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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퇴원 마을을 찾아서

교무부    2022. 06. 05.    읽음 : 1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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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월마을(소퇴원 마을) 전경(2021년 6월 촬영)

 

김 형렬은 임인년이 되어 상제께서 본댁에 머무실 때마다 상제를 찾아뵈옵곤 하였고 상제께서 본댁에서 하운동(夏雲洞)으로 자주 내왕하셨기에 그 중로에 있는 소퇴원 마을 사람들은 상제와 형렬을 잘 알게 되었도다.

(교운 1장 3절)

 

  『전경』에 따르면 ‘소퇴원 마을’은 상제님의 본댁인 전북 정읍시 덕천면 객망리(현 신월리 신송마을)에서 김형렬 종도가 살았던 현 김제시 청도리 하운동으로 내왕하실 때 그 중로에 위치한 곳이다. 그러나 지명사전이나 지역 관련 시사, 고문서에 ‘소퇴원’이란 글자 그대로의 지명은 찾을 수 없었다. ‘소퇴원’에 관한 조사를 10년 넘게 하면서 여전히 자료가 부족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조사한 내용을 토대로 소퇴원에 관한 자료 꾸러미를 하나하나 풀어가며 상제님과 김형렬 종도가 자주 내왕하셨던 ‘소퇴원 마을’로 떠나보기로 하자.

 

  

 ▲ 상제님의 본댁인 덕천면 신월리 신송마을과 옹동면 용호리 소퇴원(송월) 마을 일대(출처: 네이버 지도)

 

 

   

 ▲ 1872년 지방지도-태인현(출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정읍에서 김제로 가는 길목에 있었던 이 마을과 관련하여 『전경』 행록 4장 22절에는 ‘태인 소퇴원 주막’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소퇴원 마을은 상제님 재세 당시 전주부 태인군에 속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01 임인(1902)년 때 태인군에 소퇴원 마을이 있었을 것이라 짐작하고 정읍과 김제의 경계 지역인 현 옹동면과 감곡면에서 ‘소퇴원’과 유사한 마을 이름을 찾아보았다. 그 결과 이름과 위치로 보았을 때 제일 유사한 곳이 현 옹동면 용호리에 있는 송월마을이었다. 현 옹동면은 1914년 행정구역이 폐합되기 전 옹지면과 동촌면이 합쳐진 것이므로 현 송월마을은 상제님 재세시 전주부 태인군 옹지면 송월리에 해당된다.
  송월마을이 소퇴원 마을이라고 생각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송월마을의 옛 이름 때문이다. 송월마을은 용호리에서 감곡면 통사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솥튼재)가 있는 천애산(천아산) 기슭에 천연적으로 솥 모양의 바위가 있어서 옛날부터 ‘솟톤’, ‘솥튼’, ‘솟튼’이라고 불렸다. 고개 또한 ‘솥튼재’, ‘솟투원재’, ‘솟탄재’, ‘솟원재’, ‘소탄재’, ‘소튼재’, ‘소턴재’, ‘정치(鼎峙)’, ‘정어치(鼎魚峙)’ 등으로 다양하게 불렸다.02

 

 

   ▲ 송월마을(소퇴원 마을) (2021년 6월 촬영)

 


