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제님고부 화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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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교무부 작성일2018.11.08 조회5,114회 댓글0건본문
글 대순종교문화연구소
1907[丁未]년 12월 하순 무렵, 김형렬이 정읍 교동(校洞)에 계시는 상제님을 찾아와 배알하니, 상제님께서는 입고 계시던 의복을 내어주시면서 집에 돌아가 빨아서 김자현과 함께 다시 오라고 이르셨다. 김형렬은 명대로 행하고 상제님께 의복을 올려드렸다. 이때 상제님께서는 김형렬에게 “너는 자현과 함께 문공신의 집에 있되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라. 나는 신경수에게 가 있으리니 관리가 나의 거처를 묻거든 숨기지 말고 실토하라.”고 말씀하셨다. 옆에 있던 종도들이 무슨 일인지 이상하게 생각하니, 상제님께서 “너희가 관리를 두려워하면 제각기 흩어져서 마음대로 돌아가라.” 하셨다. 이 말씀에 종도들은 자신들이 관액(官厄)을 당할까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상제님께서는 천자신(天子神)과 장상신(將相神)을 불러들여 백의군왕과 백의장군의 도수를 보시고자 하셨는데, 이 도수를 보려면 필연적으로 관액을 겪어야 했던바, 상제님께서는 이것을 미리 종도들에게 예고하신 것이었다.
마침 그 마을 면장과 이장이 세금을 걷으려 이곳을 방문하였는데, 상제님께서는 다짜고짜 그들에게 “내가 천지공사를 행하여 천하를 바로 잡으려고 하는데 그대가 어찌 이러한 음모에 참여하나뇨!” 하고 외치셨다. 이것은 공사에 필요한 관액을 불러들이기 위함이셨다. 이 말씀에 크게 놀란 면장은 ‘이 사람들이 무언가 큰일을 도모하고 있다’고 의심하여 즉시 고부 경무청에 달려가 고발하였다.
1907년은 고종이 이준(李儁) 등으로 하여금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케 하여 을사조약이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폭로하고 이를 파기하려고 한 헤이그 특사사건이 일어난 해였다. 일본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켜 조선에 대한 통치권의 대부분을 장악해 버렸다. 분노한 사람들은 의병을 일으켜 일본에 적극 항거하였다. 의병이 전국에 확대되고 곳곳에서 의병과 일본군의 전투가 벌어지게 되자, 일본은 대토벌작전을 전개시켜 의병과 관련이 있는 사람들은 모조리 잡아 처형하였다. 이런 시국이다 보니, 이때에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기만 해도 의병이라는 오해를 사서 관액을 입는 경우가 많았다. 면장 역시 상제님과 종도들이 같이 모여서 의병을 일으키려 하고 있다고 오해를 한 것이었다.
상제님께서 “12월 24일 새벽에 백순검이 오리라.”고 종도들에게 이르시니, 순검 백 명이 온다고 생각하여 겁을 먹고 도망가는 사람도 생겼다. 그 시간이 되자 순검 백 명이 아니라 태인 새울에 사는 백낙규(白樂圭)의 형인 백순검이 왔다가 갔다. 상제님께서 “순검이나 병정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겁을 내어 도망할 마음이 있는 자는 다 돌아가라. 열 사람이 있다가 한 사람이 도망하면 아홉 사람은 그 해를 입어 죽나니, 그러므로 도망할 마음을 두는 자는 미리 돌아가고 마음을 지켜 도망하지 아니할 자는 굳은 다짐을 두라.” 하심에, 종도들은 “삼가 마음을 굳게 지켜 변함이 없겠나이다.” 맹세하니, 그 숫자가 모두 21명이었다.
상제님께서는 공사를 위해 고운 일광단(日光緞)으로 옷을 새로 지어 갈아 입으셨다. 12월 25일 밤이 되자 순검 수십 명이 무장하고 문공신의 집을 포위하더니 집에 있던 사람들을 포박하였다. 순검들이 상제님께서 계신 곳을 캐묻자 그들은 상제님께서 신경수의 집에 계시다고 말했다. 순검들은 곧 신경수의 집으로 달려가서 상제님을 비롯하여 다른 종도들도 포박하였다. 이때 상제님께서는 돈 120냥과 백목(白木) 몇 필을 인부에게 지워 무리의 뒤를 따르도록 하셨다. 상제님께서는 종도들과 함께 고부에 있는 경무청으로 압송되다가 용두리의 한 주막에 이르셨다. 상제님께서는 이곳에서 돼지 한 마리를 잡게 하시고 종도들, 순검들과 함께 나누어 드셨다.
