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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제님정읍 교동에서의 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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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08 조회4,63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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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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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읍 교동의 문공신과 황응종 집 터(위)와 신경수의 집터(아래). 지금은 모두 밭으로 변해 있다.

 
  1907[丁未]년 12월, 상제님께서는 정읍 교동(校洞)에 있는 문공신과 신경수 두 집을 왕래하시며 여러 공사를 처결하셨다. 상제님께서는 신경수의 집에서 “천지가 일월이 아니면 빈 껍데기요, 일월은 지인(知人)이 아니면 허영(虛影)이요, 당요(唐堯: 요임금)가 일월(日月)의 법을 알아내어 백성에게 가르쳤으므로 하늘의 은혜와 땅의 이치가 비로소 인류에게 주어졌나니라.”고 하시며 요임금의 ‘역상일월성신경수인시(曆像日月星辰敬授人時: 해와 달, 별의 운행을 관찰하여 사람들에게 때를 알려주도록 하셨다)’01에 대해 가르치셨다. 그리고 ‘일월무사치만물(日月無私治萬物) 강산유도수백행(江山有道受百行)’이라 말씀하시며, 오주(五呪)를 지어 천지의 진액(津液)이라 하시니 다음과 같았다.
 

新天地家家長歲 日月日月萬事知
侍天主造化定永世不忘萬事知
福祿誠敬信 壽命誠敬信 至氣今至願爲大降
明德觀音八陰八陽 至氣今至願爲大降

 
  그리고 상제님께서는 신경수의 집에 저울 갈고리 도수를, 황응종의 집에 추 도수를, 문공신의 집에 끈 도수를 정하시어 선기옥형(璿璣玉衡) 도수를 보셨다. 다시 신경수 집에 일월대어명(日月大御命) 도수를, 문공신 집에 천지대팔문(天地大八門) 도수를 정하시고, 이 세 종도들의 집을 밤낮으로 번갈아 다니시며 공사를 행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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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제님의 공사에 따라 섬진강 상류인 운암강 중의 일부가 운암취수구와 칠보취수구를 통해 서쪽으로 돌려져 전북 대부분의 평야를 적시게 되었다. 이로써 전북 평야는 만성적인 물 부족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 황색으로 표시된 지역이 그혜택을 받는 곳이다.

  