  어떻게 한 마을의 이름에 어음이 이렇게 다양할 수 있을까? 향토사학자이자 전 정읍 문화원장과 전 전북 도 문화재 전문위원이었던 고 최현식 선생의 말에 따르면 옹동면 송월리에 있었던 국영의 여관인 원(院)을 ‘솔원’이라 했다고 한다. 그는 ‘솔원’이 전음되어 ‘솟원(鼎院)’이 되고 전북의 방언으로 ‘솟’이 ‘솥’으로도 사용되므로 ‘솥원’에서 ‘솥톤’으로 전음되었을 것이라 추정하였다.03
  『전라북도 방언사전』을 보면 전북 방언의 특성상 ‘고양이’를 ‘괴양이’로, ‘고욤’을 ‘괴욤’, ‘소경’을 ‘쇠경’, ‘도도하다’를 ‘되되하다’처럼 ‘ㅗ’를 ‘ㅚ’로 발음하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솥톤’이 ‘솥퇸’으로 발음되어 ‘솥퇸 마을’에 있었던 원(院)을 ‘솥퇸원’이라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이 발음은 『전경』에 나오는 ‘소퇴원’과 아주 유사하다. 원은 여행객들이 자주 이용하는 곳으로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져 원의 이름을 따서 땅이름이 되기도 했는데, 그 예로 조치원과 이태원 등이 대표적이다.04 송월마을 또한, ‘소퇴원’으로도 불려 전해졌을 것이라 짐작된다.
  송월마을의 특징으로 두 가지를 꼽자면 첫 번째로 출장하는 관리들의 숙식을 제공하는 곳인 정어원(鼎魚院: 소퇴원)이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 중기의 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05 34권 태인현에 따르면 정어원은 태인현에서 동쪽으로 10리에 있다고 되어 있다. 솥 정(鼎)과 고기 어(魚)를 쓰는 ‘정어원’을 ‘솟치원’이라고도 했다.06 지금도 솥튼재와 송월마을에는 소나무가 많은데,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마을 동쪽에 있는 소나무의 형세가 솥 정(鼎)자의 형이라서 ‘정어원’이라 했다고 한다. 마을 어른들은 “무학대사가 마을을 지나가면서 솥단지에 밥이 그득하니 만석꾼이 태어날 터”라고 했다고 전한다.07
  ‘원’은 주로 고려시대에 불교계나 지방 유력자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 운영하였으나 조선 시대 중기 이후부터 점차 그 기능이 쇠퇴하다가 19세기 중엽 이후 순수 민간 시설인 점막(店幕: 주막이라고도 함)으로 대체되었다. 주로 역 근방이나 교통요지, 고개, 나루, 치안 위험처 등에 설치되었다.08 소퇴원은 원평, 칠보, 태인, 신태인 장으로 일 보러 다니는 사람들이 거쳐야 하는 교통 중심지에 있었으며, 신작로가 생기기 전에 마차가 지나갈 만큼의 넓은 길이 있었다고 한다.09 소퇴원 주변으로 사찰이 없고 큰 고개인 솥튼재가 있는 것을 보았을 때 소퇴원은 주로 조선 시대에 상인들의 활동무대로 사용된 곳임을 짐작할 수 있다.
  원이 민간 숙박 시설로 대체되기 전에 원래는 관리들이나 유력한 양반들이 숙박하는 국립지정여관이었다. 그래서 원을 사용할 수 있는 사용자가 극히 제한되어 있었기에 원 주변으로 민간인이 사용할 수 있는 주막이 많았다.10 주막을 생업으로 삼는 자들이 마을을 이루기도 했는데11, 송월마을이 그 예다. 송월마을 유래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때 만든 신작로가 생기기 전에도 마차가 갈 만큼 넓은 길이 있었으며, 길가에 마장집(말이 쉬는 공간), 소 마장집(수레를 끄는 소가 쉬는 공간)과 상인들이 머물던 객주와 여각이 15여 호 정도 있었다고 한다.12 한 마을 전체가 주막을 운영한 셈이다. 마을 입구에 주막이 있었다고 한 마을 주민의 증언13에 따르면 마을 입구부터 주막거리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김형렬 종도가 소퇴원 마을 사람들의 이목을 꺼려 좁은 길로 간 것(교운 1장 7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기산(箕山) 풍속화, 촌가여막(객주집), 19세기, 독일 MARKK(옛 함부르크 민족학박물관 소장)

 

