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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원(淸道院)과 류찬명(柳贊明) 종도

교무부    2022. 06. 05.    읽음 : 220


본문

 ▲ 청도마을 전경(촬영: 2017. 9. 12)

 

상제께서 “청주(淸州) 만동묘(萬東廟)에 가서 청국 공사를 행하려 하나 길이 멀고 왕래하기 어렵고 불편하므로 청도원(淸道院)에서 공사를 행하리라” 하시고 청도원 류 찬명의 집에 이르러 천지 대신문을 열고 공사를 행하셨도다. 그때에 김 송환이 그 시종을 들었느니라. (공사 2장 6절)

 

  위 전경 구절은 상제님께서 만동묘가 멀고 왕래하기 불편하여 청도원 류찬명 종도의 집에서 청국공사를 행하신 내용이다. 공사 시기는 대략 1908년으로 추정되고 있다.01 이 시기는 1907년에 태인에 사는 최창조와 대흥리에 사는 차경석 등 10명 이상의 종도들이 대거 상제님을 따르게 되어 상제님께서 종도들을 데리고 여러 공사를 보셨을 때이다. 전주에도 김병욱 종도가 있어 상제님께서 전주와 태인을 자주 왕래하셨는데 그 길목에 청도원 류찬명 종도의 집이 있었다. 이곳은 현재도 그 후손이 살고 있어 상제님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류찬명 종도의 집은 청도리에 있으며 5개의 마을이 속해있을 정도로 규모가 있고 안내성, 김송환 종도가 여기에 살았다. 그런데 『전경』에 보면 청도리에 살았던 종도 중 김송환과 류찬명 종도의 집에만 청도리 대신 청도원이란 지명이 적혀있다. 청도원이 어디였길래 두 종도의 집 앞에만 다른 지명이 붙은 것일까? 이에 대해 조사하기 위해 여러 번의 인터뷰와 답사를 진행하였으며 최근 다시 상제님께서 공사 보셨던 류찬명 종도의 집과 이와 관련된 상제님의 행적을 상세히 알기 위해 청도리로 향하였다.

 

 

청도리에 위치한 청도원
  여주에서 출발해 3시간을 달려 전북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에 도착하였다. 청도리는 본래 전주군 우림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구역을 통폐합할 때 두정리, 동곡리와 금구군 수류면의 용정리 일부를 병합하여 청도리라 하였다. 이후 1935년에 이르러 김제군 금산면에 편입되었다. 금산면은 김제시 최남단에 있으며, 모악산(母岳山: 793m), 상두산(象頭山: 575m) 등의 영향을 받아 산지 지형을 이루고 있다.02 이 청도리에는 동곡(銅谷)ㆍ백운(白雲)ㆍ하운(夏雲)ㆍ유각(有角)ㆍ청도(淸道) 마을이 있고03 김형렬, 안내성, 김송환 종도 등이 살았으며 청도원도 있었다고 한다. 역이나 원은 주로 국왕이 지방을 순시하거나 피난길에 이용하였으며 각 도 관찰사가 고을을 순행할 때 잠을 자거나 마필을 교체하는 곳으로 사용하였기에 주로 전국의 교통 중심지에 설치되었다. 현재 청도원은 남아있지 않지만 지방 관아에서 중앙정부에 보냈던 문서인 『각사등록(各司謄錄)』  「호남계록」에 보면 고종 15년 1878년에 관리가 청도원에서 공문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통해 청도원은 상제님 재세 시에도 원의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귀신사 전경(촬영: 2017. 9. 12)

▲ 청도마을(촬영: 2017. 9. 12)

▲ 청도 역원 위치 옆면(촬영: 2010. 6. 15)

 


