 진묵이 14살이 되던 1575년부터 시작된 당쟁으로 말미암아 1589년에는 정여립(鄭汝立, 1546~1589) 모반사건이 발발하였다. 이 사건을 수습하는 3년 동안 호남지역에서 정여립과 관련되어 걸려든 사람이 수천 명이고, 그들 중 사형되거나 고문으로 죽은 사람만 해도 1,000여 명이었다. 곧이어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당시 호남지역은 특히 피해가 큰 지역이었으며, 의병의 활동도 가장 활발한 지역이었다. 이후에도 1597년 정유재란, 1623년 인조반정, 1627년 정묘호란 등이 있었다.06
  이러한 난세에 진묵은 봉서사 외에도 호남지역의 여러 도량(道場)을 옮겨 다니며 수도 생활에 정진하는 한편, 헐벗고 가난한 민초들의 마음을 치유하며 그들과 더불어 살았다.
  세상에 초연(超然)했던 그의 이런 행적 때문일까? 역사가들이 기록한 그에 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호남 일대의 이름 없는 민초들 사이에서 그의 기이한 행적이 다양한 형태의 구비설화나 문헌설화로 전해져 올 뿐이다. 이처럼 공식적인 기록이 거의 없음에도 진묵에 관한 수많은 설화가 전해져 오는 것은 진묵이 진심으로 민중과 함께하고자 했다는 방증(傍證)일 것이다.
  진묵이 가난한 민중과 함께 한 행적은 『전경』에 기록된 ‘진묵이 전주부의 한 가난한 아전을 도와준 이야기’에도 나타난다.

 

김 형렬은 … 상제께 진묵(震黙)의 옛일을 아뢰었도다. “전주부중(全州府中)에 한 가난한 아전이 진묵과 친한 사이로서 하루는 진묵에게 가난을 벗어나는 방법을 물으니 진묵이 사옥소리(司獄小吏)가 되라고 일러주니 아전은 이는 적은 직책이라 얻기가 쉬운 것이라고 말하고 자리를 떠났으나 그 후에 아전은 옥리가 되어 당시에 갇힌 관내의 부호들을 극력으로 보살펴주었나이다. 그들은 크게 감동하여 출옥한 후에 옥리에게 물자로써 보답하였다 하나이다. …” 07

 

  위의 내용에서 진묵은 평소에 전주부의 한 가난한 아전과 가까이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아전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요청하자, 그것을 해결해 준다는 이야기다. 이 구절을 통해 진묵이 당시 고통받는 많은 중생을 살리려는 보살행을 행한 승려였음을 엿볼 수 있다.

 

 

  범종각에서 오른쪽으로 올라가면 정면ㆍ측면 각각 1칸 구조의 작은 건물이 보인다. 이 전각이 진묵전이다. 내부를 들여다보면, 진묵 외에도 한 여성의 영정(影幀) 더 모셔져 있다. 바로 진묵의 어머니다. 효(孝)의 화신으로 불릴 만큼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던 진묵이었기에 이처럼 함께 모신 것이 아닐까 짐작된다. 두 분의 이런 모습을 보니, 진묵의 삶에 있어서 누구보다 가까웠던 어머니와 얽힌 일화가 떠오른다.

 

 

▲ 진묵전 (촬영: 2021.06.16)

 


  진묵은 출가한 승려였지만,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극진했다. 그가 전주 일출암(日出庵)에서 지낼 때 일이다. 당시 그는 노모와 하나밖에 없는 누이동생을 인근에 있는 왜막촌(倭幕村)에 집을 마련하여 살게 하였다. 그리고 아침ㆍ저녁으로 어머니께 문안을 드리며 지극 정성으로 모셨다. 그런데 여름만 되면 어머니가 모기 때문에 아주 괴로워하자 이를 안쓰럽게 생각하여 산신령에게 부탁하여 모기를 모두 쫓아버렸다고 한다. 그 뒤로 그 마을에서는 모기 때문에 고통을 받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08 