  두 번째 특징으로는 송월마을 북쪽에 복부혈(伏釜穴)이 있다는 것이다. 복부혈은 가마솥을 엎어놓은 것처럼 생긴 돌출된 형국으로 돌혈(突穴)에 속한다. 혈은 볼록한 부분에서 약간 오목한 곳에 있다. 복부혈은 높은 산에도 있지만 낮은 평지에도 많이 있는 혈로 높은 산에 있는 것보다 평지에 있는 혈이 더 길한 것이 많다고 한다. 산곡 돌혈은 마치 볼록하게 솟은 혈장을 지탱해 주기 위해 삼발이처럼 생긴 작은 능선이 혈장 아래에 균형 있게 붙은 형태이다.14 답사하면서 혈 자리까지 찾아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솥 속에는 언제든지 밥이 가득하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이 마을은 1945년 8ㆍ15해방 후에 행정구역상 송월마을로 바뀌었다.15 


  지금은 아늑하고 조용한 이곳이 정읍에서 김제로, 김제에서 정읍으로 넘나드는 사람들로 붐볐을 모습을 상상하며 마을을 둘러보았다. 임인(1902)년이면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행하신 지 1년이 지난 해로 상제님을 따르는 종도가 많지 않았던 때이다. 당시 종도들 중에서 제일 먼저 상제님을 따른 김형렬이 정성껏 상제님을 모시며 따랐기에 상제님과의 왕래가 잦았을 것이다.
  상제님을 찾아뵐 때마다 거쳐 갔던 소퇴원 마을. 소퇴원의 과거 지명인 정어원(鼎魚院)을 비롯하여 이 마을의 바위ㆍ소나무ㆍ혈까지 모두 솥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솥은 도주님과 연관된 상징성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신이 지극했던 김형렬 종도가 소퇴원을 거쳐서 상제님을 찾아뵐 수 있었다는 것은 우리 수도인들도 도주님의 유법(遺法)을 통해서 상제님의 대순하신 진리를 만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 상제님 뵐 날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수도인 모두 진실한 마음으로 상제님을 뵙게 되기를 바란다.

 

 

 

 


01 1895년 태인현이 태인군으로 개칭되어 전주부에 속하였다가 1914년에는 태인군이 정읍군으로 통폐합되고 군내면ㆍ인곡면ㆍ흥청면 일대가 현 정읍시 태인면이 되었다.
02 한글 학회, 『한국 지명 총람』 12 (서울: 한글 학회, 2003), p.432; 임남곤, 『정읍 향리지』 (전북: 정읍문화원, 2002), p.781; 옹동면지 편찬위원회, 『옹동면지』 1호 (전북: 옹동면지 편찬위원회, 2016), p.142; 임남곤, 『정읍문화재지』 (전북: 정읍문화원, 2002), p.574; 이정태, 『내 고향 감곡』 (전북: 성전기획, 2006), p.125.
03 이정태, 같은 책, p.125 참고.
04 배우리, 「옛 길손들이 머물렀던 마을과 그 이름」, 『사학』 93 (2000), p.65.
05 조선 초기 세종대에 시작하여 1481년(성종 12)에 완성된 『동국여지승람』을 1530년(중종 25)에 전 55권으로 증보 간행한 것이다.
06 한글 학회, 앞의 책, p.432.
07 옹동면지 편찬위원회, 앞의 책, p.143.
08 정요근, 「고려-조선시대 院시설 유적의 특성과 院시설의 유형 분류」, 『사학연구』 140 (2020), p.168; 주영하, 「주막의 근대적 지속과 분화」, 『실천민속학연구』 (11) (2008), pp.15-16 참고.
09 옹동면지 편찬위원회, 앞의 책, p.143.
10 송직현 외 1명, 『태인지』 (전북: 신아출판사, 2015), p.294.
11 김대길, 「조선 후기 장시 발달과 사회문화 생활 변화」, 『정신문화연구』 35권 4호 (2012), p.100.
12 옹동면지 편찬위원회, 앞의 책, p.143.
13 송월마을 주민 인터뷰(2010. 7. 7, 송월마을).
14 정경연, 『정통풍수지리』 (서울: 평단, 2006), pp.306-308 참고.
15 임남곤, 『정읍 향리지』, p.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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