  그렇다면 청도원은 어디쯤 있었을까? 이를 알기 위해 원의 성립 배경을 살펴보면, 원은 고려 시대 불교계에서 주로 운영하여 불교에서 유래된 숙박시설인 경우가 많았다. 원들은 대체로 사찰로 들어가는 진입로의 길목에 설치되거나 교통의 요지에 주로 위치하였고 조선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04 청도원이 있었던 청도리에도 신라 문무왕(文武王, 626~681) 676년에 의상대사가 창건했던 귀신사(歸信寺)가 있다. 창건 당시는 국신사((國神寺)라 불렸으며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이후 1873년에 고종이 재건하여 귀신사로 현판을 바꾸었다.05 지금은 작고 한적한 절이지만 옛날에는 금산사를 말사(末寺)로 두며 전주 일원을 관장하던 대규모 사찰이었다.06 원은 사찰로 들어가는 진입로의 길목에 있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청도원은 귀신사의 입구 근처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청도원의 좀 더 정확한 위치를 알기 위해 마을 주민과07 김제문화원 국장08을 인터뷰하였다. 마을 주민은 청도원의 위치는 잘 모르지만 대신 청도원 마구간의 위치를 안다고 하였다. 청도원에 들르는 관리들에게 마필을 공급하던 곳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역(驛)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역은 중앙관청의 공문을 지방관청에 전달하며 외국 사신의 왕래와 관리의 여행 또는 부임 때 마필(馬匹)을 공급하던 곳이었다.09 그래서 역과 원은 서로 밀접하게 설치되어 흔히 ‘역원’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청도 역원에 대해 좀 더 상세히 확인하기 위해 김제문화원 국장에게 물어보았더니 그곳에 청도 역원이 있었다고 알려주었다. 역과 원이 밀접하게 설치되어 있었으므로 청도원의 위치는 역과 붙어있었을 것이다. 이곳은 귀신사와도 도보로 6분 거리 내에 있어 청도원 추정위치와도 잘 맞으며 류찬명 종도의 집과도 도보로 2분 거리에 있어 아주 가깝다. 이러한 사실들을 볼 때 『전경』에 류찬명 종도의 집 앞에 청도리라는 지명 대신 청도원이 붙은 것이라고 보여진다.
 


상제님께서 드나드시던 길목에 위치한 류찬명 종도의 집
  류찬명 종도의 집은 상제님께서 청국공사를 행하신 장소이다. 류찬명 종도의 증손자인 류택수씨는 7~8대 선조부터 그 집에서 계속 살고 있었다.10 그곳에서 712번 국도를 따라서 오른쪽으로 가면 독배재를 지나 전주로 갈 수 있고 구성산이 있는 왼쪽 싸리재로 가면 김제시가 나왔다. 이렇게 여러 개의 길이 교차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교통 요지에 있었다.11 사람들은 김제에서 전주나 태인, 동곡으로 가기 위해서는 산을 넘는 것보다 이 길이 빠르고 평탄하였기 때문에 이곳으로 많이 다녔다.

 

 

▲ 류찬명 종도의 집(촬영: 2017. 9. 22)

 