  또한, 진묵은 출가한 승려였기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제사 지낼 후손이 없는 것을 걱정하였다. 그래서 향을 피우고 제사를 지내려는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묘 터인 ‘무자손천년향화지지(無子孫千年香火之地)’에 어머니의 유해를 모심으로써 자식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였다. 현재까지도 이곳은 김제 만경의 유명한 명당으로 알려져 많은 사람이 묘를 참배하고 있다.09 
  진묵전 외부에는 진묵의 행적과 관련된 여러 벽화가 있다. 그중에 우리 일행의 시선을 사로잡는 한 폭의 그림이 있었다. 산길 한가운데 책을 놓고 마주 앉아 있는 스님과 선비가 있는 그림이다. 『전경』에 기록된 ‘진묵이 김봉곡의 집에서 『성리대전』을 빌려 봉서사까지 오는 길에 모두 외웠다는 일화’가 연상되었다. 봉서사에 와서 생각지도 못한 이런 벽화를 보니, 새삼스러웠다. 

  이런 기이한 일이 있고 난 후, 진묵은 시해로 인도국에 가서 범서와 불법을 더 익혀 올 것이니 방문을 여닫지 말라고 상좌에게 이르고 입적(入寂)하였다. 평소 진묵에 대한 시기심이 많았던 봉곡은 이 사실을 알고 봉서사로 달려와 상좌가 말렸음에도 억지로 방문을 열고 진묵의 시체를 마당에 내어놓고 화장해버렸다.
  진묵이 이것을 알고 돌아와 공중에서 “너와 나는 아무런 원수진 것이 없음에도 어찌하여 그러느냐.”고 외쳤다. 그러자 봉곡은 저것은 요귀(妖鬼)의 소리라고 하면서 손가락뼈 한 마디도 남김없이 잘 태우라고 말하였다. 결국, 진묵은 동양의 모든 도통신(道通神)을 거느리고 서양으로 옮겨 갔다.10
  진묵과 김봉곡 사이에 얽힌 이러한 일화와 관련하여 상제님께서는 “진묵이 천상에 올라가서 온갖 묘법을 배워 내려 인세에 그것을 베풀고자 하였으나 김봉곡에게 참혹히 죽은 후에 원(冤)을 품고 동양의 도통신을 거느리고 서양에 가서 문화 계발에 역사하였나니라.”(권지 2장 37절)고 밝혀 주셨다. 이 말씀을 통해 진묵이 간절히 소원하던 바가 천상의 묘법을 배워 이 세상에 베풀어 모두가 잘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자 함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진묵의 원은 지상천국을 건설하고자 천지공사(天地公事)를 행하셨던 상제님의 뜻과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진묵은 봉서사에서 72세(1633년)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절 입구 왼편에 그의 부도(浮屠)가 자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봉서사의 건물들이 모두 불타버리고 없어졌을 때도 진묵의 부도는 화(禍)를 면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부도는 당시 일부분이 파손되었고, 훼손된 그 부분들이 그 후 새 살이 돋아나듯 자라나고 있다고 한다. 이 신비한 현상을 두고 사람들은 생전에 많은 기이한 행적을 보였던 진묵의 영향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번 답사를 통해, 진묵이 세상을 구하려는 큰 덕을 지녔던 인물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것은 난세에서 자신의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고통받는 민중들과 더불어 살며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려 했던 그의 보살행이다.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깊이 헤아리고 있었기에 천상에 올라가 묘법을 배워 인세에 내려 모두가 잘살 수 있는 세상을 지상에 펼치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이런 숭고한 뜻을 지녔던 진묵이었기에 상제님께서 그를 불교의 종장에 임명하시고, 우리나라로 초혼(招魂)하셔서 후천선경 건설에 역사케 하신 것은 아닐까?

 

 

 

 


01 공사 3장 14절 참고.
02 공사 3장 15절 참고.
03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봉서사」 (서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5), p.103 참고.
04 김기종, 「19세기 진묵 설화의 기록화와 그 의미」 (『한국불교학』 제75집, 2015), p.226; 고월용운외 옮김, 『동다송ㆍ다신전ㆍ진묵조사유적고』 (서울: 동국역경원, 2010), p.141 참고. 
05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앞의 책, p.103; 편집부, 『소원은 이루어진다』 (서울: 나라교재, 2020), p.161참고.
06 김방룡, 「설화를 통해 본 진묵일옥의 삶과 사상」 (『한국불교학』 제44집, 2006), p.318 참고.
07 행록 1장 31절.
08 고월용운 외 옮김, 앞의 책, p.142 참고.
09 고월용운 외 옮김, 같은 책, p.143 참고.
10 공사 3장 15절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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