▲ 고부 경무청은 1906년에 고부 관아 자리에 설치되었다. 지금은 소실되고 그 자리에 고부초등학교가 들어 서 있다.
다음 날 고부 경무청에서는 상제님께서 의병임을 밝히려고 심문을 시작하였는데, 상제님께서 “나는 의병이 아니라 천하를 도모하는 중이로다.” 고 하시니, 이 말씀에 놀란 경무관이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되물었다. 상제님께서 “사람마다 도략(韜略)이 부족하므로 천하를 도모치 못하노니 만일 웅재대략이 있으면 어찌 가만히 있으랴. 나는 실로 천하를 도모하여 창생을 건지려 하노라.”고 이르시니, 경무관은 미친 소리라 여기고 듣지 않았다. 그 시절은 의병의 혐의만 받아도 시비를 불문하고 총살되는 때였으므로, 갇혀 있던 종도들 대부분은 상제님을 원망하며 벌벌 떨었다. 그때 문공신이 순검들에게 옆구리를 발로 채여서 심한 오한을 일으키고 물도 마시지 못하며 위독하게 되었다. 상제님께서 “급한 병이니 인곽(人槨)을 써야 하리라.” 하시며, 누워 있는 문공신 둘레에 종도들을 관의 형상으로 빙글 둘러 세우셨다. 그리고 감방 한 구석에 있던 오줌통의 소변찌끼를 받아 먼저 조금 잡수시고 문공신으로 하여금 먹게 하시니, 그는 자기를 위하여 상제님께서 잡수심을 황공히 생각하여 받아 마셨다. 조금 후 그는 숨이 트이면서 회복되었다.
마침 고부 경무청 간수 중에서 김형렬, 김자현과 친한 사람이 있어서 그들을 다른 조용한 감방으로 옮겨 주려 하기에, 김형렬이 상제님도 같은 방으로 옮기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상제님께서는 감방을 옮기신 후에 김형렬과 김자현에게 “세 사람이 모이면 관장(官長)의 공사를 처결하나니 우리 셋이면 무슨 일이든지 결정하리라.” 하시고, 또 김자현에게 “비록 몇 십만 인이 이러한 화액을 당하였을 지라도 일호(一毫)의 상처가 없이 다 풀리게 할지니 조금도 염려 말라.”고 일러 주셨다.
1907[丁未]년 12월 그믐날 밤에 번개와 우레가 크게 일어나니 이를 보시고 상제님께서 “이는 서양에서 천자신이 넘어 옴이니라. 이제 천자신은 넘어 왔으나 너희들이 혈심(血心)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장상신이 응하지 아니하는도다.”라고 하셨다. 1908[戊申]년의 새해가 밝았다. 경무관이 감옥에 있는 모든 죄수들에게 설날 음식으로 주식(酒食)을 한 상씩 나누어 주니, 종도들은 ‘주식을 주는 것을 보니 이제 죽이려는 것이로다. 우리는 상제를 따르다가 결국 죽게 되는도다’ 하면서 상제님을 원망하였다. 이날 눈이 아주 많이 내리고 날씨도 몹시 추웠으니, 상제님께서는 “이것은 대공사를 처결한 까닭이노라.” 하고 일러 주셨다.다음 날부터 다시 경무관은 종도들을 계속 심문하였으나 이들에게서 의병 활동을 한 혐의를 전혀 찾지 못했다. 결국 1월 10일에 고부 경무청에서는 이런 비상시국에 모여 있으면 의심을 사니 조심하라는 말과 함께 상제님을 제외한 모든 종도들을 옥에서 내보냈다.