  상제님께서도 전주에 있던 김병욱 종도와 태인에 사는 김경학 종도의 집에 들르시거나 공사를 보시기 위해 전주, 동곡, 태인 등지를 다니실 때도 이곳을 지나가셨다. 류택수씨의 말에 의하면 상제님께서 다니실 때마다 집에 들러 주무셨다고 하였다. 사랑채는 규모가 커서 지금의 마을회관 같은 곳이 없을 때 사람들이 함께 모여 음식도 먹고 담소도 나누던 곳이었다고 했다. 사랑채의 위치는 사진에서 표시한 곳이며 1990년 증손자가 지금의 집을 지을 때 허물었다고 하였다.
  우리는 류택수씨에게 상제님에 관해 물어본 뒤 류찬명 종도의 행적에 대해서도 질문하였다. 류찬명 종도의 본관은 전주이며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에서 부친 류경술과 모친 박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청도리에서 작고하였다.12 류찬명 종도는 글을 주로 읽는 선비였으며 여러 전답을 소유한 지역의 유지였다.13 언제부터 상제님을 따랐는지는 정확하지 않고 『전경』에는 1907년 이후의 활동이 주로 서술되어 있다. 류찬명 종도는 다른 종도들에 비해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상제님께서 “너는 나로 하여금 오래 살기를 바라는도다”14라고 하셨던 것으로 볼 때 상제님을 각별히 따랐던 것으로 보인다.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보실 때 류찬명 종도에게 글 쓰는 일을 종종 시키셨고 그는 여러 천지공사에 참여하며 자기 소임을 다하였다. 류찬명 종도와 관련된 『전경』 구절을 보면, 행록 5장 21절에 상제님께서 모든 종도들을 모이게 하신 자리에서 류찬명에게 ‘천문지리 풍운조화 팔문둔갑 육정육갑 지혜용력’과 ‘회문산 오선위기혈 무안 승달산 호승예불혈 장성 손룡 선녀직금혈 태인 배례전 군신봉조혈’을 쓰게 하셨다. 또한 28수 글자를 좌로부터 횡서하게 하시고 그 종이를 불사르셨고15 예시 67절에서도 상제님께서 공사 보실 때 글 쓰는 역할을 하였다. 상제님께서는 종도들에게 말씀을 남기고는 하셨는데 류찬명 종도에게 도통이 ‘건감간진손이곤태’16에서 나온다고 하시거나 “십만 인에게 포덕하라”17고도 말씀하셨다. 이렇게 상제님을 곧잘 따르던 류찬명 종도는 상제님 화천 이후 별도의 교단을 만들지 않고 집에서 개인적으로 상제님을 믿고 조용히 생을 마감하였다.
  류찬명 종도의 행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후 류택수씨와 함께 류찬명 종도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류택수씨는 “원래 묘는 금평 저수지 근처였는데 저수지가 조성되면서 현재의 자리로 이장하게 되었다. 그런데 묘를 옮길 만한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하여 화장한 후 나무 아래에 묻어 수목장을 하고 가묘를 만들어 두었다.”18고 알려주었다. 가묘로 가는 길은 712번 국도가 나기 전 동곡에서 청도원으로 오던 옛길이었는데 상제님께서 동곡에서 청도원으로 오실 때 주로 다니셨다고 하였다. 현재 이 길은 농수로가 되어 길의 형태를 정확히 갖추고 있지는 않지만, 사람이 다닐 수는 있었다.
  상제님께서 다니셨던 길을 따라 동곡 방향으로 가다가 계곡물이 시작되는 곳에서 산길로 들어섰다. 그렇게 20여 분을 올라가다 산 중턱쯤에 위치한 류찬명 종도의 가묘와 유골을 묻은 나무를 찾을 수 있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가묘를 등지고 청도마을을 내려다보니 상제님께서 천지공사를 보시기 위해 전주와 김제를 넘나드셨던 고개가 보였다. 답사와 인터뷰를 통해 청도원의 위치를 찾고, 상제님께서 청국 공사를 보셨던 류찬명 종도의 사랑채 터를 살펴봄으로써 상제님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류찬명 종도의 행적을 살펴보면서 상제님의 행적을 좀 더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산에서 내려와 상제님께서 동곡에서 청도마을로 가셨던 옛길을 걸으며 상제님의 자취를 다시 한번 되새겨보았다.

 

 

 

 


01 대순종교문화연구소, 「상제님의 발자취를 찾아서: 만동묘로 황극신을 옮기는 공사」, 《대순회보》 135 (2012), p.21.
02 한글학회, 『한국지명총람11-전북편(상)』, (서울: 한글학회, 2003), p.148.
03 디지털 김제문화대전 http://gimje.grandculture.net/gimje.
04 정요근, 「고려~조선 시대 원 시설 유적의 특성과 원 시설의 유형 분류」, 『사학연구 140』 (2020), pp.166-168.
05 김판용, 신정일, 조용헌, 『모악산Ⅱ』, (전주: 신아출판사, 2002) pp.113-115.
06 한국문화유산 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1 전북』, (서울: 돌베개, 1997) pp.77-78.
07 청도마을 주민인 곽영옥씨 인터뷰(2010. 6. 15, 청도마을).
08 김제문화원 국장인 김태규씨 인터뷰(2021. 10. 28).
09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www.grandculture.net/.
10 류찬명 종도의 증손자인 류택수씨 인터뷰(2010. 10. 1. 청도마을).
11 이동수단이 말이나 도보인 경우 산을 넘기 힘들어서 대부분은 고개나 재로 다녔고 그런 연유로 말을 갈아타거나 잠을 청할 곳이 필요해졌다. 그래서 대개 원들은 사람들의 이동이 잦은 고개나 재 주변에 위치하였었다. 정요근, 「고려~조선 시대 원 시설 유적의 특성과 원 시설의 유형 분류」, 『사학연구 140』 (2020), pp.166-168.
12 류찬명 종도의 증손자인 류택수씨 인터뷰(2010. 10. 1. 청도마을).
13 청도리 마을 이장인 김종성씨 인터뷰(2021. 6. 10. 청도마을).
14 권지 2장 27절.
15 공사 3장 24절.
16 교운 1장 47절.
17 행록 3장 31절.
18 류찬명 종도의 증손자인 류택수씨 인터뷰(2010. 10. 1. 청도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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