 이 공사를 마치시고 상제님께서는 종도들로 하여금 오주를 수련케 하신 후 “일곱 고을 곡식이면 양식이 넉넉하겠느냐?”고 물으시니, 그들은 “쓰기에 달렸나이다.” 하고 아뢰었다. 다시 상제님께서 “그렇다 할지라도 곡간이 찼다 비었다 하면 안 될 것이니 용지불갈(用之不渴)하여야 하리라.” 하셨다. 종도들이 그 말씀을 깨닫지 못하자 상제님께서는 백지에 저수지와 물도랑의 도면을 그려 불사르시면서 “이곳이 운산(雲山)이라. 운암강02 물은 김제 만경 들판으로 돌려도 하류에서는 원망이 없을 것이니 이 물줄기는 대한불갈(大旱不渴)이라. 능히 하늘을 겨루리라. 강태공은 제나라 한 고을에 흉년을 없앴다고 하나 나는 전북 칠읍에 흉년을 없애리라.”고 가르치셨다.03
  상제님께서는 문공신의 집에서 후천 음양도수를 조정하는 공사도 보셨다. 먼저 종도들에게 오주(五呪)를 수련케 하시고 자리를 정해 앉히신 다음, 종이쪽지를 나누어 주시면서 “후천 음양도수를 보려 하노라. 각자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도록 점을 찍어 표시하라.”고 이르셨다. 종도들은 자기 마음에 따라 점을 찍어 상제님께 올리니, 황응종(1841∼1927)은 두 점, 신경수(1838∼1923)는 세 점, 안내성(1867∼1949)은 여덟 점, 차경석(1880∼1936)은 열두 점, 문공신(1879∼1954)은 한 점이었다. 상제님께서 아홉 점은 없는 것을 보시며 “자고로 일남구녀(一男九女)란 말은 알 수 없도다.” 하시고, 안내성에게 “팔선녀(八仙女)란 말이 있어서 여덟 점을 쳤느냐?”고 물으시며 황응종과 신경수에게 “노인들이 두 아내를 원하나 어찌 감당하리오?”라고 말씀하셨다. 당시 황응종은 67세, 신경수는 70세였는데, 이들이 “후천에서는 새로운 기력이 나지 아니하리까.”고 여쭈니 상제님께서는 “그럴듯하도다.”고 말씀하셨다. 상제님께서 차경석에게 “너는 무슨 아내를 열둘씩이나 원하느뇨.”하고 물으시니, 그는 “열두제국에 하나씩 아내를 두어야 만족하겠나이다.”고 대답하였다. 상제님께서 다시 “그럴듯하도다.”고 하시고, 문공신을 돌아보시면서 “경석은 열둘씩이나 원하는데 너는 어찌 하나만 생각하느냐.”고 물으셨다. 문공신은 “건곤(乾坤)이 있을 따름이오, 이곤(二坤)이 있을 수 없사오니 일음일양(一陰一陽)이 원리인줄 아나이다.”고 아뢰니 상제님께서 “너의 말이 옳도다. 공사를 잘 보았으니 손님 대접을 잘하라.”고 분부하셨다.
  상제님께서는 음양도수를 마치시고, 후천 5만 년에 시행될 첫 공사를 행하시려고 박공우에게 “깊이 생각하여 중대한 것을 들어 말하라.”고 하셨다. 박공우가 아는 것이 없다고 사양하다가 문득 생각이 떠올라 “선천에는 청춘과부가 수절한다 하여 공방(空房)에서 쓸쓸히 늙어 일생을 헛되게 보내는 것이 불가하오니, 후천에서는 이 폐단을 고쳐 젊은 과부는 젊은 홀아비를, 늙은 과부는 늙은 홀아비를 각각 가려서 친족과 친구들을 청하고 공식으로 예를 갖추어 개가(改嫁)케 하는 것이 옳을 줄로 아나이다.”고 여쭈었다. 상제님께서 “네가 아니면 이 공사를 처결하지 못할 것이므로 너에게 맡겼더니 잘 처결하였노라.”고 이르시고 “이 결정의 공사가 5만 년을 가리라.”고 말씀하셨다. 
  연이어 상제님께서는 역도(逆度)를 조정하는 공사도 시행하셨다. 우선 차경석과 김광찬, 안내성은 대흥리로 보내시고, 신원일은 신경원의 집으로, 김형렬과 김자현은 동곡으로 떠나보내신 뒤에, 남아 있는 문공신, 황응종, 신경수에게 “경석은 성(誠)·경(敬)·신(信)이 지극하여 달리 써 볼까 하였더니 스스로 청하는 일이니 할 수 없도다. 본래 동학이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장하였음은 후천 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않았으나, 마음은 각기 왕후장상(王侯將相)을 바라다가 소원을 이룩하지 못하고 끌려가서 죽은 자가 수만 명이라. 원한이 창천하였으니 그 신명들을 그대로 두면 후천에는 역도(逆度)에 걸려 정사가 어지러워지겠으므로 그 신명들의 해원 두목을 정하려는 중인데, 경석이 십이제국(十二帝國)을 말하니 이는 자청함이니라. 그 부친이 동학의 중진으로 잡혀 죽었고 저도 또한 동학 총대를 하였으므로, 이제부터 동학 신명을 모두 경석에게 붙여 보냈으니 이 자리로부터 왕후장상(王侯將相)의 해원이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종이에 글을 쓰시고 외인(外人)의 출입을 금하시며 “훗날에 보라. 금전소비가 많아질 것이며 사람도 갑오년보다 많아지리라. 풀어두어야 후천에 아무 거리낌이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
  갑오년에 사람이 모였다 함은 동학농민운동(=갑오농민전쟁)을 말한다. 조선말 극도로 문란해진 삼정(三政: 토지세와 군역의 부과 및 양곡 대여·환수)과 탐관오리의 횡포로 인하여 백성들이 더 이상 견딜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趙秉甲)의 학정(虐政)이 도화선이 되어 1894년에 전봉준은 동학농민운동을 일으켰다. 봄에 일으킨 1차 봉기 때는 정부를 움직여 집강소를 설치하고 폐정을 개혁하는 등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두었으나, 10월에 일으킨 2차 봉기 때는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패퇴하고 전봉준은 1895년 3월에 서울에서 처형되고 말았다. 이로써 동학농민운동은 1년 동안에 걸쳐 무려 30만∼40만 명의 희생자를 낸 채 실패로 끝났다. 차경석의 부친 역시 동학농민운동 때 지도자급[장령(將領): 장군에 해당함]으로 활약하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무수한 피해자를 양산하고 한국 근대사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킨 이 사건에 대해 상제님께서는 그 원한을 풀어주지 않으면 후천이 어지러워진다고 하시며, 동학농민운동에 가담하여 왕후장상(王侯將相)을 꿈꾸다가 죽은 자들이 해원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하셨다. 그 해원 두목으로 차경석을 내세우셨으니, 이에 따라 차경석은 동학 해원의 우두머리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그는 상제님께서 화천하신 1909년부터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더니 상제님의 말씀대로 동학농민운동 때 모인 수십 만 인파를 훨씬 능가하는 수백 만 신도를 모았고, 차천자(車天子)라고까지 불리며 온갖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1936년에 갑자기 죽어버리더니 그가 만든 보천교(普天敎)도 순식간에 몰락해버렸다.04 아마도 동학 왕후장상의 해원이 모두 이루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순회보> 12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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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이 글귀는 『서경』의 「요전(堯典)」에 나온다.
02 섬진강 중에서도 특히 운암면 앞을 흐르는 상류 부분을 운암강이라고 한다.

03 전북 칠읍 공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전북 칠읍’을 찾아서」, 『대순회보』71호, 2007, pp.22∼29 참고.

04 「27년 동안의 헛도수」, 『대순회보』 68호, 2007, pp.24∼25, p.27; 동학농민운동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동학농민운
 동1」, 『대순회보』 79호, 2008, pp.18∼27; 「동학농민운동2」, 『대순회보』 80호, 2008, pp.12∼19; 「동학농민운동에 참
 여한 사람들에 대한 상제님의 평가」, 『대순회보』 81호, 2008, pp.30∼39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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