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님농암에서의 공사와 사명기(司命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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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07 조회4,816회 댓글0건본문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1907[丁未]년 10월에 상제님께서 다시 정읍 대흥리 차경석의 집에 들르셨다.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에게 돈 30냥01을 준비하게 하신 후 “이것은 너를 위하여 하는 일이니라.” 하시며 어떤 법을 베푸시고는 ‘溪分洙泗派 峰秀武夷山 襟懷開霽月 談笑止狂瀾 活計經千卷 行裝屋數間 小臣求聞道 非偸半日閑’이라는 시를 읽어 주셨다. 이것은 1556년 봄, 청년이었던 율곡 이이(1536∼1584)가 퇴계 이황(1501∼1570)의 명성을 듣고 찾아가 그곳에서 느낀 바를 적은 ‘過禮安謁退溪李先生滉仍呈一律[예안 땅을 지나다가 퇴계 선생을 뵙고 율시 1수를 올리다]’라는 시이다.
그런 연후에 상제님께서는 차경석을 데리고 순창 농암(籠岩) 박장근(朴壯根)의 집으로 가셨다. 상제님께서 박장근을 불러 그의 머슴에게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게 하시니, 그 머슴이 “어젯밤 꿈에 한 노인이 농바우에서 나와 부르기에 따라갔더니 그 노인이 농바우를 번쩍 들고 갑주와 긴 칼을 꺼내 주면서 이것을 가져가서 주인에게 전하라고 하기에 그것을 가져다가 이 방 안에 두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이 말씀을 들으신 상제님께서 종도들에게 “이곳에 큰 기운이 묻혀 있으니 이제 그 기운을 내가 풀어 쓰리라. 전명숙(전봉준)과 최익현이 있었으되 그 기운을 쓸 만한 사람이 되지 못하여 동학이 성공하지 못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때 황응종과 신경수가 “눈이 길에 가득히 쌓여 행인이 크게 곤란을 받나이다.”고 아뢰니 상제님께서 박장근으로 하여금 감주를 만들게 하여 여러 사람들과 함께 잡수셨다. 그러자 쌀쌀하던 날씨가 풀리면서 땅의 눈이 녹아 걷기가 편해졌다.
상제님께서는 농암에 묻혀 있던 큰 기운을 사용하시려고 “허미수(許眉叟1595∼1682)가 중수한 성천(成川) 강선루(降仙樓)의 일만 이천 고물은 녹(祿)줄이 붙어 있고 금강산(金剛山) 일만 이천 봉은 겁기(劫氣)가 붙어있으니 이제 그 겁기를 제거하리라.” 하시면서, 김형렬에게 “네가 김광찬, 신원일을 데리고 돌아가서 함께 백지 일방 촌03씩 오려 ‘시(侍)’자를 써서 네 벽에 붙이되, 한 사람이 하루 사백 자씩 열흘에 쓰라. 그리고 그동안 조석으로 청수 한 동이씩 길어 스물 네 그릇으로 나누어 놓고 밤에 칠성경(七星經) 삼칠 편(遍)04을 염송하라.”고 명하셨다. 김형렬과 김광찬, 신원일은 상제님의 명을 이행하기 위하여 곧 동곡으로 출발하였다.