▲ 용두리의 모습. 現 전북 정읍시 덕천면 달천리 용두마을. 바로 옆에 상제님께서 강세하신 객망리가 있다. 상제님께서는 교동에서 용두리를 거쳐 고부 경무청으로 압송되셨다. 교동에서 고부 경무청까지의 거리는 대략 14㎞이다.(제공: 다음지도)
2월 4일(양력 3월 6일) 경칩일이 되자 경무청에서는 상제님을 풀어주었다. 그때까지 고부에서 상제님의 출옥을 기다리던 차경석은 상제님을 객망리 본댁으로 모셨다. 김형렬도 이 소식을 듣고 안심하고 자기 집이 있는 동곡으로 돌아갔다. 상제님께서는 경무청에서 압수하였던 120냥과 백목(白木)을 다시 찾아 순검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3일 뒤에 황응종의 집으로 가셨다. 상제님께서 황응종의 옆집에 사는 문공신에게 들르시니, 문공신이 불쾌한 말투로 “일전에 고부 음식점의 주인이 나에게 와서 외상으로 달린 주식(酒食) 대금을 갚으라고 독촉을 해 왔는데, 고부 화액 때 가지고 가셨던 백목(白木)과 돈으로 그 음식값을 갚지 않으시고 왜 다른 곳에다가 다 흩어버리셨나이까?” 하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지난 12월 말에 상제님께서 종도들과 함께 고부 경무청으로 압송될 때, 상제님께서는 고부 용두리의주막에서 돼지를 잡아 종도들, 순검들과 함께 나누어 드신 일이 있으셨다. 이제 그 주막 주인이음식값을 받고자 하다가 문공신에게 그 돈을 청구하였던 것인데, 문공신은 고부 화액을 겪은 뒤로 상제님을 원망하고 있었기에 공사에 쓰였던 음식값을 낼 마음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문공신은 상당한 재산가였지만 상제님을 따른 지 불과 몇 달 만에 공사를 받드느라 거의 전 재산을 소비한 터였으므로 음식값을 낼 돈조차 없기도 했다. 고부 경무청에 압수당하였던 돈 120냥은 원래 문공신이 상제님께 올린 돈 이었다. 상제님께서는 그 돈을 순검들과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 줘버리셨기에, 음식값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돈이 궁했던 문공신은 그 돈이 아까워 상제님께 불평을 했던 것이다.
상제님께서는 문공신에게 “네 말을 들으니 그러하리로다. 순창 농암에 사흘 동안 계속 머물면서 너를 만나 여러 가지 큰 공사를 참관케 하였고, 또한 고부 도수에 감당할 사람이 마땅치 않아 너를 주인으로 정하여 독조사 도수를 붙였노라. 진주 노름에 독조사라는 것이 있으니 남의 돈을 따보지도 못하고 제 돈만 잃고 바닥이 난 후에야 개평을 뜯어가지고 새벽녘 에 본전을 회복하는 수가 있음을 말함이니라. 고부에서 음식값을 말한 일이 있었으나 그 돈을 쓰면 독조사가 아니니라. 그때 네가 꼭 돈이 있어야 되겠다고 했으면 달리 주선이라도 하여 주었으리라. 그러면 고부 도수의 주인은 다른 사람으로 돌아가게 되리라.” 하고 말씀하셨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문공신은 “일이 그와 같을 진대 그만 두사이다.” 하고 아뢰었다. 백의군왕과 백의장군 공사에 참여했던 종도들은 모두 21명이었다. 그러나 이 공사는 혈심을 가지지 않으면 받들기 힘든 것이었다. 굳은 다짐을 했던 종도 21명 중에서 김형렬과 김자현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은 고부화액을 겪은 뒤로는 상제님을 원망하고 모두 떠나버렸다. 특히 문공신과 박장근, 이화춘은 상제님에 대하여 불경한 패설을 일삼았다. 그러자 3월에 이화춘은 의병에게 잡혀 죽었고, 박장근은 의병에게 매를 맞아 뼈가 부러졌다. 동곡으로 돌아가 계시던 상제님께서 이 소식을 들으시고, 문공신에게 마음을 바로 잡지 않으면 천노(天怒)를 받을 것임을 일러주도록 하셨다. 또 상제님께서는 글을 써서 불사르시며 죽은 이화춘을 위안하셨다.
<대순회보> 12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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