다음 날 상제님께서는 농암을 떠나 동쪽으로 10여 리 정도 떨어진 피노리(避老里)05 이화춘(李化春)의 집으로 가셨다. 이 마을은 13년 전에 전명숙이 잡혔던 곳이다. 1894년 겨울에 동학농민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전명숙은 쫓기다가 순창 접주 오동호(吳東昊)의 안내를 받아 그의 매가(妹家)가 있는 피노리로 숨어들었다. 전명숙은 갑자기 열이 나면서 앓아 눕게 되자 심복인 김경천(金敬天)을 밖으로 내보내 약도 짓고 바깥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 김경천은 원래 장성군 이방이었던 사람으로 전명숙의 신임을 두텁게 받고 있던 터였다. 그는 약방을 찾다가 문득 전명숙에게 현상금이 천 냥 걸려있다는 방을 보게 되었다. 재물에 눈이 먼 그는 약을 지어다 주고는 그곳을 빠져 나와 관아에 고발하고 동네 불량배 7∼8명을 동원하여 전명숙을 덮쳤다. 전명숙은 담을 뛰어넘어 도피하려다가 다리를 얻어맞고 붙잡혀 서울에 압송되었다.06 그는 그 다음 해인 1895년 3월 29일에 교수형에 처해졌으니, 백의한사로 일어나 상놈을 양반으로 만들고 천한 사람을 귀하게 만들어 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던 만고의 명장은 을 품은 채 세상을 뜨고야 말았다.07
상제님께서는 그런 전명숙의 을 풀어주시기 위하여 이곳에 사명기(司命旗)를 세우기로 하셨다. 상제님께서는 이화춘에게 누런 개 한 마리를 잡고 술 한 동이를 마련하게 하신 뒤, 뒷산 소나무 숲에서 가장 큰 소나무 한 그루와 남쪽 양달에 있는 황토를 파오게 하셨다. 또 백지 네 장을 청색, 홍색, 황색의 세 색깔로 물들여서 모두 잇고, 베어 온 소나무의 한 윗가지에 달게 하신 후, 백지 세 장에 시천주를 각각 쓰시고 그 종이 세 장에 황토를 조금씩 싸서 함께 이은 뒤 소나무 가지에 달고 나무를 집 앞에 세우셨으니, 그 모양이 마치 깃대와 같았다. 상제님께서는 종도들에게 “이곳에서 전명숙이 잡혔도다. 그는 사명기(司命旗)가 없어서 포한(抱恨)하였나니 이제 그 기를 세워주고 해원케 하노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또다시 사명기 한 폭을 더 지어 높은 소나무 가지에 달았다가 떼어 불사르시어 최수운도 해원케 하셨다.
이 무렵 김형렬은 동곡에서 상제님의 명을 받들고 있었으나 신원일이 불평을 하므로 다시 돌아와서 상제님께 그 사실을 아뢰었다. 상제님께서 “이도삼을 불러서 행하라.”고 일러주시니, 김형렬은 다시 이도삼을 데리고 동곡으로 가서 김광찬과 함께 상제님의 명을 완수하였다. 김형렬이 김갑칠을 상제님께 보내 일을 무사히 마쳤음을 고하니, 상제님께서는 김갑칠에게 양 한 마리를 사 주시면서 “내가 돌아가기를 기다리라.”고 하셨다.
<대순회보> 12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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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요즘 화폐로 약 60만 원에 해당한다.
02 네이버 백과사전, EnCyber두산백과사전, 《통일신문》2004년 10월 25일자 참고.
03 한 치 사방의 면적. 가로 세로 3cm이고 넓이로는 9㎠이다.
04 21번.
05 이조 중엽 선조 시절, 노론소론(老論小論)의 당쟁을 피해 한 사람이 이곳으로 숨어들어 와서 마을을 이루었기에 피노리(避老里)라는 이름이 생겼다는 말이 있지만, 그 이전인 고려 충숙왕 때 하치등방(下置等坊)을 이곳에 설치했었다고 하니 마을은 이미 그 이전부터 있었다.(『순창향지』, 향지사, 2003, p.920) 또 노론과 소론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선조 때가 아니라 숙종 6년인 1680년(숙종 6)에 벌어진 경신환국(庚申換局) 때였다. 당시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노장파는 영의정 허적, 허미수 등 남인을 조정에 몰아내면서 이들에 대한 강력한 처벌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남구만, 윤증을 위시한 서인 소장파는 이에 반대하고 온건한 처벌을 요구했다. 이를 계기로 서인은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남구만을 중심으로 한 소론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피노리의 지명 유래에 대한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맞지는 않다.
06 『순창향지』, p.921.
07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동학농민운동1」, 『대순회보』79호, 2008, pp.18∼27; 「동학농민운동2」, 『대순회보』80호, 2008, pp.12∼19; 「동학농민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에 대한 상제님의 평가」, 『대순회보』81호, 2008, pp.30∼39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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